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사문(逐巳文)」
1.
무릇 세상에 형체를 가진 생명의 탄생 과정과 모습은 태(胎)와 난(卵)과 습(習)과 화(化)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중에는 종(種)과 족(族)과 류(類)를 따라 혹은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땅을 달리거나 기어 다니기도 하며, 혹은 물속에서 헤엄치고 살아가는 양태를 보임은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더러 용(龍)과 봉황(鳳凰)이나 거북이 기린(麒麟)처럼 헤엄을 치고 기고 달리며 솟아올라 날기도 하는 신이(神異)한 영물(靈物)이 없는 것도 아니나, 대부분은 수심과 지상과 공중의 어디 한 곳을 위주하여 태어나고 삶을 영위하기 마련이다.
비록 종자의 형체 모양과 대소 규모에 따라 수명장단(壽命長短)과 지우청탁(智愚淸濁)의 상하우열(上下優劣)의 차이는 있겠으나, 저마다의 생명으로 더 살려고 하는 강렬한 욕구 의지와 그러한 일회적인 삶의 소중한 가치의 실현과 생명체 간의 평등한 의미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한 것이다.
하늘을 나는 것에는 날개와 뾰족한 부리와 억센 발톱이 있고, 땅위를 달리는 것에는 뿔과 날카로운 이빨과 강력한 발톱이 있으며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에는 저마다 알맞은 부레와 갈퀴와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외로 온 몸 전체를 끌며 땅위를 기어 다니는 것들이 있으니 뱀과 지렁이와 송충이 따위들이다. 생김새도 가늘고 길쭉한데다 괴상하고 징그러워 보는 이들마다 놀라고 두려워한다. 특히 그 중에는 독을 가지고 있는 비얌이 종종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하므로 더욱 겁나하고 극도로 미워하니, 사갈시(蛇蝎視)라는 말이 어찌 우연히 있게 된 것이겠는가!
2.
어제 밤늦은 시간에 네가 현관 앞 자연석 계단 사이에서 몸을 드러내어 내 눈에 뜨였구나.
내 일찍이 너희 동류가운데 하나가 작년에도 그곳에 나타났었다는 전말과 처치지사(處置之事)를 당주(堂主)로부터 대략 들은 바가 있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밤 너를 본 순간 적잖이 놀란 것이 사실이다.
네 비록 독이 없으며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는 하나, 네 형상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이미 너를 한번 보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며 꺼리고 겁내며 피하니 너도 역시 그 점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저 연약한 부녀자에게 있어서는 그 놀람의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니, 너로서도 어찌 심히 부끄럽고 민망송구(憫惘悚懼)하지 않으랴!
네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쌓아 온 업장업보(業障業報)가 지중(至重)하여 금생에도 또한 그런 형체의 몸을 받았구나. 그동안 겨우내 땅속에서 웅크리고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가 경칩(驚蟄)이 지나고 날이 따스하니 드디어 그 길쭉한 몸을 소리도 없이 드러냄이 네 생래의 천성인 줄을 아는지라 결코 괴이한 일은 아니다만, 어째서 하필 여기더란 말이냐?
3.
너희 부류 가운데 네 만의 특별한 이름이 분명히 따로 있을 것이다마는 내 알 수가 없으니, 그대로 너라고 부르겠다. 이제 너를 향하여 내가 할 말을 들려 줄 것이니 너는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잘 듣고 즉시 따르기를 바란다.
먼저 네가 무슨 인연과 까닭으로 여기에 와 있는지를 내가 모르고 네게 묻지 않으려니와 너는 도대체 앞으로 어찌할 참이더냐?
너는 마땅히 계속하여 여기서 살고자 한다면 이후 주야(晝夜)와 절기(節氣)를 막론(莫論)하고 일체 형상을 숨기고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갑갑하고 억울하다면 너는 마땅히 이곳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살아야 할 것이다.
여기는 거룩한 성인이 상주하는 곳이고 성인의 길을 따르는 수행자의 처소인지라 네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니 즉시 물러가도록 하여라.
4.
네 만약 내가 지금 이르는 말을 아니 듣고 이후로도 몸을 드러내어 청정한 도량을 찾는 단월(檀越)들을 놀라게 하거나 혹은 자그마한 해악을 끼치기라도 한다면 내 결단코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여러 가지이니 당장 저 영특하고 용감한 보리(菩提)를 시켜서 너를 물어 찢어버릴 수도 있겠고, 또는 땅꾼을 불러다 너를 떠 담아 병속의 알콜에 담가 절여놓거나, 혹은 팔팔 꿇는 뜨거운 물에 삶아 내어 껍질을 벗겨 낼 수도 있으리니 네 어찌 두렵지 않겠느냐? 뿐만 아니라 네가 정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버팅기로 한다면 그보다 더한 주벌(誅伐)을 내릴 수도 있으니 너는 과연 어찌할 셈이냐?
네가 성인의 자비도량(慈悲道場)에서 해탈 법문을 들어 질시(嫉視)받는 미물(微物)로서의 괴로운 과보를 벗고자 한다면, 마땅히 징그러운 몸을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숨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굶주려 죽음을 맞을지라도 더 이상 개구리 등을 잡아먹는 살생도 즉시 멈추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발뒤꿈치이겠는가!
그리하여 온 정신과 지각을 집중하고 몰두하여 성인의 말씀에 귀의하여 기필코 다음 생을 태생(胎生)으로 전환하여 장차 저 삼계화택(三界火宅)의 윤회 고통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차마 어떠한 위해(危害)를 가하지 아니하고 순리로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또 네가 앞으로 처할 좋은 방도를 제시하였으니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네 슬기로운 선택과 판단이 네 몸을 종신토록 건사하는 호신부(護身符)가 될테니 망설이지 말고 속히 결정하여 아뢰도록 하라! 즉시 네가 원하는 대로 처리하여 주리라!(山_20120524)
첫댓글 마치 당나라 한유의 고문을 읽는 기분입니다. 뱀보고 개구리를 잡아 먹지말라고 한 것은 지나친 주문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