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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임란의병전적지...........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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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임란의병전적지...........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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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봉화군 소천면 화장산 비탈에 자리잡은 임란의병 전적지를 찾았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유랑자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사적비부터 읽어 본다. 날씨가 무덮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
해서 기꺼이 산화한 의병들이 묻힌곳인 만큼 여느 관광지와는 다른 엄숙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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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적지는 1592년 7월 26일, 창의대장 류종개가 이끄는 의병 600여명은 침입해오는 왜군 3천여 명을 격퇴하
기 위해 출정했다. 왜군은 강원도 일대를 유린하고 이곳 화장산 노루재를 거쳐 영남내륙으로 침투하려는 일본
군 선발대를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곧이어 조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본대를 맞아 혈투 끝에 전
원이 산화한 곳으로 의병장 류종개와 의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호국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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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창, 칼, 도끼 등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의병군은 1592년 7월 26일 일본군 선발대를 상대로 한 첫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이틀 후 전열을 정비하고 재차 공격해온 일본군 3천여 명에 맞서 여러 골짜기와 산봉우리에서 피
비린내 나는 백병전을 전개했으나 역부족으로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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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개를 비롯한 6백여 명의 의병은 전원 전사했다. 그러나 소천전투에서 1,600여 명의 병력을 손실한 일본군
은 혼비백산하여 진군의 동력을 상실, 결국 봉화, 안동땅을 점령하지 못하고 영양을 거쳐 울진, 영덕 방면으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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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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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면 류종개가 이끄는 의병군은 봉화 쪽에서 울진 방향으로, 내륙에서 바다를 향해 동진(東
進)하며 노루재를 넘었다. 그런데 의병군의 행군로가 상식에 맞지 않았다. 상식은, 일본군은 남에서 북으로 진
군한 침입군이다. 적들은 부산에서 한양으로, 다시 평양과 함경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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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일본군은 상주에서 안동을 거쳐 동진하여 봉화로 침입해야 상식에 부합한다. 즉, 일본군과 맞서 싸우
려는 의병은 적들과 반대 방향으로 행군해야 하므로 서진(西進)이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의병들도 동쪽으로 갔
다? 침략군과 의병군이 나란히 동쪽으로 이동했다면, 의병군은 적들을 뒤에서 습격하기 위해 그렇게 움직인 것
일까? 아니다. 상식과 다르게, 일본군은 동해를 등진 채 서진하여 봉화로 쳐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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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임진왜란 의병전적 기념비
봉화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감연히 결집하여 생사를 돌보지 않고 맨주먹으로 왜적에 항거하며 일대 격전
을 벌인 유서 깊은 곳이다.
임진 1592년에 왜구들이 우리 강토를 무단으로 침략하여 도성이 함락되고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류종개(柳宗介),
임흘(任屹), 김인상(金麟詳),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권경(權檠), 금은(琴檼), 김중청(金中淸), 권현수(權賢秀) 등은 뜻을 모아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의병 수백 명을 모았다. 성균관 전적이었던 류종개를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봉화의병부대를 편성 왜적 토벌
에 나섰다.
임진년 7월 26일 봉화 의병들은 삼척 울진에서 이 화장산을 넘어 안동 내륙으로 가려던 왜장 삼길성(森吉成)의 선발대를 이곳 노루재와
살피재에서 매복기습작전으로 서전을 통쾌하게 승리하고 소와 말 깃발 등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틀 후 왜적의 본대 3천여
명을 맞아 중과부적으로 끝까지 결사 항전하였으나 수백여 의사들이 장렬히 전사하였다. 대장 류종개는 왜적에게 생포되어 간악한 왜
군들이 칼날을 세워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적장을 꾸짖으며 숨을 거두었다. 비록 수차
례의 혈전에서 의병들이 거의 옥쇄의 비운을 맞았으나 적군 또한 대다수 살상된 후환이 두려워 내성 안동으로는 진군을 포기하고 울진,
영덕 방면으로 패주하니 안동은 다행히 왜적 불답(不踏)의 안전지역으로 보호되었음은 의사들의 고귀한 희생의 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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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장한 기개와 거룩한 의지로 고군분투하다 끝내 승첩치 못하고 산화하시어 살신성인으로 위국충절을 바쳤으니 그 장렬함에 어찌
숙연 통한치 않으리오. 그 시신조차도 수습치 못하여 산록에 머무른 구름도 계곡에 흐르는 물조차도 오열하는 듯 심산궁곡에 한을 남긴
영령들이 되었도다.
그 후 조정에서는 이 아름다운 순국충절을 기리어 류종개 대장에게는 통정대부 예조참의를 증직하고 김인상, 윤흠신, 윤흠도와 함께 정
려를 내렸으며, 금은은 공조참의를 증직해서 그들의 공을 기렸다. 또 이 전적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감관 1인, 산직 2인을 두어 고종 36
년(1899)까지 지켜왔었다.
류종개는 상운면 문촌리 문계서원에 제향하였으며 충신각을 보존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말살된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충효사상을 고취
함과 아울러 선열들의 넋을 위안하고 애국충정을 영원한 사표로 추모하여 봉화군과 봉화문화원이 1985년에 노루재 일대를 정화하여
중턱에 기념비를 세우고 북두칠성 모형의 적석칠봉을 쌓고 해마다 추모제를 올렸으나 2006년부터 전적지 성역화 사업으로 의총, 기념
비, 사당, 기념관을 만들어 후대까지 그 숭고하고 고귀한 뜻을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리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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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본군은 한양에서 강원도로 진입한 후 원산에서 해안선을 타고 내려온 남하(南下) 침입군이었다. 그들은 삼
척을 거쳤고, 이윽고 울진에 닿은 후 일부는 계속 남진(南進)하여 영해로 가고, 나머지 일부는 태백산맥을 넘어
안동을 향해 서진했다. 그래서 봉화 의병군이 동진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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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서 내려와 안동 방면으로 공격해온 일본군, 물론 일본군도 처음부터 동해 쪽에서 안동 방향으로 침입
할 계획이었던 것은 아니다. 1592년 4월 25일 상주 북천전투에서 이일의 조선 중앙군을 진압한 일본군은 한양
을 바라보며 내달렸지만, 그 후 일부 병력을 보내 안동을 점령하려 했다. 안동을 향해 진격해온 적은 가등청정
(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 부대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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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적들은 경상좌병어사 성응길의 조선군을 뚫지 못하고 다인(의성군 다인면) 쪽으로 물러갔다.
당시 안동의 지휘부는 이미 붕괴된 상태였다. 울산의 경상좌병영으로 출동했던 부사 정희직은 그 후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청송으로 피란을 떠나버렸고, 그 이후 복귀한 판관 윤인성도 군사를 모으는 데 실패하자 풍기 쪽으
로 달아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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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예안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자리를 굳게 지키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성응길과 신
지제의 분투에 힘입어 당분간 안동 일원은 적의 치하에 들어가지 않고 안전 지대로 남았다. 그래서 상주 선비
조정의 <임란일기>에는 그 가족들이 안동으로 피란한 기록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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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적들이 안동 일원을 계속 가만히 놔둘 리는 만무했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 8
도를 분할 점령한 뒤 곳곳에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로 결정했다.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은 평안도, 가등청정은 함경도,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전라도...... 식으로 적들은 분할
통치할 지역을 분담하였다. 경상도는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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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6월 22일에 이르러 적들은 안동에 난입했고, 7월 8일에는 예안도 함락되었다. 하지만 조선군과 의병들은
그 이튿날인 7월 9일 예안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9일에는 안동에서도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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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일본군이 공격해온 때가 바로 7월 하순, 강원도에서 남하해 온 삼길성(森吉成, 모리 요시나리)의
일본군 4군의 침입이었다. 그래서 적들은 동해 쪽에서 몰려 왔고, 이를 막기 위해 봉화 의병군은 노루재를 넘었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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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류종개, 임흘, 김중청, 윤흠신과 그의 아우 윤흠도, 김인상, 김성일의 조카 김철, 권경 등 600의병들은 노
루재 일원에 매복한 채 적들을 기다렸다. 3천 명이나 되는 일본군은 조총 등 신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인 데 반해
아군은 무기도 변변하지 못한 농민군이었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의로운 기운 하나만은 우리 의병이 적들보다
훨씬 드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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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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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소리를 들으면 나아가 싸우고, 징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그쳐야 한다.
2. 북소리가 끊이지 않으면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으며, 함부로 물러서는 자는 벨 것이다.
3. 징소리가 두 번 울린 연후에 후퇴할 것이요, 후퇴에 늦은 자는 벨 것이다.
4. 군대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벨 것이다.
5. 늦게 모이는 자는 벨 것이다.
6. 사사로이 민간의 물건을 취하는 자는 그것이 비록 작더라도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
7. 군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줄 것이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줄 것이다.'
일곱 가지 군령 아래 훈련을 해온 의병군이었다. 게다가 이 의병군을 제외하면 노루재로 출동하여 적과 맞서
싸울 만한 군대가 달리 존재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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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6일, 이윽고 첫 전투가 벌어졌다. 적의 선봉대가 앞서 나타났다. 매복하고 있던 의병군은 적들을 기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적은 많고 우리는 적었다. 7월 28일, 적의 본대가 몰려왔을 때는 이미 중과부적이었다.
600명 아군은 1600명이나 되는 왜적을 척살했지만 결국 대부분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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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군사를 잃은 일본군은 분풀이를 하느라 류종개, 윤흠신, 윤흠도, 김인상, 권경 등 전사한 아군 장수들의 '얼
굴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하늘에 매달았다. 아직 죽지 않은 아군은 불로 몸을 지졌다.(삼강행실사적)' 왜적이 물
러간 뒤 김인상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서 자신이 지어주었던 옷으로 겨우 분별해 장사
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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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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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노루재를 지킨 봉화의병군의 사흘에 걸친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결코 허망한 전몰은 아니
었다. 아니, 봉화의병군의 사흘에 걸친 장렬한 전투와 죽음은 그 이후 경상북도 북부 지방을 지켜내는 밑거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경상도 전역의 전쟁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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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군대 중 절반인 1600명을 노루재에서 잃은 일본군은 전투력이 급감했고, 사흘 동안의 시간을 번 덕분에 후
방에선 1천여 명의 군대를 조직하는 등 전투 준비를 갖춘 안동의 안집사 김륵 등을 누를 여력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영해로 내려간 일본군도 영해부사 한효순, 군관 장립, 박언국 등의 활약에 막혀 더 이상 남쪽으로 진군
하지 못했다. 결국 왜적들은 경상도 북부 일원에 대한 침범을 포기한 채 강원도로 돌아갔고, 강원도 내륙 깊숙
한 곳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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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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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소천전투를 계기로 일본군의 경상도 북부 지역 장악은 불가능해졌고, 이 지역을 발판으로 한 조선
군의 반격으로 일본군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경상도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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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영화 사업은 정부의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부터 4년간에 걸쳐 추진됐으며, 1만4천
471㎡(4천380여 평)의 부지에 국비 17억9천만원, 도비 4억8천300만원, 군비 11억7천200만원 등 총 34억원이
투입돼 사당과 전시관 등 7동의 건물과 석축, 토석담장, 마사토 포장, 의총, 사적비, 부대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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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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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848
(도로명)경북 봉화군 소천면 현동길 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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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나 지금이나 나라지키는건
총 칼 보다무서운
백성의 마음 이죠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지는 않는 분들이지만
의병활동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그 분들이계셨기에
지금의 나 도 존제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구하는것은
양반 나부랭이 사대부가 아니요. 오늘날 국개들이 아닌
풀뿌리 민초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소위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호의 호식하는데 민초들은 코로나로 인해
피눈물 흘린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
암튼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