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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시간의 시육☆]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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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육]
이관묵 시집 / 현대시시인선 131 / 한국문연(2013.05.15)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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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육
이관묵
시간, 네놈 거기 꿇어앉거라
시간이라는 동물, 평생 모시다가 퇴직하자 끌어다 기르는 애완동물, 몸 부드럽고 따듯한 몸 쓰다듬다 재운다
이놈이 물어오는 한낮의 고요함을,
이놈이 물어다 주는 저녁을,
혼자 몇 잔 따라 마시다가 머리ㅏ통 내쫓고 또 몇 잔 하다가 벌렁 누워서 가슴으로 크게 안아본다
오, 늙고 쇠약한 짐승
나는 저놈의 종이었다
등짝으로 져 나른 새벽안개와 밤바람 고스란히 바치고도 풀 죽은 빨래처럼 나폴거리는 종이었다
저놈의 식탁에 바쳐진 손목과 신고 다녔던 길목
‘저놈에게 잔치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목 졸린 꽃바구니’
저놈ㄴ에게 물어뜯긴 노래와 춤, 야단맞은 무릎
저놈의 일생에 파묻힌 나의 평생
옛다, 하루 종일 구름이나 물어뜯거라
네놈 싫어 집 나간 언덕길 만나 한잔하고 오마 얼마 전 내쫓은 전화번호 들어오거든 없다고 해라 빈집 같은 마음 재워 놓았다
잘 지키거라
흰 철쭉꽃
이관묵
흰 철쭉꽃이 둥글게 피었다
그 앞에 오그리고 앉은 저 노인
빗돌 같다
여기까지일세
자네와 동행한 길
여기서부터 나 혼자 가야 하네
흰 글씨가 글썽글썽 피었다
마음 세놓다
이관묵
텃밭 같은 하루
햇살 뿌려 쟁기질해 갈아엎고
물소리 하늘빛 곳곳에 파종해 놓고
한 바구니 뜯어다 버무려도 먹고
슬슬 빈주먹 데리고 나가 술도 마시고
대취해 주정하는 둑길 쥐어박다가
하루쯤 몸 안에 깊이 들어앉아
혼자 만개滿開하고 싶은 마음
내가 나로 만개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
쪼들려 세놓았다
꼬박꼬박 월세로 들어오는 시간
연탄재 같은 시간
파먹고 산다
마음 몰래 벚꽃 다녀간 흔적
모래의 잠
이관묵
어제는
흰 눈 맞은 계룡산 연봉 아래서
삼십년 전 제자들과 밤새 소주잔 높이 들었고
봉우리들 곁에 내 뜻 없는 삶을 꿇어앉혔다
허옇게 마른 개울바닥에 마음 부딪치다가
바닥에 바싹 말라붙은 갈팡질팡한 물길로도 닿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잠 덮어주고 혼자 거실로 나와 나를 따라 마신다
아까징끼 번진 상처처럼 피어 있는 불빛들
캄캄한 삶 기슭에 돋아난 부스럼들
저들을 무릎 아래 둘러앉히고 도대체 연봉은 내게 또 어떤 하문下問을 놓는 건가
나는 또 저들에게 어떤 불빛으로 마주해야 하는 건가
퍼먹다 남은 안주냄비처럼 나는
식어버린 나를 삶 바깥으로 내 놓는다
옹기 항아리를 추억함
이관묵
옛집 뒷마루 60년이 넘은 옹기 항아리 바라보며
오동꽃 환하던 봄날 삶이 비좁고 옹색하다고 내가 도망치며 내동댕이쳤던 나를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습한 구석이 나 자신이라도 되는 듯, 생각에 고적하고 우중충한 뒤꼍이 묻혀 있기라도 한 듯, 입 뭉개고 생각 파묻고 자신이 새나가지 않도록 꼭꼭 덮어 놓은 듯, 꼭 옹기 항아리를 빼닮았다
그렇다 나는 나에게 처박혔다
나는 나를 오래 비워 두었다
텅 비워 두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고적함에 빗살무늬를 쳐가며 황톳빛 시간을 삭혔다
비우는 일이 나를 견디는 일이었고 생각 자욱이 쏟아놓은 백지에 석유 등잔불 내거는 일이
나를 밝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거다 그리하여
나는 낮보다 밤이 길었다
어둑하게 물드는 삶이 오히려 환하고 가벼웠다
나는 나의 은둔처, 매일 마음 꿇고 기도하는 수도원, 고사목 같이 침침한 시간들이 풍화하는 유배지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크기만큼 무거웠고 내가 사랑하는 만큼 배반했으므로 나는 나에게 주저앉아 등 뒤로 두근거리는 저녁들을 보여주며 자꾸만 캄캄해지고 깊어졌다
결국 나는 내 자신이 절벽이었고 가시였으며 내가 최종 도착해야 할 집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직도 나는 내가 춥다
먹돌
이관묵
찾아뵈려고
문 두두렸더니
열어 주신다
한참을 물그러미 내다보시다가
혀 끌글 차며
도로 문 닫아걸으신다
쾅!
할喝
이관묵
깊은 산
암봉에 은둔하고 있는 저 산비
몰래 찾아뵈러 갔다
만행 갔다 돌아온 구름스님이
지팡이로 냅다 후려치자
산을 박차고 뛰쳐나간 줄 모르고
몸이 멀다
이관묵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몸 동그랗게 말고 있는 벌레
몸이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몸은 집이다)
저 미물도
임대기간 만료되자
집 지워 놓는다
삶에 대항했던 헛발질들
덮고 자던 불면들
맨발에 맞섰던 맨발들
값없는 마음들
세간 모두 처분했다
바람에 헹구어 말리는
텅 빈 김칫독 같은 오월
물방울꽃
이관묵
삭은 나뭇가지에 물방울 꽃 피었다
마치 미음 내쫓고, 단단히 걸어 잠근 캄캄한 내 몸에 등등을 걸어 놓은 듯, 제 뜻대로 살지 못해 휘어진 뉘우침들, 끝내 붙들지 못하고 놓쳐버린 초록의 장식들, 마음 깎아내고 허공에 뚫은 길들, 오지에 망명해 들어와 귀 틀어막고 사는 거울, 이를 환하게 비추는 물방울 꽃
물방울로 인해 환해지는 것들, 물방울로 인해 비로소 형체가 드러나는 무거운 머리통이며 억센 손목들, 어둠침침한 종교들, 오를 때마다 방향이 뒤바뀌던 층계들, 검은 입들, 죄다 내쫓았다 환하다
많은 이들이 나를 빌려다가 읽었다 저녁보다 들판이 더 많은 페이지에 도착하자 엉망진창인 마음에 밑줄을 쳤다 그게 싫어 나는 나를 덮어버렸다 그 후부터 쉽게 어두워지고 일찍이 공중을 만났고 온종일 구름만 써내려갔다 곁에 물방울 환하게 켜놓고서.
하늘을 잔뜩 칠해 놓은 하루, 자신에게 은둔해버린 길, 자신을 들이키고 시들시들 사라진 길 환히 비춘다 어디에도 마음 묻히고 싶지 않다고. 무음無音이란 이런 것이라고.
동백꽃 빈소
이관묵
그분이 가꾸다 캐간 시간
쓰지 못하고 어질러 놓은 시간
동백꽃이 지고 있다
길바닥 뜯어다 제단 차리고
몸 몇 송이 켜 놓고
그 양반 성깔이 차나무과에 속했다지
질퍽한 세간엔 발 디딘 적 없다지
온난다습한 삶들이 도란도란 피어 있다
마음 몽당 쓰고 가라고
마음 함부로 번식하지 말라고
‘툭’
꽃송이가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물살
이관묵
공원 모퉁이
노인이 새에게 모이를 던져준다
늙은 여자는 좌판에 졸음을 벌여 놓았다
긴 장의자는 벌써 몇 시간째 헌 누더기의 사내가 묵고 있다
한쪽에선 떼로 몰려든 극빈층층의 입들이 줄서서
검은 등짝을 퍼먹고 있다
개망초 꽃들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는 허리가 휘었다
대량생산된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온 퇴적물들
한동안 들여다보지 못했다
나에게 처박히는 데 평생을 탕진한 나
시 좌판
이관묵
싸게 드릴 테니 가져 가세요
시골 장날 좌판에 끌려 나온 허연 시들의 하품
언 흙이 재배한 시
어차피 제 값 못 받을 시
불량품의 시
몇 뿌리 집어 들었다
시 농사 갈아엎고 공사판에나 나가 봐야겠소
몸의 거친 숨 미수꾸리하며
저녁 그늘 덮고 주먹 눌러 놓는다
쥐어박듯이
언 바닥
이관묵
오래 비워둔 산집
뜰팡의
혼자 겨울이 깊어가는 구두 바라본다
그에게도 몸 안의 따뜻한 발목과
그 발목으로 절뚝거리며 건너뛰던 보폭 있었다
굽이 닳은 사랑과
어제를 퍼내도 다시 충혈돠는 오늘과
서로 비탈진 등짝을 따라주며 엎어지던 술병들
퇴직하자 혀 거두었다
마음 깎았다
저 몸의 게워낸 하늘이며
저 몸에서 쫓겨난 눈송이며
저 몸을 부리던 보이지 않는 손이며
저 몸을 뜨겁게 달구던 설레임이며
모조리 불어내서
언 바닥에 가지런히 개 놓고서
등 뒤에서 피는 꽃
이관묵
뒤란에 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피었다 식은 저녁 하늘을 고봉으로 펴놓고 식솔들 등 뒤에서
피었다 진다
모래무늬 바람과 횟가루 뒤집어쓴 낮을 버무려서 기와 공장 거푸집으로 찍어놓은 하루들
똑같이 닮은 하루들
야적장에 쌓아놓은 팔리지 않는 지붕들을 공중에 매달고 울먹거리듯 아버지 등 뒤에서도
피었다 진다
조팝나무 꽃들이 비추는 어둡고 컴컴한 등짝들은 언제 피어 제 몸 환하게 밝힐 수 있을까
아무도 알지 못하게 등 뒤에서 숨어서 한철을 반짝이다 몸 꺼버린 소금 같은 숨들
문안
이관묵
통 말이 없으시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어둠침침한 계단을 짊어지고
오랜만에
내가 내 마음 지하실 내려가 본다
그 많던 이별 누가 다 훔쳐갔을까
어느 저녁이 이 별들을 모두 탕진했을까
시동이 꺼진,
일생 이마에 갈고리 매달고 부릉거렸던
오십 시시 오토바이 같은 나날들 쓸어 모으고
밤바람 파 엎고 가뿐 호흡들 퍼내던
어둠침침한 삽들 치웠다
불을 밝혀도 암흑뿐인 한숨 내다 널었다
신문지로 태어난 습한 뉘우침들 내다 널었다
바닥, 환하게 개놓고
누가 마음 떠먹다 흘린 흔적
시든 산그늘 한 송이
그늘의 가계家系 1
이관묵
오동꽃 피고
오동꽃 졌다
그 사이 우리 집은 수많은 저녁들이 다녀갔다
아름드리 둥근 밑동을 안아보고 또 안아보아도 품에 안기는 건
구름의 흔적을 새긴 노래와
물먹은 별빛들
어느 해였던가
지독한 여름 장맛지가 소금창고를 휩쓸어가자
물려받은 논마지기 거덜 내고 아버지는 매일 밤 술에 취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 땅에 제대로 한번 서보고 싶었던 아버지
묵은 집 벽에 좍좍 줄금이 가고
식솔들은 모두 굴비처럼 소금에 절었다
맷돌 같은 집안의 적막이 두근두근했다
그런 밤이면 달빛은 왜 그리 밝은지
오동나무 밑에 몰래 나와 쪼그려 앉아
가지 사이 푸른 별들과 별들의 양철 울음을 들으며
나는 마음에 절벽을 세워갔다
오동나무는 제 품으로 나를 불러들여 검은 밤의 서늘한 적막을 꽉꽉 채워 주곤 하였다
오동나무의 넓고 둥근 그늘이 연못처럼 깊어지자
나는 생각에 깊고 푸른 바닥을 파가며 쏟아져 들어오는 검푸른 하늘을 맞이했다
몸 두드리면 그늘 우는 소리가 났다
단상斷想들
이관묵
1.
태어나면서 나는 내 삶에 입사했다
아직도 장기근속 중
매일 나한테 출근하고 나한테 퇴근하는
나
2.
벌써 나를 다 써버리다니
탕진했구나
지갑에 얼마 남지 않은
나
3.
사람들이 병째 들고 나발 불어버린 나
4.
나를 들쳐 올리고 들어서자
밥 먹다 말고 일제히 일어서서 인사하는
나
5.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꼭 쥐고 있었으나
깜빡 버스에 놓고 내렸다
나를
6.
나는 때로 뒷걸음질로 걸었다
나 쫓아오는 나를 보려고
7.
내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도착한 결승점
나
8.
내가 아무데나 쏟아버리고
아무데서나 쓸어 모은
나
9.
깊은 밤 혼자 골목 걸으며 내 구두 소리 듣는다
내가 내 소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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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밤새 어르고 호통치고 쥐어박고
그래도 말 안 듣는 시
막무가내인 시
잠 안 자고 굶겼더니 박차고 나가버렸다
빈 털터리로
밖은 엄동설한
혼자 국밥집에 앉아 몇 잔 째 나를 비우는데
그 시, 오돌오돌 떨며 두 손 비비며
나를 들여다본다
몰골 수척하다
2013년 초봄
이관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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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詩集 [※시간의 시육※]
[ 이관묵의 시세계 ] -
그림자 없이 길을 걷는 방법
남승원
(문학평론가)
1.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혼돈 그 자체의 시간에도 말은 존재해 있었다. 말이세상을 만들 유일무이한 재료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신조차 그에 선행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물에 내재한 본질적 힘 역시 신의 조물造物안에서 이루어진 기적이 아니라,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성질이 수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스Logos의 어원이 말하는 것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legein’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도 쉽게 수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모든 가치들에 발전이라는 명목을 달아주는 순간 우리의 말 역시 ‘차연differance’의 덫에 갇힌다. 과거의 우리에게 말하고 듣는 것이 그대로 세상의 조화를 드러내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말해지는 것을 끊임없이 적고, 지우고 다시 써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스스로를 가두고 만 것이다.
이 비극적 운명을 기꺼이 자신이 역할로 짊어진 자들을 우리는 그래서 끊임없이 쓰는 자, 즉 ‘작가writer’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시인은 분열된 언어를 통해 사회현실을 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리듬을 깨우고자 하는 이중의 노력을 감행한다. 이때 리듬이란 단순히 음악적 요소가 아니라 그 어원인 그리스어 ‘rhythmos’에서 알 수 있듯이 ‘흐름’, 즉 태초의 말이 가지고 있었던 자연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어 고양된 어떤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바벨탑 이후 우리의 말이 그 어떤 조화도 이루어낼 수 없는 근본적 분열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보자. 결국 시인의 작업이 지향하는 이중의 목표는 완벽한 실패라는 전제를 시 쓰기 그 자체에 내재시킨다. 이제 시를 쓰는 행위는 프로메테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영원성을 추구하는 작업으로 다시 한 번 변모한다. 따라서 시인이 선택한 단어 그 자체들이나, 또는 그것들로 위태롭게 지어진 작품들은 본질적으로 영원성을 지향하게 된다. 시에 내재되어 있는 고통에 기꺼이 자신의 일생을 내어준 이관묵 시인 역시 그 영원성을 향한 도정에 서 있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영원성을 향한 길이 목표를 정해두고 나아가는 현실적 삶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길은 앞으로만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2.
애초에 길은 당신에게 가닿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때로 나 자신까지 삼키고 마는 그 욕망의 대책 없음은 이내 나를 지우고 당신마저 지운 채 동일한 목표를 향한 무한 경쟁의 길로 모두를 내몰고 만다. 모든 것이 지워져 막막하고 방향도 모른 채 길 위로 내몰려 질주하는 아찔하기만 한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이관묵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시간의 사육』은 이처럼 우리의 등 뒤로 무심코 흘려버린 길들로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이때의 걸음이 방향의 전환에 이은 반복적 행위나 단순한 회상과 구별되는 것은 물론이다. 인생과 시 창작이 삶의 호흡 속에서 구분 없이 뒤섞인 시인의 길 위에서 그 켜켜이 쌓인 시간들을 들추다 보면 우리는 문득 이 길만이 다시 한 번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먼저 숨을 고르고, 앞만 노려보느라 벌겋게 된 눈을 감고 시인이 우리의 등 뒤로 펼쳐놓은 길을 향해 잠시 발걸음을 돌려 보자.
가쁜 숨 몰아쉬며
나른한 봄볕에 쪼그리고 앉은 노인처럼 둑방집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저 몸에서 흘러나온 길 걷는다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살던 격랑의 자식들 부화했던 방
잇몸으로 불씨 오물거렸던 늙은 아궁이
비바람이 세 들었던 헛간
등짝만으로 울먹거리다 푹 꺼진 낙타지붕
모두들
오래 나란히 동거했던 납작 창문으로 잠결에 일어나 마른 하늘을 몇 사발씩 들이켰으리라
아직 뜯지 않은 길이 있어서
굴뚝의 연기가 마실 다녔던 고샅길 아프고
네모난 평상에 둘러앉아 네모지게 게걸거렸던 극빈의 입들 아프고
새들이 키 큰 미루나무로 불러냈던 구름장들 아프고
어느덧 길은
내 언 발바닥에 떠내려와 이마를 짓찧다가 사라진다
마음을 오무렸다 폈다 팽개치고 가는 빗줄기처럼
노인병원에 모신 캄캄한 입처럼
-「둑방집」전문
뒤를 돌아보는 시인의 시선은 작고 숨어 있는 것들,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되고 잊혀온 것들에 숨을 불어넣는다. 이를 통해 시인은 그동안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갇혀 있던 대상들이 자신의 생명력을 따라 마음껏 부풀어 오르는 현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당신을 만나게 된다.
가령, 위의 작품에서 당신은 지금 ‘둑방집’의 형상을 하고 ‘노인’처럼 앉아 있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라면 눈길 한 번 주고 걷던 길을 재촉했을, 아니 어쩌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당신에게 시인은 눈을 돌린다. 그리고 이내 당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길”을 되돌아가는 걸음에서 재촉된 온기는 ‘방’과 ‘아궁이’ 그리고 ‘헛간’과 ‘지붕’에 이르기까지 한 때 당신이 거느렸던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부화’ 시킨다. ‘자식들’이 생명을 얻고 또한 당신이 뱉어낸 양식들로 ‘극빈’의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었던 과정이 다시 한 번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낡아가는 세월을 감내하던 당신이 세상의 근원으로 밝혀지는 순간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생명력에 대한 환기만으로 잊힌 의미가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것에 눈을 돌렸지만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 번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어찌 보면 앞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의 버릇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추인 받은 가치관을 눈앞의 목표로 둔 채 지속적인 의미부여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지워나가며 걸어가는 것에 우리는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근원적 풍경이 보여주는 생명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결국 같은 크기의 고통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관묵 시인이「둑방집」을 통해 그리고 있는 장면이 ‘아프고 아프고 아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인은 공터가 되었다
공터는 노인을 둥글게 부등켜 안는다
입구와 출구가 무너졌어도 한때 연애가 드나들었고 배은망덕이란 놈이 문 앞에 버리고 도망간 핏덩이 등짝도 거두어 주었으니 성지聖地다
의견이 희어 난처한 휴지들
퇴행성관절통을 앓는 플라스틱 꽃다발
모두 거두어 주었으니 그 몸이 성지는 성지다
나대지 같은 성지다
-「공터 노인」부분
세상의 근원에 살을 맞대보는 경험이 마냥 행복한 일은 아니다. 생명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위치할 현실의 좌표를 얻는 방식으로 다른 존재의 고통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 없는 생명은 기본적으로 존재가 불가능하다. 우리의 눈에 확인되는 존재는 결국 다른 누군가의 상처가 아문 흔적일 뿐이다. 삶과 고통이 구별 없이 뒤섞여 있는 동물적인 삶의 방식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하기보다 냉혹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적 삶을 구별해내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이관묵 시인을 따라 뒤를 돌아보는 시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처럼 근원적 생명력에 내재되어 있는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보는 일이다.
「공터 노인」에서 역시 당신은 지나온 세월을 모두 받아들인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앞의「둑방집」에서도 그렇듯이 당신은 한쪽 ‘공터’에서 폐지를 쌓는 흔한 모습으로, 또 그렇기에 우리의 시선을 벗어난 곳에서 주어진 세월들을 감내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이 발견해낸 당신은 우리가 버리고 간 그 “배은망덕”의 시간 속에서도 ‘문 앞에 버려진 핏덩이’를 키우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짐짓 꾸며냈지만 소용이 다하자마자 이내 뒷길로 던져버린 “플라스틱 꽃다발”과 같은 용도폐기물 더미들을 끊임없이 “거두어 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관묵 시에서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생명과 고통이 어우러진 변증적 과정의 끝에 도달한 ‘성지’인 “나대지”의 모습이다. 그곳은 설정된 목표를 벗어나 그간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것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태도는 근대적 주체의 모습과 깊은 연관이 있다. 코기토에서 비롯된 주체에 의한 탐색은 발전이라는 목표 아래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거세해왔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이 ‘발전’의 방향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야합하는 순간, 목표를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들은 기능적 생명력의 형태로 변화를 강요당하거나, 아예 인식의 바깥 영역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체의 인식 가능 범위가 넓어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인식의 불가능성이라는 영역 역시 같은 크기로 확장된다. 이해 불가능의 지점에 아예 눈을 감과 마는 비극적 주체도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바로 이 같은 상황이 타자와 형성하는 근원적인 윤리관계의 가능성 자체를 박탈한다. 타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인식의 확산에 따른 주체의 내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주체의 시선이 잡아 낸 의미나 맥락과 상관없이 현현epiphanie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의 근원적 풍경에 맞닿아 있는 고통에 주목한 시인은 타자에 대한 관심을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일상 속에서의 고통이 그러하듯이 앞으로 달려가기보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고통으로 연결된 다른 모든 것들의 존재를 외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관묵이 다다른 “나대지”는 그 어떤 압력의 작용도 사라져 버린,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관심을 포괄한다.
3.
넓어지는 것과 깊어지는 것, 우열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이관묵 시인의 경우 시집『시간의 사육』을 통해 시에 볼모 잡힌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더 깊어지고 있는 점은 그 자체로 놀랍기만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실적 구성력을 벗어나 타자의 현현을 가능하게 하는 ‘나대지’로의 발걸음이 결국 고통으로 연결된 타자들과의 만남을 예비함으로써 무한대의 관계로 넓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옛집 뒷마루 60년이 넘은 옹기 항아리 바라보며
오동꽃 환하던 봄날 삶이 비좁고 옹색하다고 내가 도망치며 내동댕이쳤던 나를 생각한다
… (중략) …
나는 나를 오래 비워 두었다
텅 비워 두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고적함에 빗살무늬를 쳐가며 황톳빛 시간을 삭혔다
비우는 일이 나를 견디는 일이었고 생각 자욱이 쏟아놓은 백지에 석유등잔불 내가는 일이
나를 밝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거다 그리하여
나는 낮보다 밤이 길었다
어둑하게 물드는 삶이 오히려 환하고 가벼웠다
나는 나의 은둔처, 매일 마음 꿇고 기도하는 수도원, 고사목같이 침침한 시간들이 풍화하는 유배지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크기만큼 무거웠고 내가 사랑하는 만큼 배반했으므로 나는 나에게 주저앉아 등 뒤로 두근거리는 저녁들을 보여주며 자꾸만 캄캄해지고 깊어졌다
결국 나는 내 자신이 절벽이었고 가시였으며 내가 최종 도착해야 할 집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옹기 항아리를 추억함」부분
이제 당신은 “옹기 항아리”이다. 당연하게도 당신은 무엇인가를 담아두고 저장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때로는 한정된 것만 감당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비좁고 옹색하다고 도망치며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그것은 ‘옹기 항아리’인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에게 중요하고 나아가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단지 목표 달성과 관련된 ‘정보’뿐이다. 따라서 ‘정보’는 애초부터 자신의 움직임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관계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나는 대상 모두가 몸을 바꾸고 목표-로 여겨지는 것-들을 향한 흐름에 뛰어들 수 있도록 일시적인 관계로 변환시킨다.
시인이 내세운 ‘옹기 항아리’ 에 눈을 두다 보면 필연적으로 벤야민의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마치 ‘정보’의 유통으로 인해 후대로 전달되는 경험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진실과 관련 없이 난무하는 사건들이 펼쳐놓은 길을 따라가던 우리의 모습과도 같기 때문이다. 동시에 ‘옹기 항아리’는 특별히 “유약”도 바르지 않고 시인의 손때 묻은 흔적을 따라 그저 소박하게 “빗살무늬”만을 쳐둔, 경험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징으로도 변모한다.
이는 “나를 껐다 캄캄하게”(「나를 끄다」)라는 진술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시인 스스로를 “오래 비워 두”는 과정을 거치면서 가능해진다. 단순히 ‘체험’하고 지나가는 정보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로 변모하는 것이 가능한 ‘경험’은 개인의 전 생애에 걸쳐 축적되고, 또한 역설적으로 주체가 무화되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경험의 가치는 다양한 욕망이 뒤섞인 이야기들이 공존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이 모든 것을 비워 낸 ‘옹기 항아리’는 앞서 ‘나대지’와 같이 주체가 물러나고 모든 타자들의 경험과 욕망이 자유롭게 뒤섞인 “환하고 가벼”운 공간이 된다.
『시간의 사육』전반에 걸쳐 드러난 화자들의 구체적 행위들을 살펴보면 “나를 내놓는다”(「모래의 잠」), “이 몸 처단하겠습니다”(「몸 그늘」), “세간 모두 처분했다”(「몸이 멀다」), “저 놈의 마을을 눌러 놓아라”(「흰 종이 노 저어」)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비워내는 동작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관묵 시인은 타자들을 받아내기 위해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것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자신을 내려놓고 타자를 받아들인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일까.
뒤란에 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피었다 식은 저녁 하늘을 고봉으로 퍼놓고 식솔ㄷ들 등 뒤에서
피었다 진다
모래무늬 바람과 횟가루 뒤집어쓴 낮을 버무려서 기와공장 거푸집으로 찍어놓은 하루들
똑같이 닮은 하루들
야적장에 쌓아놓은 팔리지 않는 지붕들을 공중에 매달고 울먹거리듯 아버지 등 뒤에서도
피었다 진다
조팝나무 꽃들이 비추는 어둡고 컴컴한 등짝들은 언제 피어 제 몸 환하게 밝힐 수 있을까
아무도 알지 못하게 등 뒤에 숨어서 한철을 반짝이다 몸꺼버린 소금 같은 숨들
-「등 뒤에서 피는 꽃」전문
이 작품에서 역시 시인은 삶의 무게가 바로 고통의 무게로 전환되는 현실을 그려 보이고 있다. 시적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기와공장”은 “식솔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삶의 현장인 동시에 그 자체로 ‘식솔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도구가 된다. 기와공장 뒤로 보이는 하늘이 마치 “녹”이 슬은 것처럼 보이거나, 기와공장이라면 분명히 긴요하게 쓰이고 있을 “거푸집”도 그저 “똑같이 닮은 하루들”을 재촉하는 것으로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관묵 시인이 보여주는 이 아름답고도 슬픈 삶의 현장을 통해 당신은 결국 우리가 가는 길에서 벗어난 어떤 종착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길 위에서 “피었다 진다”를 반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는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녹슨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을 배불리지는 못하지만, 스스로의 몸을 기꺼이 고봉으로 내어주고 있다.
‘당신’은 팔리지 않는 것을 대신 사줄 수는 없지만, 서슴지 않고 슬픔을 느끼는 주체들 모두와 함께 울먹거리고 있다.
‘당신’은 어둡고 암담하게만 보이는 삶의 길들을 밝혀주지는 못하지만, 두려움 없이 자신의 빛을 나누어 주고 있다.
위로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우리 앞에 더 짙은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고통을 짊어진 등 뒤에 나란히 숨어 있는 ‘당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얼굴들로 이루어진 생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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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이관묵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시간의 사육』은 이처럼 우리의 등 뒤로 무심코 흘려버린 길들로 다시 한 번 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이때의 걸음이 방향의 전환에 이은 반복적 행위나 단순한 회상과 구별되는 것은 물론이다. 인생과 시 창작이 삶의 호흡 속에서 구분 없이 뒤섞인 시인의 길 위에서 그 켜켜이 쌓인 시간들을 들추다 보면 우리는 문득 이 길만이 다시 한 번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된다. 이관묵 시인의 경우 시집『시간의 사육』을 통해 시에 볼모 잡힌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 번 더 깊어지고 있는 점은 그 자체로 놀랍기만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실적 구성력을 벗어나 타자의 현현을 가능하게 하는 ‘나대지’로의 발걸음이 결국 고통으로 연결된 타자들과의 만남을 예비함으로써 무한대의 관계로 넓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관묵 시인이 보여주는 이 아름답고도 슬픈 삶의 현장을 통해 당신은 결국 우리가 가는 길에서 벗어난 어떤 종착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길 위에서 “피었다 진다”를 반복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리는 바로 ‘당신’이다.
― 남승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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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관묵 시인∥
∙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 1978년《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 시집으로『수몰지구』『변형의 바람』『저녁비를 만나거든』『가랑잎 경』등이 있다.
∙ 이메일 : 2km21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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