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의 고향 최 건 차
5월이 화창하게 짙어가는 날. 영암군 금정면 덤재를 넘어 남평 문 씨인 어머니의 고향을 찾았다. 어머니가 태어난 장흥군 유치有治면 용문리는 동학란과 6․25전란을 유별나게 겪어낸 고장으로 산수가 수려한 탐진강 상류다. 인근에 있는 가지산은 목재와 고소한 견과류 열매가 약재로도 쓰이는 사철 푸른 비자나무의 자생지다. 신라 때 당나라에서 들어온 선종禪宗이 맨 처음 사찰을 세워졌다는 곳으로, 인도와 중국에 이어 세계3대 보림寶林 중의 하나라고 하는 보림사가 있다.
탐진강 상류에 다목적 댐을 조성하게 되어 일대가 수몰된다는 소식을 접했었다. 내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새로 면소재지가 된 조양리로 옮겨간 후였다. 잡초가 우거진 운동장가의 오랜 된 벽오동과 상수리나무들이 넋을 잃은 것처럼 휑하니 서 있고 학교는 유리창이 깨진 채로 버려져있다. 물속에 잠겨버리면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아 뛰놀던 운동장을 한참 거닐다가 내가 공부했던 교실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었다.
십여 년 후에 다시 와보니 큰 담수호가 되어버려 어디가 어딘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바다처럼 보이는 호수가 내 유년시절의 요란한 흔적들과 전란의 역사를 감추어버린 채 싸늘하게 냉기만 뿜고 있다. 물 구경을 하는 분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쯤입니까? 라고 물었다. 오십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분이“예, 그렁게 말이요, 여그가 옛날 대삼으로 넘어 가는 갈모리 뒷산 중턱 갓소마는 그러고 저그는 말이요 장태 건너 금사리 뒷산 두리봉 같은디 겁나불게도 물이 많아뿐게 영 모르겄소. 나도 그전에 여그 갈모리에서 살았소마는 지금은 광주서 사요. 이렇게 와 본께 진짜 기가 차네요! 물이 만능게 참말로 무섭소”라는 것이다.
그곳을 나와 물막이가 시작된 곳으로 차를 몰았다. 먼발치로 마을이 있었던 곳을 가늠해 본다. 이전에는 물이 흘러가던 방향으로 아버지가 다녔던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는 장터였고 아래쪽은 금사리와 단산리였다. 한참을 더 내려가다가 빈재 앞에서 우측으로 휘돌아 큰마을 대리大里 앞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흘러온 탐진강 물은 강진군 옴천면에서 내려오는 또 다른 냇물과 합하여 빈재 옆 부산夫山면 기천리의 각골 앞 좁은 협곡으로 흐르고 있는데 그 곳을 인공적으로 막아버렸다.
댐으로 생긴 호수는 보림사와 더불어 유명한 휴양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댐을 보고나서 왔던 길로 되돌아 용소龍沼앞 삼거리에 차를 세우고 1946년 우리가 살았던 용소龍沼 옆 집터를 둘러보았다. 물고기 잡으러 가는 형을 따라 용소에 가 몰래 헤엄을 치려다 깊이 빠져들어 죽을 번했고, 홍수가 났을 때는 물가로 가까이 갔다가 지반이 무너지면서 큰물에 휩쓸려가다가 구조되었던 사건 등이 생생하다. 강동 마을과 이웃 공수평 마을을 바라볼 수 있었던 언덕에 쉼터가 새로 생겼다. 옛 노루목과 공수평 입구에서 아흔아홉 골짜기라는 엉골로 들어가는 길목에 수몰 이주민들의 애환을 담아‘정든 고향을 떠나면서’라는 망향비가 서 있다.
< 망향의 노래> 장진웅
‘
이곳이 우리고향 마을이었네 / 개나리 진달래가 봄을 알리면 이랴 낄낄 소를 몰아 일구던 논밭/ 보림사 쇠북소리에 새벽을 열어 여기 저기 아침인사 다정 했었네/ 여기가 우리 마을 강동 공수평 이웃사촌 오손 도손 그리 살았네/ 해마다 풍년들어 격양가 높아 나그네 발길 멈춰 지켜보았네/ 자자손손 이 땅 지켜 살리라 했지 물결 넘실대는 저곳이 마을이었네/ 마지막 떠나가던 정자나무 아래 내 차마 돌이 되지 못했네/ 보고 싶은 얼굴들을 어찌 할거나 아짐, 아제, 불러보나니…’
어린 시절 말수가 적고 준수했던 초등학교 2년 후배가 남기고 간 글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망향 비에는 강동과 공수평이 수몰될 때까지 살았던 동네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있다. 우리 가족은 강동에서 6년을 살다가 떠났기에 이름이 빠졌지만 1949년 윤칠월에 막내 누이동생이 태어났고, 형 누나 동생이랑 우리말을 배우며 초등학교를 다녔었다. 특히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5남매 여덟 식구가 6․25 전란을 위태롭게 겪어내면서 목숨을 부지했기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시절 봄이 오면 누나랑 손아래 누이동생을 데리고 진달래꽃을 따면서 가재를 잡아다 구워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름에는 길가나 산자락에 마구 열리는 산딸기를 따먹고 멱을 감는다. 지천으로 깔려있는 다슬기를 건지고 뒷걸음질 치는 징거미를 잡아오면 어머니가 된장을 풀어 끓여주었다. 우리는 평상에 둘러앉아 탱자나무가시로 속살을 빼먹으면서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듣곤 했다. 겨울엔 호박으로 떡과 죽은 쒀먹으며 냇물이 얼 때 쇠망치를 메고 나가는 형을 따라다녔다. 얼음물에 반쯤 잠겨있는 돌을 찾아 두들겨 잡은 점박이 붕어와 피라미를 손질해 묻어둔 무를 썰어 넣고 양념을 한 물고기조림은 어머니의 일품요리였다.
내 유년시절을 꿀꺽 삼켜버린 무심한 호수위로 천국에 간 부모님과 뒤따라간 누나와 누이동생의 애잔한 모습이 편린처럼 일렁이다가 자취를 감춘다. 2019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