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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수 저
면수 368쪽 | 사이즈 150*210 | ISBN 979-11-5634-528-2 | 03810
| 값 18,000원 | 2022년 11월 20일 출간 | 문학 | 역사소설 |
문의
임영숙(편집부) 02)2612-5552
책 소개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영토 간도!
간도를 되찾자
일본은 집요하게 독도를 찝적거리는데 우리는 왜 우리 영토 간도를 내버려두는가.
오늘도 간도의 영혼 이중하는 지하에서 답답해 한다.
간도되찾기 운동본부처럼 수년 동안 우리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우리가 다시 되찾아야 할 간도
이중하 선생은 1846년에 태어나 1882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안변 부사로 재직하던 1885년 토문 감계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제1차)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1887년에 재개된(제2차) 조선 측 협상대표를 지냈다. 그는 불리한 국제정치 상황과 청나라의 강압적인 요구 속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국익을 지켜낸 외교관이었으며 뛰어난 협상가였다.
당시 간도 지역에는 조선인 수가 늘어나서 청나라와 마찰이 빈번했다.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청나라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함으로써 그곳에 사는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국경회담을 요청했다.
이중하 선생은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가 선택한 길은 백성들을 살렸고 하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대업을 이루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용기 있게 나서 역사의 운명을 바꿔놓았으니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한 인물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것은 애국심과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지킨 한 외교관인 이중하 선생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라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한 국가의 영토를 지키고 민족을 살린 이중하 선생은 서양의 개입에 의해 중화적 세계관에서 탈피, 아시아 세계관이 성립되는 시기에 외교적 결단성으로 관료의 정체성을 깬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하 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간도 땅을,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것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당시 일본이 간도를 차지하고 청국에게 팔아넘긴 간도야말로 이 땅의 후손들은 훗날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저자소개
저자 정권수 목사는 대한민국 국가 유공자로 자는 곤지, 호는 향사, 본관은 봉화, 삼봉 정도전의 19대 후손으로 본적 서울, 강원 고성에서 1946년(병술년) 8월 18일 출생했다.
1968년 월남전에 주월태권도교관단 교관으로 참전하여 참전기장, 종군기장, 월남공로 표창(방증록 월남군 제18사단장) 대한민국 무공포(훈)장(제1593호 대통령 박정희)을 받았다.
1972년 바르셀로나 대학교 서반아과에서 수학하고, 197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사회학과에서 수학했다. 미국 The Reformed Unoversity에서 신학(BA)을, 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를 하고 Reformed Bible College & Seminary 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D. Min)을 받았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해외동포 자원봉사 통역으로 참가하여 올림픽 기장(체육부 장관)을 받았다.
2006년 중남미 온두라스 선교사로 온두라스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온두라스 태권도 올림픽 대표 코치를 역임하고 온두라스 사회봉사상(Mencion Honoroifica)을 합참의장으로부터 받았다.
2016년 제17기 대한민국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로스앤젤레스 협의회)으로 활약했다.
2018년 아프리카 가나(서부)와 에티오피아(동부)에서 의료 선교 봉사를 하였다.
2022년 간도되찾기 운동본부 북방민족나눔협의회 홍보대사로 활약하였다.
제6회 에피포도 문학 신인상. ‘결혼 소동’, ‘장미를 드립니다’ 2002.
제12회 뉴욕 문인 신인상. ‘지난여름’ 2004.
차례
prologue 4
1. 분쟁의 시작·백두산정계비 16
2. 어명-이중하의 등장 27
3. 삼전도 비문 앞에서 32
4. 과공비례-과잉 충성 38
5. 남한산성에 올라 43
6. 수어장대-무망루 47
7. 현절사-충신들 앞에서 51
8. 안변 부사-이중하 62
9. 이중하는 살아있다 78
10. 백두산정계비 84
11. 탄천 서쪽 마을 수서동 88
12. 대원군의 선택-길 93
13. 명과 후금의 중립 외교 98
14. 독선과 아집 사이에서-광해군 104
15. 임오군란-대원군 집정 107
16. 갑신정변-3일천하 117
17. 군란의 격화 121
18. 대원군의 섭정 128
19. 토문 감계사 이중하 131
20. 제1차 회담 143
21. 장계-조회 150
22. 공동 감계 보고서 163
23. 청국의 자문-조회 171
24. 제2차 회담 182
25. 피를 말리는 싸움 197
26. 장계-제2차 감계 보고 209
27. 발령-조정으로 올라간 이중하 215
28. 전등이 켜지는 날-경복궁 225
29. 삼정문란-암행어사 237
30. 상소-강위를 추천하다 251
31. 동학농민군-청주 병영에서 256
32. 대구부 관찰사-이중하 267
33. 임오 유월 일기-신사 유람단 277
34. 비운의 영친왕 290
35.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295
36. 을미의병 302
37. 아관파천 307
38. 갑오경장 315
39. 국시 유세단 322
40. 을사늑약-십일야방성대곡-장지연 330
41. 이등박문을 죽인 안중근 338
42. 통곡-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가 된 이유 343
43. 이중하의 죽음-유언 356
44. 송덕비-이중하 364
출판사 서평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간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2013. 10. 외교통상부는 이중하 선생을 조선 후기 최고의 외교관으로 선정 발표했다. 이중하 선생(1846~1917)은 조선 후기에 청나라와 국경회담을 진행했던 대한민국 외교를 빛낸 인물이다.
이중하 선생은 1846년에 태어나 1882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안변 부사로 재직하던 1885년 토문 감계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국경 회담(제1차)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1887년에 재개된(제2차) 조선 측 협상대표를 지냈다. 그는 불리한 국제정치 상황과 청나라의 강압적인 요구 속에서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국익을 지켜낸 외교관이었으며 뛰어난 협상가였다.
당시 간도 지역에는 조선인 수가 늘어나서 청나라와 마찰이 빈번했다. 청나라는 간도의 조선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또한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청나라 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함으로써 그곳에 사는 자국민을 보호하고자 국경회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정세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 원세개가 마치 총독처럼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그러니 조선 정부의 뜻대로 국경 회담이 진행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청나라는 이 기회에 두만강 국경선을 분명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
회담에서 이중하 선생은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되어 있는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을 주장했고 청나라 대표는 두만강 상류 물줄기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서두수 국경론을 제기하여 합의점에 달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이중하 선생은 청나라 대표의 생각의 틀을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 결과 청나라 대표는 완전히 조선 측 주장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자기 논리의 맹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이중하 선생은 백두산정계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비면에 봉지글자는 즉 강희 성조(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성지입니다. 훤히 빛나는 새김이 옛날(천고)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정계비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수사학에서 강조하는 생각의 틀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접근하자면 청국 대표는 먼저 강이 있고서 뒤에 비석이 있었던 것이라는 말로 산천을 국경으로 삼는 국경 획정의 일반론을 통해 이중하 선생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중하 선생은 청국 대표의 논리체계를 청나라 황제에 대한 봉권적 충성심의 기준으로 공략했다. 정계비에 새겨진 봉지라는 글씨 하나 때문에 정계비는 단순한 비석에서 황제의 의사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고 이후 청국 대표는 정계비의 내용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순간 이미 논쟁의 중심에 이중하 선생이 서게 되었고 비록 결론이 내려지지는 못했지만 회담은 이중하 선생의 리더십에 따라 자행되었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강토는 축소할 수 없다
1887년 재개된 국경 회담(제2차)에 있어서 주변 여권은 이중하 선생에게 불리했다. 무엇보다 이중하 선생은 이전의 논지였던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은 더 이상 국경으로 주장할 수 없었다. 고종이 청나라로부터 영토 확장을 시도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중하 선생은 회담에서 두만강 지류인 홍토수를 국경으로 삼겠다는 논지를 폈고 청국 대표는 홍단수를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두만강 상류의 물줄기는 북쪽으로부터 홍토수, 석을수, 홍단수, 서두수가 있는데 과거 1차 회담에서는 이중하 선생은 두만강 아닌 송화강 물 물기를 주장했고 청나라 대표가 서두수를 주장한 것을 비교할 때 외면상으로 양국은 견해 차이를 많이 좁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협상이 결렬된 것은 외교적 실패로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이 과정을 생각의 틀로 풀이할 때 이중하 선생의 협상 리더십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청나라 대표는 백두산정계비에 명기된 토문강을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는 이중하 선생에게 이제 거꾸로 조선 국왕에 대한 충성의 과정에서 두만강 국경 인정을 강요했다.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보고 뒷일을 도모함을 구하지 않으면 마땅히 국가에는 끝없는 환란이 있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우환이 있다는 말로써 양보를 종용하는 청나라 대표에게 이중하 선생은 국경문제에 임하는 신하의 자세를 강조함으로써 약소국가의 협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청나라 대표의 틀(Frame of Mind)을 완전히 깨어 버렸다.
먼저 이중하 선생은 단호한 주장으로 국경 획정은 회담의 대상이 아님을 천명했다.
“3백 년 간 원래 정한 경계는 본래부터 전과 같은데 어찌 한 마디로 분별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청나라 대표가 이중하 선생을 윽박지르며 타협을 종용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강토는 축소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국경 회담에 임하는 신하의 입장을 피력했다. 여기에 청국 대표의 생각이 흔들렸다. 영토 문제 있어서 양보한다는 것은 신하된 자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는 기초 마련
이제 이중하 선생의 마음을 안 청나라 대표는 모두 상대방의 주장에 양보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회담 성과를 논하기 전에 이중하 선생의 이런 결사적인 노력은 조선인들이 터를 잡고 북간도 지역에 일정 기간 청국 관원들이 함부로 들어 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이중하 선생의 관력에서 토문 감계사와 아산 청진 영접관 지방의 선무사와 안핵사에 임용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토문 감계사와 아산 청진 영접관은 청국 관원을 상대하는 직책이 없으므로 외교관의 자질이 없으면 수행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당시 조선과 청군간의 외교관계가 대한제국 이후 근대적 외교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사대관계에 따른 황제국과 제후국의 외교였다는 점에서 볼 때 이중하 선생에게서 근대적인 외교관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중하 선생이 청국 관원을 상대하는 모습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합리적인 자료를 제시하여 상대를 설득하려는 것을 볼 수 있기에 그가 청국을 상대하는 외교 담당자로 임명된 이유라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간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1910년 일제의 강제적인 대한제국 병합이 이루어지자 이중하 선생은 일제에 대항하며 대한제국을 지켰다. 대부분의 대한제국의 황족과 관료들이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따라 친일 혹은 협력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에 반해 이중하는 단번에 일제의 회유를 거절했다.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로서 한일합방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반대한 그는 아들(범세)과 함께 고향인 양평으로 낙향하여 1917년 72세의 나이로 졸서하였다.
이중하 선생은 죽었지만 지금 그는 살아있다.
그의 무덤 상석에는, 유한정헌대부 장예원 경원경완산 이공중하 지묘 배정부인 창령 조씨 부좌라고 하여 일제 강점기에는 유한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 범세의 무덤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유한의 한은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중하 선생은 자신의 무덤에 대한제국의 관료였다는 것과 일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새기게 한 것이다. 일제시기 대한제국의 관료는 물론 지방 유림들의 무덤에서도 유한이라는 글씨는 보기 어렵다. 이중하 선생이 일제 통치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중하 선생은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가 선택한 길은 백성들을 살렸고 하늘은 결코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대업을 이루는 것은 혼자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용기 있게 나서 역사의 운명을 바꿔놓았으니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한 인물의 인생과 업적에 대한 것은 애국심과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지킨 한 외교관인 이중하 선생의 삶을 되돌아본다. 나라가 처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한 국가의 영토를 지키고 민족을 살린 이중하 선생은 서양의 개입에 의해 중화적 세계관에서 탈피, 아시아 세계관이 성립되는 시기에 외교적 결단성으로 관료의 정체성을 깬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하 선생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간도 땅을, 일본이 차지하고 중국에 넘겨버린 것을, 그 땅을 되찾기까지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당시 일본이 간도를 차지하고 청국에게 팔아넘긴 간도야말로 이 땅의 후손들은 훗날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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