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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곳 참치 / 최호일
참치를 보면 다른 별에 가서 넘어지고 싶어진다
동그란 깡통 참치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바다를 헤엄쳐 다녔는지 깡통 속에서 살이 통통하게 쪘는지
지느러미와 내장이 없다
참치는 좀 더 외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온 듯하다 먼 훗날
비행접시를 타고 바닷가에 내린 어느 외계인처럼
사람들은 내용물을 버리고 깡통을 구워 먹을지 모른다
다 먹고 버린 참치를 차고 노는 아이들
참치를 숭배하는 자세로 비닐봉지에 담아 가지고 오다가
덜커덩 자전거가 어느 돌에 넘어졌다
저 곳으로 넘어지는 참치
저 돌은 어느 별에서 날아 왔을까 돌은
그곳에서 가시를 발라낸 비교적 딱딱한 참치일 수도 있고
저녁 어스름의 근원적인 고독일 수도 있다
아가미가 없는 참치
다낭, 단양 연가 / 최호일
혀가 짧은 사람이 발음하지 않으면 두 도시의 공통점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베트남의 잠 안 자는 고양이, 한국계의 붉은 태양 사이로 옷 벗은 나비가 나비 옷을 걸치고 날아오고, 모르는 척 나이를 마음대로 꺼내 먹는 사람들이 안개 옷을 사 입고 다니는 곳
마음에 새겨진 뜨거운 얼음 문신처럼
방금 사라진 곳
긴 머리 달력이 거기 펄럭 웃고 있을 때, 바람이 늦은 고양이 울음으로 마을에 내려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잠깐 여는 것처럼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 다녀간 이름. 단양을 다낭이라고 발음하면 두 곳 사이의 거리는 캄캄하게 지워지지
입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다시 아득해지지
그곳에서 밥을 짓고 첫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밤이 지나도록 나를 추억하지 못할 것이다. 기억나지 않아도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 다낭, 하고 불러보는 혀가 짧은 사람
왜 그곳을 늘 널리 떠나온 것일까? 집을 나온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구름의 아래쪽을 바라보는 게 취미생활. 멀리 습관성 구름이 떠가고 있다. 저 애매한 문장은 노을빛으로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어둠에 쌓이는 빛처럼, 사랑이 너무 짧아 혀가 꼬인 사람이라면 단양에 가면 다낭 팔경을 볼 수 있다. 들키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어도 태양의 속살과 야자수 옷깃이 선명하게 보인다. 마음 그늘 속으로 이봐요, 얼굴 없는 사람이 웃으며 오고 있다. 비가 그칠 때처럼 너의 이름을 쓴다. 검정색으로 붉게
다낭과 단양 사이에 핀 들꽃에 대해
그리고 나이를 알 수 없는 태양에 대해
당신은 참 붉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음부꽃 / 최호일
장다리꽃 밭에는 장다리꽃의 오후가 가득하다
장다리꽃 옆에서 서성이고 있는 허공에는 나비가 가득하다
키가 큰 장다리꽃을 일부러 바라보는 사람은 없지만
키가 큰 장다리꽃 사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열두 살 먹은 계집애가 장다리꽃 노란 쇠문을 열고 들어가
하나 둘 바람을 세며 오줌을 눌 때도 있는 것이다
하나에서 열을 셀 때 보이는 꽃
바람 열 장이 들추어내고 있다.
시간을 얇게 저미다가 좀 더 크게 썰린 시간은
어금니로 씹으면 약간 소리가 난다
열두 살에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
나비는 날개가 고장난 것처럼 수십 년을 날아다닌다
보았다 장다리꽃
보았다 나비
내 머리에 바람이 분다고 나는 바람 밖에서 말했다
밤이 오고
달빛 아래라면 몰라도 어느 오후는
도화지에 그려놓고 잡아 다니면 주욱 찢어질 것이다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 / 최호일
1
쓸쓸한 당신은, 배가 고프면 가까운 하늘을 비벼먹으세요. 날마다 처음 보는 세상처럼 외로운 날이면, 머리칼이 가장 푸른 바람을 잠깐 집어넣고, 깔깔 웃는 진달래도 따 넣고 벅벅 비비세요. 이 개성 있는 식당은 요즘 성업 중이라 당신의 개성은 무시해 버려요. 꼬리를 잘라버린 도마뱀의 짧은 인연도 그 상처도 아,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되지요. 머리를 감싸거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더라도 마지막 질문처럼 허기는 찾아와요. 거울도 깊이 잠드는 밤이면 내 마음을 뚝뚝 팔다리도 뚝, 머리통도 뚝, 한 통 속에 비벼 넣어요. 자폐증의 월요일과 싱싱한 주말도 살짝 하루를 속여 넣어주세요. 압정을 밟은 듯 묵직해서 만져보면 돌아누운 한밤의 앙상한 등줄기. 저런, 저 기사 아저씨는 배고픈지 막말도 잘해. 욕도 싱겁지 않게 섞어서…… 상처도 비벼놓으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해서 하느님도 못 알아볼 거예요. 정말 저 찬란한 아파트 불빛도 뻔한 거짓말이죠. 즐겁게 비벼드릴까요? 자동차와 당신과 즐거운 낭떠러지! 꽃피는 아침에 문득 꽃이 피었군요.
2
은하수 단지 분리수거 하는 날은 꼭 비만 오는 날. 비 오는 날 웃기는 정치인은 이쪽, 호주머니가 커다란 재벌은 저쪽 마대 자루. 아 참, 시인도 순서대로 분류해서 여기다 넣는 거 맞죠? 빈 깡통은 어디였더라…… 국물이 흘러요. 이렇게 낡은 생각도 한번 비에 젖나요. 그런데 갈수록 자루가 모자라네. 최신형 우주인이 쓰다버린 첫사랑과 그곳을 거닐던 오솔길과 새로운 농담은 버릴 데가 없어요. 이 그림은 앤디 워홀 바이러스에 심하게 감염돼 격리해야겠군요. 지식은 갈수록 다리를 절어서 돈을 주고 버려야지. 아주 오래 된 어둠은 밤에 살짝 버리면 감쪽같아. 불륜은 가져오지 마세요. 아파트 주민이 아니잖아요. 저 빗줄기 아저씨, 왜 발등을 자꾸 밟으실까. 개성도 좋지만 그렇게 급하시면, 화장장으로 해서 강물에 공짜로 띄워 드릴까요? 저런, 화단 위에 당신이 당신의 몸을 우산 없이 가끔 버리기도 하는군요. 비가 오는 날은 이쪽, 비가 오고 분리수거 하는 날은 은하수 저쪽.
그 겨울의 氣象圖 / 최호일
신용불량의 날씨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공터에는 늙은 개가 전단지를 훑어보면서
사건을 파헤치고 있었고
첫눈이 현장을 덮치고 있었다
자주 바람이 불어 시야를 가려서인지
노파의 목도리는 첫눈이 아니라
오래된 가난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북극에서 무작정 실려온 곰의 행렬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창문을 열어놓고
눈길을 핑계삼아 어슬렁거리며 지나간다
바람은 확성기를 통해 분양사기단의 비리를
부풀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서 불고 있고
현수막이 눈송이를 자꾸 털어내면서
저 혼자 검붉은 혈서를 써놓고 있었다
마음의 혈관을 후끈, 면도날이 지나간다
아픔이 선명하게 빠져나간다
이제, 시장 입구에 신문지 같은 하루를 펴놓고
어둠이 저벅저벅 걸어올 때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눈물로 다듬어 파는 일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비교적 짧게 노파의 소식이
첫눈 소식에 묻혀 광고 문구처럼 지나갔다
그녀가 화면 위로 뱉어낸 가래침이
밥상 위에 하얗게 튄다
눈 그친 공터에는 개의 발자국이
그 해 겨울, 눈이 내린 기상도를 그려놓고
어디론가 개를 데리고 사라졌다
[심사평] 외딴 기쁨, 또는 매우 섬세한 도발
도대체 최호일이란 이름을 달고 투고한 이의 정체는 뭘까. 소위 '무릎을 탁! 내리치게 하는 시'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겨를도 없이, 그런 생각 때문에 아예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마음몸살을 앓았다. 부산하게 비점(批點)을 찍고 누수(漏水)되는 곳을 초음파로 탐지하고, 물색하고, 옹이와 마디를 짚어내는 와중에 소금버캐를 날로 씹는 고민이나 갈등 없이 한 사람을 미리 염두에 놓고, 뒷갈망에 대한 근심은커녕 만만해하긴 기실 드물다.
그의 시편이 지닌 미덕은 가멸찬 상상력과 당돌한 언어에서 만져진다. 어찌 보면 그 상상력과 언어의 육종(育種)은 시단 한켠에서 언제나 쉽게 띄는 품종과 얼추 동종 교배한 것 어슷비슷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호일의 그것은, 이를테면 낯설고 외딴 집에 불현듯 놓였다 쳤을 때의 불안감이나 경계심 비슷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무슨 산뜻한 호기심 때문에 두리번거리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의 상상력과 언어는 다만 분주하고 화려하게 이합집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을 다시 알맞은 악력으로 제어하는 자성(磁性) 같은 게 느껴지고, 이는 최호일에게 고통스런 벼림이 오랜 기간 있어 왔음을 뜻한다.
「저 곳 참치」를 보자. 항생제나 방부제로 칠갑을 한 가치관의 전도라 해도 좋고, 견고한 문명사에 대한 야유라 우겨도 좋겠다. 무엇보다 제목, 또는 첫 행의 염치없는 도발이 끝까지 부담을 주지 않고 문맥에 잠복하면서 흐름을 갈무리하는 솜씨는 전혀 신인답지 않다.
「다낭, 단양 연가」의 배면을 채우는 황량한 위트는 생의 견디기 어려운 아이러니를 차마 형언할 수 없는 페이소스로 아리게 채색한다.
「비빔밥과 분리수거에 관한 질문」은 호들갑스럽게 '섞어서 먹는 것'과 차곡차곡 '나누어 버리는 것' 사이의 거리에 관한 질문이다. 그는 그 거리를 비틀고 조립하고 해체하고 눈금을 긋고 삭제하기를 반복한다. 냉소적이지 않은 문명 비평가처럼.
「그 겨울의 氣象圖」도 그의 말 다루는 재주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필경 아파트 분양사기단에 걸려 평생 시장 노점에서 번 재산을 날린 노파와 얽힌 '사건'을 '첫눈'과 '늙은 개'의 위트로 교묘히 처리한다. 화자가 호주머니 속에 감추든 말든 텔레비전에서 '광고문구처럼 지나'가는 '노파의 소식'은 되레 현실보다 더 비극적으로, 더 가슴 시리게 현실을 고발한다. '사건을 파헤치'던 '늙은 개'는 이미 첫눈밭에서 사라졌다.
최호일의 미장센 안에서 발호하는 상상력은, 그러나 사납지도 거칠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모두 능란한 언어 구사력 때문이다. 그는 언어를 부리고 놀 줄 아는 천부의 힘을 지닌 것 같다. 그러나, 아니 그러기 때문에, 이쯤에서 언어에 대한 염결한 수세(守勢)를 견지할 수 있는 힘을 배운다면 더 말할 게 없겠다. 당선을 축하한다.
오태환 (시인)
[출처] 저 곳 참치 외 4편 / 최호일|작성자 바냔나무
개 끈 / 최호일
빈 봉지로 배불러 가는 라면 집 쓰레기통처럼
늦은 폭설이 허기진 개밥그릇에
허드레 눈덩이를 곱배기로 던져 넣고 있다
이곳까지 오는 내 발목을 물어뜯던 것들
개는 싱겁게 하늘을 보고 짖어대지만
라면은 죄송하게 젓가락까지 짜다
내 호주머니가 그런 것처럼
개밥그릇도 짭짤한 하루를 좋아할 것이다
쭈글쭈글한 공복이 개밥그릇 속에서
찬밥덩이를 흘리면서 받아먹고 있다
한 숟가락만, 감나무 가지가 손 내민다
땡볕이 주렁주렁 달라붙는 여름날에는
감나무는 그늘을 깔고 개를 달게 키울 것이다
눈 더미가 쌀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가
뼈까지 녹아 버릴 때
개는 밥그릇을 엎고 부들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이 내 따뜻한 끈이었던 시절처럼
개 끈은 당분간 개를 보호할 것이다
개가 끈을 끌고 가기도 하고
끈이 개를 잡아당기기도 하면서
개 끈의 길이만큼 간섭하고
개 끈의 길이만큼 용서할 것이다
전철에서 쏟아져 나온 넥타이들을
눈보라가 하나씩 잡아끌고 지나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 하얗게 지워지는 동안
라면은 국물과 뼈다귀까지 주름지고 있다
멍멍, 하고 밥이 다가 갈 때쯤
개의 절반이 꼬리라는 걸 처음 알았다
마당의 절반쯤, 희망에 묶여있다는 걸
아쿠아리우스 / 최호일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 당선 소감 “옆집 아줌마에게 말걸듯…그렇게 詩 써내려 갈 것”
십년 전쯤, 생업을 등지고 시에 빠져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무성 영화처럼 돌아간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나는 살짝 맛이 가 있었다. 과도한 의욕이, 편견과 오만이, 그리고 화려한 궁핍이 내 유일한 의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보이거나 천재였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지쳐있었다.
어림도 없을 줄 알았던 당선소식을 듣고는, 아이들은 상금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아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방에 가서 운다. 나는 실없는 장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담담했다. 가소롭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누군가 말했다. 시인은 돈을 멀리해야 하고, 살이 쪄서도 안 되며, 오로지 고독과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심한(?)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양식은 과연 고독과 이슬일까? 하지만 나는 어느덧 돈의 단맛을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영악해져 있다. 그러나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마음은 여전히 춥거나 허기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여!시인이여!절벽까지 나를 안내해 다오. 출구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작심을 하고 쓴 시는 모조리 밀려나고, 옆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쓴 시가 당선이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힘을 뺐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앞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시를 써 봐야겠다. 아무튼, 내가 어쩌자고 이곳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는지 통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약주나 한잔 부어 드리러 산에 가야겠다. 격려해 준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홍일표 시인, 날시 동인,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지금은 눈에 덮여 있을 추동공원의 벤치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 심사평 “우물처럼 웅숭깊은 신화적 시선”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선자(選者)들은 안타까웠다. 말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으면서도 사로잡힌 시가 안 보이니!
▲ 시 본심을 맡은 김명인(왼쪽) 시인과 정현종 시인이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시답지 않은 시시덕거림의 중언부언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산문의 줄글체 등이 어지럽게 부조되어 왔다.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는 시상(詩想)을 펼쳐 독자에게 다가선들 그 반응은 불문가지이리라. 마치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말의 빈 포대자루를 한참이나 들고 서있었다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서도 임수련씨와 최호일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할까.
임수련씨의 작품에서 오래 묵힌 신뢰 같은 것을 맛본다.‘악어왕국’에서 보여주듯이 진술과 묘사를 교직시키는 적확한 비유가 삶에 스며드는 풍자와 제대로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동력을 내쳐 지탱해내는 인내를 잃었을 때,‘달리는 자전거의 실루엣’처럼 처음의 긴장이 어느새 허물어져버리는 시편으로 나타난다.
최호일씨의 경우, 응모 작품 전체에서 균질감이 살펴진다. 그만큼 습작의 강도가 굳셌음을 읽어내게 한다. 상상에 젖어든 시어의 활달한 운용도 그의 시편들을 오롯이 한 편씩의 완결된 서정으로 구축하는데 일조했으리라.
그 중에서도 ‘아쿠아리우스’는 태생의 별자리를 짚어 삶의 근원적인 갈증을 풀어내는 신화적 시선이 우물처럼 웅숭깊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시의 얼개를 어느 정도 아우를 줄 아는 솜씨가 평가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정현종 김명인
=============================== 당선작 취소기사 =====================================
신춘문예 시 당선작 취소합니다
[서울신문 2006-01-26 08:51]
[서울신문]서울신문은 2006년 신춘문예 시 부문인 최호일씨의 ‘아쿠아리우스’의 당선을 취소합니다. 이 작품이 한국수자원공사가 2004년 실시한 제15회 물사랑글짓기 공모 입상작인 이모씨의 ‘물병자리별’과 동일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최씨는 “지역 시동인 후배인 이씨가 2년 전 품평회에서 돌렸던 내 작품을 몰래 가져다 응모한 것이라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고, 이씨도 “그렇다.”고 시인했으나 같은 작품이 이미 이씨의 이름으로 발표된 만큼 미발표작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의 규정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를 드리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울신문은 신춘문예 응모작을 더욱 철저히 검증할 것을 다짐합니다.
두 시 바람 / 최 호 일
바람 부는 날 너 다행히 불행해서 나는 참 다행이다
두 시에 부는 바람을 맞고 눈물을 삼키고 있었을 때
그 때 항아리는 존재론적으로 둥근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비가 오려나 보다하고 된장 뚜껑을 덮고 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무슨 할머니 밥상이냐고 싸웠다
종교와 이념전쟁이 불러온 비극은 신문지에서 본 듯하다
그동안 우리는 사랑의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술값을 내기 위해 싸웠다
너는 천천히 오지 않았고
비는 내리고 우리의 우주관은 쉽게 무너졌지만
다행히 식당 할머니는 욕설을 하며 뚜껑을 닫는 모습이었다
된장찌개를 먹으면 도착하는 두 시 바람
두 시 된장찌개가 생각난다 시래기를 길게 건져먹으며
너와 함께 된장찌개를 먹지 않은 된장찌개가 생각난다
화장을 열심히 하고 구름을 퍼먹으러 온 여자들이
나무 그늘에 그늘처럼 성실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어 행복하다
두 시 바람은 몇 시에 부는 걸까
된장찌개를 먹으며 꾹꾹
네가 오후 두 시에 불행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행복하다
웃음의 포즈 / 최호일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입이 사라졌다
이른 아침부터 눈이 온다 그러므로 아침부터 사랑한다고 말 하거나 욕을 하고 싶은데 아침이 사라진 것
당신과 커피와 커피를 마시지 않은 생각이 삼각관계처럼 아무도 모르는 쪽으로 기우뚱한다
커피를 대신 마셔드립니다
대신 웃어드릴게요
스케이팅을 하는 광고 모델이 빙판 위에 넘어져 이상한 자세로 웃고 있다 사라진 입속의 다른 입이 티브이 속에서 관람용 입술로 웃는다
이 웃음은 아무것도 없는 공기 같은 거
드라마를 보고 토크쇼를 본 후 머리가 다쳐서 자작나무와 눈 오는 거리가 궁금한 사람들
스무 발자국의 숲속을 걸어가면 이상한 겨울이 끝날까요
새를 털면서
자작나무 색깔로 앉거나 서거나 걸어 갈 때
나무는 저쪽이 없지 하고 웃으면서
웃음도 손바닥을 찌르면 피가 날까 생각하면서
오늘 그림자 / 최호일
햇빛 말짱한 대낮에도 그림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그림자
열 살이 되기 위해 길을 건너는 아이도
깨지지 않은 유리창도 모두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사실 그림자도 다가가 옷을 벗겨 보면
양파껍질처럼 냄새나는 그림자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태양은 본질적인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땐 우리 집 개가 몸을 부르르 먼지를 털다
가끔 혼자 넘어진다
그러면 그림자도 같이 일어난다
땅을 가만히 들춰보면 거기 그림자 없는 사람이 누워 있다
그가 신문을 읽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자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늘은 문이 잘 열리지 않아
그림자 도둑놈이 그림자를 한 개 훔치러 왔다가
제 그림자를 벗어 놓고 갈지도 모른다
내가 종일 걸치고 다닌 옷의 팔다리에 달라붙어
질긴 곱창 그림자를 씹고 있는 그림자들
별빛 두 정거장 / 최호일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린 시장 입구에서
도둑맞은 듯 강아지를 샀다
시험이 끝난 다음에야 언뜻 생각 난 정답처럼
하늘에는 별이 둥둥 떠 있다
별빛은 오래된 별빛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단지 저 소나무의 흥건한 그림자만은 아닐 것이다
별자리를 볼 때마다 선잠을 깬 형광등 같이
이곳에서 깜박 여러 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들은 먼지처럼 가볍게 쌓이다가
훅 불면 더 커진다
나는 많은 처음 사랑을 기억하다 잠이 들었고
개는 밤새 아팠지만 다시 피었다
꽃 피는 일은 꿈속에서 마주친 현실 같아서
봄에 보아도 어느 땐 거짓말 같다
중랑천은 요즘 들어 나이를 감추고 다닌다
아프리카로 걸어가는 마사이족 사이로
개 끈은 근심할 틈도 주지 않고 끈을 끌고 다닌다
밤과 낮이 서로 헤어지는 동안
끈이 끌고 다닌 만큼 따라 온 길을 따라서
봄은 또 우리를 그냥 지나칠지 모른다
우주의 앞마당에도 이런 발자국 소리가 날 것 같아
저쪽 하늘을 따라 가다보면
정확히 사라진 시간의 주인같이
내 그림자가 나무 아래에 묶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두 정거장이나 지나서
별빛과 어떤 별빛이 서로 만나는 천년 동안
<시작 메모>
우리 집 베란다엔 자그마한 화단이 있다. 방부 목으로 상자를 짜 흙과 거름을 채우고 여러 가지 화초를 심었다. 화단 한쪽엔 야채를 키우기 위한 텃밭도 만들고, 거기에 상추, 쑥갓. 치커리, 풋고추, 딸기, 방울토마토 등의 모종을 욕심 많게 사다 심었다. 무공해 야채를 뜯어다가 삼겹살에 등심을 구워먹는 기쁨을 상상했다. 거기에 과일 디저트까지... 그런데 웬걸, 토마토와 고추는 꽃이 피자마자 떨어 졌고, 야채는 실처럼 가늘고 키만 길쭉해지거나 거의 자라지 않았다. 나중에 그쪽 지식에 밝은 친구에게 물어보니 통풍이 안 되고 햇빛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했다. 내 안에 심어놓은 詩의 모종이 저렇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다 뽑아 버리고 지금은 사다 먹고 있다.
[아름다운 작가 창간호에서 발췌]- 양주작가회의 동인지
정전 / 최호일
액수가 지워진 동전이 굴러가다 멈춘 지점에서는 늘 정전이 된다 검고 큰 것이 눈을 때릴 때 우리는 한없이 하얗게 되고 끝없이 커진다
그림자가 사라졌으므로 나는 유일하게 되고
가깝고 선명한 모습으로 당신과 건너편이 보인다 태초의 바위가 마침내 내 앞에 멈춰 섰다 책은 어제보다 두꺼워지면서 세계는 한 걸음 난해해지고 마지막까지 남은 어둠이 깊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폭파될 때 살점과 뼈의 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서진다
길을 가다가 문득 우산을 잃어버린 나무처럼 어느 비에 젖기도 한다
몸통은 공중에 정지해 있고 날개만을 움직이는 새처럼
마침내 사라지는 몸통처럼
누가 모르게 바라보고 있나
가장 잊을 수 없는 나를 만들어 놓고
매일 하늘을 날면서 밥을 해 먹을 것 새의 목소리와 성격으로 수술하고 천장과 바닥을 없애 버릴 것
일주일에 두 번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고 너무 캄캄해서 울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듯 잡았던 손을 놓고 흔들며 인간의 마을에서 잊혀 질 것
새장을 만들어 놓고 새장을 부술 것 하얀 새의 천 번째 울음소리로 얼굴을 씻고 하얗게 될 것 어둠이 묻어 있는 바람을 끌어다 덮고 자면서 오월이 오면 오월을 등에 지고 다닐 것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 새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빠져 나갈 것 시를 쓰고 짝짝 찢어서 바람에 날린 후 가장 멀리 날아 갈 것
자신이 새인 줄 모르고 새처럼 날아가다가 깜짝 놀랄 것
냄새 나게 새는 왜 키우니하고 돌을 던지면 맞아서 죽을 것 죽어서 매화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
오렌지 / 최호일
내일 나는 테니스를 쳤다
공은 오렌지색이었고 라켓은 바람이 스스로 빠져 나갔다
사각의 하얀 선 안에서 우리는 감옥처럼 자유로웠고
힘껏 쳐버린 공은 그녀와 나의 표정을 건드렸다
저 나무 그림자는 가시로 찌르면 피가 날 것 같다
어제 나는 테니스를 칠 것이며
사랑을 할 것이다 그녀의 방에 못을 박고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와 시간을 걸어 놓고 나왔기 때문
화분의 시든 꽃이 꽃을 피우고
내일은 씨앗의 형태로 돌아갔다는 말은 비문이다
사랑한다는 말이 비문이 돼 버린 것처럼
그녀는 반 시계방향으로 늙어 갔다
건전지가 시간의 얇은 막을 하나씩 벗고 소진 될 무렵
손을 집어넣기 좋은
짧은 스커트 속에서 테니스 공은 기절하듯 멈출 것이다
이것은 천년 된 고등어를 먹는 것처럼 신선한 일, 아니
꽃무늬 접시에 담긴 바람을
나이프로 잘게 썰어 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일
공은 점점 기억이 희미해져서
허공에 그대로 멈춘 줄 아는 날개와 심장을 가진 오렌지처럼
그곳에 열릴 것이다
열두 마리의 개가 피자를 끌고 간다
개와 피자사이에는 오래 묵은 신뢰 같은 것이 있다
개를 보려는 것도 아니고
피자를 보려는 것도 아니고
개가 피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려고
햇빛과 나무로 된 사람들이 연도에 몰려 있다
그 중에는 오른쪽 기억을 약간 다친 여자도 있고
피자가 개를 끌고 가는 날이 오겠지 생각하는 남자도 있다
사랑이 그리운 사람들은 피자 한판 보내 주세요
전화를 건다 아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은
개가 피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려고
밀레가 만종을 그릴 때 갑자기
개가 피자를 끌고 가는 장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들판에서 기도하는 여자는 배가 몹시 고팠는지 모른다
제발 피자 한 판 주세요
개가 끄는 피자를 주세요
나는 다만 연도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을 뿐
박수 소리를 은박지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놓았을 뿐
자살한 사람이 다녀갔고 해저에 있는 군인들이 대문을 두드렸다
중랑천에서는 냉이를 캐는 여자들의 엉덩이가 커 보였다
나는 민주주의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물살은 무어라고 중얼대며 흘렀다
세 시에는 라면을 끓이고 라면 봉지를 버렸다
나는 이런 슬픔과 기쁨의 조건들을 일일이 기록하기 싫어하는 스타일
오래살기 위해 스프를 조금 덜 넣는 스타일
너희가 내 시를 아느냐고 물어보지 않는 스타일
죽은 사람은 어떤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먹을까
빈집의 개는 지금 늙고 있을까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한쪽 벽을 바라보며 롯데 마트의 짜장면을 먹으려다가
지하에서 국수를 먹었다
음 오백 원이 올랐군
봄이 왔는데 이제부터 자전거를 타야겠네
자전거가 갑자기 고장 난 지점에서는
좀 더 젊은 여자들의 엉덩이가 나물을 캤으면 좋겠다
세 시와 네 시 사이는 정확한 엉덩이가 만져지는 시간
장지동 버스 종점 / 최호일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년대 식으로 사이다를 샀는데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물방울에 대한 기억 / 최호일
멀어지는 물방울무늬를 보았나 물방울 무늬는 물방울처럼 아래는 한없이 둥글
고 위가 없는 그런 무늬
그림자도 그렇게 생긴 무늬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길들은 끊어지고 여자라는 말이 입안으로 흘
러 들어온다 한 쪽 다리는 붉고 나머지 다리는 푸른 말굽자석처럼
손끝으로 잠깐 대본 듯
모든 별과 해와 달의 순서가 바뀌고
세 번째 감정을 지닌 여자를 지나 자전거처럼 홀로 남아 있을 때 커다란 바퀴
를 돌리면 우주 밖으로 떠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지난밤이 되었고 그림자는 시계 방향의 기차를 탔다
푸른 물감을 들고 물방울을 바라보면 수세기 전의 사람과 삼분 동안 악수했던
저녁이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우리는 그보다 더 오랜 어느 시간의 게으른 관리인처럼 흘러 다닌다 등에는 여
자가 두고 간 손 같이 하얀 지느러미를 달고
코발트 블루 / 최호일
커다란 손바닥을 치운 것처럼
당신과 내 눈 사이에는 코발트 블루가 있다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그곳에 오래 빠져죽고 있는 색깔이 산다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
이런 색이 있어 행복하지?
아냐,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야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없이 긴 생각처럼
눈이 한 개씩 더 있는 날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가장 먼 길을 돌아서
물방울을 닦고 한쪽 눈이 없는 색처럼
이상한 그늘 / 최호일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
간다
그늘은 말이 없고 성실하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
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진 그늘 같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듯 꽃이 피었다 꽃은 참을성이 없고 당신
은 태연하다 나무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짜장면을 먹
으러 오는 사람은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고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
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벌레 먹은 시
이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이걸 봐
열무 김치가 놓여 있네
길모퉁이에서 가늘고 여린 열무 김치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제품
정직하게 말하면 김치가 아니라 벌레 먹은 열무지만
열무김치로 소리내어 읽네 아무려면 어때
시니까
벌레가 먹다 남긴
이걸 롯데 껌처럼 씹어 봐
아이들은 종국에는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나고
장난감을 만지며
거짓말을 습득하기 위해 무럭무럭 자란다
저 나뭇가지는 그림자를 복사하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이 골목에서 사람의 말을 버리고
발목을 자르고 노란 풍선을 날리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오후엔 담배를 끊고
모퉁이를 돌아 나와 열무 구멍으르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자
아무려면 어때 이 구멍으로 보면 모두
벌레 먹은 시인 걸 담뱃불을 붙이기 전까지 나는
사람의 눈을 가졌을 뿐
<작품론> 서정의 바깥, 미학적인 것의 활력 /유성호
1.
우리 시는 주제적 선명성이나 기법적 개성만으로는 전혀 조감되지 않는, 비평적 언어로의 환원이 쉽지 않은, 그러면서도 개별적 완성도가 높은 발화 방식이 자신만의 독자적 음색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 실례로 암시받았다. 그의 시는, 최근 우리 시의 지형을 개괄적으로 그려온 쪽에서 보면, 선명한 최초의 발생론이나 최종 지점의 귀속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주 까다로운 유추를 필요로 하는 난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마나한 계몽적 어사가 시편을 감싸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우리에게 한 편 한 편 정독할 필요를 요구하는 만만찮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신작시를 읽으면서, 언뜻 그 외관에서 '종점','기억', '색깔', '그늘','시'라는 키워드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다가옴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상호텍스트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대로 한편 한편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개 시편의 고유한 전언과 발화방식을 읽어내고, 전체가 어울리는 그림은 나중에 고려하는 게 알맞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일찍이 그의 시를 두고 한 시인은 "미래파와는 또 다른 외계의 언어이다. 단순한 현실재현적 시도 아니고, 현실 바깥으로 멀리 달아난 시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그의 시가 놓여 있다. (홍일표)"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게 최호일은 '다른 언어'를 통해, 동일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정'의 바깥에서 자신만의 오롯한 미학을 실현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미학적 활력에 다가가보기로 하자.
2.
시를 통독해보니, 최호일은 시를 통해 관념으로 직접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진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는 사물과 경험을 유추하되, 그 결합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기억/현재' 그리고 '부재/현존'의 교차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탈 관념의 시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그리는 풍경과 경험 사이에 끼인 연쇄적인 이미지를 통해, 그가 세계내적 존재로서 견지하고 있는 세계 이해 방식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가 그리는 사물들은 매우 미세하면서도 역동적인 파동을 그리고 있어, 몇몇 우의적 개괄로 그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 사물들이 그리는 파동들은 한결같이 격정을 띠고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부재 혹은 소멸의 징후를 떠안고 있다.
먼저 <장지동 버스 종점>이다. '종점'이라는 대상은 원래 노경에 이른 이의 인생론적 소재로 많이 쓰여왔다. 말하자면 기억의 형식이 공간화된 상관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상상력이 최호일에겐 전혀 없다. 그 '종점'은, 버스를 잘 못 내려 갑자기 마주친 모르는 곳일 뿐이다.
이 시편을 직조하는 이미지는, 버스를 잘못 내려 겪는 상상적이고 실재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온통 부재투성이인 존재자들이 그 '모르는 곳'에 모여 있다. 입이 없고 모자를 눌러쓴(얼굴을 가린)사람이 '모르는'물건을 놓고 가는 순간, 신열과 함께 다가오는 개망초 꽃은, 이곳에 잘못 내린 화자의 심리적 상황을 감각적으로 환기한다.
어느 가게에는 '낡은 시간'처럼 '탁자'와 '머리칼이 하얀 남자'와 '라면'이 있다. 그 낡은 시간 속에서 화자는 추억처럼 "칠십년대 식으로 사이다'를 사지만,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사라진 (부재한)풀벌레 소리의 환청을 따라 '미나리 밭'을 걸어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한다. 이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소리'는 다시 '장지동'을 가야 한다는 열망을 부추긴다.
그렇게 '미나리 밭'과 '목성'과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 시간'을 찾아 가야 하는 화자의 생각은, 기억/현재, 부재/현존의 교차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이 시인의 생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시의 문맥을 따라가 보면, 공간적으로는 '장지동'을 둘러싸면서 원경으로 펼치지는 목성과 더 먼 별 사이의 거리가 있고, 시간적으로는 '낡은 시간;과 고장난 시계 사이의 거리에서 펼쳐지는 모르고, 없고, 낡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주인없고, 고장 나고 '사라진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조차 지워야 한다는 화자의 '신음소리'가 시편 안으로 가득 번져오면서, '버스 종점'은 미끄러지고 유보되고 끝내는 미실현된다. 시적 기법의 표본인 은유는 사라지고 환유의 골똘함게 둘러싸인 '버스 종점'의 이미지는, 그렇게 한 시대의 불모와 폐허의 기억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은 <물방울에 대한 기억>에서는, '멀어지는 물방울 무늬'에 대한 실감과 환각 사이에서 펼쳐진다. '물방울' 자체보다는 '물방울 무늬'에 대한 감각으로 화자는 모든 별과 해와 달의 순서가 바뀌고, 우주 밖으로 떠돌 수 있는 자신만의 상상적 거처를 마련한다. 수세기 전 사람과 악수했던 저녁과 손을 잡기도 하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흘러 다니기고 한다. 여기서 '시간'은 앞서 보았던 '낡은 시간'보다 더 원격의 거리감을 가지게 되면서, 화자의 아득하고도 절절한 부재감을 드러낸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최호일의 시편은, 낡아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방식과 자신의 발화방식을 아득하고도 절절하게 유추하고 있다.
3.
괴테는 일찍이 "사람들은 헛되이 현상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찾는 그 어떤 것은 현상 자체 속에 이미 있다." 라고 갈파하면서, '색깔'의 현상에 대한 지각 작용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메를르-퐁티는 그의 가장 중요한 아티클 가운데 하나인 <눈과 마음>에서, 색깔이라는 사물의 외재적 속성을 단순하게 재현해내는 데 머물지 않고, "동일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들, 텍스처와 물질성을 창조해내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그것들을 창조하는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일종의 '형이상학적 의의'를 가진다고 말하였다. 그만큼 '색깔'은 예술가 자신의 창조적 지평을 암시하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적실한 상징 체계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번 최호일의 시편 가운데도 색깔에 관한 것이 있다.
무라카미 류의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소설에는, 주인공이 방바닥에 누워 파란 잉크병의 투명한 색깔을 끝없이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투명'이라는 말을 이처럼 감각적으로 구상화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렇게 아득하게 시려오는 투명의 감각을 최호일은 '코발트 블루'에 담고서, 그것을 '당신'과 '나'의 관계론적 거리 안으로 틈입시킨다.
화자의 시선 안에 들어오는, '당신'과의 사이에 번져 오는 코발트 블루는 '가슴까지 벅차오르는/가슴까지만 차오르는/그곳에 오래 빠져 죽고 싶은 색깔'이다. 충일함과 죽음을 동시에 환기하는 이 색깔은,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이고,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다. 이처럼 행복감과 어두움이 동시에 착색된, 죽음 충동과 살의가 공존하는 이 매혹의 색감은,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없이 긴 생각처럼" 찬찬히 시편 안으로 번져간다. 어느새 '당신'과 '나'는 눈 하나를 더 가지게 되고, 그렇게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충분히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가장 먼 길을 돌아"오는 일이 된다. '바다;의 빛깔을 연상시키는. 이 코발트 블루를 통해, 이 시편은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먼 길을 돌아오는 당신과 나의 아스라한 관계론을 암유한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구체적인 몸의 징후를 통해 어떤 한계지점을 통과해온 자신의 아득한 존재론을 펼쳐가는 최호일의 시편은, 감각의 선명한 재구를 통해 자신의 열망과 통증을 적극 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요한 응시와 묘사 그리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삶의 복잡한 비의가 바로 최호일 시학의 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실적 정보 전달에는 철저하게 인색한 채, 격정과 소멸의 이미지를 풍요롭게 그리면서 스스로의 형식을 완성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의미는, 시를 통해 시인의 삶의 기율이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시 자체가 그리는 감각적 동선을 따라 그것들이 그려내는 예사롭지 않은 격정과 소멸의 파동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 동참 속에서 우리는 존재가 가지는 격정의 쓸쓸함과 소멸에의 기억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거기서 충실히 멈춰져 있다.
4.
시인은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언어'를 찾아 헤매고 궁극에는 사물들 속에서 언어를 발견하고 경험하려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탐색에 공을 들이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신성함과 선명함을 동시에 잃고 병들고 벌레 먹고 있다면? 이러한 의식이 '시'이 메타적으로 다가간 다음 시편!
'이제'라는 부사가 가지는 무게는 어떤 존재전환의 실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렇듯 시의 화자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벌레 먹은 열무를 버무린 '열무김치'를 상상함으로써, '시'에 대한 존재전화를 발화하고 있다.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이 천연의 열무김치는 정확하게 말하면 '벌레 먹은 열무'지만 벌레가 먹다 남긴 것이다. '시니까' 씹어볼만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니까'는 맛이 시다는 뜻과 그것이 바로 '시'라는 이중의 함의를 띤다.
자라면서 장난과 거짓을 동시에 배워갈,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난 아이처럼, 어때,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복사하듯, '시'는 사람의 말을 버리고 잘린 발목처럼 날아가버린 노란 풍선처럼 피우는 담배처럼 열무 구멍으로 보이는 '벌레 먹은'것일 뿐이다. 여기서 '벌레 먹은 시를 발견하면서 비로소 회복하는 사람의 눈은 시를 자기 동일성의 신성함에 묶어 놓은 담론적 실재들에 대한 강렬한 항의를 뜻한다. 그만큼 최호일 시편은 세속과 초월과 실재의 경계선에서 가파르게 축조되는 그 무엇이 아닌가 했다.
최호일은 자신만의 감각과 율동을 장악하고 표현하는 선명한 물질적 상상력을 개입시킴으로써, 한결 한 시대의 음울한 우화에 충실하게 근접한다. 그 점에서 그의 시편은 '문명 비판적'인 것이 이나라, 사물의 표층 너머 깊이 숨겨진 속성들에 대한 응시과 발견을 주조로 하는 철저하게 미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렇듯 광폭의 원심으로 포착한 원초적이고도 넓은 최호일의 감각이, 서서히 커다란 타원형을 그리면서 자기 귀환의 구심으로 풍부하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서정의 바깥에서 완성되는 '미학적인 것'의 활력을, 한동안 주시하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을 시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최호일이지만, 그에게 '시간'은 경험 형식으로만 씌어지지 않았다. 시가 불가피하게 '시간'에 대한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띤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선명한 경험적 기원을 호명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유로운 연상의 가능성을 최대한 증폭하는 상상적 사물-감각, 사실-해석, 실재-환각, 기억-현재, 부재-현존의 끝없는 교체적 연쇄를 통해, 자신의 독자적이고 오랜 '시간'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호일 시편의 존재는 아직 우리 시단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등단한지 얼마 안 된 데다가 그를 귀속시킬 만한 확연한 시적 지형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고, 그만의 개성적 발화들이 내려않을 착지점이 충분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개성적인 음역에, 후속논의가 따르게 되기를, 마음 깊이 바란다.
만취 / 최호일
봄 산을 바라보니 뽕 맞은듯
정신이 몽롱하다......
정작 나를 취하게 하는 건
시간이었구나
그 시간 위에 내리는
푸른 기억이었구나
새가 되는 법 / 최호일-
매일 하늘을 날면서 밥을 해 먹을 것 새의 목소리와 성격으로 수술하고 천장과 바닥을 없애버릴 것
일주일에 두 번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고 너무 캄캄해서 울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듯 잡았던 손을 놓고 흔들며
인간의 마을에서 잊혀질 것
새장을 만들어 놓고 새장을 부술 것 하얀 새의 천 번째 울음소리로 얼굴을 씻고 하얗게 될 것
어둠이 묻어 있는 바람을 끌어다 덮고 자면서 오월이 오면 오월을 등에 지고 다닐 것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 새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빠져 나갈 것 시를 쓰고 짝짝 찢어서 바람에 날린 후
가장 멀리 날아 갈 것
자신이 새인 줄 모르고 새처럼 날아가다가 깜짝 놀랄 것
냄새 나게 새는 왜 키우니 하고 돌을 던지면 맞아서 죽을 것 죽어서 매화그림 속으로 들어갈 것
<감상>
뒤통수를 치거나 뚜껑 열린 시가 맛있다. 단정하게 뚜껑을 닫아놓은 시는 왠지 답답하고 지루하다. 응축도 생략도 없고, 광기
나 도취도 없이 뜻 없이 지루하게 중얼거리는 시는 재미가 없다. 언어의 평면적 서술만 있고 언어의 미학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
지 않은 시들은 아무 맛도 없이 가짓수만 많은 음식 같다.
언어의 광휘가 있는 시, 사유의 날이 번쩍이는 시는 읽는 이를 긴장시키고 몸을 떨게 한다. 상식적인 내용을 상투적 방법으로
되풀이하는 많은 시들 앞에 아주 특이한 어법을 가지고 나타난 시인이 있다.
최호일, 그의 시는 미래파와는 또 다른 외계의 언어이다. 단순한 현실 재현적 시도 아니고, 현실 바깥으로 멀리 달아난 시도 아
니다. 지금까지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그의 시가 놓여 있다. 미래파 이후 새로운 시적 활로를 열어가고 있는 신인이지만
아직 그에 대한 조명은 충분치 않다.
최호일 시인은 시단의 아나키스트이다. 기존의 시문법으로 접근했다가는 낭패하기 쉽다. 그의 시는 늘 새로운 독법을 요구한
다. 그의 전복적 사고는 작품 도처에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발목이 잘리기도 하고 머리통이 날아가기도
한다. 시를 읽다 말고 내 다리 어디갔지 하고 중얼거릴지 모른다.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하여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할지도 모른
다. 그러므로 시를 읽을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할 사항이 많다.
나는 지금 친절한 처방전을 쓰고 있는 셈이지만 시로 들어가기 전에 내 처방전은 버리는 것이 좋다. 주저하지 말고 일단 입에
넣고 씹다 보면 묘한 향기와 맛이 마리화나처럼 전신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혼몽해질 것이다. 그 혼몽함 속에 자신을 놓아버리면
그의 시와 함께 망망대해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한 순간이 행복할 것이고, 몸과 마음을 묶던 생의 경계 밖에서 한 사나
흘 어슬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새가 되는 법」은 비루한 일상을 뛰어넘는 비법을 묘사하고 있다. ‘새의 목소리와 성격’을 갖고 ‘새장을 만들어 놓되 새장을
부수는 것이다. 그리고 ‘하얀 새의 천 번째 울음소리로 얼굴을 씻고 하얗게’되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훨훨 날아가
다가 냄새 나는 새를 왜 키우냐고 돌을 던지면 기꺼이 돌을 맞고 매화 그림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이 시의 전언이다. 새는 자유
이고 일탈이고 영성이다. 숨 막히는 일상의 삶을 관통하는 큰 구멍이고 안팎이 소통하는 창문이다. 새를 키우고 마침내 새가 되
는 것은 존재의 혁신이요 완고한 사유의 외피를 벗고 날아오르는 일이다.
존재의 도약과 비약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의 화자는 ‘새의 그림자를 만들어 놓고 빠져 나’가는
일과 시를 찢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활달한 이미지의 전개가 막힘이 없고, 자유자재하며 이미지와 이미지가 충돌하면서 불꽃이
튄다. 연과 연으로 이어지는 낯선 시의 문법이 신선한 정서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도 이 시의 매력이다.
새로운 시의 짐을 짊어진 그의 어깨가 무겁다.
-홍일표(시인)
아파트 / 최호일
깊은 산중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은 살지 않았다
오래 된 순서대로
계절마다 꽃이 피고, 눈이 왔다
음식 냄새가 사라지고 속도가 사라졌다 소파와 부부싸움이 문으로 사라
졌다
옷을 벗고 아침과 저녁이 부부처럼 살았다
계단이 사라지고
어제가 매일 사라지고
마침내 조용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해골의 눈을 쪽쪽 빨아먹으며
시간이 살았다
사랑해
천사와 악마가 아주 귀여운 형태로 태어났다
바닥이 조금 갈라진 틈으로
깊은 산중이 사라졌다
귀여운 아이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노란 모자를 조문하는 법 / 최호일
꿈을 꿀 때도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지 노란 모자라고 불렀던 그 여자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크다
곱창과 소주 생각이 나서 곱창에 소주 마시는 생각을 했다
시간은 느리게 갈 것이고
밤은 덜 익은 곱창처럼 질기고 소주는 너무 써
물방울무늬의 암세포가 시간의 덩굴처럼 아름답게 자라는
누우면 젖과 젖 사이가 멀어지는 여자
서른여섯이니까 하늘을 봐요
같은 병실에서 잠이 드는 게 지루하고 미안해 별을 보고 말했다
별은 단순하고 쓸쓸한 쪽에서 빛난다
먼 부부처럼 밥을 따로 떠먹으며
그녀와 함께 바람 부는 날 소주에 곱창을 먹을 확률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생각들은 형광등 불빛으로 멀리 새 나가
더 먼 곳에서 사라진다
안녕, 노란 모자
노란 모자가 불이 켜지는 냉장고 위에 놓여 있다
죽음에 무사히 도착하려면 모자를 벗어야지
누가 내 혀를 잘라서 가지고 있는지
요즘 소주는 싱거워
—《미네르바》2010년 여름호
흩어진 말 / 최호일
라일락 향기가 무작정 공중으로 흩어질 때 아니,
공중으로 흩어진다는 말이 흩어지지 않을 것처럼 좋았을 때
나는 그것을 봄과 혼동하기로 했다
우리 결혼해도 될까요 국문과 선배에게
문학적으로
어제 산 장난감처럼 꺼냈다 그 말은
한쪽 무릎이 잘린 채 골목길을 비관적으로 걸어갔다
흩어지고 내렸다
검은 고양이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오는 것처럼
그 계절의 비가 왔다
젖은 옷과 젖은 옷 사이
흑백으로 된 라일락 냄새가 봄의 겨드랑이에서 풍겼다
혁명을 꿈꾸기도 했으나 불길한 색상 때문에
머리가 가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말은 어디로 갔을까
오후 다섯 시에 약속이 있다는 그녀의 시간은
녹슬어서 좀처럼 열리지 않는 문같이
문득 활짝 열리는 그 말은
잃어버린 지갑을 또 잃어버린 것처럼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았다
가장 먼 곳에 두고 살았다
그 말이 몸에서 흩어지는 걸 본 최후의 사람처럼
—계간《작가들》 2010년 봄호
엑스트라 / 최호일
이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있고
여섯시에 총을 맞아야 하므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
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 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장지동 버스 종점 / 최호일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 대 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물방울에 대한 기억 / 최호일
멀어지는 물방울무늬를 보았나 물방울무늬는 물방울처럼 아래는 한없이 둥글고 위가 없는 그런 무늬
그림자도 그렇게 생긴 무늬
물방울을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길들은 끊어지고 여자라는 말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한 쪽 다리는 붉고 나머지 다리는 푸른 말굽자석처럼
손끝으로 잠깐 대본 듯
모든 별과 해와 달의 순서가 바뀌고
세 번째 감정을 지닌 여자를 지나 자전거처럼 홀로 남아 있을 때 커다란 바퀴를 돌리면 우주 밖으로 떠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지난밤이 되었고 그림자는 시계 방향의 기차를 탔다
푸른 물감을 들고 물방울을 바라보면 수세기 전의 사람과 삼분 동안 악수했던 저녁이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우리는 그보다 더 오래 어느 시간의 게으른 관리인처럼 흘러 다닌다 등에는 여자가 두고 간 손 같이 하얀 지느러미를 달고
코발트 블루 / 최호일
커다란 손바닥을 치운 것처럼
당신과 내 눈 사이에는 코발트 블루가 있다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그곳에 오래 빠져죽고 싶은 색깔이 산다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
이런 색이 있어 행복하지?
아냐,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야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 없이 긴 생각처럼
눈이 한 개 씩 더 있는 날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가장 먼 길을 돌아서
물방울을 닦고 한쪽 눈이 없는 색처럼
이상한 그늘 / 최호일
양산을 쓴 여자가 그늘을 끌고 간다 발로 배를 걷어 차버린 강아지처럼 따라 간다
그늘은 말이 없고 성실하다
양산을 썼기 때문에 태양에 가장 가깝게 걸어간 그늘 같다 뜨겁고 무덥고 무겁고 다리가 있어 오래된 뼈와 살로 만들어진 그늘 같다
천변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침을 뱉듯 꽃이 피었다 꽃은 참을성이 없고 당신은 태연하다 나무 계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변두리 짜장면을 먹으러 오르는 사람은 무겁다
저녁이 오는 쪽으로 사람들은 죽고
여우가 여러 번 울어서 밤이 오면, 아무도 그것이 어둠을 열고 사라진 검고 이상한 사람인 줄 모른다 그늘이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벌레 먹은 시 / 최호일
이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이걸 봐
열무김치가 놓여있네
길모퉁이에서 가늘고 여린 열무김치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제품
정직하게 말하면 김치가 아니라 벌레 먹은 열무지만
열무김치로 소리 내어 읽네 아무려면 어때
시니까
벌레가 먹다 남긴
이걸 롯데 껌처럼 씹어 봐
아이들은 종국에는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나고
장난감을 만지며
거짓말을 습득하기 위해 무럭무럭 자란다
저 나뭇가지는 그림자를 복사하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이 골목에서 사람의 말을 버리고
발목을 자르고 노란 풍선을 날리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오후엔 담배를 끊고
모퉁이를 돌아 나와 열무 구멍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자
아무려면 어때 이 구멍으로 보면 모두
벌레 먹은 시 인걸 담뱃불을 붙이기 전까지 나는
사람의 눈을 가졌을 뿐
<시작 노트>
바다 이야기
소설은 지루하고 시는 비극적이어서, 수필처럼 있고 싶을 때는 어느 바닷가에 간다. 그 바다는 이제, 그곳의 지명처럼 새는 날아오지 않는다. 대신 값비싼 노을이 있고, 사람들은 시간을 일일이 쪼개고 다듬고 요리해서 그것을 보러 온다. 그들은 노을을 바라보고 나서 처음에는 죽을 것처럼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금방 웃으면서 사진을 찍고 조개를 줍거나 굽는다. 이런 장면은 저명한 영화감독이나 무대 연출가가 뒤에서 지휘하는 것처럼, 장엄하고 일사분란하다. 꼭 필요한 장면을 찍는 것처럼....
어느 계절, 글을 쓴답시고 그곳에 방을 잡아 놓고 바닷가에 나갔다. 조개구이를 파는 상점이 있고, 소나무 밭이 있고, 조바심치는 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제일 좁게 끼어 앉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를 집어 삼키며 일몰이 시작 되었다. 노을의 앞 페이지가 뒷 페이지를 한없이 크고 넓고 집요하게 끌어 넘기는 풍경을 목도했다. 저 시집의 제목은 무엇일까.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보이지 않아서, 아니, 없어서 절망했다. 시 따위는 직전에 사라진 노을처럼 번번이 놓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더 작아져서 더 외로워지고, 내가 아닌 것 같이 낯설어 글 쓰는 일을 작파하고 술만 마시고 온 기억.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바다가 무서워졌다. 그 후, 내 시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젠가 강원도 양양의 한 식당에 갔었다. 바로 코앞에 감청 빛 바다가 마당처럼 펼쳐져 있는 이층집이었다. 바가지 음식 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3D 영화처럼 장관이었다. 경치에 정신이 팔려 누가 얼굴을 한번 때려도 웃어 줄 것 같은 순간은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터. 일행들의 탄성이 절로 나오고, 이곳에 살면 저절로 시가 나오겠다는 둥, 판사 며느리 본 사람도 부러울 게 없겠다는 둥 떠들썩하다. 그들은 단추만 누르면 시가 튀어나오는 줄 아는, 오십년에 시집 반 권 정도를 읽을까 말까하는 사람들이었다.
거리를 지우면 사람이 생긴다. 그러나 저들에게 나는 이만큼 떨어져 앉아 있고, 나도 저들에게서 이만큼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괜찮고 즐겁다. 누군가 음식을 갖다 주는 여자에게 날마다 이 좋은 경치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 매일 보는 경치라 좋지도 않을뿐더러 또한 지겹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존재가 무화 된 상태. 모든 사물이 사라지고 자신마저도 사라질 때. ‘그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야 시는 나타나는 것.’ 나는 며칠 째 끊고 있던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시 쓴다고 폼 잡지마라고 할까봐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이라는 낯선 이름과,」
내 직업은 잡지 프리랜서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바람 앞에 촛불이다. 누군가 숨을 쉬다가 훅 불면 꺼진다. 그래서 일용직 보다 더 불안하고 위태롭다. 서울을 기반으로 살아온 지 수 십 년이 지났지만 그곳에서 밀려나 위성도시에 살고 있다. 하지만 굳이 서울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하는 터전이 서울인지라, 가끔 가서 일도 보고 막걸리를 마시고 토하기도 하고 온다. 그런데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아직도 낯설고 서먹하다. 나를 받아주지 않은 도시, 나를 버린 도시라는 콤플렉스 같은 것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나는 충청도 어느 산골 출신인데, 나이가 들수록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꾸 시골 생활이 그리워진다. 그곳에 가서 정말 ‘프리’하게 사는 게 꿈이다.
얼마 전 일원동에 있는 병원에서 볼일을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복잡한 생각까지 하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 종점에 와버렸다. 무엇에 홀린 듯 내렸다. 종점은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진 비교적 광활한 공터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눈앞에 산도 있었고, 물이 흐르는지는 모르지만 냇가 비슷한 형태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과 모든 사물이 낯설었다. 내가 혹시 죽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닌지 잠시 공황상태에 빠졌다. 발을 내 디뎠는데 바닥에 잘 닿지 않았다. 임사체험 하듯 이 이상한 기분은 뭘까?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유령 같았고, 나도 유령 같았다. 급하게 택시를 잡았는데, 교대시간이라는 핑계로 또 엉뚱한 데로 내려 준다. 오후 두시쯤 되었을까?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오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도망가야겠다. 대중교통을 포기하고, 무조건 택시를 잡아 비교적 먼 거리인 집까지 가자고 말했다. 집에 도착해 정신을 잃었다. 정신없이 잤다.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누군가 정신없이 써 갈겨 준 시가「장지동 버스종점」이다. 따라서 이 시는 내 작품이 아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고, 그럴만한 작품도 아니지만, 원고료를 받으면 그 날 그 귀신에게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 주고 싶다. 아니면 이제부터 친하게 지내면서 열무김치에 식은 밥 같이 비벼먹고 싶다. 휴~ 미안하다.
최호일: 2009년『현대 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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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의 바깥, 미학적인 것의 활력
-최호일의 신작시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1.
최호일 시편들을 읽다가, 이제 우리 시는 주제적 선명성이나 기법적 개성만으로는 전혀 조감(鳥瞰)되지 않는, 비평적 언어로의 환원이 쉽지 않은, 그러면서도 개별적 완성도가 높은 발화 방식이 자신만의 독자적 음색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 실례로 암시받았다. 그의 시는, 최근 우리 시의 지형을 개괄적으로 그려온 쪽에서 보면, 선명한 최초 지점의 발생론이나 최종 지점의 귀속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주 까다로운 유추를 필요로 하는 난해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마나 한 계몽적 어사가 시편을 감싸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우리에게 한 편 한 편 정독할 필요를 요구하는 만만찮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신작시를 읽으면서, 언뜻 그 외관에서 ‘종점’, ‘기억’, ‘색깔’, ‘그늘’, ‘시’라는 키워드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다가옴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시편들은, 상호텍스트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한 편 한 편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개 시편의 고유한 전언과 발화 방식을 읽어내고, 전체가 어울리는 그림은 나중에 고려하는 게 알맞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일찍이 그의 시를 두고 한 시인은 “미래파와는 또 다른 외계의 언어이다. 단순한 현실 재현적 시도 아니고, 현실 바깥으로 멀리 달아난 시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그의 시가 놓여 있다.”(홍일표)고 말한 바 있는데, 그렇게 최호일은 ‘다른 언어’를 통해, 동일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정’의 바깥에서, 자신만의 오롯한 미학을 실현하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미학적 활력에 다가가보기로 하자.
2.
시를 통독해보니, 최호일은 시를 통해 관념으로 직접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진 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는 사물과 경험을 유추하되, 그 결합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기억/현재’ 그리고 ‘부재/현존’의 교차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탈(脫)관념의 시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그리는 풍경과 경험 사이에 끼인 연쇄적 이미지들을 통해, 그가 세계내적 존재로서 견지하고 있는 세계 이해 방식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가 그리는 사물들은 매우 미세하면서도 역동적인 파동을 그리고 있어, 몇몇 우의적(寓意的) 개괄로 그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 사물들이 그리는 파동들은 한결같이 격정을 띠고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부재 혹은 소멸의 징후를 떠안고 있다.
먼저 「장지동 버스 종점」이다. ‘종점’이라는 대상은 원래 노경(老境)에 이른 이의 인생론적 소재로 많이 쓰여왔다. 말하자면 기억의 형식이 공간화된 상관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러한 상상력이 최호일에겐 전혀 없다. 그 ‘종점’은, 버스를 잘못 내려 갑자기 마주친 ‘모르는 곳’일 뿐이다.
버스를 잘못 내렸네 장지동은 모르는 곳
입이 없고 커다란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이 내 몸에 모르는 물건을 놓고 나간 듯 신열이 나고 개망초 꽃이 보였네
탁자가 있고 낡은 시간이 놓여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머리칼이 하얀 남자가 상점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네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샀네 나는 이미 사라진 풀벌레 소리인가 아마존의 주인 없는 미나리 밭으로 두 시간 걸어온 걸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를 냈네
나 장지동에 잘못 왔네 라면을 먹지 않았네
내 몸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다녀간 곳
장지동에 가야겠네 그곳은 한없이 가다가 개망초 앞에서 멈추는 곳
미나리 밭을 지나 목성을 지나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라면을 후후 불며 먹고 와야겠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지우고 와야겠네
- 「장지동 버스 종점」 전문
이 시편을 직조하는 이미지는, 버스를 잘못 내려 겪는 상상적이고 실재적인 경험에서 나온다. 온통 부재투성이인 존재자들이 그 ‘모르는 곳’에 모여 있다. 입이 없고 모자를 눌러 쓴(얼굴을 가린) 사람이 ‘모르는’ 물건을 놓고 가는 순간, 신열과 함께 다가오는 개망초 꽃은, 이곳에 잘못 내린 화자의 심리적 상황을 감각적으로 환기한다.
어느 가게에는 ‘낡은 시간’처럼 ‘탁자’와 ‘머리칼이 하얀 남자’와 ‘라면’이 있다. 그 ‘낡은 시간’ 속에서 화자는 추억처럼 “칠십 년대식으로 사이다”를 사지만,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사라진(부재한) 풀벌레 소리의 환청을 따라 ‘미나리 밭’을 걸어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한다. 이때 “시계가 고장 나 지구별에 늦게 도착한 고양이의 신음 소리”는, 다시 ‘장지동’을 가야 한다는 열망을 부추긴다. 그렇게 ‘미나리 밭’과 ‘목성’과 ‘더 먼 별’의 기억을 지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 시간’을 찾아 가야 하는 화자의 생각은, ‘기억/현재’ 그리고 ‘부재/현존’의 교차를 민첩하게 포착하여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이 시인의 생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시의 문맥을 따라가 보면, 공간적으로는 ‘장지동’을 둘러싸면서 원경(遠景)으로 펼쳐지는 ‘목성’과 ‘더 먼 별’ 사이의 거리가 있고, 시간적으로는 ‘낡은 시간’과 ‘고장 난 시계’ 사이의 거리에서 펼쳐지는 모르고, 없고, 낡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주인 없고, 고장 나고, ‘사라진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그것조차 지워야 한다는 화자의 ‘신음 소리’가 시편 안으로 가득 번져오면서, ‘버스 종점’은 미끄러지고 유보되고 끝내는 미실현된다. 시적 기법의 표본인 은유는 사라지고, 환유의 골똘함에 둘러싸인 ‘버스 종점’의 이미지는, 그렇게 한 시대의 불모와 폐허의 기억을 증언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은, 「물방울에 대한 기억」에서는, ‘멀어지는 물방울무늬’에 대한 실감과 환각 사이에서 펼쳐진다. ‘물방울’ 자체보다는 ‘물방울무늬’에 대한 감각으로 화자는 모든 별과 해와 달의 순서가 바뀌고 우주 밖으로 떠돌 수 있는 자신만의 상상적 거처를 마련한다. 수세기 전 사람과 악수했던 저녁과 손을 잡기도 하고, “그보다 더 오래 어느 시간”을 흘러 다니기도 한다. 여기서 ‘시간’은, 앞서 보았던 ‘낡은 시간’보다 더 원격(遠隔)의 거리감을 가지게 되면서, 화자의 아득하고도 절절한 부재감을 드러낸다 할 것이다. 이렇게 최호일 시편은, 낡아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존재 방식과 자신의 발화 방식을 아득하고도 절절하게 유추하고 있다.
3.
괴테는 일찍이 “사람들은 헛되이 현상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찾는 그 어떤 것은 현상 자체 속에 이미 있다.”라고 갈파하면서, ‘색깔’의 현상에 대한 지각 작용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메를로-퐁티는 그의 가장 중요한 아티클 가운데 하나인 「눈과 마음」에서, ‘색깔’이라는 것이 사물의 외재적 속성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동일한 것과 차이가 있는 것들, 텍스처와 물질성을 창조해내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그것들을 창조하는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일종의 ‘형이상학적 의의’를 가진다고 말하였다. 그만큼 ‘색깔’은, 예술가 자신의 창조적 지평을 암시하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적실한 상징 체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번 최호일 시편 가운데도 색깔에 관한 것이 있다.
커다란 손바닥을 치운 것처럼
당신과 내 눈 사이에는 코발트 블루가 있다
가슴까지 벅차오르는
가슴까지만 차오르는
그곳에 오래 빠져죽고 싶은 색깔이 산다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
이런 색이 있어 행복하지?
아냐,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야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없이 긴 생각처럼
눈이 한 개씩 더 있는 날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가장 먼 길을 돌아서
물방울을 닦고 한쪽 눈이 없는 색처럼
- 「코발트 블루」 전문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소설에는, 주인공이 방바닥에 누워 파란 잉크병의 투명한 색깔을 끝없이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투명’이라는 말을 이처럼 감각적으로 구상화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이렇게 아득하게 시려오는 투명의 감각을 최호일은 ‘코발트 블루’에 담고서, 그것을 ‘당신’과 ‘나’의 관계론적 거리 안으로 틈입시킨다.
화자의 시선 안에 들어오는, ‘당신’과의 사이에 번져 있는 코발트 블루는, “가슴까지 벅차오르는/가슴까지만 차오르는/그곳에 오래 빠져죽고 싶은 색깔”이다. 충일함과 죽음을 동시에 환기하는 이 색깔은, “투명한 컵에 담아 던지면 넘치거나 깨지기 쉬운 색”이고, “햇빛 밝은 날 죽이고 싶은 색”이다. 이처럼 행복감과 어두움이 동시에 착색된, 죽음 충동과 살의(殺意)가 공존하는 이 매혹의 색감은, “물방울은 하얗게 튀고 머리는 젖어서 한없이 긴 생각처럼” 찬찬히 시편 안으로 번져간다. 어느새 ‘당신’과 ‘나’는, 눈 하나를 더 가지게 되고, 그렇게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충분히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가장 먼 길을 돌아”오는 일이 된다. ‘바다’의 빛깔을 연상시키는 이 ‘코발트 블루’를 통해, 이 시편은 서로 다른 바다를 바라보다가 먼 길을 돌아오는 ‘당신’과 ‘나’의 아스라한 관계론을 암유(暗喩)한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구체적인 몸의 징후를 통해 어떤 한계지점을 통과해온 자신의 아득한 존재론을 펼쳐가는 최호일 시편은, 감각의 선명한 재구(再構)를 통해 자신의 열망과 통증을 적극 환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요한 응시와 묘사 그리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삶의 복합적 비의(秘義)가 바로 최호일 시학의 동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최호일 시편들은, 사실적 정보 전달에는 철저하게 인색한 채, 격정과 소멸의 이미지를 풍요롭게 그리면서 스스로의 형식을 완성한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의미는, 시를 통해 시인의 삶의 기율이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있지 않고, 시 자체가 그리는 감각적 동선(動線)을 따라 그것들이 그려내는 예사롭지 않은 격정과 소멸의 파동에 동참하는 데 있다. 그 동참 속에서 우리는 존재가 가지는 격정의 쓸쓸함과 소멸에의 기억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그의 시는 거기서 충실히 멈춰져 있다. 더 이상의 과장된 포즈나 가치론적 지향은 그의 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4.
시인은 언어적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언어’를 찾아 헤매고 궁극에는 사물들 속에서 ‘언어’를 발견하고 경험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도구적 기능을 넘어 ‘언어’ 자체에 대한 탐색에 공을 들이는 이가 바로 시인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신성함과 선명함을 동시에 잃고, 병들고 벌레 먹고 있다면? 이러한 의식이 ‘시’에 메타적으로 다가간 다음 시편!
이제,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이걸 봐
열무김치가 놓여 있네
길모퉁이에서 가늘고 여린 열무김치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제품
정직하게 말하면 김치가 아니라 벌레 먹은 열무지만
열무김치로 소리내어 읽네 아무려면 어때
시니까
벌레가 먹다 남긴
이걸 롯데 껌처럼 씹어 봐
아이들은 종국에는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나고
장난감을 만지며
거짓말을 습득하기 위해 무럭무럭 자란다
저 나뭇가지는 그림자를 복사하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이 골목에서 사람의 말을 버리고
발목을 자르고 노란 풍선을 날리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오후엔 담배를 끊고
모퉁이를 돌아 나와 열무 구멍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자
아무려면 어때 이 구멍으로 보면 모두
벌레 먹은 시인 걸 담뱃불을 붙이기 전까지 나는
사람의 눈을 가졌을 뿐
- 「벌레 먹은 시」 전문
‘이제,’라는 부사가 가지는 무게는 어떤 존재 전환의 실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렇듯 시의 화자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벌레 먹은 열무로 버무린 ‘열무김치’를 상상함으로써, ‘시’에 대한 존재 전환을 발화하고 있다.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은 이 천연의 ‘열무김치’는, 정확하게 말하면 ‘벌레 먹은 열무’지만, “벌레가 먹다 남긴” 것이라고 ‘시니까’ 씹어볼 만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니까”는, 맛이 시다는 뜻과 그것이 바로 ‘시’라는, 이중의 함의를 띤다. 자라면서 장난과 거짓을 동시에 배워갈, 벌레 먹기 위해 푸성귀처럼 태어난 아이들처럼, 어때, 나뭇가지가 그림자를 복사하듯, ‘시’는 사람의 말을 버리고 잘린 발목처럼, 날아가버린 노란 풍선처럼, 피우는 담배처럼, 열무 구멍으로 보이는 “벌레 먹은” 것일 뿐이다. 여기서 ‘벌레 먹은 시’를 발견하면서 비로소 회복하는 ‘사람의 눈’은, 시를 자기 동일성의 신성함에 묶어 놓은 담론적 실재들에 대한 강렬한 항의를 뜻한다. 그만큼 최호일 시편은 신성과 세속, 초월과 실재의 경계선에서 가파르게 축조되는 그 무엇이 아닌가 한다.
최호일은 자신만의 감각과 율동을 장악하고 표현하는 선명한 물질적 상상력을 개입시킴으로써, 한결 한 시대의 음울한 우화에 충실하게 근접한다. 그 점에서 그의 시편은 ‘문명 비판적인 것’이 아니라, 사물의 표층 너머 깊이 숨겨진 속성들에 대한 응시와 발견을 주조로 하는 철저하게 ‘미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렇듯 광폭의 원심으로 포착한 원초적이고도 넓은 최호일의 감각이, 서서히 커다란 타원형을 그리면서 자기 귀환의 구심으로 비교적 풍부하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서정의 바깥에서 완성되는 ‘미학적인 것’의 활력을, 한동안 주시하게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을 시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최호일이지만, 그에게 ‘시간’은 경험 형식으로만 씌어지지 않는다. 시가 불가피하게 ‘시간’에 대한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띤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도, 그는 선명한 경험적 ‘기원(origin)’을 호명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자유로운 연상의 가능성을 최대한 증폭하는 상상적인 사물-감각, 사실-해석, 실재-환각, 기억-현재, 부재-현존의 끝없는 교체적 연쇄를 통해, 자신의 독자적이고 오랜 ‘시간’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최호일 시편의 존재는 아직 우리 시단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등단한 지 얼마 안 된 데다, 그를 귀속시킬 만한 확연한 시적 지형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고, 그만의 개성적 발화들이 내려앉을 착지점이 충분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개성적인 음역(音域)에, 후속 논의가 따르게 되기를, 마음 깊이 바란다.
유성호: 연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현대시 교육론』『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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