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6.金. 깊고 푸른 것들이 하늘아래 쌓이고
03월11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5.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언젠가 중앙고속도로의 치악휴게소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아마 6,7년 전 혹은 그 이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아무 것도 없고, 한가하고, 텅 비어있어 주차장이 여유로운 고속도로휴게소는 처음이어서 그냥 화장실만 들리려던 것을 슬슬 거닐며 너르고 깊은 것들을 쳐다보면서 삼사십 분가량을 머물다 일어선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봉화 청량사와 안동 봉정사를 가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각 사찰을 순방하고, 참배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 돌아다니던 일정 내내 치악산 산정 회색구름 밑으로 텅 비어있었던 허공이 여유 있고 평안한 길을 만들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K시를 가다보면 치악휴게소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마음이 좋아하는 휴게소가 하나 있습니다. 천안-논산간 민자 고속도로를 지나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여산을 지나고 전주를 지나면서 이서휴게소라는 작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여기도 아마 4,5년 전인가 K시를 가다가 우연히 들려보았던 것인데 휴게소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기분이 많이 좋아져있었습니다. 이 휴게소는 한가하지도 않고, 산 중턱에 걸려있지도 않고, 텅 비어있을 만큼 너르지도 않지만 다만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주유소 기름가격이 아주 착했습니다. 그래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면 한 번쯤은 이서휴게소에 들리곤 합니다. 우리들이 고속도로휴게소에 대해서도 모르고 지나는 것들이 너무도 많겠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헤아려가며 파악하고 힘들여 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충 우연에 의지하고 살아가면서 좋은 만남을 기대하는 정도의 관심을 표명表明할 뿐입니다. 맞습니다.
익산 숭림사 보광전을 비롯해서 기운 넘쳐나는 자그마한 도량을 초벌 훑었는데도 시간은 이제 겨우 오후3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제부터는 탐방이나 견학을 마치고 순례巡禮의 참 의미를 좇아 기도를 올리든, 명상을 하든, 마음의 치유를 하든, 자신이 원하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시도를 한다면 딱 좋은 조건과 환경이지만 오늘 방생법회를 오신 모든 신도님들의 뜻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 있는 시간의 활용법으로 여기에서 머지않은 바닷가에 위치한 서천 해양박물관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모두 관광버스에 오르고 부릉.. 부릉.. 기지개를 켠 관광버스는 숭림사 일주문을 빠져나와 잘 닦여있는 포장도로를 따라서 서해 바닷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습니다. 주차장에 버스를 주차시키고 난 뒤 버스에서 내리는데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갯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서천 해양박물관이라, 나는 처음 와보는 곳이었습니다. 배를 연상시키는 박물관 건물의 외관이 오후 햇살을 받아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아, 여기에도 매표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65세 이상은 무료입니다. 그래서 신도님들을 65세 이상과 미만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65세 미만이 나를 포함해서 17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6분이 65세 이상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80이 넘으신 보살님들과 거사님들도 여러 분이 계십니다. 아마 60세 이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분 정도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게 방생법회 신도님들의 나이를 확인하는 기회가 생겼습니다만 구태여 확인을 해보지 않고 그냥 쭈우욱 쳐다보더라도 나이를 대충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 평균나이를 계산하면 70이 넘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 천장사 방생법회에서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고 거의 모든 사찰의 방생법회 신도님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한국 불교신도님들의 노화현상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삼성동 봉은사가 집에서 가까워 평소 봉은사 행사에 자주 참석을 하고 새벽기도나 예불에도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봉은사 대웅전大雄殿 아래 있는 법왕루法王樓는 많은 신도님들이 한 자리에서 기도와 불공을 올릴 수 있는 장소여서 600~700여 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법당입니다. 일요일 사시마지불공에 참석을 해본다면 대부분이 노老 보살님들이어서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한 거사님들을 위해 가운데 자리는 비워 놓아둡니다. 그래서 법당이 비좁을 때도 거사님들은 쉽게 자리를 확보하고 편히 앉아 법회를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주는데 그래도 거사님들은 몇십 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다 좌우주변을 둘러보아도 내가 가장 젊은 축에 들어가는 것처럼 비춰옵니다. 물론 봉은사에는 청년법회도 있고, 대학생법회도 있고, 합창단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전체 신도수 중에서 얼마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서울 한복판의 대형 유명 사찰의 현실이 이렇다면 지방이나 시골 사찰의 신도님들은 상황이 더 심각할 것입니다. 불교신도님들 숫자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젊은 피의 수혈이 이루어지지 않아 급속도로 신도 층의 노화가 진행 중인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스님이 되기 위한 출가자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나 신도 층의 노화문제는 결국 같은 종류의 원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힘이 되고, 그들의 삶을 불법佛法으로 끌어당기는데 실패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단순화시켜보면 불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삶에 거의 혹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출가자가 없고, 나이 어리고 젊은 층의 신도가 절에 오지 않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게 설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의 종교소비자인 예비출가자나 젊고 파릇파릇한 예비신도를 불교로 안내를 하고, 불교로 이끌고, 불교에 정착을 시키려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만 할까하는 고민을 충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외로 심각한 문제에 대한 대답은 명료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불교의 축을 이루는 수행자들과 예비 출가자를 위한 질 높은 사회교육을 포함한 수행자 ‘교육’과 ‘종교적 서비스정신’ 이라는 두 가지 문제로 압축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타종교에 비해 불교는 전통적으로 종교적 서비스정신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이라는 전통적인 절의 대민정신對民精神은 그야말로 수수방관袖手傍觀에 가까운 것이어서 스님들이나 행정담당자들이 구태의 관습이나 사고방식을 털어내고 종교적 서비스정신으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불교가 현대의 종교사회에서 발전은커녕 퇴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불교를 되살리는 길은 결국은 ‘교육’과 ‘종교적 서비스정신’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봄날 오후 햇살아래 약간 쌀쌀하지만 시원한 갯내음을 품고 있는 갯바람이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너른 공간들이 시선과 마음을 편안하게 다독여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해양박물관으로 들어갔습니다. 4층부터 전시해놓은 바닷물고기를 구경하면서 1층으로 내려왔습니다. 벽에 실사로 그려놓은 검고 거대한 고래는 바다에서 막상 실물을 본다면 그 입체감과 위압감 때문에 더 크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반도半島 국가이고 다도해多島海를 포함하고 있는 섬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에게 국토가 됐든 자원이 됐든 바다는 매우 중요한 영토이자 자원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대四大 관음기도도량觀音祈禱道場이라고 말하는 서해 낙가산 보문사, 동해 낙산 홍련암, 남해 금산 보리암, 여수 향일암의 공통점은 모두 해수관음도량海水觀音道場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바다의 소중함을 알고 바다를 통한 대국의 기원과 발원을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威神力에 의지하고 한편으로는 행동할 줄 아는 지혜로운 안목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은 현대에 와서 국가 간의 영토분쟁이 바다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더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조상님들의 통찰通察과 예견豫見은 정확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자, 서천해양박물관까지 돌아보고 나서 다시 버스에 올라타 우리들은 오늘의 출발점인 고북 주차장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올해 무술년戊戌年 방생법회를 잘 마쳤다는 평안한 마음으로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저녁공양을 올린 후 주차장으로 이동해서 각각 손을 잡고 인사를 한 뒤에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습니다. 나도 이제 서울로 출발을 해야 합니다. 어둠속에서 화성휴게소에 들려 잠시 쉬고 자동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나서는 바로 북쪽을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길거나 짧거나 방생법회를 위한 봄날의 하루가 빠르거나 느리게 기억을 만들어놓고 서서히 져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