태안마애삼존불. 백제 7세기 초반. 보물 제432호.
좌우 여래상 높이 2.1미터, 보살상 1.3미터. 충청남도 태안읍 동문리.
태안은 단출한 여느 읍내 풍경이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와 중국을 연결하는 번성한 무역항이었던 당진이 근처에 있다. 태안의 진산인 백화산은 희고 깨끗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읍내에서 보면 하얀 연꽃이 온 산에 가득한 형상이다. 백화산의 정상에 서면, 동쪽의 낮은 산 능선이 서해안까지 이어지는 시원스런 풍광이 펼쳐진다. 그 정상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암반의 맞은편, 내륙을 향한 바위에 마애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태안마애불은 삼존 형식이지만 구성이 독특하다. 키 작은 보살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덩치 큰 두 불상을 배치한 것이다. 보살상은 두 여래와 나란하게 발높이를 맞추었지만, 좁은 공간을 비집고 서 있는 느낌이다. 또 선새김의 깊이가 얕고 치마에는 불필요한 주름들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삼존의 마애불을 의도하고 만든 것인지 의문도 든다.
마애불은 밀려든 토사가 하체를 가린 채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최근 발굴에 의해서야 불상의 전모가 드러났는데, 특히 세 불보살상의 연꽃무늬 대좌가 눈길을 끈다. 끝이 뾰족하고 길게 표현된 연꽃 모양이 어딘지 백제의 그것과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꽃모양은 5세기 성총이나 무용총 등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고, 특히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두침에도 보여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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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바라본 태안마애삼존불. 사진은 블로그 '마가렛을 그리며' 제공. |
세 불보살상은 모두 머리 앞부분과 얼굴의 중심을 이루는 코가 깨져 있고, 전체 윤곽은 풍화되어 뭉개져 있다. 상체만 드러났던 당시, 고부조의 상호는 짱구형에 둔중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전면 발굴 이후의 모습을 보면, 원래의 훤칠한 키가 드러나면서 고부조의 조각미와 파안의 미소 또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왼쪽에 서 있는 둥글넓적한 여래는 눈두덩이 부어 있고, 도톰한 입술이 불거져 있다. 육계가 높고 만질만질한 소발이고, 백호를 끼웠던 흔적이 이마에 뚜렷하다. 오른손은 팔을 구부린 채 손바닥을 보이도록 위로 올려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은 시무외인이고, 왼손은 아래쪽을 향한 여원인이다. 서산마애불의 본존과 손의 모습이 같다. 양어깨에 걸친 법의는 두툼하게 덮여 육중한 몸을 더욱 강조하였다. 긴 목이 드러나게 ‘U’자형으로 내려온 법의의 속옷에는 옷고름이 달려있는데 가슴이 앞으로 살짝 튀어나왔고, 간소하게 주름진 옷자락은 발등까지 내려와 발가락만 나란히 드러내 보인다. 연화대좌는 가운데 연잎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퍼져 나가며 끝이 약간 말려 올라간 모습이다. 오른쪽 여래도 이러한 왼쪽 상과 유사하지만, 손의 모양이 다르다. 왼손에 작은 약합 또는 보주를 들고 있다.
두 여래 가운데 낀 작은 보살상은 양손으로 보주를 받쳐들고 선 자세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양옆 장식은 어깨까지 닿아 있다. 또 배 앞에서 ‘X’자 모양으로 겹친 천의는 양팔목을 감고 밖으로 흘러 있다. 등뒤의 천의자락도 밖으로 삐쳐 있다. 이 보살상은 두 여래와 달리, 양감이 적고 저부조이다. 위치는 가운데지만 두 여래의 당당한 기세에 눌린 듯하다. 최근 하체를 다 드러낸 발굴조사 이후, 이 세 불보살상은 현세의 석가불과 과거의 다보불을 양쪽에 두고 그 사이에 미륵보살이 끼어 삼존불을 이룬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된 적이 있다(문명대, <태안 백제마애삼존불상의 신연구>).그러나 이러한 특이한 구성을 삼존불의 도상을 명쾌하게 해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인 마애불로 꼽힌다. 잡석이 많이 섞인 재질 탓에 아쉽게도 마애불의 외모가 많이 깎여 나갔지만, 긴 목에서 어깨선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체구에 굵직하고도 자연스럽게 흘러 팔목에 걸쳐진 주름진 법의의 표현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다. 마애불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몸에 칠해진 붉은색과, 군데군데 남아 있는 녹색 안료의 흔적이다. 이러한 채색이 마애불을 만들던 당시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미 바위에 스며든 부분을 보면 상당히 오래전에 채색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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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 앞에 위치한 감모대. 제사를 지냈던 시설로 여겨진다. |
마애불의 맞은편 벼랑에는 ‘太乙洞天’이라는 큰 새김글씨가 눈에 띄는데, 마애불을 백화산의 산신령인 천신으로 보고 쓴 지명이 아닐까 싶다. 벼랑 아래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계곡 바위에 새긴 ‘一笑溪’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아마도 마애불의 미소를 보고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리라. 태을동천 옆에는 김해 김씨와 관련된 명문이 보인다. 그리고 마애불 앞마당에는 원형 탁자에 팔각형 바위를 붙여놓은 ‘감모대(感慕臺)’가 있다. 이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로, 앞서 김해 김씨들이 집안의 선조들을 위로하기 위한 장소였던 듯하다. 이 계곡 위편에 누운 사람 형상의 큼직한 바위가 있고, 정상까지 드문드문 동년대, 만천대 등의 글씨가 보인다. 신성한 공간을 풍류로 드나들던 뭇 행인들의 자취이다. |
백제의 미소-얼굴 찬사 끊이지 않는 걸작
현존 마애불 중 첫 작품…탁월한 조형미 마치 살아있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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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 우리나라 마애불 가운데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서산마애삼존불. 국보 제84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소재.
백제 6세기 후반. 본존 높이 2.8미터. 보살입상 1.7미터. 반가상 1.7미터.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200여 곳의 마애불 가운데 첫 작품이다. 대체로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하는데, 당시는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지 200여 년이 지나 불교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때였으니 그만한 역량의 조각미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태안마애불과 함께 백제를 대표할 만한 마애불을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가 아닌 변방에 조성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근처에는 마애불과 연관될 만한 세력의 고분도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은 국가의 후원으로 조성되었을 터인즉, 그만큼 백제가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려준다.
6세기 후반의 백제는 고구려, 신라의 세력 확장에 밀리는 편이었다. 그런 탓에 정치적으로도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섭하는 일이 절실했고, 특히 고구려 견제를 위해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사신을 파견하거나 교역의 활성화에 따라 서해를 통해 중국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여정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조성한 불적이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이지 않았을까 싶다. 더군다나 태안반도는 지역적으로도 중국의 불교도상과 석조기술을 수용하기 쉬웠을 것이다. 서산마애불의 경우 밝은 표정의 미소와 복장의 모양새는 중국 북위·동위의 불상양식에 영향을 받은 듯하고, 태안마애불의 넓고 통통한 얼굴은 북제·수의 양식과 연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또 7세기의 여느 마애불보다 조각미가 뛰어나다. 초기 작품부터 그처럼 생동감 있는 부조예술의 아름다움을 창출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남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장소에 숨어 있다. 백제가 신라와 고구려에 밀리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마애불을 산 속 은밀한 암벽에 새겨놓았을까. 마애불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1950년대 후반이다. 서산은 행정구역상 서해안에 인접해 있지만, 마애불이 안치된 장소는 은둔자 부처에 어울리게 서산에서도 동쪽 내륙 쪽 산세가 시작되는 곳이다. 운산면 용현리라는 지명처럼, 구름과 용이 어우러질 만한 깊은 골짜기이다. 남쪽으로는 가야산이 이어지고, 여기에서 시작된 실개천은 당진 쪽 대방들천으로 합수된다. 마애불 때문인지 바위 이름도 인암(印岩)이라 불린다.
인암은 그 자체로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형 공간을 이룬 암벽의 동남향 벼랑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다. 보드랍게 도드라진 본존의 몸은 상당히 육중한 편이다. 글에 비하면 보살상들의 키는 앙증맞다 싶게 작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의 밝은 빛이어야 동남향으로 자리한 마애불의 해맑은 미소가 살아난다. 빛의 밝기에 따라 입체감과 표정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마애불을 대할 때, 묵중하고 어두운 화강암 벼랑에 떨어지는 빛까지 끌어들여 불상을 새긴 조각가의 치밀한 솜씨에 감탄이 절로 일 것이다. 크고 둥근 눈과 높지 않은 콧날, 그리고 연잎처럼 툭 피어난 입술에서는 생명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본존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내보이고 왼손은 허리 앞으로 내어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린 모습이다. 다소 두툼한 부처님 법의(法衣)자락이 양어깨에서부터 길게 감싼다. 안쪽 가슴 밑 부분에는 내의를 묶는 띠매듭이 보이는데, 간결하고도 부드럽다. 수직으로 처진 옷자락은 발목 근처에서 대칭형의 ‘옴’자형 무늬를 이루는데, 이런 형태는 인도의 부처상이 중국화하면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두광(頭光)은 활짝 핀 연꽃이 넓게 자리하고, 그 외곽의 화염무늬 안에 작은 화불(化佛) 3구가 배치되어 있다.
좌우 협시보살의 키는 본존의 어깨높이만하다. 본존의 오른쪽에 서서 보주를 양손에 감싼 보살상은 장식적인 보관을 쓰고 가벼운 천의를 양팔에 휘감고 있다. 그리고 왼편의 보살상은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린 자세로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누르며 엷은 미소를 띤 표정이다. 목걸이 장식에 보관을 쓰고 치마를 걸쳤다. 삼존의 세련된 조형감각은 본존과 협시의 구성미뿐 아니라 좌우 보살상의 미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광대뼈를 살짝 드러낸 두 보살상은 분명 우리의 소년상이다.
삼존의 이름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로 구성된 현재·과거·미래의 삼세불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묘법연화경에서 언급되는 제화갈라보살인 연등불은 석가모니보다 훨씬 전에 출현하여 석가모니에게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준 과거불이고, 석가모니는 도솔천의 미륵보살에게 56억 7천만 년 뒤에 부처가 될 것을 예견했다. 곧 서산마애삼존불은 그러한 내용을 담아 조형화시킨 수기삼존불로도 해석된다. | |
김유신과 화랑들이 금세 살아 나타날 듯
‘ㄷ'자 모양의 바위에 10여구의 불보살·공양상 새겨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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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단석산마애불상군의 본존격인 북향벽면의 여래입상 부분. |
경주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신라 7세기초반. 바위높이 10미터. 깊이 10미터. 입구 폭 3미터인 ‘ㄷ'자형 암벽. 국보 제199호.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 서면 단석산 소재.
단석산(斷石山)은 신라의 중악에 해당한다. 경주의 서남쪽으로 시내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해발 827미터의 높이로 일대에서는 가장 우뚝한 산이다. 단석산의 계곡은 예로부터 화랑들의 수도처로 알려져 왔다. 단석산이란 이름은 국선으로 추대된 김유신이 수도하던 중에 칼로 암벽을 쪼갰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가 열일곱 살에 중악석굴에서 기도하고 노인을 만나 방술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이곳이 바로 김유신의 수도처이며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장이었음이 추측된다. 첩첩산중 깊은 계곡의 팍팍한 등산로를 따라서 한나절을 올라 단석바위에 서면, 그 옛날 김유신과 화랑들이 금세라도 살아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에는 신선사라는 암자가 있는데, 그 서쪽 벼랑에 10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ㄷ’자 모양의 석굴형 바위가 단석이다. 마애불이 있어서인지 맨 윗사람이라는 의미로 속칭 상인암(上人岩)이라고도 불린다.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으로 보아 암벽에 목조건물을 설치하여 예배공간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암벽은 북향 바위 사이로 입구가 만들어져 있고 그 내부 바위 벽면에 불보살과 공양상 10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남벽면 보살상 옆에 200여 자의 명문을 남겼다. 이 명문은 반 정도만 판독되었는데, ‘신선사(神仙寺)’, ‘미륵석상’, ‘보살계 제자 잠주(菩薩戒弟子岑珠)’ 등이다.
단석 공간에 들어서면 북향 바위면 왼편에 있는 본존격인 8미터 높이의 불상이 육중해 보인다. 위아래로 손바닥을 내민 양손의 모습은 부처의 자비를 뜻하는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이다. 둥그런 얼굴에 반질반질한 소발의 원형 육계를 갖고 있다. 얼굴은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웃음을 짓는 듯하다. 간소한 법의를 양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는 내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이 불상을 미륵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동벽과 남벽에는 각각 6미터 정도 높이의 보살입상이 서 있으나 마모가 심한 편이다.
입구 오른편인 북벽에는 세 불상이 양손을 모두 왼쪽으로 올려 본존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옆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아래쪽으로는 모자를 쓴 공양상 2구와 작은 불상이 있다. 공양상들은 향로와 같은 지물을 들고 본존을 향하고 있다. 끝이 높으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모자를 쓰고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상이나 고신라 토우에 나타나는 복식처럼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이다.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신선사는 미륵전, 관음전, 산령각(山靈閣)의 전각을 둔 작은 암자이다. 그 앞마당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어귀에는 한여름이면 산나리꽃이 군락을 이룬다. 늘씬한 점박이의 산나리꽃이 주황색으로 그을린 건강한 살빛을 한 화랑의 화현(化現)인 것 같아,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신선사 산나리꽃 너머로는 산내면이라는 지명답게 멀리 구룡산까지의 첩첩한 산 능선이 전개된다. | | |
22미터 수직벼랑에 관음보살 나투시다
승가사 마애불과 함께 都城수호의 염원 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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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암 마애관음보살상. 서울을 수호하는 염원을 담아 조성됐다. |
서울학도암마애관음보살좌상. 조선 1872년. 높이 13.4미터.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24호. 노원구 중계본동 학도암 소재.
서울의 동쪽, 불암산 줄기인 천보산 중턱에 학도암이 있다. 학도암은 ‘학이 찾아드는 곳’이라는 이름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암자이다.
인조 2년(1624)에 무공(無空)대사가 창건하였고, 고종 15년(1877)에 벽운(碧雲)대사가 중창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현재의 암자는 1955년에 재건된 것이고, 아직도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학도암의 마애불은 최근 조사되어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암자 위쪽의 22미터가 넘는 수직벼랑에 거대한 관음보살좌상이 새겨져 있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로 새겼으며, 옷주름 처리, 화불이 있는 머리장식, 연화대좌, 칠보문 표현 등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놓은 듯하다. 특히 보관의 양편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양식이 양어깨로 드리워져 있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이 관음보살상은 남서향으로, 중랑천 주변의 노들평야와 그 너머 남산·관악산·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다.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에 이어 도성을 수호하는 마애관음상이 동쪽에 등장한 것이다. 그만큼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그 위치로 보아 서울의 왕실이나 세력가의 시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적기에는 동치(同治) 11년(1872)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새겼다고 전한다. 조선 말기까지 수그러 들지 않은 불교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애불 왼편 벽면의 명문에는 불화의 화기(畵記)와 같이 증명비구 혜묵(惠默)을 비롯, 축문을 염불한 송주(誦呪)와 마애불을 새긴 금어(金魚) 명단이 보인다. 마애불 조각가를 금어와 동일하게 여긴 점이 흥미롭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 | | |
송림 사이로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 보다
당당한 체구는 미륵 기다리는 민초들의 염원 대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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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삼태리마애입불상. 고려 12∼13세기. 높이 7미터. 보물 제407호.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소재
천안과 아산시의 경계를 이룬 태학산 북쪽 중턱 용문골에 마애불이 있다. 이곳에는 큰 학의 뛰어난 영험 때문인지 마애불의 위력 때문인지, 종단이 다른 조계종 법왕사와 태고종 태화사가 나란히 들어서 있다. 최근 법왕사 암반의 지하 금강굴에는 새로운 마애불들을 조각하기도 했다.
두 사찰의 오른쪽 언덕 위, 울창한 송림에 우뚝 솟은 바위를 꽉 채워 새겨진 마애불이 있다. 동남향으로 태학산 정상을 향한 마애불은 주변 산세의 품에 안긴 형국이다. 마애불 뒤로 올라가면 천안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약간 배부른 듯한 암벽에 저부조로 새긴 마애불은 7미터 높이의 규모에 어울리게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고 중후한 표정이다.
좁은 이마에 두툼한 눈, 작고 부드러운 입술과 볼이 늘어진 커다란 귀에도 부피감이 살아있어, 따뜻한 오전 빛을 받을 때의 상호 표정은 눈부시다. 이런 인상은 역시 우리 얼굴의 특징을 잘 살려낸 것이다.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오른손은 펴고 왼손은 손가락을 구부렸는데, 설법인인 듯하다. 커다란 체구는 양어깨에 걸친 법의의 옷주름으로 덮여 있다.
상체의 옷 주름은 얼굴과 어깨에 맞추어 볼륨을 살린 데 비하여, 하체와 양쪽 소맷자락은 음각선으로 간소하게 처리했다. 상하가 다른 음양각 선묘의 혼용은 역시 고려 마애불의 수법이다. | | | |
백제의 미소-얼굴 찬사 끊이지 않는 걸작
현존 마애불 중 첫 작품…탁월한 조형미 마치 살아있는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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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 우리나라 마애불 가운데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서산마애삼존불. 국보 제84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소재.
백제 6세기 후반. 본존 높이 2.8미터. 보살입상 1.7미터. 반가상 1.7미터.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200여 곳의 마애불 가운데 첫 작품이다. 대체로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하는데, 당시는 백제가 불교를 수용한지 200여 년이 지나 불교국가로서의 틀을 갖춘 때였으니 그만한 역량의 조각미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태안마애불과 함께 백제를 대표할 만한 마애불을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가 아닌 변방에 조성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근처에는 마애불과 연관될 만한 세력의 고분도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은 국가의 후원으로 조성되었을 터인즉, 그만큼 백제가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려준다.
6세기 후반의 백제는 고구려, 신라의 세력 확장에 밀리는 편이었다. 그런 탓에 정치적으로도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섭하는 일이 절실했고, 특히 고구려 견제를 위해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사신을 파견하거나 교역의 활성화에 따라 서해를 통해 중국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이 여정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조성한 불적이 서산과 태안의 마애불이지 않았을까 싶다. 더군다나 태안반도는 지역적으로도 중국의 불교도상과 석조기술을 수용하기 쉬웠을 것이다. 서산마애불의 경우 밝은 표정의 미소와 복장의 모양새는 중국 북위·동위의 불상양식에 영향을 받은 듯하고, 태안마애불의 넓고 통통한 얼굴은 북제·수의 양식과 연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또 7세기의 여느 마애불보다 조각미가 뛰어나다. 초기 작품부터 그처럼 생동감 있는 부조예술의 아름다움을 창출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남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 장소에 숨어 있다. 백제가 신라와 고구려에 밀리던 당시의 상황 때문에 마애불을 산 속 은밀한 암벽에 새겨놓았을까. 마애불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1950년대 후반이다. 서산은 행정구역상 서해안에 인접해 있지만, 마애불이 안치된 장소는 은둔자 부처에 어울리게 서산에서도 동쪽 내륙 쪽 산세가 시작되는 곳이다. 운산면 용현리라는 지명처럼, 구름과 용이 어우러질 만한 깊은 골짜기이다. 남쪽으로는 가야산이 이어지고, 여기에서 시작된 실개천은 당진 쪽 대방들천으로 합수된다. 마애불 때문인지 바위 이름도 인암(印岩)이라 불린다.
인암은 그 자체로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형 공간을 이룬 암벽의 동남향 벼랑에 본존불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협시보살이 있다. 보드랍게 도드라진 본존의 몸은 상당히 육중한 편이다. 글에 비하면 보살상들의 키는 앙증맞다 싶게 작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의 밝은 빛이어야 동남향으로 자리한 마애불의 해맑은 미소가 살아난다. 빛의 밝기에 따라 입체감과 표정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 마애불을 대할 때, 묵중하고 어두운 화강암 벼랑에 떨어지는 빛까지 끌어들여 불상을 새긴 조각가의 치밀한 솜씨에 감탄이 절로 일 것이다. 크고 둥근 눈과 높지 않은 콧날, 그리고 연잎처럼 툭 피어난 입술에서는 생명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본존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내보이고 왼손은 허리 앞으로 내어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구부린 모습이다. 다소 두툼한 부처님 법의(法衣)자락이 양어깨에서부터 길게 감싼다. 안쪽 가슴 밑 부분에는 내의를 묶는 띠매듭이 보이는데, 간결하고도 부드럽다. 수직으로 처진 옷자락은 발목 근처에서 대칭형의 ‘옴’자형 무늬를 이루는데, 이런 형태는 인도의 부처상이 중국화하면서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두광(頭光)은 활짝 핀 연꽃이 넓게 자리하고, 그 외곽의 화염무늬 안에 작은 화불(化佛) 3구가 배치되어 있다.
좌우 협시보살의 키는 본존의 어깨높이만하다. 본존의 오른쪽에 서서 보주를 양손에 감싼 보살상은 장식적인 보관을 쓰고 가벼운 천의를 양팔에 휘감고 있다. 그리고 왼편의 보살상은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린 자세로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볼을 살짝 누르며 엷은 미소를 띤 표정이다. 목걸이 장식에 보관을 쓰고 치마를 걸쳤다. 삼존의 세련된 조형감각은 본존과 협시의 구성미뿐 아니라 좌우 보살상의 미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광대뼈를 살짝 드러낸 두 보살상은 분명 우리의 소년상이다.
삼존의 이름에 대해서는 석가모니,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로 구성된 현재·과거·미래의 삼세불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묘법연화경에서 언급되는 제화갈라보살인 연등불은 석가모니보다 훨씬 전에 출현하여 석가모니에게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준 과거불이고, 석가모니는 도솔천의 미륵보살에게 56억 7천만 년 뒤에 부처가 될 것을 예견했다. 곧 서산마애삼존불은 그러한 내용을 담아 조형화시킨 수기삼존불로도 해석된다. | |
김유신과 화랑들이 금세 살아 나타날 듯
‘ㄷ'자 모양의 바위에 10여구의 불보살·공양상 새겨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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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단석산마애불상군의 본존격인 북향벽면의 여래입상 부분. |
경주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신라 7세기초반. 바위높이 10미터. 깊이 10미터. 입구 폭 3미터인 ‘ㄷ'자형 암벽. 국보 제199호.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군 서면 단석산 소재.
단석산(斷石山)은 신라의 중악에 해당한다. 경주의 서남쪽으로 시내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해발 827미터의 높이로 일대에서는 가장 우뚝한 산이다. 단석산의 계곡은 예로부터 화랑들의 수도처로 알려져 왔다. 단석산이란 이름은 국선으로 추대된 김유신이 수도하던 중에 칼로 암벽을 쪼갰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가 열일곱 살에 중악석굴에서 기도하고 노인을 만나 방술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이곳이 바로 김유신의 수도처이며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장이었음이 추측된다. 첩첩산중 깊은 계곡의 팍팍한 등산로를 따라서 한나절을 올라 단석바위에 서면, 그 옛날 김유신과 화랑들이 금세라도 살아 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에는 신선사라는 암자가 있는데, 그 서쪽 벼랑에 10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ㄷ’자 모양의 석굴형 바위가 단석이다. 마애불이 있어서인지 맨 윗사람이라는 의미로 속칭 상인암(上人岩)이라고도 불린다.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으로 보아 암벽에 목조건물을 설치하여 예배공간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암벽은 북향 바위 사이로 입구가 만들어져 있고 그 내부 바위 벽면에 불보살과 공양상 10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남벽면 보살상 옆에 200여 자의 명문을 남겼다. 이 명문은 반 정도만 판독되었는데, ‘신선사(神仙寺)’, ‘미륵석상’, ‘보살계 제자 잠주(菩薩戒弟子岑珠)’ 등이다.
단석 공간에 들어서면 북향 바위면 왼편에 있는 본존격인 8미터 높이의 불상이 육중해 보인다. 위아래로 손바닥을 내민 양손의 모습은 부처의 자비를 뜻하는 시무외·여원인의 수인이다. 둥그런 얼굴에 반질반질한 소발의 원형 육계를 갖고 있다. 얼굴은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웃음을 짓는 듯하다. 간소한 법의를 양어깨에 걸치고 있으며, 가슴에는 내의를 묶은 띠매듭이 보인다. 이 불상을 미륵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동벽과 남벽에는 각각 6미터 정도 높이의 보살입상이 서 있으나 마모가 심한 편이다.
입구 오른편인 북벽에는 세 불상이 양손을 모두 왼쪽으로 올려 본존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옆에는 반가사유상이 있다. 아래쪽으로는 모자를 쓴 공양상 2구와 작은 불상이 있다. 공양상들은 향로와 같은 지물을 들고 본존을 향하고 있다. 끝이 높으면서 앞으로 구부러진 모자를 쓰고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인물상이나 고신라 토우에 나타나는 복식처럼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이다.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신선사는 미륵전, 관음전, 산령각(山靈閣)의 전각을 둔 작은 암자이다. 그 앞마당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어귀에는 한여름이면 산나리꽃이 군락을 이룬다. 늘씬한 점박이의 산나리꽃이 주황색으로 그을린 건강한 살빛을 한 화랑의 화현(化現)인 것 같아, 한참을 머무르게 된다. 신선사 산나리꽃 너머로는 산내면이라는 지명답게 멀리 구룡산까지의 첩첩한 산 능선이 전개된다. | |
22미터 수직벼랑에 관음보살 나투시다
승가사 마애불과 함께 都城수호의 염원 담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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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암 마애관음보살상. 서울을 수호하는 염원을 담아 조성됐다. |
서울학도암마애관음보살좌상. 조선 1872년. 높이 13.4미터.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24호. 노원구 중계본동 학도암 소재.
서울의 동쪽, 불암산 줄기인 천보산 중턱에 학도암이 있다. 학도암은 ‘학이 찾아드는 곳’이라는 이름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암자이다.
인조 2년(1624)에 무공(無空)대사가 창건하였고, 고종 15년(1877)에 벽운(碧雲)대사가 중창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현재의 암자는 1955년에 재건된 것이고, 아직도 중창불사가 한창이다. 학도암의 마애불은 최근 조사되어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암자 위쪽의 22미터가 넘는 수직벼랑에 거대한 관음보살좌상이 새겨져 있다. 양각의 융기된 선묘로 새겼으며, 옷주름 처리, 화불이 있는 머리장식, 연화대좌, 칠보문 표현 등 불화의 도상을 그대로 바위에 옮겨놓은 듯하다. 특히 보관의 양편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양식이 양어깨로 드리워져 있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이 관음보살상은 남서향으로, 중랑천 주변의 노들평야와 그 너머 남산·관악산·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다. 북한산 승가사 마애불에 이어 도성을 수호하는 마애관음상이 동쪽에 등장한 것이다. 그만큼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그 위치로 보아 서울의 왕실이나 세력가의 시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적기에는 동치(同治) 11년(1872)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새겼다고 전한다. 조선 말기까지 수그러 들지 않은 불교에 대한 우리 민족의 열망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마애불 왼편 벽면의 명문에는 불화의 화기(畵記)와 같이 증명비구 혜묵(惠默)을 비롯, 축문을 염불한 송주(誦呪)와 마애불을 새긴 금어(金魚) 명단이 보인다. 마애불 조각가를 금어와 동일하게 여긴 점이 흥미롭다. 이태호 명지대 교수 | |
송림 사이로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 보다
당당한 체구는 미륵 기다리는 민초들의 염원 대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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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삼태리마애입불상. 고려 12∼13세기. 높이 7미터. 보물 제407호.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소재
천안과 아산시의 경계를 이룬 태학산 북쪽 중턱 용문골에 마애불이 있다. 이곳에는 큰 학의 뛰어난 영험 때문인지 마애불의 위력 때문인지, 종단이 다른 조계종 법왕사와 태고종 태화사가 나란히 들어서 있다. 최근 법왕사 암반의 지하 금강굴에는 새로운 마애불들을 조각하기도 했다.
두 사찰의 오른쪽 언덕 위, 울창한 송림에 우뚝 솟은 바위를 꽉 채워 새겨진 마애불이 있다. 동남향으로 태학산 정상을 향한 마애불은 주변 산세의 품에 안긴 형국이다. 마애불 뒤로 올라가면 천안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약간 배부른 듯한 암벽에 저부조로 새긴 마애불은 7미터 높이의 규모에 어울리게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고 중후한 표정이다.
좁은 이마에 두툼한 눈, 작고 부드러운 입술과 볼이 늘어진 커다란 귀에도 부피감이 살아있어, 따뜻한 오전 빛을 받을 때의 상호 표정은 눈부시다. 이런 인상은 역시 우리 얼굴의 특징을 잘 살려낸 것이다.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오른손은 펴고 왼손은 손가락을 구부렸는데, 설법인인 듯하다. 커다란 체구는 양어깨에 걸친 법의의 옷주름으로 덮여 있다.
상체의 옷 주름은 얼굴과 어깨에 맞추어 볼륨을 살린 데 비하여, 하체와 양쪽 소맷자락은 음각선으로 간소하게 처리했다. 상하가 다른 음양각 선묘의 혼용은 역시 고려 마애불의 수법이다. | | 기사제공 :
이태호(명지대)의 마애불이야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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