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요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같은 명령형의 인사는 강요 같아서 쓰지 않고 ‘새해 행운을 빕니다.’ 미신이나 점을 믿지 않아도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다. 종교도 없고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섬기지 않지만, 복을 많이 받으라고 덕담한다.
절기대로 돌고 도는 시간의 이력에 새로운 감흥이 있을까마는 피안 저 너머에서 본다면 혹여 산다는 일이 꿈은 아닐까를 생각할 때가 있다. 요즘 탄핵 놀음에 민초들은 정신이 없다. 높으신 그들 안중에는 국민은 보이지 않고 탄핵 논리는 도를 넘어 자꾸 정도를 벗어나고 있으며 세세히 열거하려면 끝내 자신이 피로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괴로운 현실이 되고 만다.
이 풍진 세상이 싫어 훌쩍 길을 나섰다.
낯설지 않은 사람을 방패막이로 낯선 사람들과 동행이었는데, 다행인 것은 낯을 가리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너무도 편하고 무던한 얼굴들이었다. 마치 어느 옷 광고에서 ‘일 년을 입어도 십 년을 입은 것 같은 옷, 십 년을 입어도 일 년을 입은 것 같은 옷’이라 하였던 것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익숙한 사람 같아 보였다.
그중 한 분이 요즘 새로 나왔다는 우스갯소리로 일행들에게 폭소를 선사한다.
뜬금없지만, “소 잃고 뇌 약간 고친다.”라는 말을 한다. 외양간이 아니라 뇌 약간. 발음에 리듬까지 비슷한 단어지만, 차이가 있다. 앞의 속담은 ‘뒤늦게 하는 후회’에 방점이 있지만, 후자는 일종의 정신 승리다. 인지 부조화에 빠진 개인이 뇌를 고쳐서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 부조리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뒤늦은 후회이거나, 정신 승리여선 안 된다. 또, 어느 사람이 말을 걸었다. “소가 어떻게 웃는 줄 아세요?” 나는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우하하예요. 우하하 재미나죠?”
그런데 그런 유머들을 듣고 집에 가서 해보려고 해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가물가물해진다. 남이 할 때는 그렇게 재미나고 웃기는 이야기도 어쩐 일인지 자신의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맛없고 김빠지는 이야기되어 버리는 걸 느낀다. 유머를 때와 장소에 맞춰 듣는 사람의 감정 변화와 타이밍까지 놓치지 않고 순발력 있게 구사하는 그 사람의 입술을 보면 감탄을 넘어 경탄하는 마음마저 생기기 마련이다.
세상일에 적당히 때 묻고 느긋해져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도 고양이 귀처럼 바짝 곧추세우는 일 따위는 남의 일인 듯한 그들이었다. 노년이 주는 푸근하고도 넉넉한 여유와 낯선 타인들에게도 호의적인 게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거기다 더 좋았던 것은 내가 곁에 있든 없든 그들의 행동은 가림 없고 거리낌 없어 보였다. 때로는 상대를 위하려는 배려가 오히려 상대를 간섭하고 구속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가볍고 싶을 때, 혼자 있고 싶을 때 생각에 잠기고 싶을 때 친절은 오히려 방해나 간섭으로 작용하기 쉽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준 사람의 능력이란 가지가지겠지만 비위 좋고 입담 좋고 일도 재빠르고 수완이 좋아 어떤 난처한 일도 쓱싹 해치우는 그 사람 앞에 서면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도 든다.
과연 세상에 옳고 그름이 명확한 일이 얼마나 될까. 타고난 체질과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다를 것이다. 내가 좋고 싫고 그에 따라 색이 가해질 수 있다. 대부분 내가 옳고 싫은 것은 틀렸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남들도 나처럼 생각할 거라는 그 점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우리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각자 생각도 다르다는 걸 놓치고 사는 이유 아닐까. 단기적으로 보면 인생은 불공평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공정할 수 있다. 시간 앞에 장사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경험은 의미 있고, 크게 흔들리지 않는 이유다. 아무튼, 올해는 행운과 웃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