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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샤 존자의 명상요결 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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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절대적 보리심과 상대적인 보리심을 계발하는 것
1)그대가 고요해지면 신비가 드러나리라.
2)모든 현상을 꿈처럼 보라.
3)태어나지 않는 의식의 본성을 탐구하라.
4)마음을 자연스럽게 놓아두면 수행에서도 자유롭다.
5)우주적 근원 속에서 쉬어라.
6)환영의 몸을 수행하라.
7)통렌을 수행하라.
8)호흡 수행에 두 가지를 채우라.
9)세 종류의 사람을 만나 세 가지 독이 일어날 때 세 가지 덕을 닦으라.
10)모든 경우 말을 사용해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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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보리심과 절대적 보리심>
*절망적인 세상에서 희망은 인간의 가능성에 있다.
세상을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없어 보인다. 제도권이니 비제도권이나, 조직화된 모든 가버넌스(governance)도 신뢰할 수 없고, 주변 인간들에게도 희망의 싹이 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국가 대 국가, 민족과 민족의 투쟁이 그칠 날이 없고, 기후 위기와 환경재앙은 임박해 있다. 어디에서 희망의 씨앗을 찾을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실패하고 모든 것에 실망해도 여전히 희망은 인간에게 있다. 그것도 인간의 가능성 Human-being to come에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다방면으로 찾을 수 있겠지만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부처님은 너희 마음에 사랑과 지혜를 개발하여 세상의 고통을 건너가라고 하셨다. 사랑과 지혜, 다시 말하면 자비와 지혜를 개발하는 일이 고해를 건너가는 길이며, 그것이 세계의 희망이기에, 인간 삶이란 소중하고도 희유한 기회가 된다고 하셨다.
자비와 지혜를 개발하려는 큰 결심을 하고 삶을 그 방향으로 전환하여 그 길을 계속해 가려는 결단과 의지를 일러 상대적 보리심이라 한다. 그러면 보리심이란 말은 어디에서 유래해서 어떻게 쓰이는 말인가?
*보리심은 깨달음을 향해가는 의지적 결단이다.
보리심이란 싼스끄리뜨 어 bodhicitta 보디찟따에서 유래했고, bodhi(보디, 菩提라고 한역되었고, 한글로 ‘보리’라고 읽는다)와 citta(찟따, 마음 혹은 心심이라 한다)를 합성해서 만들어졌다. 보리심에는 두 차원이 있다. 절대적 보리심과 상대적 보리심. 상대적 보리심은 깨달으려 하는 마음, 즉 깨달음을 향해 갈 것을 결의하고 일상에 깨달음을 일깨우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말한다. 절대적 보리심이란 상대적 보리심이 무르익을 때 드러나는 절대적 실상의 경지이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에서는 열반이라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성(空性)이라 한다. 그것은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해방된 절대 지복의 상태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말할 때, 이는 종교적 고백이나 결단이며, 자기 선언이다.
나는 이기적 방식으로 세상을 살기보다는 이타적 삶을 살겠습니다.
나는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출세간적 가치를 지향하겠습니다.
나는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발현하여 생사에 자재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보리심을 삶의 동기로 삼은 사람은 보리심 행자라 한다. 이에 보리심 행자는 <보리심의 서원>을 매일 합송한다.
나와 허공에 가득한 중생이 지금부터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삼세 일체불의 공덕을 한 몸에 구현하고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팔만사천 다르마에 귀의합니다. 성스런 승가에 귀의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부처를 이루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법을 전하여 깨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행복으로 인도하겠습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과 번뇌가 다할 때까지
나는 열반에 들지 않고 세상과 함께하면서 보살의 원행을 완성하겠습니다.
이런 서원을 일으켜서 잊지 않고 자기 심장처럼 소중히 간직하는 걸 ‘원보리심’이라 하고 그 보리심을 일상에 실천하고 사는 삶을 ‘행보리심이’라 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 두 가지를 견지하는 사람을 bodhisattva 보디싸뜨바, 줄여서 ‘보살’이라 한다. 보편적 해탈을 지향하는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핵심 주인공 캐릭터가 되었다. 보살은 깨달음을 향해가는 사람, 그래서 깨달음의 전사, 깨달은 영웅이라고까지 떠받들어진다.
*보리심을 개발하는 수행
상대적 보리심을 개발하는 수행에 대해 말해 보자. 진실적 차원에서 보자면 일상생활 이대로 수행 아닌 게 없지만, 초심수행자의 경우 일상생활 전체를 수행으로 삼을 수 있기까지는 예비 수행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사마타와 위빠사나 즉 고요한 안정과 통찰이다. 교학적으로 말하면 선정과 지혜, 즉 정혜쌍수 또는 지관쌍운이다.
먼저 선정, 고요한 안정을 이야기해보자.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인이 요청된다.
*선정을 닦기 위한 몇 가지 요인
①믿음: 지금은 불신 시대이다. 우선 지도자를 불신한다. 정치지도자, 사회 지도자, 경제계 지도자, 성직자를 불신한다. 그들은 불신을 자초할만한 짓을 해왔다. 그래서 사람을 믿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 가운데 성직자들의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작태가 노출되면서 종교적 진리조차 불신당한다. 더불어 유투브나 SNS를 통하여 대중의 지식이 늘어나 종교적 진리를 비판할 수 있게 되면서, 맹신하던 종래의 관행을 벗어나 의심하는 시선을 던지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종교조직과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쉽게 믿지 않는다.
*맹신을 벗어나기 위해 의심과 비판이 필요하다.
맹신을 벗어나 제대로 알고 믿기 위해서는 의심과 비판은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종교에 입문하기 전에 합리적 의심과 정당한 비판을 할 것을 권하셨다. “나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무작정 내 말을 따르지 말고 비판적으로 시험해 본 뒤에 받아들여라. 직접 경험해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두루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마라.”
*불가지론을 넘어서
믿음과 관련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불가지론이다. 형이상학적 진리에 대해서 누구도 함부로 주장할 수 없다. 아무도 그런 문제에 대해 권위를 가진 답을 할 수 없으며, 무한한 진리를 유한한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 없다는 관점이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피스트라 불리었고 현대에는 철학자라 불린다. 불가지론자들은 모든 진리 주장은 상대적이기에 누구도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사가 달린 문제에 대해 참으로 알고 싶다면 불가지론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문제를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 의존할 그 누구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에 대해 다른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의심한다면,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도 의심해봐야 한다. 자기가 정말 불가지론자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중요한 발견을 누군가 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가져야 한다.
*믿음은 선택이다.
금을 녹이거나 두드려 보고 진 금인 것을 확인하듯, 가르침을 듣고 기억했다가 실천해보고 그 효험을 확인하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믿음이 가는 대로 수행할 것이기에 한 번 생긴 믿음은 점점 증장 할 것이다. 스스로 수행해서 경험한 만큼 믿음이 생긴다. 결국 믿음은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믿을 것인가 아닌가 는 최종적으로 자신이 결정한다. 자신의 선택이 자기 삶이 된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진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업자성정견이다. 나는 나의 업의 창조자이면서 상속자이다. 카르마의 법칙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기의 믿음을 선택하라.
*법-인연의 소중함
여러분은 진리에 대한 열정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믿음, 탐색해보지 못한 자기 안에 감춰진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가 아닌 살아보고 싶고, 살아볼 만한 새로운 형태의 삶은 없을까 모색하다가 여기 불교 공부 모임에 오신 것이다. 이것을 법-인연이라 한다. 법-인연을 소중히 하라. 법-인연은 모든 인연 가운데 최상이요, 가장 희유한 일이다. 한번 만난 법-인연을 자기의 심장처럼 간직하고 자기의 눈처럼 보호하라.
*귀의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이며 자기선언이다.
법회를 시작할 때 우리는 삼귀의를 합송한다.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고백과 같다. 또 나는 이렇게 살리라고 자기선언을 하는 것과 같다. 삼귀의를 한 사람은 믿음의 뿌리를 내린 것이다. 삼귀의는 결국 자귀의, 자등명이다. 자기가 일으킨 보리심의 서원에 의지하며, 보리심의 서원이 자기 앞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는 뜻이다.
*자신을 둘러싼 무한한 여백에 눈을 뜨라.
결정되지 않아, 훤히 열린 무한 가능성의 자신을 함부로 제약하여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무한 가능성의 자기를 좁은 자기로 국한시키지 말라. 자아는 자아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직 개발되지 않고 표현되지 않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여백이 나에게 무한으로 감춰져 있다. 이 여백의 가능성에 눈을 뜨라. 나는 아직 다 소모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다 산 것이 아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감춰져 있을지 누가 아는가? 그러니 자신을 안다고, 이제는 더 알 것도 없다고 단정하지 말라. 자신을 둘러싼 이 무한한 여백을 느껴라. 이것에 눈을 뜨라. 그것이 지금 좁은 자아에 갇혀있는 상황을 타개해줄 것이다. 당신은 무한으로 피어나야 한다. 유한자로서 지금 여기에 바늘처럼 꽂힌 삶을 살게끔 태어나지 않았다. 당신은 무한으로 태어났다. 세상 속에 살되 세속을 초월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라. 세상속에 뿌리늘 내리되 출세간의 하늘을 나는 백조가 되어라. 그러니 믿음의 사람이여, 진리의 사람이여, 삿뿌리사(Sappurisa)는 위버멘쉬가 아닌가?
[참고]
①Sappurisa: 선남자, 선여인, 진실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a worthy man), 고귀한 마음을 지닌 사람(the noble minded person), 훌륭한 사람(a superior person)
②위버멘쉬: Übermensch, 니체가 말한 초인
*당신은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가?
불교 공부에 들어온 사람들은 먼저 자문해야 한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가? 수행이나 영적인 각성으로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가? 혹은 무슨 수를 써도 인간은 변하지 않아, 인간은 안 돼! 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지혜와 자비와 선업이 계발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의 노력으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럼으로써 마음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무엇을 하든지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 자신의 신념을 검색하라. 우리의 믿음들은 종종 자기 암시적인 예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니 무엇을 믿을 때 조심하라. 그것이 현실로 나타날지 모르니까. 나는 잘 안 돼! 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잘 안돼! 라는 무의식의 힘이 작용하여 ‘역시 잘 안 되네.’라는 결과를 부른다.
②선정:
*생각의 흐름이 정지하면 지극히 고요해진다.
우리의 마음에는 생각이 끊임없이 흘러간다. 이것을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의 흐름’이라고 했다. 생각의 흐름이 삶이다. 그리고 생각이 흘러가는 방식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통제할 수 없는 생각이 계속 흘러간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산란해서 잠시의 안정도 누릴 수 없어 피곤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 정도가 심하면 강박증이나 신경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생각이 흐름이 느리고 온화하다면 그 사람은 느긋하고 편안하며 삶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면 생각의 흐름을 조절할 수 없을까? 여기에 제멋대로 오가는 생각의 흐름을 끊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집중이다. 무엇을 어디에 집중하는가? 주의력을 호흡이나 표상에 집중한다. 주의력이 집중되면 생각의 흐름이 정지하여 고요해진다. 이때의 고요함은 지극한 안정이며 경안(輕安)이다.
*자기 내면에 억눌린 한과 분노를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먼저 생각의 흐름을 정지하기 위해선 선결과제가 있다. 생각이란 수돗물처럼 그냥 줄줄 흘러가는 게 아니라 맺히고 꼬여서 막힐 수 있다. 그래서 맺힌 생각, 꼬인 생각, 막힌 생각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냥 생각의 흐름을 지켜본다고 그 맺힌 생각이 자동적으로 풀어지지는 않는다. 맺힌 생각, 꼬인 생각, 막힌 생각을 일러서 콤플렉스, 혹은 트라우마(상처), 한(恨)이라 한다. 먼저 자기 내면 깊숙이 어떤 한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이 작업이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받기도 하고 스승과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내면의 문제라 자기가 정말로 진실하게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을 당해서는 갑자기 미친 듯이 반응하다가도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은 자기 내면을 절대 볼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억눌린 한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은 선정은 고사하고 일상의 평범한 안정도 누릴 수 없다. 이런 내면의 억눌린 한이나 분노, 애정결핍이 어느 정도 해소된 사람은 주의력을 조절하면 고요한 경지를 누릴 수 있다.
*주의력을 훈련한다.
주의력을 훈련하는 것을 정념(正念, samma-sati)라고 한다. 여기에는 주의력을 모으는 단계와 풀어놓은 단계가 있다. 주의력을 모으는 단계가 바로 집중하는 것이다. 흩어지는 마음을 다잡아 주의력을 모으는 훈련으로 수식관과 하나의 표상에 집중하는 방법이 있다.
③호흡-수식관
다음을 실습하라.
몸과 마음을 지극히 평안한 상태에 놓아두라. 언젠가 별똥별이 진주에 떨어졌다. 그처럼 별똥별이 문득 떨어져 지금 이 자리에 놓여있는 듯이 생각하라.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하지 말라. 다만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을 뿐이다. 몸과 마음이 그냥 한 덩어리 돌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쉬어라.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이니 숨을 쉬게 된다. 자,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여기에 살짝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심각하게 하지 말고, 아무 일도 아닌 듯 슬쩍 주의를 기울여라.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하나’라고 속으로 되뇌인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하나’라고 하면 된다. 다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둘’이라 한다. 이렇게 ‘셋’, ‘넷’까지 한다. 일반적으로 다섯, 여섯,...,열까지 세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다간 초심자는 중간에 ‘몇 까지 셌더라?’, 혹은 다른 생각이 스며들어 명상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 ‘둘’, ‘셋’, ‘넷’까지 세고 다시 되돌아 ‘셋’, ‘둘’, ‘하나’라고 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것을 수식관(數息觀)이라 한다. 호흡을 숫자로 헤아리면서 주의력을 모으는 훈련이다. 수식관을 3~5분 정도 하면 충분하다. 이것을 너무 오래 하면 역시 생각이 스며들고, 그래서 생각에서 벗어나려 애쓰다 보면 마음은 더 산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수식관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마음이 흩어졌거나 주의력이 산만해졌을 때는 언제라도 수식관을 30초, 1 분간 수행하면 즉시 마음이 초롱초롱해지고 주의력이 생생해질 것이다.
④하나의 표상에 집중
주의력을 집중하기 위해 전면에 놓은 대상을 표상(表象, nimmitta, 니밋따)라고 한다. 눈앞 전방에 점 하나를 찍어 놓고 집중해도 된다. 그리고 눈앞에 촛불을 켜두고 거기에 집중해도 된다. 이렇게 집중할 수 있는 외부대상을 표상이라 한다. 표상으로 삼기 좋은 것으로 부처님 탱화나 이미지, 혹은 작은 불상이다. 이런 것을 자기 명상실 제단에 모셔두고 집중하면 좋다. 수행자는 명상을 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것이 좋다. 명상실 제단에 매일 아침 촛불을 켜고 향불을 올리고 차 한잔을 올리고 <보리심의 기도>를 올리는 일은 주의력을 집중하는 명상에 아주 유익하다. 그리고 눈앞에 표상을 두고 집중할 때 먼저 눈을 뜨고 집중한다. 3~5분 정도 집중하다가, 자연스럽게 보통의 호흡명상으로 전환한다. 눈을 뜨고 수행하다가 눈을 감아도 눈을 떠서 봤던 표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적 표상이다. 이것을 특별히 니밋따 nimitta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니밋따는 눈앞에 빛나는 점이나 동그라미, 나선형, 혹은 찬란한 광명으로 보이기도 한다. 니밋따가 눈앞에 뜨면 이것을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기에 쉽게 선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통한 현상이 아니라, 집중의 정도가 강해지면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니까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말라. 이런 체험을 특별히 여겨 자랑하게 되면 자아를 강화할 뿐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된다.
⑤마음을 자연스런 상태로 놓아두기
선정은 주의력을 한점에 집중하는 수행이라면, 이번에는 주의력을 풀어놓고 쉬는 수행이다. 보통 사람들은 일이 없을 때 쉰다고 말하면서도 쉬지 못한다. 몸은 쉬는 것 같은데 생각이 쉬지를 못하기 때문에 쉬어도 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쉰다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쉰다는 것은 자기의 주의가 어느 한 곳에 꽂히지 않고, 주의를 어느 것도 붙잡지 않은 채 자유롭게 흐르게 놓아두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놓아두기’라고 말한다.
다음을 실습하라.
눈을 평상으로 뜨고 앉아 시선은 당신 앞의 공간에 두고 어떤 대상에도 집중하지 말고 그냥 깨어있으라.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여 외부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말라. 두 눈을 똑바로 떠서 눈동자를 움직이지 말고 내면을 향하라. 외부에서 소리가 들려오면 들려오는 대로 내버려 두라. 생각과 감정이 떠올라 올 수도 있다. 어느 것 하나에도 특별한 의미를 두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라. 몸은 마치 태산처럼 정지해 있고, 의식은 허공처럼 열려있게 하라. 호흡은 일어나는 대로 자연스레 두어라. 이 상태를 지속하면 몇 분 후 의식은 명료해지고 전면 공간이 빛나 보일 것이다. 텅 빔과 고요, 밝음과 맑음이 생생하게 체험되리라.
이렇게 말하니 무슨 특별한 수행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평범하게 말한다.
처음에는 몸과 마음을 큰 바위처럼 꼼짝하지 않은 채 죽은 것처럼 놓아둔다. 어떤 의도도 내지 말라.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지 말라. 그냥 그대로 쉬어라. 마치 힘이 다 빠진 100세 노인이 동네 운동장 한 곁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노는 걸 마냥 지켜보듯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라.
그런데 생각을 흘려보냈는데도 계속 달라붙어 이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경우에는 앉아서 명상하기보다는 일어서서 주의를 외부대상을 향하게 하라. 가령 정원에 꽃이나, 나무, 정원석이나 풀밭에 주의를 주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걸음걸음을 알아차린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하면서 걸음걸음을 알아차린다. 이른바 ‘걷기 명상’이다. 그래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다시 앉아서 명상하던 곳으로 돌아오면 된다.
아무 집착 없이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가능할까?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에 놓아두는 데는 단지 가벼운 접촉만 필요하다. 마치 한 마리의 벌이 꿀을 빠는 동안 거의 꽃을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벌은 꽃을 흔들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그처럼 풀어놓은 주의로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도 알아차릴 수 있다. 외부대상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내면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든지 대상에 붙들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외부대상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내면의 생각을 마치 물방울처럼 생각하라. 그리고 당신은 그 물방울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다가 된다고 상상하라. 아무리 파도가 쳐서 일렁거린다해도 바다처럼 모든 것을 담담하게 감싸 안으라. 그래서 거대한 바다처럼 그렇게 장중하고 묵연하게 그리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남아있으라. 이것은 지극한 평온이며 행복이다. 이런 경험을 ‘대양의식, Oceanic consciousness’라 한다. 이는 윌리엄 제임스가 일찍이 종교적 경험을 설명할 때 썼든 말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명상이 또 하나 있다. 당신이 허공이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바라보라. 그러면 드론을 높이 띄워서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듯이 자기의 내면을 비롯한 자기 몸 주변을 단번에 두루 고르게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을 ‘고르게 떠 있는 주의(even hovering attention)’라고 한다. 만약 이런 관점으로 세상과 자기를 보는 것에 숙달된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가족, 그리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평등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마음 씀이다. 그렇더라도 현실적으로는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곧바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도로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마음속으로 말할 수는 있다. 그러면서 “나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합니다.”라고 자기 혼자 기도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왔고, 마음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떠나지 않으리라. 마치 그림자가 몸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법구경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승경전 <대보적경>에서도 말하고 있다.
“마음이 모든 현상에 앞선다. 마음이 이해될 때 모든 현상은 이해된다. 마음을 제어함으로써 모든 것들이 제어된다.”
여기에 ‘마음’ 대신에 ‘의도’를 넣어보라. “의도가 모든 현상에 앞선다. 의도가 이해될 때 모든 현상이 이해된다. 의도를 제어함으로써 모든 것들이 제어된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말은 너무나 포괄적이고 임의적이어서 명확한 의미를 찾기 힘들다. 그것을 ‘의도, 동기, 의지’로 바꾸면 훨씬 그 뜻이 분명해진다. 그러면 경을 읽는 순간 저절로 ‘의도의 중요성’이 각인된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 의도를 스스로 알아차려야 태도가 분명하고 그 결과도 투명해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