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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동안거사 이승휴의 표준 영정을 만드는 세미나의 기조발표문을 미리 싣습니다. 전문가 세미나이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은 많이 생략했습니다. 독자들의 좋은 질정을 당부드립니다.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의 삶과 인성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강원일보의 박미현 국장으로부터 동안거사의 표준 영정을 만들겠다는 전화를 받고 후손이 없는 동안거사에 대해 어떻게 만들 것에 대해 긴 대화를 했다. 과거의 인물의 영정을 만든다는 것은 일종의 ‘역사만들기’이다.
‘역사만들기’에 대해 나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역사연구의 목적은 현재의 역사를 바로잡고 미래의 역사를 창조함에 있다고 생각해온 사람이다. 과거의 역사는 지배층 중심의 역사로서 당시의 국민의 활동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체를 모든 사람의 역사로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올사모daum/cafe/allsamoo) 카페를 만들고 시민운동으로 전개하고 있다. ‘우공이산’의 생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영정만들기 세미나의 주제발표를 하여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역사가가 참여하여 작업을 올바로 잡는 것도 역사가의 실천적 활동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표준 영정을 만듦에 대한 정보로 작년 말까지 문체부에서 승인한 자료와 그 관계 취지문을 보고 원고를 고쳐 썼다. 그리고 몇 살 때의 영정을 만들면 좋겠는 가를 언급해 달라고 나에게 주문했다.
우리나라는 제사를 지내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표준 영정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제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의 교육을 위한 목적과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를 현창하여 후대에 그의 역사가의 정신을 전하려는 점이다.
영정은 방안이나 전시실에 모셔져야 하고 그 보존 기간도 오랜 시간을 보장할 수 없다. 그에 비해 동상은 거의 영구적이라고 생각한다. 영정은 사실적이어야 되고, 동상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영정은 일종의 초상화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가 않다. 그의 영정 보다는 동상을 만드는 일이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2. 영정의 제작의 목적 :
2.1. 고려문화와 전통의 계승
고려시대 제사에서는 왕의 초상화를 그려 이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고, 고려 태조의 경우는 실물 크기의 동상을 그 아들 광종이 만들어 그 후 매년 사계절마다 옷을 갈아입히고 국왕과 전국의 제전에는 항상 모셨다. 왕의 직계 4대의 제사를 지내는 ‘경령전(景靈殿)’이 궁궐 안에 지어져 제사를 지냈다. 이에는 태조의 동상을 포함하여 각 왕의 초상화가 모셔졌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족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난을 갔을 때에 태조의 동상이 모셔져 갔다. 그런데 이 동상은 세종이 고려 국왕 중 몇 분의 제사를 모실 때에 제방(지방)을 써서 지내도록 하고 동상은 태조의 왕릉 곁에 묻으라고 했다. 북한에서 태조 왕릉 곁에서 이 동상을 찾아내었고, 이 동상은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2006년 3달간 국민들에게 공개 관람된 바 있다. 국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에서 영정을 만들어 모셨는데 이를 진전사원(眞殿寺院)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승들의 모습이 탱화로 그려져 전해왔다. 공신은 공신각에 영정을 그려 모시도록 당나라 법제에 규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국자감에는 공자와 제자들의 초상화가 중국에서 수용하여 모신 예도 있다.
그러나 국왕의 경우 영정을 만드는 이런 풍조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주자가례에 의해 제사방식이 바뀌면서 초상화의 전통은 크게 쇠퇴하였다. 조선후기의 영정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들의 초상화였다. 그러나 이때의 초상화는 수염하나도 틀리지 않게 그렸던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요즘 부모 조부모의 사진 영정을 지방과 함께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풍조가 살아나고 있다. 따라서 이승휴 선생의 영정을 재구성하는 일은 고려시대의 문화풍조를 되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2. 미래의 역사 교육을 위한 목적
동안거사의 영정을 만드는 목적이 그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후대인에게 말이나 글보다는 그림으로 보여주려는 점에 있다. 현재는 물론 앞으로의 시대가 글보다는 그림을 존중하는 영상의 시대가 더욱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에 후세의 교육을 위해서 이 작업을 추진한다는 목적에서 제작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2.3. 표준 영정의 대상에 적절한 인물이다.
정부의 표준영정 규정에 “영정의 대상인물은 문화, 과학, 학문, 정치, 종교, 국방 등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선인이라고” 한 것에 동안거사의 학문적 업적으로 보아 그 대상이 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2.4. 시민이 영정 제작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동기가 순수하다.
그의 영정은 후손이 가문을 빛내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척시민이 추진하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영정 제작의 주요 동기가 그가 큰 “제왕운기”를 썼다는 점을 드높이기 위해서이다. 제왕운기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시로 썼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노래로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군주는 물론 대중에게 역사사실을 쉽게 알리려는 목적에서 시로 쓴 것이다. 제왕운기는 조선조의 역사서에서 삼국유사보다 중시한 역사서로 인정되었으며, 1909년대 단군 기원을 사용한 점, 광복 후 단기 연호를 제정함과 개천절의 국경일 제정에 기초 자료가 된 점 등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영상 제작의 정당성은 확보된다.
2.5. 중앙 중심의 역사에서 지방사 중심의 역사 시대에 합당하다.
과거의 역사는 중앙 관료중심의 역사기록을 남겼고 역사의 주체는 왕과 지배층만으로 여겨졌다. 이런 중앙중심, 지배층 중심의 역사가 지방자치화 시대에 각 지방의 역사가 중시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 점에서 삼척시에서 영정을 제작하려는 목적은 시의에 적절하다.
비록 그는 중앙관료로서 활동했지만 삼척에 전 생애의 절반인 30여 년 삼척에 살면서 이웃 농민과도 많은 접촉을 가졌다. 삼척지방에서 그를 ‘갈건처사’로 민중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는 점은 농민과 함께 한 그의 생활을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이다.(강석근, ‘이승휴의 시문학 고찰’, 구비문학대계자료임). 그는 중앙과 지방사를 연계할 수 있는 중요 인물이다.
3. 표준 영정을 만들기 위한 방법론:
3.1. 그의 후손의 유전자 채집을 통해서 영정을 만드는 방법
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후손을 알 수 있는 족보자료도 없고 그 후손을 찾을 수 있는 길도 없다. 이승휴는 가리 이 씨의 시조로 기록되고 있다.
가리 이 씨는 경북 성주에 7개의 본관을 달리하는 이 씨가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가리 이 씨는 현재 극소수가 남아 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그 이후 각종 지리지에는 이승휴는 성주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의 인물임을 확실하다.(장을병, “이승휴의 삶과 정치활동”, 경인문화사간, 2008 참조).
그의 후손 중 셋째 아들인 이연종은 80세를 살았고,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 후손은 개성지역에 살았다고 생각한다. 장남인 이임종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관직을 사퇴하고 시골로 돌아왔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삼척지역으로 와서 산 것 같다. 그의 후손을 찾는 것은 현재 거의 불가능하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영정을 그리기 위해 후손의 사진 수 백장을 모아 화백이 골상을 추리한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전자는 각 세대마다 2분지 1이 어머니 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3.2. 문헌자료를 통해서 그의 인간상과 인성을 찾아내는 방법.
동안거사의 경우 영정이나 동상을 만듦에 참고할 수 있는 문헌자료는 비교적 많다. 특히 그가 자신이 직접 지은 시가 많고 그 저술과정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있다. 그러나 영정을 만들기에 꼭 필요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영정이나 동상의 제작함에는 그의 신체적 상황이나 인성의 파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정의 백미는 그의 얼굴과 눈빛이다. 얼굴을 재현한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영정에 눈빛을 형상화하는 작업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작업을 함에 이런 문헌자료의 연구는 필수적인 것인 것이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4. 그에 관한 자료
4.1. 문집자료:
그에 관한 자료는 고려사의 열전 자료와 기타 세가의 자료 등과 그의 문집인 “동안거사집”이 현재 전하고 있다. 그의 문집은 그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1360년(공민왕 9년) 그의 아들 이연종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문집은 기, 편지 등을 모은 잡저와 그의 시를 모은 行錄 3권과 빈왕록 1권이다. 그가 1287년에 집필한 “제왕운기”는 문집보다 그의 생전에 따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그의 문집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동안거사집의 제왕운기는 1939년에 역사학자인 황의돈에 의하여 구해져 그의 문집 뒤에 부록으로 붙여져 고전간행회에서 영인 출판된 것을 다시 영인한 것이다.(조남호, ‘1930년대 대종교 계열 학자들의 이승휴 이해와 제왕운기에 대한연구’(“선도문화” 28권, 2020).
그의 문집자료는 그가 사망한 후 곧바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사료적 신빙성이 대단히 높다. 제왕운기는 그의 생전에 진주에서 판각되었다. 그의 문집은 경주에서 판각되어 몇 차례 번각본이 나왔다.
그의 문집에는 그의 개인 신상에 대한 가계 기록과 가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성씨도 알 수 없고, 가리현에 왕래한 기록도 없다.
4.2. 내전록
그의 저술에 “제왕운기”와 “내전록(內典錄)”이 있다고 고려사의 그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이 책은 고려사 편찬 이전에 출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현전하지 않는다. 그 책이름으로 보아 ‘대당내전록’과 유사한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그가 인근 사찰인 삼화사에 있던 1천 상자의 불경을 빌려다가 매일 매일 10년간 다 읽고 저술한 것으로 불경에 대한 해설서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차장섭, 2005년도 10월 문화인물 ”이승휴“ 및 변동명, ‘이승휴의 내전록 저술’ ”한문학논집“ 28권, 2009).
그의 문집 편찬 시에는 내전록 자료가 있었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문집에 싣지 않은 것은 제왕운기처럼 이미 간행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불교가 극도로 배척된 상황에서 내전록 간행본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4.3. 빈왕록
그가 50세 때 원나라 사신 중 서장관으로 갔던 자료를 정리한 것이 ”빈왕록”이다. 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빈왕이란 원나라 왕에게 손님으로 간 기록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이는 1290년(지원 27년, 庚寅)에 당시 자료와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것임이 끝 부분에 써져 있다. 이 자료는 우리나라 외교사에 있어서 맨 처음의 사신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 동안거사의 인성과 신체적 특징
5.1.그가 관직생활에서 보여준 성품
“고려사”에 그의 강직한 성품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그가 충렬왕에게 근시배를 배제할 것과 국왕의 사냥함을 중지할 것을 진언한 내용과 양광도와 충청도 2도의 안찰사로 나갔을 때 비리를 저지른 자 7명을 처단하고 재산을 몰수했던 점에서 그의 강직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관직에서 사직한 것이 세 번이었다. 한 직에 2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그는 관직의 유지를 위해서 연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강직한 성품이었다.
그가 1270년(경오, 원종 11)식목도감의 녹사로 관료의 승진 자료를 올리는 일의 실무를 맡았는데 원종 10년(?) 12월 말일에 올린 자료가 잘못되어 1월 1일 승진에서 공이 없는 자가 초탁되고 능력 있는 자가 승진에서 빠져 물의를 일으켰다. 이 일로 재상들이 뇌물을 준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자신이 사표를 제출한 점에서 그의 강직성을 확인할 수 있다(빈왕록 서 참조). 이런 점으로 보아 그의 성품은 직선적이고 관직에 연연하지 않은 성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2. 문학작품으로 본 그의 성품
그는 많은 시를 썼다. 그의 거의 모든 활동은 시로 남겨졌다. 시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을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상대방에게 주는 선물로 활용한 그의 유일한 자산이었다. 시는 문학적 재능을 노출하는 것이고 자신의 감정 노출을 절제하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는 서정시가 아니라 서사시, 서경시가 주를 이룬다. 시는 고금과 동서의 지역을 넘나들었으며, 그의 진솔한 마음씨가 담겨져 있다. 서사시의 대표적인 작품이 제왕운기이고, 서경시의 대표적인 작품은 ‘희우시’와 삼척 요산 산성에서 울릉도를 바라다보면서 지은 시를 들 수 있다.
그는 시만이 아니라 문장력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문장은 1273년 원나라 서장관으로 가서 바친 표문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국왕에게 올린 상소문은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
그의 시에 보이는 성품은 사물을 관찰함에 섬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서사시에서 그의 성품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시는 극도로 절제된 문학이므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찾기 어렵다. 그의 글 중 서장관으로 갔을 때 원 세조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상대방의 심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절한 언사를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성품이 주도면밀함을 알 수 있다.
5.3. 자신의 생활을 직접 기록한 자료
5.3.1.병과시(病課詩)
병과시는 1263( 원종4년, 40세) 때 쓴 것으로 전염병을 겪으면서 지은 시이다. 그 서문에 그때까지의 자신의 중요 한 일을 기록했다. 9세 때부터 공부한 과정, 14세에 아버지의 사망, 종조모집에 부양 받음, 이후 술을 마셔 술미치광이라고 소문난 청년기 방황한 이야기, 과거의 급제, 어머니를 만나러 삼척에 왔다가 몽골병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돌아가지 못함, 반란군의 약탈로 가산을 탕진하자 삼척 구동 냇가에 집을 짓고 어머니를 봉양한 일, 전염병으로 노비 수명이 죽어감, 자신이 어머님에게 약을 달여 드림, 촌 노인과의 대화했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에서 그는 성실한 농부로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의 봉양했음과 출장입상(出將入相)하겠다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촌노와 대화하면서 답변한 내용을 자신의 시로 썼다. 이 시를 쓰는 목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알아주기 바란다!. 내가 행동을 조심하고 스스로 고생함과 행동에 바름을 지켜 아첨하지 않아서 세상에 용납되지 않더라도 또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고 운명이라고 편안히 받아들일 것이다”
이에서도 그의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正道를 걷으려는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고, 검소하면서도 실천적인 지성인이었던 참 선비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인용문의 마직막 표현에서 후일의 동안거사란 자호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다.
5.3.2. 촌거자계문:
문집의 첫머리에 실린 ‘촌거자계문(村居自誡文)’은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자계문의 내용에 “불경을 가까이 하여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말며 때때로 편안히 앉아 마음을 반성하고 태어남과 죽음을 큰 일로 보지 않으며... 불경을 친근히 하여 세월을 허송하지 말라” 식의 불교신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참을 인(忍)자 한 글자가 우리 가문의 묘약이며 이는 유교 불교 도교의 성인이 모두 이를 닦아 깨달았다고 하면서 자식들에게 유념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글은 그가 57세(1280년)에 파직되어 삼척에 돌아와 두타산 구동에 용안당을 세우기 전후 시기의 작품인 듯싶다. 이 자계문에는 “농사를 지음에 많은 욕심을 내지 말고 좋은 농지를 욕심내지 않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짓고, 가뭄에 물코 싸움을 하지 말라” 항목에서 농부로서의 따뜻한 마음가짐과 남을 배려하는 심성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살던 용안당을 간장사로 개칭하고 이에 모든 재산과 토지를 시주하여 사회에 기부 환원했다. 공익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성품을 읽을 수 있다.
5.4. 다른 사람의 평
5.4..1. 고려사 집필자의 평
“고려사” 열전 자료 중 그의 인간성을 평한 것은 세종대에 고려사 열전의 집필자가 평한 것이다. 그의 열전에 성품이 정직하고 세상에서 이름을 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5.4..2. 문집 서문을 쓴 목은 이색의 평
이색(1328~1396)은 이승휴가 죽은 후에 태어났으므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문집자료를 최초로 본 사람이었다. 문집 서문을 쓰면서 “글을 통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고 원나라 서장관으로 명성을 떨친 것을 극찬하고, 그의 글재주와 몸에 닦은 도와 집에서의 올바른 행실 등을 칭찬하고 있다.
5.4..3. 그를 평한 김방경의 평
김방경(1212~1300)은 장수로서 삼별초의 진압, 일본원정에 명성을 떨친 장군으로 84세 때에 최고위의 수상 직과 상락군 개국공이란 공신에 봉해졌다. 그에게 ‘단모부(旦暮賦)’라는 칭송하는 긴 시를 지어 보내자 김방경은 답으로 보낸 글에서 이승휴가 관직에 나옴과 물러남의 엄격함, 노장, 유교, 불교의 수양을 통해 가지게 된 충의를 덕성을 칭찬하고 있다. (이에는 둔헌(遯軒)이란 이승휴의 호가 보이고 있다).
5.5.. 그의 신체적 상태:
이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빈왕록 중에 보이고 있다. 1273년 8월 29일 고려 사신단 일행은 연경에 있는 호천사(昊天寺)를 관광했다. 호천사는 금나라 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절로 이에는 거대한 9층 목탑(기단은 사방 800미터)이 세워져 있었다.
고려인 일행 200명이 관광하기 위해 이 탑에 올라갔다. 다른 사람은 힘에 겨워 3층까지 올라갔다. 오직 상서 송분과 낭장 윤복균과 이승휴 세 사람만이 9층까지 올라갔다. 그 곳에서 내려다보니 멀리 아래 사람이 개미 같았다고 했다.
이로 유추컨대, 이승휴의 신체는 비대하지도 않고 키도 크지 않았던 듯하다. 보통 크기의 신장에 단단한 체력을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가 강릉 근처의 대산(臺山)의 정상에 올라 시를 지은 것이 남아 있어 정상에까지 등산을 할 정도로 단단한 그의 체구와 체력을 짐작할 수 있다.
6. 이승휴의 생애와 각 시기의 특징:
그의 생애는 네 시기로 구분되고 있다.(2005 10월 문화인물 이승휴, 문화관광부 문예진흥원간)
6.1.강화도 수학시기( 1~29세)
그는 개성에서 태어나 9살 때(고종 18년, 1231)에 강화도에 가서 살았다. 이는 최씨 집권자 최우가 몽골병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였고, 그의 가족도 강화도로 들어간 것으로 판단된다. 14세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는 아들을 종조모 원씨 부인에게 맡기고 친정인 삼척으로 간듯하다. 종조모를 어머니처럼 의지했지만 그녀도 사망하자 이승휴가 받은 심적 타격은 대단히 컸다. 유교적 교육을 받기도 했으나 불운해서 술을 마시는 미치광이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방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과 문장력의 기틀이 완성되었다. 그는 29세에 조선조의 대과와 같은 禮部試에 문장력을 시험 보는 제술업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는 문벌의 기반이 없는 자가 문관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6.2. 삼척 생활 시기(30세~40세 1253 고종40~1263 원종4)
과거에 급제한 후 그 기쁨을 어머니에게 전하기 위하여 외갓집이 있는 삼척으로 왔다. 바로 그해에 몽골 군대가 침입하여 철원, 원주 지역에 까지 진격하고 춘천을 함락하였다. 이때 그는 삼척의 요전산성으로 피난하여 전쟁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다음 해 몽골병의 침입으로 길이 막혀 강화도에 돌아가는 일이 미루어졌다.
그가 곧 바로 강도(江都)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던 듯하다. 본가의 기반이 있었으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을 이끌어 줄 자신의 시험관이었던 최자(1188~1260)의 죽음과 종조모의 죽음으로 서울에서 의지할 데가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반역자의 약탈로 가산을 탕진하자 그는 두타산 아래 구동으로 들어가 집을 새로 짓고 직접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래서 귀경하지 못하고 11년을 삼척에서 머물렀다. 1263년 정월 초에 전염병이 돌아 노비 여러 명의 시신을 치워야했고, 어머니의 약을 자신이 직접 다려서 올렸다.
이 시기에 병과시를 썼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실제 할 일을 다 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청운의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6.3. 관직 생활 시기(41~57세 1264 원종5년~1280 충렬왕 6년)
41세 때 강릉의 경흥도호부 판관겸 서기로 임명되어 문관으로서 출세할 수 있는 첫 걸음을 걸었으나 1년 반 만에 사직을 했다. 강화도로 돌아와서 44세 때(원종 8년)에 도병마사 녹사, 식목도감 녹사 등(三官職 종7품직)에 임용되었으나 인사고과의 서류를 잘 못 올린 책임을 혼자 지고 사직했다. 이해는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다.(빈왕록 서문의 自註 是年條를 원종 14년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원종 11년에 원종의 개경환도에 반대하는 삼별초 난이 일어나자 구금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쳤다. 삼별초의 난은 현재 몽골병에 항쟁하려 했다고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이는 무인정권이 개경환도로 무너짐에 대해 반발한 군사들의 집단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삼관 직에서 사직한 것은 원종 10년 이전일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가 삼관 직에 재직한 것은 길어도 2년 정도임은 확실하다. 그는 원종에게 삼별초 난을 진압하는 방책을 건의하였고, 이때 원종은 그의 이름을 메모해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원종 14년(1273) 50세 때 원나라 황후와 황태자의 즉위식에 축하하는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이는 재상들이 세 번이나 서장관을 올렸으나 원종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이 이승휴를 서장관으로 발탁했다.
서장관은 외국의 현지에서 외교적 조처의 글을 쓰는 점에서 문신들이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직책이었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원 세조에게 올릴 표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이는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고려 사신단이 5일이나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던 원나라 관반사의 환심을 이승휴는 시를 지어 줌으로 그들과 친근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표문을 올려 원 세조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다.
그는 성공적인 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때가 그의 관료로서의 최고의 자부심을 느꼈던 시기이다. 그는 다음해 원종이 승하하자 부고를 알리는 일로 다시 원에 가서 충렬왕을 모시고 돌아왔다.
이때 그는 충렬왕에게 즉위식에서 고려의 복식과 예제를 행할 수 있도록 조언하여 이를 허락받았다. 이와 같이 고려 문물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아들 이연종에게서도 볼 수 있다. 공민왕이 원에서 돌아올 때 이연종은 체두변발과 원나라 복제를 포기하도록 단언하여 공민왕이 그대로 따랐다.
이승휴는 충렬왕이 원에서 돌아와 즉위할 때에 수행한 공이 있었고, 문학적 재능이 있어 충렬왕 즉위년에는 관료로서 가장 명예로운 대간직(합문지후, 감찰어사, 우정언, 우사간-종5품~정6품직)을 맡았다. 그러나 대간의 활동은 군주가 명군일 때 빛을 발휘하는 것이지 근시배와 아첨배가 군주를 둘러싸고 있으며, 올바른 정치를 하려는 의지가 없는 군주 하에서는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는 우정언으로서 충렬왕 즉위년에 15개 항을 건의하였으나 수용될 리가 없었고. 그 해에 양광도와 충청도의 안찰사로 나갔다. 이 때 그는 부정부패한 관료 7명을 처단하자 그들의 모함을 받아 동주 부사(철원)라는 직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그는 동안거사라는 호를 지어 울분을 스스로 삭였다.
충렬왕 6년(1280, 57세) 감찰 직인 전중시어사(사헌부 종5품직)로 임명되어 시정득실에 관한 열 가지를 상소했다. 이 상소로 충렬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관직생활을 불명예로 마쳤다.
충렬왕이 원 공주를 박대한다는 이유로 24년 1월 세자 충선에게 선양하여 태상왕으로 있다가 8월에 태상왕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충선왕은 의욕적인 개혁 정치를 하려고 관직을 고치고 인사를 초치했다. 이 때 이승휴는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갔다. 그는 75세의 나이라는 점을 들어 사직하고 한 달 만에 삼척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림원시독학사 겸 좌간의대부(문하부 종4품직) 충사관수찬관 지제고의 직을 받았고, 밀직부사 감찰대부(정3품) 사림원승지 직을 받아 致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려사열전). 충선왕의 재위는 겨우 8개월 만에 끝났다. 종4품직은 그가 받은 최고위의 관품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관직에서 퇴임하였다는 치사라는 서술은 적절하지 않다. 치사란 오랜 관직 생활을 하다가 70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는 뛰어난 문사로서의 재능을 가졌지만 무인집권기에 집정관과 왕권의 갈등, 원나라 간섭하의 부원배와 근시배가 전횡하는 상황에서 관직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았다.
6.4. 삼척에서 새로운 삶의 시기(57세~77세)
그가 57세 (1280) 때에 관직에서 파직되어 삼척으로 돌아왔다. 저술과 공부에 집중한 시기이다. 그는 가족을 돌보거나 자신이나 자신의 가계에 대한 글을 남기는 문제 등에 매이지 않았다. 당시 그의 가족은 재취한 부인과 열 살 미만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추정된다.(셋째아들 이연종이 1360년에 70세였던 점). 그 무렵에 쓴 ‘촌거자계문’에는 30여 가지의 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문장도 첫 구절에서는 “자신이 양반 집 후손으로 허술한 집을 짓고 나에게는 헛된 이름만 남아 있으니,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 시작하여 뒤에서는 너희는 어떻게 하라는 말과 참을 인자 한 글자가 우리 집의 妙藥이고 삼교 성인이 이를 닦아 깨우쳤으니 너희들은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맺고 있다. 아마도 이 글은 정리되지 않은 초고인 듯하다. 이는 자신이 경계할 내용이 아니라 어린 자식들에게 경계할 내용을 나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후일 별도로 써야할 문제이지만 요점만을 말하면 선비로서 절개를 잃지 말며, 방일하지 말라, 검소하고 자신을 낮추라는 등의 유가적 교훈과 불경을 가까이 하여 태어난 일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 등 불교 신앙을 통한 인생의 생사에 대한 소신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64세 때에 그는 ‘제왕운기’를 써서 그우리나라 역사학계에 큰 업적을 성취했다. 67세 때에 그는 ‘빈왕록’을 썼다. 또한 불교서인 ‘내전록’을 저술했다. 이들 저술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연구가 되었기에 생략한다.
7. 영정을 만드는 대상 시기의 문제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생애 중 영정을 제작한다면 어느 시기를 할 것인가를 말해보겠다. 관료기인 그의 생애 제2기와 최후 집필기인 제4기 중에 택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제2기는 관료생활 중에서는 그가 득의한 시기인 50세의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영정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인 관료생활은 결코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영정을 만든다면 당시 그의 직책이 무엇이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어 관복의 그림에 어려움이 따른다. 관료상의 영정은 75세 때 감찰대부의 영정을 그릴 수도 있지만 이는 다른 사람처럼 관직을 연임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한 일도 없으므로 그의 관직에 대한 일대기를 소상히 아는 사람에게는 빈축을 살지도 모른다. .
더구나 동안거사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이를 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승휴를 숭앙함은 제왕운기를 썼기 때문이다. 결코 그의 관직이 고관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60세 전후의 영정이라면 두루마기를 입은 학자로서의 영정이 될 것이니 복제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한복을 입고서 책상에 앉아 열심히 집필하는 그의 모습을 그리면 어떨 가 생각한다. 삼척에 동상을 세운다면 물론 제4기의 것이 좋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다.
8. 맺음 말
이승휴는 64세 때에 ‘제왕운기’를 집필하였다. 그 집필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그 집필에 준비하고 초고를 고친 기간을 치면 10여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당시 세계 대제국인 원나라와 부마국 고려와의 관계는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임을 그는 느꼈을 것이다. 제왕운기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는 원나라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국가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는 갑자기 일어난 나라와는 달리 앞으로 역사를 장구히 이어갈 것을 그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원나라와 공존하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역사만이 아니라 중국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의 개방적인 국제관계 속에서 가지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는 제왕운기를 집필했다 고 생각한다.
이승휴는 시인이고 문인이었기 때문에 역사를 시로 쓴 노래였다. 이는 역사를 대중화하려는 뜻이 있었다는 차장섭 교수의 견해는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음악과 춤을 상고의 부족국가시대부터 즐긴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런 문화적 속성은 현재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전통은 그가 다시 크게 조명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승휴의 영정을 만드는 것은 앞으로 필요하다. 그 영정을 만드는 작업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그의 후손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영정을 공인받기에는 힘이 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정의 제작은 전문 화백과 연계되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이 아니다. 종이나 천에 만드는 영정은 그 보존 연한도 극히 짧다.
그렇다면 영정을 만들기 전에 큰 규제를 받지 않는 동상을 먼저 세음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삼척시민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함께 해야 할 일이며, 국가적으로 지원되어야 할 대상이다.
앞으로 삼척에 동안거사 공원을 만들고 동상을 세우며 기념관을 세운 후에 영정을 만듦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작업은 한국인의 역사 정신을 전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세계적인 역사관광지로 만듦에 기초가 될 것이다.
이런 힘든 작업을 추진하는 강원일보 국장 박미현 박사의 열성을 높이 치하하며 삼척시민에게 용기를 가지고 힘내라는 격려를 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끊임없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저를 흥기시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참으로 훌륭한 발제문입니다.
영정에 관하여 새롭게 인식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간을 내어 다시 정독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교헌
지교수님 반갑습니다. 영정을 만들기 위한 전문가 집단의 세미나여서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생략했습니다. 공인된 영정이 98명이나 된다고 함에 저도 깜작 놀랬습니다. 자료가 없는 을지문덕, 양만춘, 장보고 등등 많은 역사인물이 이미 만들어 졌군요. 선생님의 좋은 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 박사님 덕분에 훌륭한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공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여러 언론매체에서도 보도를 통해 정 박사님의 발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인물의 영정을 만드는 사업에 정 박사님이 큰 역할을 하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정 박사님 소개가 된 언론보도를 참고로 덧붙입니다.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4203
감사합니다. 장천선생 원고의 오탈자 일부를 수정해야겠습니다.
장천선생의 제보로 저의 발제 제목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발표문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그를 관료상을 영정으로 만들려는 주최측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었습니다. 원전과 관련 논문을 여러편 읽으면서 힘들여 쓴 글입니다. 그의 신체, 그의 촌거자계문에 대해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긴 글을 독자에게 부담을 주었을 것 같아 한편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정 박사님이 공들여 쓰신 발제문을 나름대로 꼼꼼히 읽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눈도 침침하실텐데 어떻게 이런 귀한 옥고를 써내셨는지 감탄했고, 둘째 이승휴라면 드라마에도 나오고 유명한 역사적 인물인데 초상 영정이 아직도 없는지 의아해서 제가 귀하게 읽었던 손철주 선생(미술평론가, 학고재 출판인)의 저서 <사람 보는 눈>에 혹시 이승휴 초상 언급이 나오나 싶어 다시 펼쳐보았습니다만 발견치 못했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어느 분의 블로그에 이승휴 관련 이미지(얼굴)로 보이는 그림이 있기에 관심있게 보았으나 출처를 알길 없어 지나쳤습니다.그러다가 강원도지역 언론보도도 접하게 됐습니다.
@윤승원 이승휴 영정 사업 관련 학술 심포지움을 연다는 기사였고, 여기에 정박사님이 발제를 맡으셨다는 기사를 보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모쪼록 역사적 인물의 영정이 훌륭하게 만들지고 더불어 정 박사님의 학문적 토대로 생생한 사실적 인물像이 그려져 동상까지도 건립되기를 기원합니다.
1 영정을 만드는 일이 인터넷 시대에 그 파급효과가 대단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몇몇 화백에 의하여 그려지고 있다는 점과 문중의 영정만들기가 판을 치지 않을가 염려됩니다. 역사만들기에는 진보적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문중의 선조 영정만들기에는 보수적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실학자 중 반계유형원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후손이 끊겼고, 힘이 약합니다.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의 경우 그들의 학문적 업적이 크기도 하지만 후손들의 힘에 의하여 성호학, 다산학이라 하여 학보를 발간하고,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2. 아마도 유형원의 영정만들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런 문중의 힘은 역사학을 발전을 위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반계사상연구소를 만들어 후손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중사학은 임진왜란의 의병연구에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각 문중이 자기 선조의 의병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에 역행합니다. 좋은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체육부에서 표준영정 일람표를 찾아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
본 주제 세미나에 직접 참석하지 못함에 못내 아쉽습니다. 저희 문중에서도 시조님 외 추가 중시조, 파시조 영정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복지겸 장군의 경우 영정을 만들 만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의 발표문은 삼척시 동운당에 모실 영정을 만드는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합의를 보았습니다. 삼베옷을 입은 영정으로 그리기로 1단 정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