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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임소미’선생은 역사학자가 아닌 역사 스토리텔러라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쉽게 이해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역사 공부를 이야기처럼 해주면 이해하기도 쉽고 재미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공부는 지나간 시대 이야기를 듣는 것이므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다.
흔히 역사가들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반복되는 이유가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를 알면 현재의 우리에게, 어른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귀중한 통찰력을 얻게 해 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실감되기도 한다.
제목에서부터 세계사를 단순화하고 최소화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제1장 ‘인류 문명의 탄생, 고대사’, 제2장 ‘역사를 바꾼 결정적인 순간, 전쟁사’, 제3장 ‘대제국 흥망의 역사, 최강국 통사’, 제4장 ‘세상이 숨긴 비극의 역사, 잔혹사’등으로 구분한 것은 최소한이란 말에 들어 맞는 것 같다. 물론 제목 속에 여러 작은 역사가 담겨 있지만, 나는 여러 제목 가운데 조금 특별한? 것 만 뽑아서 적어볼 생각을 한다. 그것은 오늘, 8월 초하룻날 양산의 한낮 기온이 41.6℃로 기상 관측 이후 최고라는 데에 질려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8.2에는 42.5도로 또 기록을 경신했다)
방송에 자주 보이는 ‘크리스티안 부르고스’는 멕시코 출신이다. 그는 인상이 좋고 호감이 가고 또한 잘생겼다. 만약에 그를 만날 기회가 있어 그와 멕시코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나는 그의 이야기를 그냥 듣고만 있어야 할까. 아니면 그의 말에 최소한 장단을 맞추려면 멕시코의 역사를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멕시코의 수도는 ‘멕시코시티’로 올해 북중미 월드컵을 개최한 것을 떠나서, 미국 아래에 위치한 나라라는 것은 안다. 멕시코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알려진 나라다. 그런데 그 전의 역사는 없는 것일까?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가 유럽, 아시아에 이어 최후에 도착한 곳이 아메리카 대륙이다. 이것이 대략 기원전 2000년경이고, 기원후 톰템족이 멕시코 일대를 차지하고 살았는데, 이를 ‘고전기’라고 하고, 900년부터 아즈텍이 멸망한 1521년까지를 ‘후고전기’라고 하는데, 1200년경 아즈텍족이 북방에서 내려와 톰템족을 멸하고, 1325년 지금의 멕시코시티에 새 수도를 건설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1392년보다 조금 빠르다. 멕시코에는 이집트 만큼이나 커지는 않지만, 많은 피라미드가 있다. 가장 큰 것은 아파트 22층 높이로 65m에 달한다. 이것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20년 동안 매년 1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아즈텍족에게는 그들의 수호신이 있었는데, 소호신의 이름이 ‘우이칠로포치틀리’다. 수호신이 아즈텍족에게 계시한 것은 “날아가는 독수리가 뱀을 물고 선인장 위에 앉는 곳에 정착하거라”였다고 한다. 지금의 멕시코 국기를 보면 이 계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즈텍의 제사 의식은 아주 특별히 대규모로 진행되는데,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 큰 충격이다.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가벗긴 인간 제물을 널어 세우고 날카로운 돌(흑요석)로 그들의 가슴을 가르고, 온기가 남은 심장을 꺼내 마치 태양신에게 바치듯이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희생자는 보통 포로를 잡아 온 전사가 가져가 인육으로 삶아 먹는데, 신에게 바친 신성한 인육을 먹음으로써 신과 하나가 된다는 특권의식을 재현한 것이다. 아즈텍인들은 태양신이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이 세계가 창조되었으며, 그 신은 52년 주기로 세상은 파괴되고, 다시 생성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믿었던 태양신이 새겨진 태양석에는 소멸한 태양이 4개 새겨져 있다. 4개가 소멸되고, 다섯 번째 태양 아래 자신들이 살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 다섯 번째 태양의 종말을 지연시키기 위해 태양신에게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제물로 바쳐진 포로가 연간 2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인신공양은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끔찍한 제사 의식을 지켜보는 군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공포에 압도되고 공포감을 통해, 군중을 통치할 수 있었다. 또 적 포로와 위험인물을 제거하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찬란했던 아즈텍은 스페인의 전사 코르테스에 의해 멸망한다. 그는 쉽게 신식무기로 아즈텍 왕국을 무너뜨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10만 명이 넘은 아즈텍 전사와 168명의 무장군인의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몇 번 충돌이 이어지던 중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공포의 ‘천연두’였다.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면역이 없던 아즈테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갔고, 제국은 내부분열로 위태로워졌다. 이에 코르테스는 군대를 다시 모아 총공세를 이어나갔다. 이때 스페인 군과 원주민 연합군을 합쳐 900명이 10만 명의 아즈테카군을 무너뜨렸다. 끝까지 저항한 황제 쿠아우테목은 사로잡혔 주임을 당했고, 페허가 되어버린 메소아메리카에 멕시코시티가 새로 건설되었다. 메소는 중앙이란 뜻이다.
일본의 자동차는 핸들이 오른쪽에 있고, 차들도 차도의 왼쪽을 달린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영향으로 그 반대인데 비하면 일본은 왜 그럴까 싶다. 그것은 영국의 영향이다. 1871년 철의 수상으로 불린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합쳐 통일한‘독일제국’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헤름 1세의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독일제국은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했다. 그동안 ‘명예로운 고립’이라는 위치를 고수하던 영국은 독일과 러시아 등의 팽창을 그냥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 1902년 아시아에서 급부상한 일본과 손 잡았다.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조선과 만주를 탐내면서 남하정책을 펼치던 러시아가 영국으로서는 아니꼬았던 것이다.
영국은 공동의 적인 독일까지 막기 위해 오랜 원수였던 프랑스와도 ‘영·불협정’을 맺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지면(실제로 러·일전쟁이 터지기도 했다) 영국·일본 동맹은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 그런 일이 없게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가 동참하면서 영국·프랑스·러시아 ‘삼국협상’이 체결된 것이다. 다양한 식민지를 가졌던 유럽의 제국주의들은 크게 두 개의 세력이 형성되었는데,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독일·오스트리아로 나뉘어 진 것으로 이는 곧 터질 제1차 세계대전의 예고편이었던 것이었다.
무려 5,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광기의 독재자 히틀러에 의해 저질러졌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풀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는데, 독일의 행보에 깜짝 놀란 영국과 프랑스는 경악하여 선전포고를 날렸지만, 1차 세계대전의 악몽 때문에 본격적 전투는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초기에는 마른 전쟁 또는 가짜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은 방어가 아닌 침략 위주 공격으로 전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막대한 군비를 쏟아부어 수백 ㎞에 이르는 거대한 방어기지를 건설하였는데, 이를 ‘마지노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일은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프랑스군 14만 명이 꼼짝없이 됭케르크 해안에 포위되었을 때 여기에는 영국군 19만 명도 같이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알고도 독일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스터리지만, 히틀러가 추후 영국과 협상을 위한 오판이라는 설, 히틀러의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늪지대에 발이 묶일 것을 우려하여 소모전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했다는 설 등이 있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됭케르크 구출 작전은 연합군의 전멸을 막았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 한 사람의 광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나치라는 추종 세력이 있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국민들은 배상금을 물어야 해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서 리어커에 돈을 가득 싣고 가야하는 인플레이션과 고실업으로 받는 경제적 고통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독일을 흔든 혼란의 원인이 유대인 때문이라는 인식도 켰는데, 히틀러는 그런 점을 교묘히 이용했다. 1938년 게르만 민족을 통합한다며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손쉽게 흡수하고, 1년 뒤에는 체코슬로바키아도 게르만 민족이 살고 있다는 논리로 합병했다. 러시아와는 서로 침략하지 않고, 동유럽을 나눠 먹자며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새벽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의 발상지인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50만의 독일군은 쉽게 소련을 점령할 줄 알았으나, 소련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십만의 민간인을 포함해 양측에서 20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끝에 소련이 승리했다. 이에 연합군의 사기가 올라가면서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꿨다. 무적의 신화가 무너진 독일은 충격과 불안으로 나치당을 향한 국민의 지지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1944년 6월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끈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쳐 서부전선을 되찾기 시작해 두 달 뒤에는 파리를 되찾았다.
독일군은 1944년 12월 ‘벌지 전투’라 불리는 최후의 반격을 펼쳤으나 결국 패배하였고, 이듬해 3월 연합군이 독일에 입성했다. 뒤늦게 소련도 이 전쟁에 가세함으로써 베를린은 두 동강이 났다.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오랜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자신의 벙커에서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월 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독일이 항복하였으니 2차 세계대전은 끝났을까. 아니다, 일본이 남았다.
1910년 조선을 합병하고, 1931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로거우차오(盧溝橋)사건*을 일으켜 그토록 바라던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화하기에 이른다. 중일전쟁의 승리를 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고, 일본에 항복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일본은 교착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동남아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이미 열강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충돌은 불가피했다. 1941년 미국은 일본에 수출하던 석유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일본은 인도차이나와 중국에서 물러나라고 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정책은 차질이 불가피해 졌다.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자립은 허울뿐인 명분이 되고 말았다.
* 1931년 일본은 중국 만주(지금의 둥베이 지구[東北地區])를 점령하여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고 이 지역의 산업화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으로 중국에서는 점차 반일운동이 확산되었다.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자 193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 종식에 합의하고 심화되는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당시 루거우차오 부근에는 중국의 쑹저위안[宋哲元] 29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몇 발의 실탄 사격 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가 이튿날 8일 새벽 중국군 진지를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최초의 사격이 일본측의 모략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당초 사태를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은 이 사건을 '중국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이라 단정하면서 파병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국내 3개 사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했고, 전선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28일에는 화베이[華北] 주둔 일본군이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측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항일 기운이 고조되었다.
참다못한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9분, 운명을 건 한판, 진주만 공습을 시작했다. 사전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하지만, 포고문이 늦게 전달됨으로써 포고도 없이 기습 공격이 되어 버린 일방적이었다. 그렇게 기습공격이 성공했음에도 일본은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은 미친 듯이 동남아로 진격했고,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희망에 들떠 있었지만 일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동안 중립을 외치던 미국이 한 방 크게 얻어맞자,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치욕의 날’이라며 제2차 세계대전에 본적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윈스턴 처질은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고 말했다. 미군의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진주만 이후 4년 동안 전쟁은 계속됐다.
일본의 결정적 항복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한 것이지만, 그 전인 1945년 3월 10일 새벽 도쿄에는 미군의 B-29 폭격기 344대가 소이탄 1,665톤을 투하해 도쿄를 X자 모양으로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 융단폭격으로 10만 명 이상이 죽고, 1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나무로 만든 가옥 27만 채가 불타 도시는 그야말로 탈탈 털린 꼴이 되었다. 이해 4월 1일에는 미군 18만 명이 오키나와에 상륙했으나,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일본군에 고전했다. 자살특공대인 카미자제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전투가 바로 오키나와 전투였다. 미군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일본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 걸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전진혼’때문이었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고 하는 일본군의 전투 규범이 전진혼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항상 고향과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 더더욱 분발하여 기대에 답할 것이며,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죽어서 죄과의 오명을 남기는 짓을 하지 말라.”〈전진혼〉2장 8절
오키나와에서 학을 뗀 미군 수뇌부들은 고민에 빠졌다. 일본 본토 상륙은 미군의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일본의 광기를 단숨에 잠재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5월에 독일이 항복하였음에도 일본은 굴하지 않았고,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연합국 정상들이 회담을 갖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드디어 8월 6일 아침에 히로시마에 작은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이로 인해 7만 8,000명이 사망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일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3일 뒤에 나가사키에 같은 폭탄이 또 떨어졌다.
이때 유럽에서 승승장구한 소련은 동북아시아를 넘보게 된다. 미국은 당황하고 한반도를 통째로 삼킬 것을 우려했다. 미군이 서울로 들어와 38도선을 제시하자, 소련은 원폭의 위력에 놀랐던 것을 기억하며 미국의 제의를 즉각 수락한다. 복잡하고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독립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이제 명실상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미군이 50만 명이나 이 전쟁에 가담해 이런저런 피해를 입었고, 제3자인 한국군도 30만 명을 파병해 빈축을 쌌다. 베트남 전쟁은 끝났지만, 50년이 넘은 현재 다행히 상처를 딛고 일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은 우리와 같이 당구를 사랑하는 국민과 선수들로 당류 교류를 계속하고 있고 박항서에 이어 김상식까지 베트남 축구 감독을 우리나라 사람을 쓰고있는 것을 보면 여간 고맙지가 않다. 베트남인의 고행과 역사를 다룬 〈처음 읽는 베트남사〉같은 책이 있기는 한데. 아직까지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는 못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중동 전쟁’은 너무 복잡해서 누구 말이 맞는지, 어떤 말을 믿어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1948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은 피와 갈등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으로 난민이 되어 쫓겨난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조직해 이스라엘과 싸워왔으며, 1993년 미국의 중재로 서로 존재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정’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휴전, 유혈 충돌, 암살, 자살테러, 전쟁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데, 2018년 1기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누구의 것으로도 인정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을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고, 텔아비브에 있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했다. 이에따라 유혈 사태는 더욱 빈발하고 있다. 2000년 동안 헤매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팔레스타인 인과의 뿌리 깊은 대립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책에 소개된 중동전쟁의 뿌리는 기원전 1047년 사울왕을 군주로 하여 이스라엘 왕국이 건국되고, 기원전 1000년 다윗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데 이어, 기원전 957년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완공하고, 기원전 930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분열되었으며,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되었으며, 기원전 587년 남유다 왕국 바빌로니아에 의해 정복 당하고.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가 유대인들을 돌려보냈다. 기원전 332년과 기원전 63년 알렉산더대왕과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 당했고, 기원전 37년 로마가 임명한 헤롯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도 했으며, 기원후 636년 아랍(이슬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했고,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 점령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은 아랍의 지배기간이 더 길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졌으며, 1947년 아랍과 유대인 개별 국가 건설을 유엔이 결정(아랍은 거부)한 바 있으나,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 선포하고, 1980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발표하자 아랍의 반발로 중립지대로 남아 있었으나 트럼프의 이스라엘 수도 인정으로 감정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1993년 오슬로 협정에도 불구, 현재까지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우리와 가까운 중국도 일본도 興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어쩌면 역사라는 것은 인생처럼 덧없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대제국이었던 로마나 秦, 몽골과 청나라, 우리의 조선도 그랬다. 한 나라의 흥망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나아갈 길,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또한 폭염으로 열사병 환자가 수천 명에 이르고, 농작물은 말라가고, 열대야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뿐이다. 언젠가는 인간도 말라갈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오늘에, 내가 살기에 급급하다.
중세를 풍미한 오스만 제국이라고 있었다. 몽골 다음으로 역사가 확실하고 알차고 옹골찬 제국이었는데 왜 망했을까? 우리의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때부터 600년간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대륙을 석권했던 오스만 제국은 동서양 문맹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어서 여러 면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서양중심의 역사관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의 맹주로 군립하던 오스만 제국은 1299년 오스만 1세가 오스만 공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로마제국이 395년 동서로 분열된 이후 476년 서로마제국은 몰락했으나, 동로마제국은 이후에도 1000년간 역사를 이어갔는데, 그 중심에는 콘스탄티노플, 옛이름 비잔티움이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신생 오스만 공국의 등장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1326년 오스만의 아들 ‘오르만 가지’가 천년을 이어온 콘스탄티노플 천혜의 요새, 철옹성으로 높이 12m, 두께가 5m나 되는 성을 공격하였고, 다음에 왕위에 오른 메흐메트 2세가 이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는 헝가리의 대포 기술자 우르반을 고용했고, 우르반은 포신이 8m에 달하는 거대한 대포를 만들어 한 번에 600㎏의 돌 폭탄을 1.5㎞까지 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무너졌다.
1922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술탄제도를 공식 폐지할 때까지 이스탄불은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맘루크왕조가 통치하던 메카와 메디나까지 귀속시킨 셀림 1세는 이슬람 세계의 명실상부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1520년은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로 지중해를 비롯해, 세계 대륙을 지배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유럽은 신대륙 아메리카로 진출하고, 오스만 제국을 피해 아시아와 직접 무역을 꾀한 해상 무역에 뛰어들면서 해군력을 증강해 1571년 레반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이겼다.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패권을 잃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를 향해 돌진하여 결국 항가리를 함스부르크가에 넘겨줘야 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동맹국 편에 줄을 섬으로써,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면서 급기야 국가가 조각나고 말았다. 1922년 최후의 술탄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될 때까지 623년간 이어온 오스만 제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듬해 ‘케말 파사’가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오스만의 역사는 조선과 많이 닮았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은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본섬인 브리튼에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가 있고, 서쪽 섬에는 북아일랜드가 있다. 각기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졌었는데, 8세기 흰 피부에 금발을 한 켈트족이 유럽대륙에서 건너와 번성하기 시작했다. 로마 시대 카이사르가 침략하기도 했지만, 해안 일대에 머물렀던 것이 전부였다. 브리튼 섬에는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을 안 로마 황제 클라오디스가 로마인 4만 명을 이끌고 상륙하기도 했고, 서기 122년에는 황제 히드라이누스가 브리튼 섬 북부에 117㎞에 달하는 방벽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로마의 정치 불안과 이민족의 준동으로 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
혼란한 틈에 유럽 대륙에서 건너간 잉글로-섹슨족 전사들이 브리튼 원주민들에게 땅에 농사를 짓는 대신에 성을 방어해주기로 하였으나, 섹슨족은 오히려 섬을 장악해 버렸다. 용병이 정복자가 된 것이었다. 섹슨족이 섬의 주인이 되기에 이르자, 브리티니아로 불리던 브리튼 섬은 이후 잉글로의 땅이라는 뜻으로 ‘잉글랜드’가 되었다. 섹슨족은 섬에 7개의 작은 나라를 세웠으며, 이들 7왕국은 200년 동안 끊임없이 지배권 전쟁을 벌였다. 8세기 이후 바이킹이라 불린 해적이 등장하여 7왕국과 피바람을 불렀고, 7왕국 중 하나인 웨식스 엘프레드 왕이 바이킹을 항복시켰다.
십자군 전쟁에 가담하기도 했던 리차드 1세 왕은 잉글랜드로 돌아오는 길에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5세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는데, 레오폴토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리차드를 넘겼다. 하인리히는 리차드의 몸값으로 거액을 요구하였는데, 요구한 금액이 15만 마르크로 당시 잉글랜드의 연간 세금 수입의 2∼3배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국민들은 금 모으기를 해서 배상금을 지불했고, 왕의 귀환을 성대히 환영했다. 1295년 이전까지 귀족과 성직자에 의해 다스려지던 잉글랜드였으나 이때부터 일반시민이 의회에 참여하였는데, 교회 지도자와 귀족으로 이루어진 상원과 지방에서 선출된 하원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이것을 ‘모범의회’라고 한다.
절대왕정의 시대를 연 헨리 8세는 교황이 왕비와 이흔을 거절하자 종교개혁을 단행해 로마 카톨릭과는 절연하고, 잉글랜드 성공회를 국교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대영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여 명실상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듀터 왕조는 막을 내리고,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왕이 등극하게 된다. 1607년 제임스 왕의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이 식민지 아메리카에 개척되었는데, 최초의 영국 식민지였다. 제임스 타운은 미국에서 13개 주로 확장되었는데, 이로 인해 13개의 줄무늬가 새겨진 미국 국기가 만들어졌다.
아메리카 개척과 해상무역이 활발해진 빅토리아 시대에는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였던 영국이지만,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2022년 작고한 엘리자베스 2세가 1952년 즉위하면서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해방운동이 일어났고, 왕정이 분리되면서 영국의 빛나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지금의 영국 왕은 찰스 3세지만, 그는 이혼 경력이 있다는 것 외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한말부터 우리와도 관계가 깊었던 러시아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듯도 하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다. 1689년 등극한 ‘표도르 대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사절단과 서유럽을 탐방해 유럽 선진기술을 경험하고는 러시아를 개혁했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는데 여기에는 아들인 황태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 강대국 중의 하나인 스웨덴을 정복해 발트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새 수도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황무지 위에 9년간 건설로 세운 도시로써 인민의 뼈와 피로 건설되었다고 하여 ‘저주받은 도시’라 불리기도 하고, 러시아 전기작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현상을 신의 저주로 표현하기도 한다.
1721년 표도르는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신문을 발행하는가 하면 전문학교를 건립해 교육에 힘 쓰기도 하고, 남성 중심이던 관습을 변화시켜 여자도 왕이 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러시아에는 여왕이 여럿 등장하기도 했는데. 1762년 남편을 쿠데타로 몰아낸 ‘예카테리나 2세’가 황제로 등극하여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기도 했다. 그녀는 무상교육과 최초로 사범대학을 설립해 교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1801년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는데, 러시아까지 정복해 유럽대륙을 통치하겠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야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전투를 피하고 도시에 불을 지른 뒤에 후퇴하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겨울이 오면서 물자부족으로 위기를 겪은 나폴레옹 군을 물리쳤다.
2022년 2월부터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드론 전쟁, 전자전쟁으로 변하고 있어서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이 전쟁은 2014년에 있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과도 그 맥이 닿아 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졌음에도 땅따먹기를 계속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크라이나의 나토가입 때문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15개의 나라가 독립했는데, 그중 하나인 우크라이나는 친서방을 표방하며 나토에 가입하고자 했다. 코앞의 나라들이 나토에 가입하는 것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과거 나폴레옹이 우크라이나를 통해 모스크바로 침공했듯이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우크라이나가 눈엣가시였다, 다른 또하나 이유는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두 나라의 공통 뿌리였다는데 있다. 키이우공국으로(현재 우크라이나 수도가 키이우이다) 러시아는 막강했던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조지아를 되찾아 제국을 세우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식량창고라는 것도 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가 모르는 비극의 역사, 잔혹사도 아주 많다. 책에서는 그런 비극의 역사로 아이티 혁명, 아편전쟁, 캄보디아 킬링필드, 홍콩의 구룡성채 철거 문제와 류큐 왕국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이것들을 읽어보기는 하겠지만, 여기서는 대략이라도 모두 적기는 무리일 것 같아 한두 가지만 적어보고자 한다. 첫째, 아이티는 몇 년 전에 지진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나고, 갱단이 활보하는 무정부 상태라는 뉴스를 본것 같은데, 사실 그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 나라가 아프리카에 있는지 남미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이티는 쿠바 아래쪽 섬나라로 콜럼버스가 그 섬을 구세주의 섬이라고 하여 ‘산살바도르’라고 이름 붙였고, 원주민은 이곳을 히스파니올라섬이라고 했다. 이 섬의 오른쪽에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고, 왼쪽에는 아이티공화국이 있다.
이곳에 살던 원주민은 스페인 점령군에 의해 대부분 학살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이때에 스페인은 여기를 경영할 새로운 인력이 필요했고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끌고 와 경영했다. 1697년 스페인보다 영국과 프랑스가 힘이 세지자, 프랑스가 스페인과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맺고 이 섬 1/3을 프랑스령으로 삼았다. 경상남북도 정도 크기의 섬 일부가 훗날 아이티공화국이 되었는데, 원주민들이 몰살된 뒤 노예로 잡혀 온 흑인들은 설탕 생산노동자로 지옥에 빠졌다. 17세기 유럽인은 커피의 쓴맛을 달콤하게 변화시키는 설탕의 맛에 빠져 설탕의 인기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이로써 아이티에는 플랜테이션이라는 근대적 농업시스템이 처음 시도되기도 했다.
아이티의 흑인 노예들은 평균 수명이 20세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착취당했는데, 사탕수수는 다 자라면 키가 4m가 넘고, 이를 베어 압축기로 즙을 짜야 하고, 그것을 설탕으로 정제하기 위해서는 솥에 넣어 끓여야 하는데 땔감도 노예들이 직접 산에서 베어 와야 했다. 압축 과정에 몸이 빨려 들어가 죽는 경우도 허다했으므로, 기계에 팔이 빨려 들어가도 죽지 않기 위해서 자기 팔을 잘라야 했는데, 그래서 노예들은 언제나 팔을 자를 수 있는 손도끼를 갖고 작업을 해야 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밖에 없었다. 아이티의 종교는 ‘부도교’로 가톨릭과 아프리카 전통 종교가 혼합된 것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89년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고, 이때 만들어진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것이 삼색기다. 흑인 노예들은 혁명 소식을 환영하며 혁명가를 부르고 프랑스를 따라 했다. 노예 50만 명에 고작 5%에 불과한 백인들은 분노한 흑인을 피해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1804년 중남미에서는 최초로 흑인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프랑스가 ‘생도맹그라’라고 불렸던 것을 ‘아이티’라고 국호로 정했다. ‘산악이 많은 지방’이라는 이 말은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지명이다. 아이티 혁명은 실재로는 대단한 역사지만,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2022년 1월에는 갱단에게 주민 1천 명이 희생되고, 90개가 넘는 이들 조직은 경찰과 군인도 손쓰기 힘들 정도다. 유엔의 도움도 한계를 보이는 실정에 놓인 아이티공화국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인구 1/4인 200만 명이 공산독재자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에 의해 잔인하게 희생된 크메르공화국(현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죽음의 땅)사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이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신에 2017년 처음 찾았던 류큐(琉球) 왕국에 대해 보기도 하자. 류큐, 즉 오키나와는 지금은 일본 땅이지만 중국에 가까운 왕국이었다. 따뜻한 햇볕과 맑은 바다로 동양의 하와이라고 불린다. 비록 짧기는 했지만, 한때 찬란한 역사를 꽃피운 곳으로 일본의 혼슈 등 4개 섬을 제외하면 가장 큰 화산섬이다. 3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안타깝지만 류큐의 고대 역사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박물관에서 본 옹기분 등이 기억이 난다.
13세기 전후 농경이 활발해지면서 북산, 중산, 남산이라는 세 나라가 형성되었고, 1429년 중산국왕 尙巴志가 삼국을 통일하고 슈리성을 수도로 류큐왕국을 세웠다. 류큐왕국 건국에 고려의 삼별초가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슈리성에서 출토된 고려기와에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長造)라고 새겨진 명문이 그것을 말해준다. 류큐는 제주에서 700㎞ 떨어져 있지만, 해류를 타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평화로운 이곳에 평화가 깨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1590년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금의 가고시마현(사쓰마번)에 명과 조선을 치려하니 군역 1만 5000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쓰마번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이에 사쓰마 대신에 류큐에 군역을 보내라고 요구하게 된다. 단칼에 거절한 류큐는 이런 내용을 명에 알렸다. 1593년 임란 발발 이듬해에는 사쓰마번과 류큐에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을 위한 식량을 요구한다. 류큐는 이를 거절하지만 자존심이 구겨진 사쓰마번은 류큐를 공격해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는다.
임란이 끝난 1609년 사쓰마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허락을 받고, 100척의 함선과 3,000명의 사무라이를 보내 류큐를 치는데, 류큐는 한번 저항도 못하고 수리성이 함락되었다. 관리 100명이 사쓰마번으로 끌려가고 왕과 신하들은 모진 고초를 겪다 류큐가 사쓰마의 속국임을 인정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1853년 미국이 일본과 통상외교를 맺으면서 류큐도 개방하라고 요구하다가 미국은 류큐와 따로 협정을 맺기도 했으나,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인 1872년 류큐를 일본의 번으로 편입시키고 왕을 귀족 지위로 격하시켰다. 이제 중국 눈치나 보던 일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은 류큐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청나라와의 무역도, 조공도 금하였는데 이에 류큐는 밀사를 파견하여 청나라의 실권자 李鴻章을 만나 류큐를 구해달라고 간청하고 혈서까지 썼다. 이홍장은 고민에 빠졌다. 보고만 있자니 류큐를 먹은 다음에는 대만, 조선, 심지어 청나라까지 눈독을 들일 것이고, 류큐를 구하려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에 청나라는 항의하는 말을 일본에 던졌지만,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1879년 4월 4일 류큐의 마지막 날에 500명 군사를 보내 슈리성을 점령하고 ‘류큐처분’을 통해 오키나와로 강제 병합시켰다.
1945년 초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미·일이 사활을 건 전투였는데, 일본 땅에서 벌어진 유일한 지상전이다. 이 전쟁으로 미군이 1만 2천 명, 일본군이 6만 5천 명 전사했으나, 행방불명되거나 학살당한 오키나와 주민이 12만 명에 이른다. 이것은 일본이 자폭 공격까지 불사하고 주민을 총알받이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하게 되지만,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오키나와는 미군의 중요 군사기지가 되었다. 1972년 미군은 오키나와를 반환했으나, 오키나와는 여러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2009년 유엔은 류큐 언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등재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갔을 때 류큐 노래는 들었어도 말은 듣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