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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말에 나온 <말과활> 창간호에 '밀양 송전탑 싸움'에 대한 내용을 에세이 형태도 쓴 글입니다. 전문가협의체 이전까지 다루었고, 내용이 좀 깁니다. 원래 제목은 <밀양 송전탑 할매들은 왜?>입니다.
분노에 주름지다
이응인(시인, 밀양시 부북면)
“지금 우리나라에 핵발전소가 몇 기 있습니까?”
“그러면 그 중에 고장이 나거나 짝퉁 부품을 써서 가동 중단 된 건 몇 기입니까?”
지난 5월 29일 저녁 7시, 밀양 영남루 아래 계단에서 105번째 송전탑 반대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사회자의 질문에 산골에서 온 할매 할배들은 서슴없이 대답한다.
“23기요.”
“10기요.”
우리는 지금 23기의 핵발전소 가운데 10기가 멈추어선 나라에 살고 있다. 송전탑을 반대하고 나선 밀양의 할매 할배들 말고,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밤을 낮처럼 밝혀 놓고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은 송전탑의 비밀을 알고 있을까?
5월 20일 송전탑 공사 재개
나는 밀양에 산다. 송전탑 반대 싸움이 치열한 시골 마을, 그 이웃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야 돌아오는 생활이라서 낮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잘 모른다. 그래도 나름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외지 사람들보다야 이곳 소식에 밝은 편이고, 마을 어른들을 만날 기회도 자주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송전탑 이야기를 어설프게나마 해 볼까 한다.
지난 5월 17일 부처님 오신 날 오전, 오토바이를 탄 낯선 이가 우리 집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길을 묻는 이인가 싶어 다가갔더니 오토바이는 곧바로 옆집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우편함에 전단지 한 장이 들어와 있다.
‘밀양 765kV 송전선로 건설공사 관련 대국민 호소문’
한전 사장 이름으로 나온 호소문은 이렇게 끝난다.
“앞으로 한국전력은 횃불을 밝히며 야간 공사를 단행해서라도 올 12월 신고리원전 3호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농사와 일터로 차질 없이 내보낼 수 있도록 765kV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건설 공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횃불을 밝히며 야간 공사를 단행해서라도’라는 구절에서 무섬증이 밀려왔다. 초고압 송전탑 공사를 저렇듯 막 해도 되는지? ‘신고리원전 3호기에서 생산된 전기를 농사와 일터로 차질 없이’ 보내겠다는 구절에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 밀양에서는 그런 전기가 더 이상 필요 없는데, 저렇게 억지를 부려도 되는가? 갑자기 멍해졌다. 오늘 뭘 하려고 했는지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컴퓨터를 켰다.
‘5월 20일부터 밀양 송전탑 공사를 재개’ 뉴스가 줄을 이었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건 뉴스마다 좀 전에 내가 본 대국민 호소문이란 걸 전문을 실어 놓았다. ‘언론에다가 단단히 작업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다음날인 18일, 부북면 평밭마을로 가는 고개, 129번 송전탑 자리에 있는 움막을 찾아갔다. 내가 내민 호소문을 보고 이남우 할배는, 불과 며칠 전 국회에서 한전과 반대 대책위 사이에 간담회가 있었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펄쩍 뛰었다. 이번에는 본때를 보일 거라며 한번 보라고, 곁에 선 할매들이 매섭게 빗장을 넣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신문과 방송 기자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등 뒤로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평밭마을과 움막을 뒤덮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음날, 단장면 동화전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앞에 대절버스가 두 대 서 있고, 주변에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어 사람들이 빙 둘러선 모습이 보였다. 통합민주당 정동영 고문이 이곳을 지나게 되어 주민들의 발언을 듣고 있었다. 동화전 김태연 어른이 마이크를 잡고 있다.
“한전은 우리가 제시한 방안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올 연말에 완공되는 신고리 3호기 전기는 기존의 신양산-동부산 송전선로, 신울산-신온산 송전선로로 보내라는 겁니다. 그러고 아직 착공도 하지 않은 5,6호기가 완공되는 10년 동안 우리가 제시한 지중화 방안을 검토하라는 겁니다. 올 연말에 공사가 시작되는 울산-함양고속도로와 밀양의 송전 선로가 15키로 구간이 겹칩니다. 지중화를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대절 버스가 떠나자 주민들은 서둘러 논밭으로 흩어졌다. 얼른 일 하고 이따 저녁에 다시 만나자며 걸음을 재촉한다. D-1일이다.
공사를 재개한다는 20일 출근길, 맞은편에서 경찰 버스가 줄지어 달려오더니 산 아래 마을로 향한다. 이날, 한전 직원, 하청업체 인부와 500명의 경찰이 7군데 송전탑 공사 현장을 에워쌌다. 마을마다 겨우 서너 명에서 대여섯 명의 할매, 할배들이 현장을 막아서다 끌려나오고, 정신을 놓아 병원으로 실려가기 시작했다. 부북면 위양리 127번 현장에서는 이금자 할매가, 상동면 도곡리 109번 현장에서는 서홍교 할배와 이갑수 할매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
퇴근길에 병원으로 달려가니 이금자 할매는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우리를 알아본 할매는 그만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놈들이 움막을 막 부수고, 한옥순이…….”
할매가 몸을 떨었다. 곁에 서 있던 따님이 부탁했다.
“제발 가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심장이 벌렁대고 안정이 안 되어 이러다가 큰일 납니다.”
이날 밤, 자녀들은 이금자 할매를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21일 저녁 무렵, 민주당 원내 대표단이 부북면 현장에 온다고 해서 위양리 화악산길 입구, 평밭마을 진입로에 있는 움막으로 갔다. 길가 양쪽 나무에다 밧줄을 겹겹 쳐 길을 막고, 경운기와 트럭을 세워 이중 삼중으로 차단을 했다. 서 있는 국회의원들, 바닥에 앉은 마을 주민들, 이들을 둘러싼 기자들, 꼭 영화 촬영 현장 같다. 이날 오전, 공사를 하러 온 한전 직원들과 대치하던 장재분 씨가 나무에 걸어논 밧줄에다 실제로 목을 매달았다는 말에, 주민들은 울부짖고, 국회의원도 울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단체 사람들도 훌쩍였다. 주민들의 발언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가 움막 옆 길가에 놓인 의자에 와서 주저앉는다. 장재분 씨다. 목에는 밧줄에 조인 핏자국이 벌겋다.
‘나 하나 죽어서 이 싸움 끝난다면 그러고 싶다.’
지난 해 1월 16일, 산외면 보라마을에서 분신하신 이치우 어르신의 말씀도 그러했다. 이렇게 막막한 싸움에 부딪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자식보다 더 어린 새파랗게 젊은 것들한테 어른들이 온갖 모욕을 당하는 걸 보면, 순간 생각이 획 돌아선다고 한다. ‘나 하나가 죽어서 이 싸움이 끝난다면….’ 목덜미가 서늘했다.
20일에 시작된 공사는 한 주일 내내 주민과 대치하며 계속되었다. 20일 세 분에 이어 21일 세 분 어른들이 병원으로 실려갔다. 22일 바드리 현장에서 두 분 할매가 쓰러져 헬기에 실려나오고, 부북면에서는 권영길 이장님 등 다섯 분이 쓰러졌다.
움막과 땡볕에서 만난 어른들
주말인 25일에야 화악산길 입구 움막을 다시 찾았다. 길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주말이라 희망버스를 타고 온 대학생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127번 현장에 올라가 보고 싶다고 하니 김길곤 할배를 따라 가란다. 팔순의 김길곤 할배가 이곳 싸움터 길라잡이 운전사가 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127번 현장으로 올라가려다 돌아보니 맞은편 언덕에서 이쪽을 쏘아 보며 보초들 서는 이들이 있다. 한전 직원들이란다. 127번 현장 입구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자리를 지키고 있고, 몇 걸음 더 올라가니 송전탑 자리 한쪽 구석에 천막이 보인다. 할머니 세 분, 아저씨 한 분, 젊은 아가씨 셋이 모여 있다. 아가씨들은 대전인가 어디서 이곳 소식을 듣고 어제 달려왔단다. 좀 있다 파란색 티를 갖춰 입은 아주머니들 넷이 몰려왔다. 울산에서 온 학습지 노동자들이란다. 좀 더 있으니 아래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막 올라온 한옥순 할매와 장재분 아지매 두 사람이 현장으로 오다 맞은편 한전 직원들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내 눈 앞에서 썩 안 꺼지나!’ 하는 한옥순 할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부터 공사 안 한다고 했잖아!’ 하는 장재분 아지매 고함 소리에 이어 뭐라고 상대가 대꾸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것들이 어쩌고’ 하더니 둘이서 달려들어 그만 순식간에 한전 직원들을 언덕 너머로 몰아내버렸다. 좀 있다 학습지 노동자 아지매들과 트럭 짐칸에 함께 타고 산을 내려와 움막에서 헤어졌다.
26일, 밀양의 오지 가운데 하나인 단장면 바드리 마을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이 끝나니 널찍한 평지나 펼쳐졌다. 차를 세워 두고 89번 송전탑 자리를 찾아 내려가다 먼저 마주친 건 하청업체 직원들, 이어서 한전 직원들이 보였다. 이들은 각기 다른 색의 조끼를 입고 있었다. 숲 한가운데 나무를 다 베어내어 벌건 비탈 아래쪽에 굴삭기 두 대가 버티고 있었다. 내려가 보니, 그 두 대의 굴삭기에 기대어 한쪽에는 동화전 마을의 할매와 아지매가, 맞은 편에는 안동에서 왔다는 두 아가씨가 앉아 공사를 막고 있다. 하늘을 가리는 천막 하나 없는 땡볕이다. 좀 있다 방송사 카메라가 들이닥쳤다.
위로 좀 더 올라가면 산 능선에 88번 현장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이 끝나자 오뚝한 산 능선에 굴삭기 한 대만 덩그렇게 눈에 들어왔다. 그 굴삭기 뒤에서 주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회동 어른들이다. 여긴 어찌 한전 직원들이 안 보인다 해서 물었더니, 위쪽 나무 숲 그늘에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가는 곳마다 한전 직원들과 하청업체 직원들은 나무 그늘에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이 나무를 베어낸 땡볕에서 주민들이 굴삭기를 붙들고 있다.
“22일 싸움은 생각만 하면 끔찍해요. 우리가 88번에 있다가 89번에서 공사를 한다고 해서 주민 일고여덟이 산을 기어올라 보니 경찰 80여 명이 굴삭기를 3중으로 둘러싸고, 인부들이 굴삭기 시동을 걸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순식간이었어요. 할매 셋이 3중으로 둘러싼 경찰을 뚫고 굴삭기 밑으로 들어갔어요. 그러고는 밧줄로 굴삭기에다 몸을 묶었지요. 한전 직원들이 25명 정도 됐어요. 몰려와서 할매들을 끌어내려고 해도 안 돼요. 여경을 데려오고 그러다 안 되니까 한전 직원 한 사람이 큰 커터칼 있지요. 그걸 가지고 왔어요. 정말 아찔한 상황이었어요. 경찰이 그걸로 밧줄을 끊고 할매들을 끌어냈지요. 끌려나온 할매 둘은 그 자리서 기절했어요. 구조헬기를 부르고 한참이나 지나서 헬기가 와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요.”
“이곳 바드리 마을 주민들은 안 보이네요.”
“이 마을 사람들은 한전에서 마을로 올라오는 길을 확장해 준다니까 도장을 찍어 줬답니다. 한전이 마을 도로 포장해주는 행정기관입니까?”
산을 내려오다 생각하니 89번 땡볕에 있는 할매와 아지매가 눈에 밟혀 생수를 사들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8년간의 긴 싸움
최근에서야 외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밀양 송전탑 싸움은 오래 되었다. 2005년 12월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여수마을 주민들이 한전 밀양지사 앞으로 몰려와 항의 집회를 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주민 설명회도 제대로 하지 않고 산골 마을을 76만5천 볼트의 고압으로 둘러싸겠다는 데 대한 항의 집회였다. 시골 노인들이 난생 처음 하는 데모, 나도 잠깐 그 자리에 함께 서 있었다.
송전탑 문제가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는 걸 확연하게 알게 된 건 2007년 12월이었다. 경남도지사 이름으로 온 우편물을 받고 나서야 주민들은 ‘이게 그 놈의 송전탑이구나!’ 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업자원부장관이 전원개발촉진법(電源開發促進法) 제5조의 규정에 의거 승인한 765kV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2구간) 건설사업에 귀하 소유 토지가 편입 예정되어 동법 시행령 제17조의 규정에 의거 전원개발사업 실시계획 승인사항 열람을 안내하오니 기한 내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사전에 말 한 마디 없이 ‘귀하 소유 토지가 편입’ 된 것만도 속이 터지는데, 더욱 황당한 건 한전에서 해 주는 보상이란 게 철탑이 들어서는 자리와 송전선이 지나가는 아래쪽 땅(선하지)에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다. 단장면 동화전 마을 양상용 할아버지가 법원에 낸 탄원서의 사연은 이렇다.
저는 가난하고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결혼을 해서는 날품을 팔아 겨우겨우 먹고 살았습니다. 내 땅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 저녁마다 죽을 끓여 먹고, 버려진 땅에 고구마 심어 삶아먹고, 칡뿌리를 캐고 쑥을 뜯어 삶아먹으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돈이 조금 모이자 비탈진 산을 싼 값으로 샀습니다. 그게 30년 전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내 땅이 있는 게 너무나 좋아서 밥만 먹으면 그곳에 가서 일했습니다. 괭이로 땅을 파고 맨손으로 돌을 골라내고, 톱과 낫으로 잡목을 베어내고 밤나무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밤나무 단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밤나무 밭에서 버는 돈은 일 년에 7~8백만 원 정도이지만 그 돈이면 우리 부부는 삽니다. 지금 내 나이가 일흔둘입니다. 힘이 남아 있는 한 밤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3년 전에 밤밭을 1억5천만 원에 팔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내 힘으로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에 안 팔았습니다.
그런데 한전에서 이 밤나무 밭으로 초고압 송전선로를 설치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항공방제를 할 수 없어 밤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산을 팔려고 해도 아무도 살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 전 한전에서 보상금 154만 원을 찾아가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154만 원 필요 없다. 그 돈 안 받을 테니 우리 부부 먹여 살려라. 우리는 그 땅 없으면 굶어죽는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송전선이 꼭 내 땅 위로 지나가야 된다면 나라에서라도 우리 부부를 먹여살려 주십시오. 잘 먹고 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밥만 굶지 않고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2008년 7월 25일 삼문동 둔치 야외공연장에서 ‘765kV 백지화 밀양시민대회’를 시작으로 대규모 집회는 서울 한전 본사 앞 ‘전국 송전탑 민원지 연합 집회’(12.10.)로 이어졌다. 2009년 3월 18일에는 한전 본사 앞에서 ‘전국 송변전 공동대책위 출범식’에 이어 송전탑 문제의 실상을 알리는 대규모 홍보,선전전이 밀양 전역에 펼쳐졌다. 그러나 한전은 7월부터 송전탑이 들어설 자리의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대책위 내부에는 보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쪽과 공사를 백지화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뉘어 있었다. 7월 30일, 싸움은 백지화 쪽으로 결정이 나고, 보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이들은 맡은 직책을 내놓았다. 여기서 매듭 하나가 지어졌다. 아마도 보상 쪽으로 기울었다면 밀양 송전탑 싸움은 이쯤에서 동네마다 보상금 다툼이나 벌이면서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전은 ‘백지화’가 들어가는 어떤 만남도 거부했다. 주민과 한전 사이의 문제를 풀기 위해 2009년 12월 국민권익위의 중재로 갈등조정위원회가 구성되어 6개월간 활동에 들어갔으나 양쪽이 합의한 것은 ‘합리적 보상 등을 위하여「제도개선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하자’는 것뿐이었다. 해가 바뀌어 2010년 11월 26일에 가서야 ‘송변전 설비 건설 관련 제도개선추진위원회 발족식’이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렸다. 이렇게 한창 대화가 진행 중인 10월 25일, 밀양시장이 ‘토지수용 재결신청에 따른 열람 공고’를 내었다. 송전선 공사 ‘편입토지의 소유자 및 이해관계인께서는 관계서류 등을 열람하시고 의견이 있을 때에는 열람기간 내에 의견서를 제출하라’는 공고이다. 시장이 이렇게 공고를 하게 되면 다음 단계는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결정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한전은 여기에 근거해서 공사를 시작하게 된다.
엄용수 밀양시장은 한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2011년 4월 1일 중앙토지위원회의 수용 결정이 내려지자 한전은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송전탑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마을 입구와 공사장 진입로부터 주민들은 막아섰다. 이어서 주민 대표들은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4월 27일에야 겨우 ‘밀양주민-한전 간 대화위원회’가 꾸려졌으나 다시 7월 13일부터 단장면·상동면·청도면에서 공사가 재개되어 날마다 200~300명이 모여 몸으로 막아섰다. 10월 21일, 주민 대표들과 김중겸 한국전력 사장의 간담회가 밀양시청에서 열렸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겨울산에서 나무를 껴안고
2011년 11월부터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다. 한전 사장과 간담회가 이루어진 뒤 밀양시는 9군데 공사를 허가해 주었다. 이때부터 할매 할배들은 도시락을 싸 들고 추운 겨울산에서 나무를 끌어안은 채 인부들의 전기톱에 맞섰다. 부북면 평밭마을에서는 127번 자리에다 아예 움막을 짓고 24시간 교대로 현장을 지켰다. 산외면 108번 공사 현장에서는 공사업체 대동전기 직원이 태고종 여스님에 무자비한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2012년 1월 16일,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에서 삼형제의 논에 공사를 벌이던 인부들과 대치하던 이치우 어른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것이다.
이치우 어른의 분신으로 인해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언론, 정치인, 종교단체, 시민단체, 대학생 등 많은 이들이 송전탑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월 20일, 영남루 아래 계단에서 송전탑을 반대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시골 어른들도 송전탑 문제의 중심에 핵발전소가 서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4월부터 ‘고리1호기 폐쇄 농성’, ‘고리1호기 폐쇄 인간띠잇기’ 행사에 밀양 어른들이 참여하며 본격적인 연대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4월 11일 19대 총선이 지나자, 송전탑 싸움에 들러붙어 사진을 찍고 모양을 내던 정치인과 쭉정이들은 빠져나갔다. 7월 한여름에 한전은 다시 공사를 재개했고, 주민들은 자재를 실어 나르는 헬기에 몸을 묶었다. 그 무렵 한전이 주민 3명을 상대로 10억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거기다 13명을 상대로 1인당 하루 100만 원씩 과태료 처분을 내려달라는 ‘공사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내었다.
9월 들어 국회 진상조사단 조사와 국정감사를 앞두고 한전은 공사를 중단했고, 국정감사는 10월 24일에야 끝났다. 이 무렵 한전과 반대 주민 사이의 실무회의가 몇 차례 있었으나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대선이 코앞에 닥친 12월 4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밀양 765㎸ 송전탑 해법을 찾는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4월 총선과 9월 대선이 끝나고 나는 속으로 참 막막했다. 새누리당은 비례대표 1번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 출신을 내세웠다. 핵발전소를 통한 전력 생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 동안 여기까지 싸움을 끌고 왔는데 이렇게 주저앉고 마는가? 열심히 싸워온 어른들을 만나기가 불편해졌다. 그런데 직접 마주한 어른들은 여전히 표정이 밝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우리가 언제 대통령 믿고 싸웠나?”
누가 대통령이 되건 송전탑 백지화 싸움은 끝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2013년 1월 28일, 한전이 송전탑 건설 공사를 재개하자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와 민주통합당 등이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앞에서 ‘무기한 릴레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어서 2월 18일, 국회 지경위 소회의실에서 1차 간담회를 시작으로 5월 13일까지 6차에 걸쳐 주민들과 한전의 만남이 있었다. 여기서 주민들은 송전탑 문제에 대한 대안을 내놓았다. 지난 5월 20일 공사가 재개되기 직전까지 있었던 일이다.
1)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3~4호기에서 생산하게 될 전기는 기존 노선에 증용량(전선을 교체하여 용량을 늘임)으로 보내든지, 지금 건설 중인 신양산-동부산, 신울산-신온산 간선 송전 선로를 신고리와 연결하여 계통 편입시켜 보내라.
2) 아직 착공도 되지 않은 신고리핵발전소 5호기, 6호기가 완공될 10년 동안 주민들이 요구한 지중화 3대안(초전도체, 밀양구간 345kV 지중화, 울산-함양고속도로 지중화)을 그 동안 향상된 기술력으로 검토하라.
3) 공사 강행 즉각 중단하고 주민들의 대안을 검토할 전문가 협의체를 구성하라.
무슨 말인가 하면 1)은, 새로 765kV 송전탑을 세우지 않더라고 기존 송전선으로 신고리 3~4호기의 전기를 보낼 수 있으니 그렇게 하라는 제안이다. 그런 다음 2)에서 제시한 대안들을 시간을 두고 연구하고 검토해서 방안을 찾으라는 것이다. 과연 이 제안이 가능한 것이지 3)과 같이 전문가들을 통해 검증받아 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는 이제 765kV 송전탑 문제는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해당되는 문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핵발전소를 통한 장거리 송전의 국가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5월 29일, 한전과 주민들은 전문가 협의체 구성이 합의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이제 밀양 송전탑 문제는 국가적 차원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셈이다.
사람, 사람, 사람들
그 동안 만났던 주민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한전 직원들이 주민들을 이간질하기 위해 윤여림 할배를 이남우 할배의 졸개라고 놀렸다는데, 윤 할배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래, 나는 이남우의 졸개다 왜? 바른 일 하는데 졸개면 어떻고 대장이면 어떻노!”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운전기사 역할을 하던 평밭의 김길곤 할배, 모두가 우리 동네 할매 할배라며 손발 걷고 나서 싸운 문정선 시의원, 뜨거운 피와 눈물을 함께 가진 동화전의 청년 김정회 님(시골에서 청년은 40~50대를 말함), ‘젊은 것들이 빙시거치 한전 놈들한테 붙어가지고 뭐 하는 짓고?’ 하시던 팔순의 위양리 할머니,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택시 타고 촛불 집회 장소로 달려온 웅변가 상동의 김영자 총무님, 사업 내팽개치고 어른들 실어 나르다 싸움꾼이 된 위양의 서종범 님, 병원에서도 분을 삭이지 못해 부들부들 떨던 이금자 할매, 고향과 선산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권영길 위양 이장님, 밧줄에 목을 맨 장재분 님, 여전사 한옥순 할매, 상동의 백영민 사장님과 젊은 아지매들, 굴삭기에 몸을 묶고 싸운 할매들, 대책위에서 반핵 싸움을 끌어가는 김준한 신부님, 이계삼 사무국장님, 곽빛나 간사님, 싸움의 현장을 찾아온 대학생들, 시민단체 사람들, 싸움 현장을 영상으로 담는 PD들, 108번째 촛불문화제를 준비하는 너른마당 식구들, 밀양이 발굴한 촛불 사회자 김철원 님.
“대국민 호소문이 무슨 말이고? 한전 사장이 호소를 하자면 밀양 시민들한테 하고, 사과를 해도 밀양 시민들한테 해야지. 이건 순전히 밀양 사람들을 협박하는 거야.”
한전에서 나온 호소문의 본질을 한 마디로 짚어 내던 고준길 할배. 이 모든 이들이 밀양 송전탑 싸움의 주인공들이다.
이 분들이 8년간이나 송전탑 싸움을 해 온 힘은 무엇일까? 어찌 보면 이 분들은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송전탑 문제를 안고 살아온 것 같다. 기간을 정해 언제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싸우며 산다는 자세이다. 지난 해 4.11 총선과 12.19 대선 결과를 보고 이제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닌가 하고 머리를 굴렸던 나하고는 달랐다.
이곳 주민들이 가장 열받아하는 질문은 ‘보상을 더 받을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이다. 시골 노인들을 돈 몇 푼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한전의 제안을 뿌리치고 이들은 사람 대접을 선택했다. 내 욕심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이전처럼 살 수 있는 마을 공동체를 지키고 싶다는 것이다. 나아가 후손들이 이곳에서 자연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런 얘기를 이곳 어른들에게 자주 듣는다. 돈 한 푼에 눈이 어두운 이들에겐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작년 1월 이치우 어른이 떠난 이후 주민 대표들로 새롭게 구성된 대책위는 모든 회의 과정과 내용을 공개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한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민주적 절차는 주민들에게 신뢰를 주었고, 주민들의 지지를 얻은 대책위는 싸움의 구심점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시골 어른들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렇다. 현장에서 나오지 않은 철학은 모두 가짜임이 분명하다.
요대로만 살게 해 달라
765kV 고압 송전선으로 인한 전자파 피해, 팔고 떠날 수도 없게 된 논과 밭,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노인들, 모두 핵발전소를 통한 장거리 송전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밀양 어른들의 송전탑 싸움으로 인해 이제 우리나라 어디에도 주민을 배려하지 않는 765kV 고압 송전선은 불가능해졌다. 이제 현실의 전기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산업용 전기의 값싼 요금 체계가 갖는 혜택을 가정용 전기의 누진 요금이 부담하고 있다. 밀양의 할매 할배들은 비싼 전기 요금을 내고 송전선 피해까지 이중으로 덮어쓰고 있다. 이제 여기서 핵발전소 건설은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전기를, 지역을 살리는 전기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요대로만 살고싶습니다. 보상을 더 받을려고 공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송전탑이 꼭 필요한 전기 공사라면 사람이 안 사는 먼 곳으로 공사를 하든지 백지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부북면 위양리 정임출 할매)
- 격월간 <말과활> 창간호(2013.7.22.)에서
첫댓글 글 쓰신 분 정말 애 많이 쓰셨습니다. 계속하여 이 사태 종말에 가서 한전의 목줄이 밟혀 완전 절명할 때 까지 온 힘을 다 써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