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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1] 스크랩 문향(文鄕)의 언덕, "두들마을"(2)
바람산 추천 0 조회 71 15.02.08 11: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문향(文鄕)의 언덕, "두들마을"(2)

 

 

 

     마을 탐방로는 붉은 투수형 아스팔트로 깨끗이 단장되어 있어 걸어 다니기에는 더없이 편안하다.

     요소마다 현대적 미감을 살린 안내판을 설치하여 탐방객의 이해를 돕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정부인 장씨 예절관

 

     정부인 장씨를 기리기 위한 예절관은 강당 및 주방, 전시관, 문간채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영양군은 이 예절관을 청소년이나 대학생, 주민들이 예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장으로 이용하는 한편,

     음식디미방의 음식을 재현하고 교육하며 체험을 해보는 관광 상품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작가 이문열의 고택

 

          

              이문열의 고택마당 한 켠의 200년된 향나무는 이곳이 한국문단의 거장을 길러낸 곳임을 상징하듯

           기상높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유우당(惟于堂)

 

유우당은 석계 이시명의 둘째형인 이상도(李相度, 1733 ∼ 1835)가 창건을 시작하였으나, 병으로 장자(長子)인

이기찬(李箕燦)에 의해 완성되었고, 이기찬의 호를 따서 유우당(惟于堂) 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는 조선 순조 33년(1833) 석보면 주남리에 세운 것을 선생의 후손인 이돈호(1869∼1942)가 지금 있는 자리

로 옮긴 것이다.

이돈호(李暾浩)는 3?1운동 때 유림(儒林)의 대표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가담하며 독

립운동을 하였고, 그의 조카 이병각(李秉珏)은 조지훈(趙芝薰)?오일도(吳一島)?조세림(趙世林) 등과 더불어 항일

(抗日) 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이 집은 정침(正寢)과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은 이 지역 민가(民家) 건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口'자형태로 되어 있고, 정침 우측에 있는 사당은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특히,자연석을 높이 쌓은 축대 위 사랑채 누마루의 중간 주초는 건강과 불로장생의 상징인 머리를 치켜든

거북이형상의 자연석을 사용한 것이채롭다.

 

 
 

                                                                       석천서당(石川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서당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9~1674) 선생이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여 석천서당(石川書堂)이 되었다.

 

이곳은 무엇보다 전망이 시원하기로 앞산과 들녘이 보이고 두들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남서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좌측에서 첫째와 넷째칸은 통칸방으로 꾸몄고 둘째와 셋째칸은 마루를 깔았다.

정면과 좌우면에 2자의 쪽마루를 내어 평난간을 둘렀고, 마루로 향하게 한 창호는 4분합의 "들어 열개문"으로

하여 6칸을 1칸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석천서당을 돌아 나오는 담벼락 밑에 큰 물통을 잘라 거꾸로 세운 특이한 집의 주인이 나그네를 쳐다보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에 익숙해진 견공의 얼굴에서  경계의 눈빛은 느껴지지 않는다.

 

 

                          두들마을 4대(臺) 위의 "원리 쉼터"에 있는 설명문 

 

마을앞을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대략 100여m의 간격을 두고 석계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

이 새겨 놓은 동대(東臺)·세심대(洗心臺)·낙기대(樂飢臺)·서대(西臺)사대(四臺)라는 것이 있다.

 

이들 대(臺)는 힘차게 뻗은 일월산 낙맥의 정기가 모인 곳이다.

대(臺)는 보통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이나 바위 절벽 위를 지칭한다.

 

1676년 항재(恒齋)이숭일이 부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선생의 삼년상을 마치고 석보로 돌아와 선현의 업 

을 이어 학문을 탐구 할 적에 명명한 곳으로 각대마다 암석에 각자(刻字: 글을 새김)를 하였는데,특히 이들 중 

세심대(洗心臺)와 낙기대(樂飢臺)에 서면 전방의 촌락과 무수한 굴곡의 산야를 일목요연하게 감상할 수 있어

심신이 상쾌하여 배고픔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다는 뜻에서 대명(臺名)을 지었다고 한다.

 

낙기대(樂飢臺)...

"배고픔을 즐기는 곳"이란 희귀한 이름이다.

이 대명(臺名)에 관하여 원광대학교 조용헌(趙龍憲) 교수는 이분법적 해석을 내렸다.

하나는, 말 그대로 배가 고팠다는 의미란 것이다. 

 

       재령이씨는 조선 후기 당쟁사를 놓고 볼 때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던 집안에 속한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석보면 두들 마을

       출신인 갈암(葛庵)이현일(李玄逸:1627~1704) 때문이다. 갈암은 17세기 말의 영남학파(嶺南學派)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7세기 말은 조선조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숙종 말엽이다. 경신환국(庚申換局),기사환국(己巳換局),갑술환국

       (甲戌換局) 같은 정변이 몰려 있는 시기이다.기호학파 노론(老論)과 영남학파 남인(南人)의 승부였다.

       이 시기 남인의 대표주자가 바로 갈암 이었다. 갈암은 기호학파의 종장이었던 우암 송시열에게 정면승부를 걸었다 패배했다.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의 운명을 건 승부였다. 갈암이 당쟁에서 패한 뒤 재령이씨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장에서 재령이씨 수험생들은 노론 시험관들로부터 '제이(除李)'라고 불렀다. "재령이씨는 제외한다"는 뜻이다.

       재령이씨들은 이후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됐기 때문이다.

       산골이라 논밭도 없고 녹봉도 없으니 그저 굶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는, 가진 자의 사회적,도덕적 책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란 것이다.

 

       낙기대 주변에는 대략 50여 그루의 상수리 나무가 오랜 풍상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수령이 300~400년된 것들이다.  

       흉년이 들거나 보릿고개가 닥쳐서 인근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낙기대 위의 상수리나무 열매를 비상

       식량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보통 하루에 끓이는 죽의 양이 200명이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고 하니 적은 양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수리 죽으로 배를 채운 유랑민들은 “다른 집의 쌀죽보다 이씨 집의 상수리가 더 달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였던 그 성의를 고맙게 여겼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 이시명의 조부가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를 보면 노비가 700명 가량 있었다고 나온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숫자

       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700명이 모두 노비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중 상당수는 노비라기 보다는 가신(家臣)

       개념에 가깝다. 가신은 어느 정도 예속되어 있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자유가 전혀 없는 노비는 아니다.

       기민 먹이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700명이란 숫자는 이씨 집안에서 최소한의 호구를 책임을 져야 하는 가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양반이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했다.  

 

 

 

             

 

            

 

                                                오늘날 복원한 46가지의 "음식디미방"의 음식들

 

 

            이시명의 부인, 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 장계향 1598~1680)는 친정에서 배운 요리 솜씨에다

            시댁 음식까지 곁들인 평생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만든 가양주(집에서 만드는 술)를 비롯해

            146가지요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책 뒤표지 안쪽에는 “이 책은 이리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라. 딸자식은 이 책을 베껴가되 가져갈 생각을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 하라”는 당부의 글까지 적어 두었다.

 

            책을 지을 당시 장씨 부인은 74세의 고령이었다. 이 책에는 곰 발바닥을 비롯, 멧돼지ㆍ참새ㆍ

            자라ㆍ누런 개ㆍ꿩 등 지금은 생경한 요리 재료가 많다. 당시는 가문의 체통을 지키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손님 접대를 위한 술 빚기였는데, 술 종류가 자그마치 51가지나 됐다. 이화주ㆍ

            사시주ㆍ칠일주ㆍ절주ㆍ하절주 등 계절감이 살아 있는 술이 있는가 하면 감향주ㆍ죽엽주ㆍ

            유화주ㆍ향온주  등 풍류를 느끼게 하는 술 이름도 있다.

 

            이것뿐 아니라 냉장고가 없던 시절 “생선을 말릴 때는 내장과 핏기를 말끔히 없애고 소금을 친

            다음 널빤지 사이에 질러 두었다가 판판해지면 발에 넣어 말린다. 이때 밑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쐬면 벌레가 꾀지 않는다”는 살림의 지혜도 메모돼 있다. 임진왜란 이후 들어온 고추가 일반화

            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인지 김치를 담글 때 고춧가루 대신 천초와 후추ㆍ겨자ㆍ파 등 향신료를 

            많이 사용했던 점도 이채롭다.

 

 

 

 

             

                            약 330년 전 정부인 장씨가 한글로 작성한 '음식 디미방'  

 

                                           『음식디미방』의 음식법특징을 요약한 글이다.

 

               전체 146항목 중에서 술 만드는 법이 51항목으로 35%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의 상류층 가정

              주부가 하는 일 중에서 술빚기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곧, 접빈객(接賓客)이 중요한 덕목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복숭아 간수법이나 가지, 생포 간수법 등을 보면 냉장고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음식을 보관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제철이 아닌 나물 쓰는 법 등을 보면 비닐하우스 재배와 같은 방법으로 겨울철에도 야채와

              과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  만두와 국수도 재료나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며, 반찬도 다양하다. 앵두와 설탕을 조려

              응고시킨 젤리와 같은 음식도 있다. 육류 중에는 소고기보다 개고기와 꿩고기 요리가 많다.

              농사에 소가 귀하게 쓰이던 시절, 개와 꿩이 소고기를 대신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시대 장득만(1684-1764) 등이 그린 ‘기사경회첩’에 보면, 궁중연회 상차림에 ‘음식디미방’

              에서 소개하는 음식들이 보인다. 특히, 별탕이라 불리는 자라탕이나 중국 왕실에서도 귀했던

              웅장,해삼과 전복 등에 대한 조리법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에서 먹어본 요리를 다시 집안마다

              재현해서 별미로 먹곤 했음을 알 수 있다.

 

          ♣  고추는 우리나라 문헌 중 ‘지봉유설’(1613)에 처음 소개되었는데, ‘음식디미방’에는 고추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 점으로 보아, 지금은 고추산지로 유명한 영양이지만 당시 이곳까지는 고추가

              전파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매운 맛을 내는 조미료로 천초와 후추, 겨자 등을 사용했고, 마늘보다 생강을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육류, 해산물, 채소 등을 활용한 ‘누르미’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현재 밀가루를 입혀서 지지는

              누름적의 원형으로 보인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동아와 외로 만든 음식도 널리 식용되었

              음을 알 수 있다. 계란 음식은 난탕과 계란탕 두 가지인데, 반숙한 계란을 끓는 물이나 장국에

              곁들여 초를 치는 것으로 지금도 전래되어 오는 음식이다.

 

          ♣  ‘음식디미방’에는 ‘맛질방문’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모두 16개 있다. 

              이는 ‘맛질이란 마을의 조리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서 ‘맛질’은 장씨 부인의 외가(친정

              어머니가 살던 예천 지역) 마을의 조리법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인 안동장씨 유허비

 

아래 글은 "음식디미방"에 관한 역사와 환경, 발전과정을 잘 요약한 설명문인데, 이 글을 쓰신 분은 아마도 음식

전문가이신 것 같다.  

 

                 호남 음식은 '가야금' 경상도 음식은 '거문고'


 

짠 음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식의 요체를 알 수 있다. 한식 세계화의 첨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먹음직스러운 전통된장.
짠 음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식의 요체를 알 수 있다. 한식 세계화의 첨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먹음직스러운 전통된장.
책 표지에는 한자로 ‘규곤시의방(閨是議方)’ 이라 쓰여 있지만, 겉표지를 넘기면 ‘음식디미방’이라는 한글 제목이 나온다. 겉표지는 장씨의 부군이나 후손들이 책의 격식을 갖추고 의미를 더하기 위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한글로 된 최초의 요리서를 펴낸 정부인 안동 장씨의 초상화
한글로 된 최초의 요리서를 펴낸 정부인 안동 장씨의 초상화

# 호남은 너무 빠르고, 경상도는 너무 느렸고

안동·영주·영양.

경북 북부 세 고을 전통요리가 한묶음이 된다면? 솔직히 호남 음식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할 겁니다. 알만한 한식 고수들은 내색만 하지 않

을 따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남의 음식 마케팅을 위한 팀

워크는 눈이 부실 정도로 탁월합니다. 그에 비하면 경상도는 너무 겸

손하고 점잖죠. 나대는 걸 무척 염치없어 합니다. 그틈에 호남은 비빔

밥을 세계적 음식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습니다. 호남의 발빠름도 눈

여겨 둬야 할 시점입니다.


지역 조리사들은 호남 음식에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타지 사

람이 "경상도에 먹을 게 없다"고 하면 금세 맞장구를 칩니다. 안목이

없으면 잘 안 보이죠. 날이 선 경상도 음식을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였을 겁니다. 경상도 반가(班家)음식은 조선 궁중요리

의 축소판입니다. 반가 사람들, 참 자존심이 세죠. 좀처럼 담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합니다. 반가음식이 식당 메뉴로 팔리는 걸 문중 어른

들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조상에 못할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아직 상당수 경상도 반가음식은 몇몇 한식 연구가에게만

공개되고 아직 베일에 감춰져 있습니다. 언론이 노크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제 기지개를 켤 때가 왔습니다.


호남은 그 화려한 음식 가짓수만큼이나 식재료가 무궁무진하죠. 그래

서 음식도 가야금 선율처럼 알록달록합니다. 하지만 경상도 음식 질감

은 호남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뭐랄까, '거문고 소리' 같습니다. 가짓

수도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하나하나에 고졸질박한 기품이 담겨있

다고나 할까요. 나는 호남 음식은 '초서체' 같고, 경상도 음식은 한석

봉체처럼 반듯한 '해서체'같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상도 전통

음식은 분명 우리 한식사에선 단연 우뚝합니다. 그 흐름 몇 자락을

정리해봅니다.


# 궁중요리 전문가 황혜성이 찾아낸 음식 디미방

1957년 국내 최초 궁중음식 소개서인 '이조궁정요리통고'를 펴낸 궁중

요리 전문가 황혜성(2006년 87세로 작고).


그녀가 사라져가는 전통음식의 명맥을 잇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

던중 진기한 한글 요리서 한 권을 발견합니다. 바로 조선조 숙종 때 안

동에 살던 정부인 안동 장씨 부인(1598∼1680)이 지은 한국 최초 한글

요리백과서인 '음식 디미방(1670년 간행, 현재 원본은 경북대 고문서

실에 보존)'이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식경(食經)'으로도 불립니다. 옛 

날 '임금님이 식사를 하는 장소'즉, '지미방(知味房)'을 소리대로 옮겨

놓은 디미방은 이름 그대로 '음식의 참 맛을 알게 해주는 책'이란 뜻입

니다. 황혜성은 10년뒤 펴낸 '한국요리백과사전'에 146가지 요리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만난 인연으로 매년 빠뜨리지 않고

장씨 부인 제삿날 안동으로 달려갔습니다.


장씨 부인의 얼은 현재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 재령이씨 집성

촌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이 가문 사람으로 소설 '선

택'의 주인공도 바로 장씨 부인입니다. 장씨 부인은 또 다른 신사임당

이었습니다. 낳은 아들 모두 입신양명했고 특히 셋째 아들 갈암 이현

일은 퇴계의 학통을 잇는 영남학파의 거봉으로 후에 산림(山林·대학자

급 처사를 조정에서 일컬음) 칭호도 받습니다. 이 집성촌엔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전통 한옥 30여채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석계고택은 조선

인조 때 유학자인 석계 이시명(1599∼1674)이 1640년에 지은 한옥입

니다. 이시명의 아내인 안동 장씨가 이곳에서 음식 디미방을 편찬했습

니다. 현재 두들마을에는 장씨 유물 전시관이 있으며, 정부인 장씨 예

절관에서는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음식 일부를 맛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안동 군자마을의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도 한국 최고급 고요리

서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550년전 그 마을에 들어 온 농수 김효로 선

생의 둘째 아들 김유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입니다. 이 책에선 김

치가 '침채(沈菜)'로 적혀있습니다.




# 디미방 브랜드 마케팅  


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흔세살 생일을 맞아 풍산류씨 종택이

있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경상도식 반가음식을 생일상으로 받았습니다.

이 느닷없는 이벤트로 인해 하회마을은 전국적 관광지로 급성장했고,

덩달아 경상도 음식이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됐습

니다. 하지만 후속타가 아쉬웠습니다. 경상도 음식에 대한 지속적 홍보

전략이 부족했습니다.



아쉬움을 느낀 안동시가 적극 나섰습니다.

2004년 서울 삼성 코엑스에서 열린 제5회 세계 음식박람회에서 디미방에 나오는 요리 16가지를 재현했습니다.

양념을 한 소양을 중탕해 만든 '양숙편'과 멥쌀 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한 뒤 고명을 얹어 찐 여름 떡인 '증편' 등이었습니다. 디미방에는 술과 식초 관련 54종, 국수·떡·과자 등 15

종, 고기와 생선요리 등 46종, 채소와 과일 관련 조리법 31종이 섞여 있습니다.


안동에 뒤질세라 영양군이 디미방을 브랜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요즘 전국 한식 고수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영양 두들마을을 찾아옵니다.


일차적으로 문중 사람들과 지역 주부들이 모여 지난해부터 디미방 요리책 속 음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국의 삭품영양학과 교수와 한정식 주인 등이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디미방 음식 재현

시식회가 있는 날, 소문을 듣고 한국식생활문화학회(회장 양일선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회원 50여명이 몰

려들었습니다. 그날 집돼지 고기구이, 어만두, 연근채, 숭어전, 가지찜, 섭산삼(더덕에 찹쌀가루를 묻혀 튀긴 음

식) 등 여섯 가지가 소개됐습니다. 그런데 음식에 붉은 기운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고춧가루가 빠진 탓이죠.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처음 고추가 소개됐지만 당시에는 영양까지 고추가 보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

게 하는 대목입니다.


두들마을 초입 전통한옥체험관은 경북 음식 세계화의 전진기지입니다. 디미방의 조리법에 따라 맛을 재현하고

음식차림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디미방 관련 음식을 칠첩반상, 코스요리 등으로 묶어 팝니다. 1인분 3만~5만원

선. 재료준비 관계로 미리 예약해야 합니다(054-680-6043·영양군청 관광개발계). 영양군은 '음식 디미방'을 브

랜드로 상표등록했습니다.

 

                                                    (출처: http://cafe.daum.net/54cheongun/58sL/733)

 

 

 

 

   정부인 안동장씨 유허비를 지나 탐방 마지막 코스로 석계고택을 향하는 중간에 자그마한 시(詩)동산이 있다.

  그곳에는 한 때 유우당(惟于堂)에서 자랐던 항일 반체제 애국시인 이병각의 시비가 서 있다.

 

  학생시절부터 항일운동에 가담, 옥살이를 당하기도 했던 이병각은 이육사, 김동리, 신석초, 오장환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강철의 투지를 지닌 대륙적 남성 이육사선생은 절친했던 이병각시인이 병으로 눕자 아예 동거

  하며 주위의 만류를 듣기는커녕 자신이 피하면 친구가 병이 더 심한 줄 알고 불안해한다며 오히려 가까이

  지내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병각은 몸을 추스르지 않고 작품을 쓰다 서울 성모병원에 한 달 정도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41년 11월29일 만 31세를 일기로 영면 하였다. 
  목숨은 사라졌어도 그의 문학적 생명과 항일정신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커지고 있다.

 

  1946년 조선문학가 동맹 전국 문학자 대회에서 추도대상 시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이병각은 곧은 사람으로

  민족적이고 저항적인 글을 남겼으며 요절 한데다 주류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조명을 소홀히 했으나 이제는

  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2006년4월 두들 마을 석계고택 맞은편에 이병각 시비가 세워졌다

 

 

             

                                                                    항일애국시인 이병각 시비

 

                                                                                   “가을밤” 


                                                             뉘우침이여 

                                                             베개를 적신다 

                                                             달이 밝다 

                                                             베짱이 울음에 맞추어 

                                                             가을밤이 발버둥 친다 

                                                             새로워질 수 없는 내력이거든 

                                                             나달아 빨리 늙어라

 

 

 

 

                                                        정부인 유허비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검은 비닐로 멀칭(mulching)을 해놓은 밭이랑 끝에 보이는 집이 이 마을의 개척조(祖) 이시명의

     석계고택이다.

 

 


                                                  석계고택(石溪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로 지정된 석계고택은 정면5칸, 측면1칸, 홀처마 맞배지붕인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옆으로는 토담을 막아 허실감을 메우고 마치 口자형 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되어

있다.


이 집은 석계 이시명 (1590~1674)선생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고택으로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정부인 안동장씨도 선생의 학문 못지않게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친정을 재건한 효행과 부덕,학문, 예술 등을 

두루 겸비한 학자로 세인들로 부터 신사임당과 동등한 인물로 칭송되어 오고 있다.

 

그런데, 앞서 둘러본 두들마을의 한옥 중 근래에 지은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의 지붕을 보면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든다. 여기에 관한 조용헌(趙龍憲) 교수의 설명이다.

 

 

        원리리 두들마을 고택들의 지붕을 보면 한 가지 어색한 부분이 발견된다. 석계종택, 석계서당,유우당을 비롯한

        기와집들의 지붕끝에 마감재로 사용하는 앙와(仰瓦)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앙와로 마감을 하지 않으니 기와지붕의 양쪽 끝이 매우 어설퍼 보인다. 집을 짓다 만 것 같기도 하다.

        집안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집을 지을 때 앙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수백년 내려오는 재령 이씨들의 전통이라고 한다.

        돈이 없어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어떤 이유 때문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미완으로 남겨놓기 위해서이다. 미완이란 겸손을 뜻하기도 한다. 앙와를 설치하지 않았으므로 아직

        이 집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자각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사치스럽게 짓지 않기 위해서이다. 전통 기와지붕에서 멋을 낼 수 있는 부분이 앙와이기도 하다.

        궁궐 지붕의 끝에 설치하는 치미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기도 한데, 화려하고 맵시 좋은 앙와로 지붕을 단장하는 것은

        선비정신에 어긋난다고 간주한 것이다.

 

 

 

             

                                                        담배 건조장

 

              두들마을을 떠나면서 마을 진입로 초입에 서 있는 담배 건조장 앞에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이곳 영양을 비롯한 인근의 청송,봉화 등의 산지 마을에서는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었다.

           내가 알기로 담배농사는 과거의 전매청 시절이든 지금의 담배인삼공사이든 계약재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이 지방들을 다닐 때는 담배밭이 지천으로 보였는데 요즈음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 금연운동확산으로 그 수요가 준 때문인지, 아니면 고생에 비한 댓가가 적어

           재배를 포기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보이는 저 낡은 건조장도 본래의 자기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두들마을....

           음식디미방을 재현하는 곳에서는 구수한 고향의 냄새를,광산문학연구소에서는 은은한 묵향을,

           석천서당에서는 싫지않은 오랜 고서적의 묵은 냄새를, 이병각의 시비에서는 아무렇게나 휘두른

           막대기에 생체기가 난 누운 들풀의 냄새를, 쓰러질듯 버티고 있는 담배 건조장에서는 그 옛날

           "풍년초"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

           이 냄새들은 이제는 기억너머로 자꾸 사라지려하는 어머니,아버지의 냄새일 게다......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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