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다시 부를 희망의 노래(요10:7-18)
2021.12.19 김상수목사(안흥교회)
할렐루야! 오늘은 성탄절을 앞둔 대림절 마지막 주일이고, 금주 토요일은 성탄절이다.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모든 분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인생의 참된 희망을 발견한 사람은 내일이 있고, 희망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없다. 사람의 마음속에 희망이 있어야할 자리에 절망이 자리 잡을 때, 그때부터 사람은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한국전쟁 때, 압록강 부근에서 있었던 일이다. 중공군의 총탄을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미군병사에게 미군 군목이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시오”
그 미군 병사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에게 두려운 것은 밀려오는 중공군보다도 자신에게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절망으로 인해 죽어가던 미군병사의 심정보다 더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재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을 대결구도로 보는 이상한 가치관에 끌려 다니고 있다(남녀대결, 세대대결, 여야대결, 지역대결, 남북대결, 기타). 설상가상으로 극단적인 언행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와 분열을 일으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나 여전히 활개 치는 코로나와 극한 경제난 그리고 심지어 신앙을 정치와 이념의 편 가르기 도구로 이용하는 일부 교계 지도자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깊은 절망감을 준다.
그러나 전후좌우의 환경이나 사람을 보면 희망이 없지만, 위를 보면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는 앞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찬송 : “사람을 보면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성탄절이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영적인 의미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 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것이 “희망”이다.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하면,
- 십자가의 은총으로 인해 지옥 사형수였던 우리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희망이며,
- 마귀 사단에게 눌려서 두려움과 저주의 공포 속에 살던 사람이 해방될 수 있는 희망이고,
- 더럽고 부패했던 심령이 새롭게 될 수 있는 희망이며,
- 온갖 저주와 운명과 탐욕으로 망가졌던 인생이 다시 새로운 인생의 이모작을 살 수 있는 희망이고,
- 죄악과 부패로 만연한 이 사회가 복음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며,
-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수 없는 축복들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희망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결코 값없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시기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시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OOO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OOO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OOO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0-18)
“양(羊)”이라는 말에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넣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이 말씀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에게 평안과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 이 시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고, 나에게 생명을 얻게 하실 뿐 아니라 더 풍성한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망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희망”이라는 말씀은 단지 개인적으로만 적용되고 끝나서는 안 된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이생과 내생에 대한 생명의 희망은 그분을 머리로 모신 교회와 지역사회의 희망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과 지역에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장 쉽게 말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지붕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이다. 변함없이 어둠을 밝히는 십자가는, 이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라는 표시이며,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영혼구원과 사랑의 섬김과 나눔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이미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희망이었듯이, 교회와 성도들도 이 땅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다시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로 돌아가자.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회복하고, 감당해야 할 교회의 책임이며, 교회의 생존의 문제이며, 부흥의 문제이며 또한 성도의 의무이다.
우리교회는 지금까지 이러한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힘써 왔다. 우리 안에 이처럼 하나님의 자랑꺼리가인 성도들이 많다는 것이 행복이며 축복이다. 앞으로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꾸준히 영혼을 구원하며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확신컨대 교회든 성도들 개인이든지를 막론하고 이런 방향으로 뜻을 정하고 나가면, 그 옛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택했던 다니엘(단1:8-21, “뜻을 정하여”)이나 다윗(시57:7-11,”확정되었사오니“)을 축복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온갖 기이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과 모든 필요한 축복들을 함께 부어 주실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을 결코 혼자 두지 않기 때문이다(요8:29).
마지막으로 이 땅에 참된 생명의 희망을 주었던, 우리가 본받을 만한 한 교회를 소개하고 함께 기도한다. 그 교회는 1883년 황해도 장연군에 조선 최초로 세워졌던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를 세웠던 분은 서상륜(1848-1926)이다. 그는 평신도로서 새문안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1887.9.27). 서상륜은 소래교회 뿐만 아니라,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처음 새문안교회 세워질 당시에 전체 신자 14명 중에 13명을 서상륜이 전도했다.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사람이 선교사나 목회자가 아니고, 서상륜이라는 평신도였다는 점은 오늘 우리들이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느껴진다.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는 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다.
서상륜의 집안은 원래 양반 집안이었다. 그러나 서상륜이 1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으로 해서 형편이 어려지자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했다. 그러던 중에 서상륜은 30세가 되던 1878년에 전염병으로 인한 고열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때 만주에서 선교하던 의료선교사 헌터(Hunter)의 치료로 살아나게 된다. 이때 서상륜과 그 동생 서경조는 예수님을 영접한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만난 로스 선교사(John Ross)를 도와서 성경(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한글로 번역했다. 서상륜 형제는 번역한 성경을 갖고 입국하다가 국경에서 실패한다(당시 조선은 성경을 금서로 규정).
서상륜 형제는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돌아와서 소래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전도했다. 그 당시에 소래에는 58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서상륜 형제의 전도로 그 중에 50세대 약 80여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불과 3-4년 만에 마을 주민의 90%이상이 복음화가 된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얼마나 뜨겁게 전도했고, 먼저 믿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는 결코 그 지역에서 희망을 줄 수 없다. 소래교회가 부흥하면서 교회를 새로 건축할 때, 심지어 장연군 일대의 동학군(東學軍)들까지 교회의 건축비를 냈고, 다수의 동학군 출신들이 신자로 변화가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소래교회가 건축될 때, 언더우드 등의 외국 선교사들이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을 서상륜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조선 최초의 예배당을 건축함에 있어서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은 후세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서상륜은 동생에게 소래교회를 맡기고, 자신은 서울로 가서 새문안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을 세웠다. 서상륜 장로가 1925년 12월 16일 7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는 비록 평신도였지만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주민 여러분들이여, 서상륜이라는 평신도 한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소래교회와 유수한 교회들을 세우신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희망의 등불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 힘차게 살아가자. 이것이 우리들이 이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몸과 삶으로 다시 부를 희망의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