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티안에서 게이트 오브 미스트(Gate of Mists)로 하강하는 정병택 선배. 건너편에 넬리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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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대륙 아프리카. 그곳 적도 근처에 대륙에서 킬리만자로(5,895m)에 이어 두 번째 높은 산인 케냐산(Mt. Kenya·5,199m)이 있다. ‘케냐’는 그곳 원주민어로 눈이 덮여 있는 하얀 산이란 뜻이다. '케냐'라는 국가이름은 마운트 케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 산의 정상 부분에는 바티안(Batian·5,199m), 넬리언(Nelion·5,188m), 레나나(Lenana·4,985m) 등이 솟아 있고, 루이스빙하 등 10개의 빙하가 뻗어 있으며, 만년설에 덮여 있다. 트레킹으로 오를 수 있는 킬리만자로와 달리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인 마운트 케냐는 암벽 또는 빙벽등반을 해야만 오를 수 있다. 6월부터 10월까지는 태양이 북면의 바위에 쌓인 눈을 녹여 주어 등반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 주고 1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는 남면으로 태양이 비춘다.
우리는 남동벽 루트를 통해 넬리언을 오른 후 건너편에 있는 바티안을 오를 계획을 세웠다. 바티안을 오른 후 다시 넬리언으로 돌아와 정상 부근에 있는 무인산장(Howell Bivouac Hut)에서 하루를 지낸 후 다음날 오전에 하산하는 것이다. 20대부터 알고 지내온 타이탄산악회의 정병택 선배와 함께 하기로 했다.
- ▲ 두 번째 캠프지인 매킨더 캠프(4,300m) 로 오르는 길.
- ▲ 매킨더 캠프로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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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인천 공항을 출발해 16시간의 비행 끝에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를 거쳐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경찰관이 노란색 증명서를 보이면서 여권과 황열병 예방접종증명서를 보자고 한다. 최근 케냐 정부가 케냐에 입국하는 한국인에게는 황열병 예방증명서를 요구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어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난감하다. 마침 여권 속에 있던 미국지폐 한 장을 주니 무사통과다. 황열병은 모기가 옮기는 바이러스성 질환이다. 나이로비는 해발 1,500m라서 모기가 보이지 않았고 우리가 높은 곳으로 이동한 덕분인지 여행 내내 모기 한 마리 본 적이 없다.
나이로비 공항을 빠져 나오니 택시 운전사들이 자기들의 택시를 이용해 달라고 조르며 접근한다. 이곳 생활수준은 1970년대 우리나라를 보는 듯하다. 몇 년 전 킬리만자로를 가기 위해 묵었던 나이로비 시내의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12월 23일. 마운트 케냐의 남면으로 가는 기점인 나로모루(NaroMoru)는 나이로비에서 북쪽으로 180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어제 공항에서 시내 호텔로 이동하던 중 택시 운전사와 협상해 오늘 아침 나이로비에서 나로모루까지 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정기 노선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으나 편안하게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 ▲ 매킨더 캠프.
- ▲ Makinder’s Gendarme 하단부를 등반하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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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은 나로모루에 있는 트레킹서비스업체(Mt. Kenya Guides & Porters Safari Club)에서 포터를 고용한 후 해발 3,000m인 멧 스테이션 캠프(Met Station Camp)까지 가는 것이다. 그곳 포터가 운반하는 우리의 짐 무게는 1인당 18kg이다.
나로모루의 마운트 케냐국립공원 출입구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입산 등록을 하고 입산비를 지불했다. 입산료는 1인당 하루 55달러다. 일단 4일치 220달러를 지불했다. 하산 시 공원 출입구에 영수증을 제출하고 나머지 일자를 계산해 지불하면 된다.
여기서부터 멧 스테이션까지는 지프가 이동할 수 있는 비포장도로로 천천히 세 시간 정도 올라간다. 도로 주변에 유난히 대나무가 많이 보이고 한 무리의 버펄로가 이동한 흔적이 보인다. 멧 스테이션 캠프는 작은 기상 관측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등반객을 위해 로지를 만들어 놓았다. 잔디 위에 텐트를 치고 아프리카 밀림에서 첫 번째 밤을 맞이했다. 지척에서 원숭이를 비롯한 동물들이 소리를 지르며 텐트 주위를 맴돌아 아프리카 정글에 온 것을 실감했다.
- ▲ 케냐산 위치도
- ▲ 케냐산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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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만에 해발 4,300m 고도에 올라서자 컨디션 바닥
12월 24일, 오늘은 텔레키밸리를 따라 1,300여 m 고도를 거슬러 올라 4,300m인 매킨더 캠프까지 가야 한다. 마운트 케냐를 처음으로 오른 영국의 지리학자 할포드 매킨더(Halford Mackinder)의 이름을 붙인 로지이다.
이틀 만에 4,300m의 고도에 이르는 것이 부담스럽다. 고소병에 대비해 천천히 그리고 물을 많이 섭취하면서 오른다. 매킨더 로지 앞 잔디밭에 바닥 없는 텐트를 쳤다. 산장에는 이미 여러 무리의 유럽 트레커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모두 쿡이 제공하는 식사를 하고 있다. 유일하게 우리만 취사를 스스로 해결하고 텐트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소란스러운 산장보다 텐트 안이 조용하고 자유스럽다. 또한 고소증에 대비해 물을 많이 섭취하니 밤에 소변을 보러 여러 차례 들락거리기 용이하다. 저녁 식사 후 텐트 안에 자리를 잡고 침낭 속에 들어가니 고산병 증세로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 왔다. 두통약 한 알을 먹으니 편안해졌다.
12월 25일, 고소순응을 위해 4,900m에 있는 오스트리안 헛(Austrian Hut)에 오른 후 몇 시간 머물다 내려올 예정이다. 고용한 3명의 포터를 활용해 장비와 식량을 모두 올리고 한 명만 하산을 위해 남겨둔다. 오스트리안 캠프에 오르는 동안 왼쪽에 바티안 오른쪽에 넬리온 두 개의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두 봉우리 사이의 쿨와르에는 하얀 얼음이 가느다랗게 바닥까지 이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쿨와르다. 이 루트는 바티안으로 오르는 빙벽 루트로 1970년대 후반 미국의 등반가이본 취나드 일행이 초등했다. 5,000여 m 고도에서 수직의 빙벽 등반도 흥미로울 것 같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안 헛(Austrian Hut)으로 다시 올랐다. 이 산장은 넬리온 남면을 오르는 등반팀들의 베이스캠프로서 20명 정도 지낼 수 있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 새벽에 넬리온 정상 등반에 나설 예정이다. 고소증세로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유쾌하지 않다.
- 남동벽 루트 통해 넬리언과 바티안 쌍봉 등정
- ▲ 우리가 오른 넬리언 남동면 루트. 넬리온을 오른 후 안개 속에 가려 있는 건너편의 바티안을 올랐다.
- ▲ 바티안 마지막 피치를 오르는 정병택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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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고차 400m 높이의 수직벽 타고 넬리온 등정
12월 27일 새벽 4시 반에 눈을 떴다. 넘어 가지 않는 아침밥을 억지로 밀어 넣고 다섯 시에 산장 문을 나섰다.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벽 아래 등반기점에 도착하면 6시 반쯤 날이 밝아질 것이다. 벽 아래 도달하기 위해서는 폭 200m의 루이스빙하를 횡단한 후 너덜지대를 올라야 한다. 루이스빙하를 건너는 여러 개의 불빛이 어둠 속에 반짝였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한 팀으로 가이드 3명이 포함한 6명의 팀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시간이 지체되어 두 시간이나 걸려 벽 아래에 도착했다.
오전 7시경 등반을 시작했다. 우리 등반장비는 9.8mm 싱글로프 60m 한 동과 하강용으로 준비한 직경 6mm 60m 한 동과 캠 한 세트 그리고 너트 몇 개와 피켈 한 자루가 전부다.
우리가 오르는 400여 m 높이의 수직벽은 20여 피치로 나뉘어 있다. 난이도 5.8 또는 5.9 정도 되는 몇 개 피치를 제외하고 대부분 쉬운 루트고 그냥 걸어 올라가는 피치도 여럿 있다. 기술적으로는 어렵지 않으나 3일 만에 5,000m 고도에 올라와 등반을 하려니 힘이 많이 들었다. 피치 종료 지점에 도달해서는 암각에 슬링을 이용하거나 캠을 이용해 확보점을 구축했다.
- ▲ 넬리온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하웰 비박 헛 앞의 정병택 선배.
- ▲ 바티안 마지막 피치를 오르고 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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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피치는 20m를 올라 넓은 레지에 이른다. 다음은 왼쪽으로 이동해 눈이 있는 걸리에 진입한 후 레지에 올랐다.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오르면 매킨더 침니 아래에 이른다. 30여 m의 매킨더 침니를 올라도 되고 침니를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도 된다.
침니를 오르면 원 어클락 걸리(One O'clock Gully) 아래에 도달한다. 1시 방향 사선으로 나 있는 50여 m 길이의 걸리다.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확보를 적절히 하면서 오른다. 걸리를 오른 후 오른쪽으로 50m 정도 트래버스한다. 위를 보면 두어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대피소(Baillie’s Bivy)가 보인다.
이것을 목표로 쉬운 바위 두 피치를 오르면 넬리온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도달한다. 이 능선을 넘어서 5m 정도 내려간 후 20m 길이의 좌향 크랙을 따라 올라가면 테라스가 나온다. 여기서 35m의 수직 크랙을 오른다. 오른쪽으로 20m 트래버스 하면 넬리온 정상으로 이어지는 걸리가 시작된다. 낙석에 주의하며 4피치를 오르니 넬리온 정상이다. 오후 2시쯤에 도착했으니 일곱 시간이 걸린 셈이다.
- ▲ 게이트 오브 미스트(Gate of Mists)에서 바티안으로 오르고 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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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계획은 건너편에 있는 바티안 정상까지 다녀와야 하나 안개가 몰려오며 시야가 좋지 않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넬리온 정상 근처에는 4명 정도 겨우 누워서 머물 수 있는 허리 높이의 비상 대피소(Howell Bivouac Hut)가 있다. 좁지만 바람과 한기를 충분히 막아 줄 수 있는 고마운 자리이다. 500g짜리 가을용 침낭으로 추운 줄 모르고 밤을 지냈다. 지난해 이맘때 뉴질랜드 마운트쿡에서 정 선배와 크레바스에서 침낭 없이 밤을 지낸 것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12월 28일, 마운트 케냐 정상에는 쌍둥이 봉이 있다. 넬리온과 바티안이다. 마치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처럼 이 두 봉은 200여 m 거리에 50여 m 깊이 안부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 안부를 게이트 오브 미스트스(Gate of Mists·5,144m)라고 부른다. 며칠 관찰해 보니 이름처럼 오후만 되면 여기에 안개가 덮이는 것 같았다.
넬리온에서 안부까지는 설사면으로 하산한 후 바티안으로 이어지는 여러 피치의 바위능선을 올라야 한다. 다시 올라올 것을 대비해 로프를 고정시키고 하강해 안부로 내려왔다. 그리고 어렵지 않은 암릉 여러 피치를 올라 마침내 바티안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 한동안 정 선배와 함께 기쁨과 행복감을 맛보았다.
- ▲ 바티안 정상에서 정병택 선배와 필자(오른쪽).
- ▲ 시리몬 루트로 하산 중 십튼 캠프에서 바라본 마운트 케냐 북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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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안을 자일 하강한 후 넬리온으로 다시 올라와서 우리가 올라 왔던 루트 아래로 하강을 시작했다. 하강 포인트는 대부분 암각에 슬링이 걸려 있고 가끔 하강 볼트가 설치되어 있다. 도중에 하강 포인트를 찾지 못해 헤매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며 25~30m 길이의 하강을 14차례 하니 어제 아침에 등반을 시작했던 자리에 다다랐다. 60m 로프 한 동을 이용해 하강이 가능하다. 5시간이 걸려 하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선구자 에릭 십튼의 자취와 흔적 느끼며 하산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을 먹고 포터 한 명과 함께 하산을 서둘렀다. 고도에 순응되었는지 몸 상태가 좋다. 그러나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우리의 하산 루트는 올라왔던 루트의 반대편에 있는 시리몬(Sirimon) 루트다. 세 시간 정도 좋은 경치를 감상하며 내려가니 십튼헛(Shipton Hut)이 나온다. 영국의 등산가 에릭 십튼이 시도한 북면 루트의 베이스캠프다. 당시 그는 인도의 카메트, 가르왈 히말라야의 난다데비, 카라코람의 트랑고산군, 타클라마칸사막, 에베레스트의 노스콜,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 등 지도의 공백지대로 남겨진 극지와 오지 등을 탐험한 불세출의 탐험가며 등산가였다.
십튼 캠프에서 마운트 케냐의 북벽을 바라보며 선구자의 자취와 흔적을 잠시 느껴 본다. 하산을 계속 하여 3,300m의 주드마이어 헛(Judmaier Hut)에서 하루를 더 머물며 우리의 등산일정을 마무리했다.
첫댓글 멋지고 존경스럽습니다. 이틀만에 4300이라. 경치도 좋은데 좀 천천히 가시지 그러셨어요. 대단하십니다.
그냥! 마냥! 좋아요~~
진짜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