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1964년 유명한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세계 챔피언이 된 날이기도 합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단순히 권투를 잘해서만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 그가 왜 존경받았는지 생각해보시죠.
1964.2.25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고" 챔피언 되다
|
| 1964년 2월 25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홀에서 세계의 영원한 챔피언이 탄생했다. 그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얼마 후에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 경기 전 인터뷰에서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라고 말했고, 경기에서 꼭 그렇게 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 후"나는 왕"이라고 포효하다
WBA(세계권투연맹)/WBC(세계권투평의회) 세계 헤비급 통합챔피언 소니 리스턴은 무시무시한 완력을 가진 선수였다. 그의 주먹은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여 그 주먹에 한번 맞은 이는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1962년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후 내로라하는 도전자들이 도전했지만 모두 경기 초반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캐시어스 클레이도 1회전을 버티면 잘한 것이라고 말했다. 관중들은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지, 클레이를 연호하며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경기는 종이 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클레이는 특유의 독설로 상대를 자극하고 대중을 선동했다. “소니 리스턴은 허섭이야. 난 이 애송이 녀석을 화성 너머 목성까지 날려버릴 거야.” 경기 전의 기자회견은 한판의 쇼였다. 리스턴은 과묵했지만, 클레이는 끊임없이 독설을 뿜어내어 시선을 끌었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재미있는 비유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클레이의 작전은 적중하여 사람들은 이 경기에 더욱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
|
1964년2월25일, 초반에는 리스턴의 공격을 허용하던 알리(왼쪽사진)가 경기 뒤로 갈수록 우세함을 보여 결국 TKO승을 거뒀다.
오른쪽은 경기를 마치고 소니 리스턴을 향해 포효하는 알리.
드디어 종이 울렸다. 클레이는 빠른 동작으로 링 위를 춤추듯 돌아다니며 리스턴의 살인주먹을 잘도 피했다. 그러나 뚜벅뚜벅 다가오는 저승사자의 움직임은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었다. 리스턴의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지만, 링 전체를 쓰는 클레이의 작전에 휘말린 리스턴은 3회전 중반이 되자 지치기 시작했다. 클레이는 왼손 잽을 부지런히 날렸다. 경기를 길게 끌고 간 경험이 별로 없는 챔피언은 초조해졌다. 6회전이 되자 리스턴의 동작이 한껏 커졌고, 그럴수록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클레이의 주먹은 가벼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챔피언의 오른쪽 눈이 퉁퉁 부어 오르더니 마침내 눈두덩이 째지고 말았다. 6회전이 끝나갈 즈음 리스턴은 거의 그로키 상태였다. 그때 종이 울렸다. 1분을 쉬고 7회전 시작종이 울렸으나 챔피언은 나오지 못했다. 결과는 클레이의 TKO승. 클레이는 하늘로 펄쩍 뛰어오르며 포효했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왕이다! 세상의 왕이다!” 실로 그는 왕이었다. 입으로만 살아 있는 왕이 아니라 진정한 강자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새로운 챔피언은 챔피언의 대명사가 된다. 나이가 들면서 당연히 챔피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지만, 우리는 ‘챔피언’ 하면 여전히 클레이의 새로운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린다. 그가 ‘영원한 챔피언’이 된 것은 단순히 권투를 잘하는 강자여서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
|
세계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의 이름을 듣고 세계챔피언을 꿈꾸다
클레이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자존심이 센 아이였다. 그는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루스 클레이 주니어였다. 그가 살던 곳은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는 가운데, 그는 늘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생각했다. 그것이 자존심 강한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이다. 그에게는 남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형제는 버스비가 없었기 때문에 달리는 버스를 쫓아가는 내기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몸놀림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의 가난이 시킨 단련 때문인지도 모른다. 클레이가 권투에 입문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열두 살 때였다. 친구 조니 윌리스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밖에 세워두고 극장에 들어갔다 나와보니 자전거가 없어져버렸다. 클레이는 조 마틴이라는 형사에게 자전거를 훔친 사람을 잡으면 ”한방 먹이겠다”고 소리쳤다. 형사는 “한방 먹이는 것을 배우려면 체육관에 가라”라고 농담을 던졌다. 이 때 클레이는 탁 무릎을 쳤다. 차별대우 받는 흑인이 갈 길이란 어쩌면 권투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사각의 링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것 아닌가. 단순히 자전거 도둑을 혼내주려던 계획은 결국 큰 포부로 바뀌게 된다.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라디오를 켰는데, 마침 권투 중계방송 중이었다. 라디오에서 “우리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입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영화 <록키>의 소재가 된 그 경기였다). 클레이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훗날 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뼈를 통과하는 싸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말처럼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말은 없었습니다.” |
|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건만, 여전히 계속되는 인종차별
1960년 로마 올림픽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클레이(알리) |
|
| 클레이의 최대 강점은 집념이었다. 미치지 않으면 절대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음을, 달리 말해 미쳐야만 성공할 수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권투로 가득 들어찼다. 밥 먹을 때도 권투, 학교에 갈 때도 권투, 공부 시간에도 권투, 화장실에 앉아서도 그는 팔을 뻗으며 잽을 날리곤 했다. 권투 생각만 하다 보니 학교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지혜로웠다. 18세에 아마추어 선수로서 180승을 올린 그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의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다. 올림픽에서 클레이는 발군의 기량을 뽐내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클레이는 이제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클레이가 금의환향하자 고향은 축제분위기였다. 그의 집 현관은 성조기로 뒤덮였고, 페인트공인 아버지는 계단을 빨간색과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칠하여 축제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랑스런 아들을 환영하기 위해 이웃들을 모아놓고 미국 국가를 불렀다. 클레이는 한동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
|
영광은 잠시였다. 어느 날 클레이는 친구 로니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햄버거를 먹기 위해 잠시 멈췄다. 그 식당은 백인들이 주로 다니는 곳이었지만, 금메달리스트인 자신은 국가적인 영웅이 아닌가. 그러나 식당에 들어선 순간 클레이는 싸늘한 눈초리를 느끼며 움찔했다. 백인 불량배들이 노려보면서 욕설을 퍼붓자, 식당 주인이 큰소리로 “난 깜둥이한테는 음식 안 팔아!”라고 말했다. 클레이는 핵 주먹에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또 한번은 불량배들에게 금메달을 뺏길 뻔한 사건도 있었다. 불량배 두목이 클레이의 금메달을 뺏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을 물리치고 난 클레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하이오 강으로 갔다. 푸르고 넓고도 흑백을 차별하지 않는 강물에 클레이는 미련 없이 금메달을 던져버렸다.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리라 결심했다. “내가 로마에서 가졌던 ‘미국을 대표한다’는 환상은 그때 사라졌습니다. 나는 흑인으로서 멸시 받고 있는 켄터키의 고향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지난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그는 지금까지 미국인이 되기 위해 쌓아온 모든 성과를 아예 없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
|
신념을 지킨 대가로 챔피언 벨트는 물론 모든 것을 잃다
금메달까지 버린 마당에 클레이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해야 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일찌감치 꿈꾸었던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루이빌 스폰서 그룹과 계약을 맺은 뒤 프로로 전향했다. 프로가 된 이상 아마추어처럼 얌전한 권투를 구사해서는 안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레슬링 선수 고저스 조지의 인터뷰를 듣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놈을 죽여버릴 거야. 두 팔을 확 뽑아버릴 거야. 그 자식에게 지면 링을 기어서 내 머리털이라도 잘라버릴 거야. 하지만 그럴 리 없어. 내가 세계에서 제일 강하니까.” 이 말을 듣고 클레이는 그 경기를 꼭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경기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떠벌리는 선수가 이기는 것뿐만 아니라 망신당하는 것까지를 재미있어하는 것이었다. 열광하는 사람들 틈에서 클레이는 프로 선수로서의 방법론을 터득하고 있었다.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나간 클레이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고, 소니 리스턴과의 타이틀전에서 그는 모든 방법론을 써먹었다. |
|
그러나 우리가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아니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는 이제 펼쳐지게 될 그의 시련과,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신념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끈기와 집념 때문이다. 리스턴에게 통쾌한 승리를 거둔 클레이는 정신적인 스승 맬콤 엑스처럼 자신의 이름을 ‘캐시어스 엑스(X)’라 부르기로 했다. 미국인들이 노예에게 부여한 성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그는 당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슬람교의 분파이자 운동조직인 이슬람국가운동(Nation of Islam)에 참여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것이다. 이슬람국가운동의 최고지도자인 엘리야 무하마드는 그에게 더한 영예를 주었다. 그것은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이었다. 엘리야 무하마드가 당시 이슬람국가운동의 실력자 맬콤 엑스에게도 부여하지 않은 이름을 그에게 주었으니, 클레이가 얼마나 큰 특혜를 받았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클레이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이 ‘무하마드 알리’로 바뀌었음을 알렸다.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습니다.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혼인할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택하는 길이 어떤 건지 알고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압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
| 9개월 갓 지난 라일라와 세 살 된 큰 딸 한나와 함께(1978년) |
|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가 알리를 영원한 챔피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알리가 백인사회나 미국이라는 국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최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 선언이 가져올 시련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알리가 백인들의 적인 엘리야 무하마드와 맬콤 엑스의 친구임을 안 이상 백인사회와 정부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1964년 이후 알리는 이듬해 소니 리스턴과의 재경기에서 1회 KO승을 거두는 등 3년 동안 모든 도전자들을 물리쳤지만, 더 무서운 적과 싸워야 할 운명이 닥쳐오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알리를 베트남전에 보내기 위해 그에게 징집 영장을 보냈다. 알리는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고 무시하지 않소. 내가 왜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야 한단 말이오?” 알리의 말이 신문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증오의 편지와, 협박 전화가 빗발쳤다. 1967년 4월 28일 알리는 징병위원회로부터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그 대가는 너무도 혹독하여, 그는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겼고, 선수 자격정지를 받았으며, 법원에 기소되었다. 법정에서는 5년의 실형을 언도 받았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챔피언이 갑자기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운명은 언제나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에게 실질적인 수입이 없어지자 주위의 사람들도 떠나고, 엘리야 무하마드는 종파의 칙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단에서 제명했다. |
|
32세에 조지 포먼을 누르고 다시 챔피언에 오르다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는 법, 참고 견디면 기회는 오는 법이었다. 반전여론이 높아지면서, 대법원은 알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어쩌면 그것은 알리에게 법정이 ‘당신은 영원한 챔피언이오’ 하고 선고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3년 세월을 법정에 불려 다니며 권투를 못한 동안 그는 벌써 30대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힘든 운동을 접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는 다시 글러브를 끼었다. 1971년 조 프레이저와의 재기전에서 패했지만 알리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이렇게 끝내게 되면 자신은 ‘주둥이’만 살아 있는 ‘떠버리 복서’가 된다고 생각하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생애 첫 번째 패배였지만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았고, 3년 후 결국 프레이저를 누르고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WBA/WBC 통합챔피언 조지 포먼을 누르면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다. 1974년 10월 30일, 막강한 주먹의 혈기방장한 26세의 조지 포먼과 전성기를 보낸 32세의 알리가 자이르의 킨샤사에서 맞붙었다. 정말로 불꽃 튀는 접전이었다. 알리는 인파이터인 포먼의 저돌적인 공격에 계속해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8회에 작렬한 카운터펀치는 포먼을 조용히 잠재웠다. 알리의 쾌속행진은 계속되었지만, 해가 갈수록 그의 권투인생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이후 1977년까지 타이틀을 지킨다. 1978년 레온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뺏겼다가 다시 탈환하지만, 1980년 래리 홈즈에게 지면서 타이틀을 영원히 잃게 되고, 1981년 11월 12일 트레버 버빅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을 끝으로 글러브를 벗는다. 통산 56승 5패, 20년 동안에 세운 이 기록에는 그 누구의 것과도 다른 시련이 스며 있었다. 또한 시련을 달게 받았던 신념이 함께했기에 알리를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권투선수이자 최고의 스포츠맨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권투잡지 <링 매거진>은 알리를 ‘영원한 헤비급 1위 선수’로 선정했고,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20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
|
파킨슨 병에 걸렸어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성화를 점화하다
알리는 파킨슨 병에 걸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애들란타 올림픽 성화 점화자로 나서 감동을 주었다.(1996년) |
|
| 1996년 우리는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우리의 챔피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파킨슨 병에 걸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성화를 점화할 때 우리는 옛날의 그의 모습을 상기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인으로서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했다. 장애는 권투를 오래 한 결과였으니 그 역시도 알리의 열정이 낳은 산물이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용기를 얻었고, 알리 또한 장애인을 돕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과거의 알리를 생각해본다.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던 알리는 자신이 미국의 대표인 금메달리스트가 아님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다. 1990년대에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리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전적으로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달라진 것이 있다면, 흑인으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알리라는 권투선수의 역할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알리에 대해 할 이야기는 아직 무궁무진하다. 그 이야기를 다 한다는 것은 알리의 달변을 이용한다 해도 쉽지 않다. 아쉽지만 여기서 줄인다. 어차피 현재진행형인 그의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그가 회고록에서 한 말을 마지막으로 새겨본다. “챔피언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갈망, 꿈, 비전이 그것이다. 당신은 온 힘을 발휘해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라야 한다. 당신은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기술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
|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알리에 관한 책은 외국에서는 많이 나왔지만, 한글로 번역된 것은 별로 없다. 마이클 만 감독,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알리>(2002)는 자존심 강하고 고집스러운 알리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위 글의 대화나 인용문은 이 영화와 아래 두 책에서 빌렸음을 밝힌다. 마이크 마커시의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차익종 옮김, 당대)는 단순히 권투선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권투선수는 압도적으로 흑인이 많다. 태생적으로 불리한 입장의 흑인이 성공하는 길은 스포츠 분야가 가장 유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 분야에서도 |
|
| |
백인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지 않은 흑인은 성공가도를 달리기 쉽지 않다. 무하마드 알리는 백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따르지 않고도 성공한 최초의 스타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단순히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권투를 통해 흑인들이 어떻게 저항하고 자아를 성취했는지를 보여준다. 진 랜드럼의 <신화가 된 사람들>(양영철 옮김, 말글빛냄)은 스포츠 스타들의 삶을 통해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신화 시대의 영웅이 주로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나 아르주나 같은 전쟁영웅이라면, 우리 시대의 영웅은 스포츠 스타라고 볼 수 있다. 스포츠 분야는 어느 분야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승부에 따라 운명의 명암이 엇갈리게 된다. 스포츠 분야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것도 최고의 스타가 된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뭔가 특별한 것에 대해 각 선수들의 특징을 살려서 설득력 있게 부각시키고 있다. |
|
- 글 차창룡 / 시인, 문학 평론가
- 글을 쓴 차창룡은 1989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시를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제1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고시원은 괜찮아요>,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 등 다수의 시집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