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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국가의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위로는 신(神)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게 된
황제, 왕, 영주 등 지배자의 등장과 함께 궁궐의 조영도 역사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지배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권위를 드러낼 상징적 장치가 절실해지면서, 통치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해 줄 무엇인가의 필요성은 왕의 출생을 신비화시켜 신격화하고 그 치장을
범인과 다르게 꾸밈으로써 우월성을 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왕과 왕족들의 거처와 정무 청사도 가능한한 기술과 재력, 인력을 동원하여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 조영함으로써 강력한 통치력을 표현하게 된다. 따라서 천자나 제왕, 왕족들이 살던 규모가 큰 건물을 일컫는 궁(宮)이라는 말과 궁 앞의
문 좌우에 설치된 망루를 가리키던 궐(闕)이라는 말의 합성어인 궁궐도 지배자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규모에 따라 신분상의 차별이
적용되었던 옛날에는 엄격한 구분의 의미에서 궁이면서도 궐을 갖추지 않은 건축물은 궁전(宮殿), 궁실(宮室)로 부르기도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건축 분야의 분류용어로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국가통치의 최고 주권자인 제왕 또는 황제가 정무를 수행하던 청사와 거주하던 주택 및
부속건물들을 총칭하는 의미로 궁궐건축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궁궐건축은 고대국가 체제가 정립되었던 삼국시대부터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제외하고 앞 시대의 지상건축물 유구는 현존하지 않으므로 유지(遺址)나 관련 문헌, 고분벽화 등으로 당시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궁궐건축 연구의 한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서의 기록과 발굴 등에서 드러나는 유지의 수효나 규모 등 으로 미루어 보아
각 시대의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궁궐건축에 아낌없는 투자를 해 왔음을 짐작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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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은 단순히 권위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행정, 문화, 정치의 중심지로서 역사의 산 현장이기도 하였다.
왕이 국사를 처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곳이므로 그에 따른 다양한 건물들로 궁궐은 형성된다. 먼저 궁궐을 외호하는 시설인 궁성이 있고 이
성곽에는 드나드는 사람을 감찰하는 문이 요소요소에 배치된다. 궁궐의 정문은 대개 남쪽에 있게 마련인데 나라의 주요 관청들은 이 정문 앞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열된다. 이곳을 궐외각사(闕外各司)라고 한다. 궁성 안에는 왕과 신하들이 만나 국사를 의논하는 건물인 정전과 편전이 있고, 왕과
왕비의 거처가 되는 침전이 자리한다. 이런 건물 외에도 궁궐에 들어와 왕을 자주 만나면서 활동하는 관원들의 공간이 있었는데,
궐내각사(闕內各司)로 분류되는 관청 기능의 건물들이 있다. 궐내각사에는 대신들이 왕을 만나기 전이나 만나고 나서 모이는 건물인 빈청(賓廳),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머무는 대청(臺廳),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政廳), 왕과 함께 경연을 하는 등 학문적인
자문을 하는 홍문관(弘文館), 왕의 비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承政院), 왕실 문서 및 일반서적을 관리하고 학문 연구, 감찰 기능 등을
가지고 있던 규장각(奎章閣),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예문관(藝文館), 역사를 기록하는 춘추관(春秋館), 왕과 왕실의 약을 조제하는
내의원(內醫院), 왕실과 궁궐의 각종 살림을 맡아보는 여러 관청 들, 내병조(內兵曺)를 비롯하여 왕과 궁궐을 호위하는 각종 군사관계 관청등
수많은 관청들이 있었다. 이외에도 왕세자의 거처(東宮)가 있고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그를 호위하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등이 배치된다. 이러한 주요 건물들 한 켠으로는 국왕의 가족과 그들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주거공간들이 자리잡고
주변으로는 정원이 조성된다. 1908년에 작성된 <궁궐지>에 의하면 경복궁의 총 규모가 924여 칸으로 오늘날 30평짜리 집으로 치면
500여 채에 해당되는 규모이니, 작은 도시를 형성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수많은 건물들과 사람들이 밀집된 곳이 궁궐이었으므로 사람의 3대
쾌감 중 하나인 배설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해우소(解優所)도 상당수 설치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번거롭고 꺼림직한 일은 남의 손을 빌어 처리하였듯이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는 용변을 보는 기본 생리현상도 스스로 처리하지를 않았다.
왕의 변을 궁중용어로는 매우라고 하여 특별 취급하였는데, 용변을 볼 때에는 이동식 변기인 매우틀을 이용하였으며 당연히 그 뒤처리도 시중드는
나인의 손을 빌었다. 매우틀에 받아낸 왕의 변은 정기적으로 건강상태를 측정하는 자료로도 쓰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실들이 와전되어 궁궐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속설도 생겨났지만 실제로는 궁궐에 왕과 왕비만 살았던 것이 아니었으므로 많은 수의 화장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만
보더라도 여러 개의 화장실들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북궐지의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현재의 경복궁에도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요소요소에 현대식
간이 화장실을 마련해 두고 있는데 옛궁궐의 화장실 배치나 구성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주거생활 중
화장실의 설치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가치관이나 문화의 차이로 그것을 어떻게 취급하느냐는 현상의 격차가 있을 수도
있지만, 빼놓을 수는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 가치관, 생활 규범, 건축 양식, 건축 구조 등을 알리고 후대에게 교육하기
위한 현장으로서 당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경복궁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생각되며 경복궁 복원사업 계획
중에 전통 화장실의 복원도 함께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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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궁궐의 건물들이 필요에 의해 자리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궁궐건축에는 기능을 극대화 시키면서 권위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배치의 규범이 절실히 요구되어졌다. 중원문화권에 속해 고대로부터 중국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온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에서 그 기본 규범을
찾고 우리 자연 지형에 어울리도록 적절히 응용의 폭을 넓히는 방법을 택하여 왔다.중국의 도성과 궁궐 배치 규범은 상대의 주(周)나라 때 간행된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가 토대가 되어 역대로 내용의 상세가 더해져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우리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중국적
도시계획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주례 고공기에는 9리 사방의 도성을 9등분하고 그 중앙 구획에 왕궁을 둔 중화사상의 강력한 표현을 담고 있다.
또한 국도(國都)의 구체적인 구성 원리로서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침(前朝後寢), 3문3조(三門三朝) 등을 설정하고
있다. 전조후시란 궁궐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두고 뒷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하는 것이고, 좌묘우사는 궁궐 좌측에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궁궐을 중심으로 한 시가의 구성 원리를 규정한 내용인데 전조후침과 3문3조는
궁궐 내 건축과 담장, 문에 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전조후침이란 궁궐의 앞쪽에 정치의 장인 조정을 두고 뒤쪽에 왕과 왕실의 거처와 침소를
두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3문3조는 궁궐 전체를 3개의 독립된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담장이나 행랑으로 막고 문을 두어 연결시키는
폐쇄적인 공간 구성의 형식을 말한다. 주례 고공기의 궁궐 배치 규범은 우리나라 궁궐에도 원용되었는데 중국의 경우처럼 오로지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동화되는 특성을 보인다. 다만 동서남북에 이르는 축의 구성이나 주요건물의 배치 등에서는 규범에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
가장 빈번히 접촉하면서 교역과 전쟁 등을 통해 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국력을 키워 나갔던 고구려 안학궁의 배치에서도 그러한 특징을 발견할 수가
있다.안학궁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427년(장수왕15년)에 건설된 궁궐이다. 고구려는 이것을 발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북으로는 흑룡강 유역과 남으로는 한강 전역과 죽령, 조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유역, 동으로는 연해주 일대, 서로는 내몽고 와 중국
동북지방을 통괄하는 대제국을 형성하게 되므로 안학궁의 존재는 우리 민족 기개의 상징물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안학궁성은 평양 대성산성의
소분봉 남쪽 기슭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북쪽에는 궁성의 방어 요새인 대성산성이 있는 대성산이 있고 앞에는 대성벌, 동쪽으로는 장수천,
서쪽에는 합장강, 남쪽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있다. 평야지대와 곧바로 연결되며 육로, 수로를 통한 교통로도 발달되어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하겠다. 건축적인 면에서도 성벽의 한변 길이가 622m, 넓이는 약 38만㎡나 되는 웅장한 토성인데 후대의 궁궐규모에 비해서도
처지지 않는 위용을 나타내고 있다.안학궁성의 평면 배치도를 보면 문은 동, 서, 북 벽에 각각 하나씩 내고 남쪽에는 3개를 냈는데 가운데 문이
가장 큰 것으로 보아 정문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궐의 형태를 취한 궁성에서 초기에 양쪽으로 망루를 겸한 누문을 두고 중앙은 넓게 개방된 문의
형태를 취한 것에서 발전된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문의 배치는 동서남북이 정확한 대칭을 이루지 않고 지형에 따라 다소 비껴선 자리에 놓여
있다. 궁전 건물은 대체로 남쪽 중앙에서부터 남북 축상에 4동(棟)을 배치해 중심축을 형성하고 그 동쪽과 서쪽에 동궁과 서궁을 배치해 보조축을
설정하였다. 이 중심선상 건물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궁궐의 일반적인 배치 형태로 미루어 보면 외전(外殿), 내전(內殿),
침전 (寢殿) 등과 태자구의 기능을 지녔을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 건물들은 경사진 지형에 따라 남궁에서 북궁으로 가면서 터는 높아지고 건물은
낮아지는 특색을 보인다.안학궁성의 배치에서도 나타나듯이 배치의 기본 규범은 중국의 것을 빌어왔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형에 따라 적절히
변화를 추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백제나 신라, 고려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의 건축 규범과 건축기법이 총체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조선의 궁궐에서도 유사한 형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 고유의 자연의식이 건축적 특성으로 승화되어 면면히 전승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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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와 함께 건축된 경복궁은 명실공히 조선의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성계의 조선개국 계기가 되었던 위화도 회군은 역사 연구자들마다 다소 해석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공통된 견해는, 고려시대 정치
이념의 근간을 이루었던 유학의 학습과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한 신흥 사대부세력과 홍건적의 난, 왜구의 침탈 등 빈번한 외부 세력과의
전쟁을 통해 국민적 지지도를 바탕으로 성장한 소장파 군부세력의 결합이 빚어낸 무혈쿠데타라는 것이다.고려는 원에 복속된 후 끊임없이 내정간섭에
시달려왔고 왕권의 계승도 원에서 좌지우지할 정도로 왕실의 체통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원의 황실과 관계를 맺어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한
권문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온갖 수단을 통한 토지겸병으로 사적인 부를 축적함으로써, 고려 왕실의 재정은 극히 궁핍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권문세족의 부의 축적에는 비단 양인, 천인들의 것만 대상이 된것이 아니고 지방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중앙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중소지주인
사대부들까지도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글 중에 시인이자 학자로서 14세기에 활동한 윤여형의 시가 있다.
이른바 도토리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여서 굴러다니는 도토리의 신세도 처량하지만 그나마 도토리로 연명할 수 있는 처지는
한탄이라도 할 수 있는 다소 나은 처지의 느낌을 줄 수 있는 싯구이다.요즈음 세도 쓰는 놈들이 / 우리 농민 논밭을 모조리 빼앗아 / 산과 내를
표적 삼아 문서를 마련했거니 / 한뙈기 논밭에도 주인이 하도 많아 / 걷어 가고 빼앗아 가고 끝장 없다오 / 게다가 장마나 가뭄에 흉년이 거듭
들어 / 논밭엔 해마다 잡풀만 무성할 뿐 / 살을 깍고 뼈를 깍어 몽땅 앗아가니 / 관가의 조세는 또 무엇으로 바치리이까 / 젊은 것들 수없이
고장을 떠나고 / 늙고 약한 사람만 남아 / 빈방만 지키고 산다오고려말의 이러한 사회혼란은 공민왕 때에 이르러 반원친명 정책과 함께 왕권 강화,
친원세력의 축출, 국토의 회복 등 강력한 개혁정치가 펼쳐짐으로써 다소 누그러지는 추세를 보였으나 천인출신인 신돈을 통해 이루려던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의 반발과 신돈의 죽음으로 기가 꺾이고 자신마저도 실의의 생활 끝에 암살당함으로써 더욱 극심한 권문세족의 발호라는 결과를
낳으며 실종되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대륙에서도 새바람이 불어 원(元)이 쇠퇴하고 꾸준히 세력을 키워왔던 명(明)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면서 원(元) 관할하에 있었던 철령 이북지역의 고려 영토를 자신의 영토로 귀속시키라는 요구를 제기해 온다. 고려 조정에서는 명의
요구에 대해 찬반론이 대두되어 최영은 강경한 입장으로 명의 정벌까지 주장하였고 이성계, 정도전 등은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정국을
주도했던 최영의 주장대로 고려조정은 최영을 8도 도통사로 하고 조민수를 좌군통도사, 이성계를 우군통도사로 한 3만 8천여명의 요동정벌군을 편성,
정벌길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반대론을 펼쳤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4불가론을 내세워 조민수를 설득하는 한편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진입함으로써 고려왕조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다. 이성계는 우왕 대신 창왕을 내세우고 최영을 반역죄로 처단함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배체계를
완성한다. 그리고 전제개혁, 사전정리 등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여 권문세족들이 독점했던 토지를 나라에 귀속시켜 경제 기반을 다진후 마지막으로
내세웠던 공양왕을 몰아내고 국왕의 보위에 오름으로써 1392년7월 명의 재가를 받아 조선의 건국을 선포하였다.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이라는 군사
쿠테타를 성공시키고도 한참을 고려의 신하로서 종사하면서 건국의 기반을 다지는 기간을 가졌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 기간 중에 그는 신하에서 왕의
보위에 오를 수 있는 대의명분을 구하고 새로운 나라의 골격을 구상하며 통치의 이념을 다졌을 것이다. 새로운 조정에서 일하게 될 신하들을 임의로
편성하고 반대세력이 될 고려의 신하들에게는 가차없는 숙청의 칼을 휘둘렀음은 물론일 것이다. 그리고 하루 바삐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는 방법으로
도성천도를 계획했을 것이다. 그의 권위를 상징할 수 있는 화려한 궁궐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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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의 약사 경복궁(景福宮)은 태조4년(1395)에 창건된 조선의 정궁(正宮)이다.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천도를 결심하고, 즉위 3년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여 10월에 천도하고 그 이듬해에 경복궁을 창건하였다.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이곳에 경복궁을 지은 가장 큰 이유는 도읍지의 위치 및 왕궁터의 길흉 여부가 곧 왕조 의 화복과 관계된다고 보았던 삼국시대
이래로 행했던 풍수지리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양은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도읍지였고, 고려시대는 남경(한양)천도설이 유력했을 정도로 길지(吉地)로
지목된 곳이었다. 한양의 지세(地勢)는 북쪽에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왼쪽에 청룡(靑龍)인 낙산, 오른쪽에 백호(白虎)인 인왕산과 남쪽에
안산(案山)인 남산을 두고, 한양의 명당수(明堂水)인 청계천이 북북서(亥)에서 시작하여 동(卯)으로 흘러가고 한양의 객수(客水)인 한강이
동(卯)에서 나와 서(西)로 흘러가는 극히 길한 명당지(明堂地)이다. 경복궁은 이 명당지의 혈(穴)에 놓여 있으며 주산인 북악을 등지고 북북서에
앉아 남남동을 바라보고(壬坐丙向) 전개되었다. 경복궁 내에는 북악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내당수인 계류가 근정문 앞을 지나 흘러나가서 대단히
길한 혈을 형성하였다.궁궐 완성후 태조가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자,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의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경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라는 구절에서 景福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왕명에 의해 동서남북 네 문의 이름을 각각 동문은 건춘(建春), 서문은 영추(迎秋), 북문은 신무(神武),
남문은 오문(午門:세종때 光化로 바뀜)이라 지었다.그후 크고 작은 화재가 있었으나 여러 임금을 거치면서 많은 증축으로 규모는 점차 커져갔다.
그러나 1592년 4월 임진왜란 때 왜병과 난민의 방화로 전소된 후 왕궁으로서는 불길하다는 이유로 273년간이나 폐허가 된 채 방치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익종ㆍ헌종 등 역대 왕들이 경복궁 중건을 생각하였으나, 국력이 미치지 못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이후 역대 왕은 왜란 후
광해군 때에 다시 지어진 창덕궁에서 기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고종 2년에 이르러 권력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뿌리뽑고
왕권을 확립하고자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재건하기로 결정, 경복궁 중건에 착수하게 되었다. 고종2년(1865)에 착수한 경복궁 중건은 4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관료와 부자들에게서는 물론, 백성들에게까지 원납전이라는 명목으로 소요
경비를 거두어 들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당백전이라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기에 이르렀다. 국력을 돌보지 않는 무리한 공사, 공사비 조달에 따른
착취는 경제 혼란을 초래하고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백성의 고혈이 바탕이 되어 재건된 경복궁은 개국 초인 태조 이성계 창건
당시보다 규모나 화려함에서 월등한 위용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32년(1895) 10월에 민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 폭도들에게 주살 당하는
변을 당하고 이듬해 2월에 고종이 러시아 공관(아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의 왕궁으로서의 운명은 끝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후 흥선
대원군에 의해 무리하게 중건되기는 하였으나, 겨우 27년간 사용하다 버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서 국권이 강탈 당하자
경복궁내의 200여 동에 달했던 전각이 거의 다 헐리고 경회루와 근정전 등 10여개 동만 남았고, 일본인들이 근정전 남쪽 정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음으로써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과 안산인 남산의 기맥 흐름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그대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마감을 의미하는
참담한 현실을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광복이 될 때까지 궁내에 남아있던 건물은 10여개 동의 전각 정도 뿐이었다.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부속 전시장으로 대규모의 건물을 경복궁 안의 동편에 지었다. 그리고 그후 도로의 확장 등으로 궁성이 여러번 퇴축(退築)되어
심지어 궁궐 성곽의 동서좌우의 망루 역할을 하였던 동십자각(東十字閣)은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고 서십자각(西十字閣)은 훼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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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사신(四神) 중 주작을 상징하는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라는 이름의 뜻(光被四表化及萬方: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침)이 말하여 주듯이, 조선의 위엄과 문화를 상징처럼 표현한 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문은 일제 초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성될 때에 해체되어 경복궁 동편 지금의 건춘문 북쪽 담벼락으로 옮겨짐으로써 조선왕조 오백년의 권위와 정통성이 함께
훼손되었고, 6.25전쟁 때에는 포탄에 맞아 화강석 축대만 덩그러니 남아 폐허로 되었던 것을 제3공화국 때에 제자리로 옮겨 왔다. 당시
복원공사를 하면서 누(樓)건물을 철근콘크리트 기둥과 서까래를 얹고 지붕을 올림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멀쩡하지만 원형은 완전히 잃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문짝과 철판, 대문의 빗장까지도 철판으로 만들어 제작 당시에 지녔던 막중한 의미와 상징성까지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경복궁을 지키는 정의의 사자로 조성된 광화문의 해치는 뿔을 하나 가진 동물로서 양을 닮았다. 흔히 해태라고도 부르는 이 해치는 대단히 영물스럽고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성군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고,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덤비어 받아 넘기는 정의의
동물 이었다. 이 해치를 궁문 앞에 세운 이유는 궁궐에 거처하고 있는 왕이 성군임을 칭송하는 한편 백관들이 궁궐 앞을 출입할 때에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고 경계하는 태도를 가지게 하는 데에 있었다. 신하들은 해치가 세워진 자리에 이르면 말이나 탈 것에서 내려서 입궐의 준비를
점검하였는데 해치를 통해 신하로서의 도리와 체통을 지키는 일에 경계를 삼았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해치는 화마(火魔)를 제압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서울 성내의 궁전은 여러 차례에 걸친 대화재등으로 피해가 많았는데 서울의 안산인 관악산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으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서 관악산 상봉에 샘을 파고 구리로 용을 만들어 그 샘에 넣었으며, 또 광화문 앞 좌우에 해치상 한 쌍을 관악산을 보게 앉히어 화기를
진압하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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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의 정전을 신성한
공간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염원이 탄생시킨 상상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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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에서 임금의 정무공간인 정전(正殿)은 다른 모든 공간을 압도하는 위세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정전은 곧 한
왕조와 왕을 상징하는 구조물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전으로 드는 자리에는 특별한 과정을 거치도록 구조를 마련하였다. 우리가 흔히 사찰의
진입부에서 볼 수 있는 개울과 다리의 상징적 역할이 세상에서 묻은 때를 그 곳에서 다 씻어 버리고 안으로 든다는 의미로 인식하듯이, 궁궐
안에서도 그러한 의미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드나드는 근정문 앞에도 다리가 있었다.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그 구조물인데 이렇게 다리가 궁궐 정전의 문 앞에 위치하는 것은 곧 지엄한 내부의 공간과 외부의 일상적인 공간을 구분지우는 의미와 통과의례의
역할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 옛날 정전에서 임금이 임하는 크고 작은 조회가 열릴 때면 참석하는 문무백관들을 일단 다리 남쪽의
정해진 위치에 각기 도열한다. 문반은 동쪽, 무반은 서쪽에 형식을 갖추고 도열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정리의 안내를 받아 정전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이 다리는 지엄한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한 일보로서 흐르는 물에 사심을 씻고 청결무비한 마음으로 진입하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현재는 전혀 무관하게 근정전 동쪽에 옮겨져 있다. 그나마 무성의한 졸속 시공으로 본래의 골격조차 잃어 버린 모습이다.
곡선에 따라 화강석을 적절하게 다듬어 짜맞추어야 할 홍예를 철근콘크리트로 대강 만들어 버리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마감하여 외형만 갖추었는데 다리
아래에서 보면 그 무성의한 구조가 한눈에 보여 씁쓸함을 금할 수가 없다.영제교는 통과의례의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도 북악산 쪽에서 발원한 물이
경복궁 서쪽 담의 안쪽을 따라 흘러 내리다가 영추문 근처에서 직각으로 굽어져 동쪽으로 방향을 잡은 다음 근정문과 홍예문 사이를 지나 동남쪽 담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드는(서류동입:西流東入)명당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물도 흐르지 않고 있으니 충심(忠心)을 다지며 건너던
상징적인 다리가 아니라 콘크리트 뼈대로 박제된 다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편 영제교 축대 사방을 보면 엎드려 있는 동물상이 있다.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고 정수리에 뿔이 하나 있는데 도랑 바닥을 감시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동물은 산예(酸猊)라는 상상의 동물로서
물길로 잠입할 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색출하여 궁궐의 정전을 신성한 공간으로 유지시키려 했던 염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동물도 역시
원래의 위치와는 달리 배치되어 있는데 흘러드는 물마저 없으니 그 신성함도 느껴지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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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의 문앞에 위치하여
지엄한 내부공간과 외부의 일상공간을 구분하는 통과의례를 담고있는
영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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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문은 근정전 남문으로
현존하는 조선 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의 건물로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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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의 동쪽 회랑으로서
열주의 초석이 방형과 원형으로 내측과 외측이 다르게 처리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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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은 조선조 정전 건축 중 가장 높고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수펑선보다는
수직적 상승감이 돋보이는 조형 의지는 왕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동서남북의 회랑<1>으로 둘러싸여 있는 근정전은 극히 폐쇄적인
공간 구성으로 신성감과 보안성을 높인 궁궐 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또한 이것은 남북으로 축을 구성하고 그 축을 따라서 정전, 편전,
내전을 두고 문을 내었던 주례 이후의 궁궐건축 형식의 적용이기도 하다. 근정전 원래의 출입 통로는 남쪽의 근정문과 북쪽의 사정문 뿐이었으나 현재
멀쩡한 정문인 근정문을 닫아놓고 동쪽 회랑벽을 헐어 문을 달고 그 곳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옆구리에 구멍을 내고 드나드는 꼴이라
근정전도 측면부터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영제교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근정문을 통해서 들어오면 북악을 배경으로 우뚝 버티고 선 근정전의
위용에서 국왕의 준엄한 권위를 느끼게 되는 것이 원래의 건축 의도였다고 본다면 지금의 동쪽 회랑문의 활용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라고
하겠다. 서쪽의 회랑도 건축보수 자재운반을 편리하게 한다는 구실 하에 헐어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모양이 흡사 양쪽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권위도 신화도 물거품이 되어버린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것만 같아 처연한 마음이 든다.근정전이라는 건물의 명칭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인 정도전에
의하여 붙여졌다. 한양 천도 후 정전의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에 정도전이 근정전(勤政殿)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그 뜻을 태조에게 아뢰었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폐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정치의 큰 일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서경에 말하기를 문왕은 아침부터 해가 기울도록 까지 밥 먹을 여가가 없었고 만인을 모두 화목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문왕이 부지런 했던 바이니 임금으로서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라며 근정전의 이름에 담긴 뜻을 밝혔는데
임금의 안일을 경계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 땅에 펼치고자 하였던 의지가 담겨 있었다고 하겠다.경복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권위가 직접적으로 표현된
공간답게 근정전에는 많은 장식적인 요소와 상징물들이 배치되어져 있다. 하나하나를 짚어 보면서 그 기능과 함께 상징적 의미를 음미해 보도록 하자.
앞마당의 쇠고리 근정전의 앞마당에서는 신하의
조하를 받음은 물론 세자책봉, 왕족혼례, 회갑연 또는 외국사신의 영접등 각종 행사들이 펼쳐지곤 하였다. 또 임금의 즉위식, 큰 공을 세운
장수들의 무공을 기리는 하례도 이곳에서 베풀어졌다. 이런 행사에는 만조백관이 참여하여 도열하니 질서를 지켜설 품계석이 필요하였고 행사시 햇볕이
따깝거나 비가 내리면 막아 줄 차양막도 필요로 하였다. 마당과 1층 월대 위의 커다란 고리모양 철물은 차양막을 쳤을 때 기둥을 버티기 위해 줄을
매는 장치이다. 세월의 때가 묻어 녹이 슨 쇠고리는 더이상 이것을 사용할 사람이 없음을 웅변해 주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마당은 화강암의
판석으로 표면을 처리하였는데 정전으로 오르는 중앙에 삼중도를 놓아 왕도(王道)를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위계를 표시하고 있다.
- [녹이 슨 쇠고리는 궁궐에서의
행사 시에 차양막을 설치할 때에 사용하던 그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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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의 상징인 계단 궁궐에서 격이 높은 전각<2>들은 대부분 높은
축대 위에 있어 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으며, 특히 궁궐의 계단은 특별한 상징성이 있다. 계단은 높고 낮음의 등차가 있으며, 내려오는 것
보다 위로 오른다는 의미가 강하므로 계단 위에 있음은 지체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단은 단순한 건축 구조물의 기능을 뛰어넘어
군신간의 위계질서와 상하의 구별을 뚜렷이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면 그 위의 공간을 이상화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근정전의 계단도
이단 삼중계로 꾸며져 최고의 권위를 표현하는데, 중앙의 답도(踏道)<3>에는 부조 형태로 봉황이 조각되어져 있다. 봉황은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해서 성군이 출현하여 나라가 태평하면 홀연히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새로 인식되는 상상의 동물이다. 그래서 용,
거북, 기린과 함께 사령으로 일컬어진다. 봉황의 형상은 닭의 머리, 뱀의 몸, 제비의 털, 거북이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키는 6척, 몸과 날개는 오색이 찬란하고 다섯가지의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전한다. 근정전 계단의 답도에 조각된 봉황은 단상의 임금이 성군임을
암시하면서 태평성대를 누리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계단을 포함하여 근정전 주변에 산재해 있는 서수(瑞獸)는 중국의 경우처럼 위협스럽거나
괴기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같이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애완동물 같기도 하다. 호랑이는 민화의 까치호랑이처럼 약간 얼이
빠진 듯하고 현무도 북방을 호위하는 동물답지 않게 어항에 든 남생이처럼 생겼다. 석상들의 작의없고 유연한 자태, 어수룩하면서도 순진한 멋이
한국인의 심성을 단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들 석상들은 사방(四方) 과 십이지(十二支)를 방위하는 사방신과 십이지신들로서
정전을 외호하는 수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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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산 일월도가 있고 천장의
닷집과 이룡희주
그리고 어좌는 고종 때에 근정전이 재건되면서 새로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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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회루의 누하기둥으로 외주는
방형
내주는 원형의 배치인데 민흘림 양식이 적용되어 안정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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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시 태조에 의해서 건립된 연회공간이다.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는데
태종12년(1412)에 박자청으로 하여금 증축하게 하였다. 유연하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이곳은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등 주로 공적인
연회에 자주 이용되었다. 경회루 연지의 물은 못바닥에서 나오는 지하수이며 북쪽 향원지에서 흘러드는 물과 일부 지표수는 용두를 설치하여 폭포로
떨어지게 하였으며,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석교 셋을 세워 뭍과 연결시키고 있다. 건물은 2층 누마루 양식인데
누하에는 돌기둥을 세웠고 누상에는 목기둥을 세웠다. 원래 누하 돌기둥에는 용의 조각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대원군의 경복궁 중창시에는
복원되지 않았다.경회루 기둥의 배치는 상부 하중을 받는 단순 기능의 차원을 넘어서 우주 질서의 구현이라는 의미에서 주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48개의 돌기둥이 마루를 떠받치고 있는 누하주<4>를 보면 외진<5>에는 높이 15.5자의 방주<6>를
세우고 고주<7>를 받는 내진에는 네모난 주초석 위에 원주<8>를 세웠는데 기둥은 민흘림<9> 양식으로 안정감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렇게 원주와 방주가 대비되어 나타나는 기둥의 설치는 근정전 회랑에서도 볼 수가 있다. 하늘(天)을 뜻하는 원형기둥과
땅(地)을 의미하는 방형 기둥으로 삼라만상의 조화를 꾀하고 있는 경회루는 도열한 기둥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음양의 표현을 살리는 의도적인 배치라고
볼 수 가 있다. 배치도 내측에 24개, 외측에 24개를 배열하여 전체 칸수를 36칸으로 구성하였는데 이것은 천지(天地)사이에 36天이 있어
우주질서가 운행된다고 하는 주역의 36궁을 뜻한다.3중으로 기획된 공간구성에서도 중심부에서는 3칸으로 구성해 천지인(天地人) 3재(才)를
상징하고 8개의 기등으로 8괘(卦)를 나타낸다. 두번째 공간에서는 12칸으로 구성해 24방(方)의 월절후(月節候)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우주
질서의 종합적인 표현이 치밀하게 구성된 건축물은 유례가 드문 것으로 사상의 형태적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건축적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경회루에 진입하는 돌다리 난간에 장식된 석상 중 불가사리로 보이는 동물상이 있다. 불가사리는 불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로서 화기(火氣)의
접근을 막는 상징물이다. 광화문 해치상과 함께 불을 막는 동물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화재의 피해가 빈번했음을 의미하며, 목조건물의 한계를
상상의 동물을 동원해서라도 이기겠다는 선대의 지혜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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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태전의 아미산은 후원의
대표격으로, 교태전에 딸린 벽돌 조적 굴뚝은 정원을 하나로 정리해 주는
조형적인 요소로서 작용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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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은 인공산으로 꾸며졌다. 경회루 건립시에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꾸민 산으로 아미산이라고
하였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산의 형상은 아니고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계단형 정원이다. 구성을 보면
남쪽에는 4단의 화계를 조성하여 각각의 단에 괴석, 방형 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용이 서린 석구, 화전장식의 굴뚝이 배치되고
매화렇除燭앵두레釜紡철쭉 등의 화목을 주위에 심었으며 단위로는 배, 뽕, 느티, 말채나무 등의 원림을 꾸며 두고 있다. 궁중 후원의 대표적인
격식을 갖춘 양식이다.이곳에 시선을 유도하는 특징적인 모티브가 되고 있는 육각 굴뚝은 단순한 굴뚝의 성격을 넘어 정원의 구성 요소라는 점이
특색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육각이 라고 하는 형태는 자연계에서 가장 안정성이 높은 밀집구조라고 이해되는데 벌집의 구조나 눈(雪)의 결정구조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이러한 안정감을 바탕으로 굴뚝의 각면에는 다양한 길상 문(紋), 문자들을 시문하여 시선의 유도와 함께 공간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이 굴뚝의 높이는 2.6m 가량이고 육각의 한면 폭이 88㎝ 정도인데 굴뚝 최상단에는 당초문, 그 밑으로는 용,
학, 박쥐 등의 문 양전이 배치되고 북쪽 면에는 길상문자를, 정남에는 용문전을 배치하고 있다. 굴뚝의 몸체를 이루는 붉은 벽돌과 문양전의 색채가
어울려 아미산의 선경을 구현하고 있다. 한편 궁궐건축에서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지붕 용마루를 양성으로 높여 마무리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데,
경복궁에는 왕의 침전인 사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지붕이 이렇게 건축되어져 있다. 이것은 곧 왕이 거처하는 곳은 이미 우주의 최고 정점이어서
군왕 위에 더 높은 곳은 없다는 의미에서 의도적으로 용마루의 마감재인 양성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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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을 올리지 않은 무량갓
양식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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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은 고종의 양모 조대비의 거처로서 경복궁 중건 시 흥선 대원군이 지었고 그후 불이나 한차례 중건을 거쳤는데
침전으로는 유일하게 남은 유구이다. 금남의 집, 여성의 공간답게 요소요소에 아기자기한 문양들이 장식성을 높이고 있다. 자신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도록 해 준 조대비에 대한 고마움을 흥선 대원군은 최고의 화려함으로 표현했는지 모를 일이다. 자경전 서쪽 담장의 문양은 대표적인
화문담의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구이다.이곳에 나타나는 문양을 종류별로 살펴보면, 문자 문양으로 萬, 壽, 福, 康, 寧이 나타나고 식물
문양은 소나무, 매화, 국화, 대나무, 모란, 연꽃 등이 나타난다. 이것은 장수와 복을 빌며 발전을 기원하는 문양들의 집합이라고 하겠다. 또한
담의 여백 부분에 표현된 만자문(卍), 아자문(亞) 등의 연속무늬들은 끊어짐 없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無始無終의 기원이며 빗살이나 격자 등으로
표현된 기하문양들은 벽사의 뜻을 담고 있다. 보물로 지정되어 비바람을 막기위한 차양까지 얻어쓰고 있는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 굴뚝은 벽돌로 문양을
짜맞춘 뒤 회를 발라 화면을 구성한 형식인데 담장에 부착된 채 한단 돌출된 특이한 구조이다. 이곳에는 수명장수를 나타내는 십장생 외에도 열매가
충실하고 줄기의 번식이 강한 석류렛Р?렵宕돌?으로 多男을 표현하고 있고, 석쇠문양.체문양으로 악귀가 걸려 통과하지 못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십장생도 상하에는 벽사상을 배치하여 강한 벽사 의지를 구현하고 부귀럽冒?多男)을 상징하는 박쥐문양을 돌출된 굴뚝 측면에 시문해 두고 있다.
이렇게 길상의 담장으로 둘러친 데다가 잡귀를 막는 상(像)과 거물망까지 쳤으니 자경전은 이제 청정한 공간이 되었고 그 속에 학과 사슴이 뛰놀고
뭇 십장생들이 서기를 발하고 있으니 선계의 정경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건축이라고 하겠다.그런데 이런 선경의 앞마당 계단 앞에 이해 할 수 없는
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증보산림경제를 보면 뜰에 나무를 심을 때 피해야 할 여러가지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먼저 나무를 심되 뜰의
가운데 심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뜰 가운데 나무를 심으면 집안이 곤궁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뜰 가운데 나무를 심으면 사각형 울타리
속에 목(木)자 들어 있는 꼴이 되어 빈곤할 곤(困)자의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대문에서 곧바로 보이는 위치에 나무를 심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것은 문(門) 속에 나무가 든 꼴이 되어 한가할 한(閑)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나무가 심어져 있지 않았는데 누가 나무를 심었는지 궁금해진다. 서울의 고궁 산책을 쓴 허균씨는 일인들의 짓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즉 조선
왕조의 정통성과 민족정기의 말살책을 위해 전국 명산의 혈에 쇠말뚝을 박고 조선의 정궁 경복궁 근전정 앞에 일(日)자형의 총독부 건물을 지음으로써
大日本의 형상을 의도하는 등 여러 계책을 꾸몄던 작태로 미루어 볼 때에, 가장 화려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자경전을 왜곡시킴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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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의 침전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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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상진원 샘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샘으로 옛날부터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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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과 민비의 산책터인 향원지 1876년에 고종이 왕비인 명성황후 민비를 위해 건천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중앙에 섬을 만들어 건립한 후원의 연지가 향원지이다. 연못의 중앙에는 인공섬을 조성해 가운데에 향원정(香遠亭)이란 정자를 짓고 섬을
연결하는 목조 다리는 취향교(醉香橋)라고 명명하여 그 정취를 높이었는데 고종 내외는 이곳의 산책을 무척이나 즐겼다고 한다. 후에 일인 낭인들에
의해서 민비가 시해된 곳이 향원지의 주관망지인 건천궁이었고 지금 그 터에 일인들의 만행을 기억하는 유적이 서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향원지
일곽은 민족의 아픈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는 유적지라고 하겠다. 이 곳의 서안에는 열상진원(烈上眞源)이라는 샘이 있다. 열상진원이란 차고 맑은
물의 근원이라는 뜻으로 향원지의 수원이 되는 샘이라는 말이다. 샘물이 연지에 흘러드는 모양을 보면 서류동입의 명당수 개념이 도입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멈춤과 머뭄,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거쳐 향원지로 물이 흘러드는데 그 일련의 과정이 간단한 구조 속에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길을 따라 나온 물이 일단 둥근 수조에 잠깐 멈추다가 원을 따라 반 바퀴를 돌아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판석 밑으로 숨어든다. 그리고 남쪽으로
다시 나타나 좁은 수로를 타고 연못에 들어가는 명당수를 이곳에 실현함으로써 영화 기원의 상징성을 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연지의 물은 다시
남쪽 호안의 구멍으로 넘쳐 향원지 남쪽 함화당과 집경당 땅 밑을 지나 나타나고 숨으며 서류(西流) 하다가 경회루 연지 동쪽 호안의 용두의 입을
통해서 연못으로 떨어진다. 열상진원에서 시작된 물의 흐름은 향원지를 거쳐 경회루에 이르면서 이중의 멸당수 구조를 나타내는 보기 드문 구성이다.
물 하나 흐르고 멈추고 다시 흐르는 현상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자 하였던 옛 선인들의 건축 사상이 단면적으로 표현된 조영 형식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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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원정은 평면이 육각형인
건물로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현존유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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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여행, 서울ㆍ경기편, 중앙일보사.1983
- 우리 역사 이야기 1. 2. 3. 조성오, 돌베개.
1993 - 서울의 고궁 산책, 허균, 효림. 1994 - 한국의 궁궐, 이강근, 대원사. 1989 -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1994 - 읽고 떠나는 국토 여행, 임덕순, 집문당 - 한국의 고궁 건축, 열화당. 1993 - 한국의 건축, 김봉열,
공간사. 1994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2. 청년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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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랑(廻廊)-정당(正堂)의 좌우에 있는 긴 집채로 통행 또는 부속실로 쓰임
2. 전각(殿閣)-임금이
거처하는 宮殿, 궁전과 樓閣 3. 답도(踏道)-계단, 답(踏)은 계단의 한 단으로 그 높이는 5인치이고 나비는 1척임. 4.
누하주(樓下柱)-다락집 또는 2층집의 아래층에 있는 기둥 5. 외진(外陣)-건물의 내외에 이중으로 기둥이나 벽이 둘러 쳐 있을떠 그
바깥쪽의 기둥열이나 벽체를 가리키며 안쪽의 기둥열 은 內陣. 6. 방주(方柱)-단면이 직사각형 또는 정방형으로 된 기둥 7.
고주(高柱)-보통 기둥보다 높게 된 기둥. 솟을지붕 또는 동자기둥을 겸하여 쓰이는 기둥 8. 원주(圓柱)-단면이 원형으로 된 기둥.
두리기둥. 9. 민흘림-기둥 밑둥에서 꼭대기까지 직선적으로 가늘게 된 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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