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사회에서 책읽기를 권장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지식에의 목마름 때문이던지, 교양을 향한 강박적 취향 때문이던지, 내면의 들뜸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함이던지, 우리를 책으로 이끈 동기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책을 향해 뻗는 손길은 아름답다고 상찬된다. 동기를 따지지 않은 채 책읽는 행위 일반을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 지식과 진실의 보고(寶庫)라고 여기는 무의식적인 인증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타인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은 마치 고해성사에 견줄만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수반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모욕을 준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이익과 모욕을 피하기 위해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마치 읽은 것처럼 거짓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걸 정말 믿는 사람은 드물다. 책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는 책과 멀리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어떤 책도 펼쳐보지 않는 사람은 살아가는데 책읽기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고 일생을 책읽기에 바친다 해도 우리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들이 많다. 책을 읽는 일은 좋은 일이고,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은 것이다라는 문명사회의 상식과 관행을 뒤집는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존재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책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와 그 의무가 초래하는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해 이렇듯 책읽기를 두텁게 감싸고 있는 거짓과 기만들을 파헤친다. 이 책은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말하는 사술(詐術)을 가르치거나 비독서를 권장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자발적 책읽기를 장려하고,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불확실한 경계,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것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혀준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에 관한 총체적 시각을 갖고, 책과 책 사이의 소통과 연결선들을 아는 것이다. 교양은 책을 읽어내는 능력과 책 자체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에서 길러진다. 발레리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긴 소설을 상세하게 읽지 않고도 비평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교양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뜻밖에도 책을 읽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은 우리가 특정한 책 한 권을 붙들고 있는 것은 동시에 그 선택에서 제외된 세상의 모든 책들을 읽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정당화된다. “독서는 우선 비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逆)의 몸짓을 가린다.” 우리가 읽은 책은 바로 우리가 손에 들고 읽었던 그 책인가 ? 그것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이며, 떠돌아다니는 수없이 많은 “유령 책”들이다. 실재하는 책과 책 사이로 수없이 많은 유령 책들이 떠돈다. 이 유령 책들은 “각각의 책과 우리 무의식의 여러 잠재적 가능성의 교차”에서 솟아나오는 것들이다. 우리가 그것을 읽었건 읽지 않았건 간에 한 권의 책이란 저자가 “‘집단 도서관’이라 불렀던 그 방대한 전체 속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해서 교양에 대한 강박증적 불안을 떨치고 말하지 않을 까닭은 없다.
몽테뉴는 읽은 책들의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읽은 책들을 마치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것처럼 다시 손에 든 적이 여러 번이라고 고백한다. 몽테뉴는 나중에 책의 말미에 그것을 읽은 때와 개략적인 소감을 적어놓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을 다른 읽지 않은 책들과 구별했다. 몽테뉴의 건망증은 심각했다. 그는 남들이 쓴 책을 읽고 잊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쓴 책에 대해서조차 종종 잊었다. 건망증은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구별을 지워버린다.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책을 우리는 과연 읽었다고 해야 되는가 ?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은 뒤에 읽은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읽은 것들은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망각”에 의해 서서히 증발해버린다. 그것이 우리 기억의 부실함에서 초래되는 불가피한 일이라면 잊는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고뇌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망각은 풍요화의 또 다른 일면”이다. 망각은 우리가 읽은 책들을 더욱 풍부한 몽상과 추리로 살찌게 한다. 그러니 책을 읽은 뒤 그 저자며 내용을 잊어버리는 걸 지나치게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책의 내용을 기억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또 그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책은 “어떤 비개인적인 지혜의 일시적인 수탁물”일 뿐이며, 따라서 “자신의 메시지를 양도한 후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저 긴 소설 『율리시즈』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을 읽지 않고도 대중들 앞에서 그 작품에 대해 몇 시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발레리가 프루스트의 소설에 관해 그랬듯이. 대학교수나 비평가들은 약간의 뻔뻔스러움을 견딜 수만 있다면 그것과 관련된 2차문서 몇 개만을 읽고도 한 편의 비평을 쓸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한 권의 책을 쓸 수도 있다. 비평 담론의 공간에서 텍스트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주되는, 유동적인 오브제가 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아울러 그것은 우리가 읽어온 수많은 다른 책들이 “우리 내부에 구축한 도서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의 도서관”, 우리 살이 되고 피가 되어버린, 아니 우리 존재 자체를 삼키고 바로 그것이 되어버린 “축적된 그 책들의 앙상블”은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풍부한 재료들을 내놓는다.
오스카 와일드는 대단한 독서가지만 동시에 독서의 위험성을 일찍이 간파해서 “독서의 여러 가지 위험을 경계한 단호한 비독서자”이기도 한 사람이다. 그는 읽어야 할 책들과 읽지 말아야 할 책들의 경계를 분명히 그었다. 읽지 않아도 되는 책들을 읽는 것이 초래하는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내면의 창조성을 갉아먹고, 그 책들이 자기만의 것을 쓰기 위한 전(前)텍스트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오스카 와일드는 어떤 책을 파악하는데 충분한 시간은 단지 6분이며, 그 이상을 붙들고 있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에게 “무거운 책의 진창 속에서 생고생을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
우리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습 공간에서 책읽기는 “완전한 읽기가 가능하다는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그것을 실제로 읽었는가, 안 읽었는가를 갖은 방법을 다해서 테스트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그 폭력은 책읽기에 내재된 원초적인 기쁨을 증발시켜버린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을 억압적으로 지배하며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는 것, 진정한 책읽기의 기쁨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책을 통하되 책에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자유롭게 가로질러 감으로써 가능하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배울 것은 가정과 학교에서 강요되는 불필요한 독서에 대한 강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책읽기에로 나아가는 법, 읽은 책들과 안 읽은 책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미묘한 불안을 떨치고 사는 법, 그리고 책들의 심리적 투사(投射)에서 생겨나는 중력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안의 창조적 힘들을 찾아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