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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문화도시 달랏 2
자수박물관 슈콴(XQ) 입구 조각품
고백컨대, 지금껏 베트남에 대한 상상력은 무채색에 가까웠다. 참혹한 역사는 많은 상상력을 구속한다. 역사와 자연의 행복한 조화로움, 해발 1,450m 고원에 흐르는 랏족의 강, ‘달랏’에 잠긴 프랑스 적 우수. 이들은 잊고 있던 내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유채색 톤으로 내게 불명예를 안겨준 술을 생각나게 한다. 언덕을 따라 얌전히 앉은 색색의 가옥들은 영락없는 유럽의 작은 도시다. 초가을 같은 쾌적한 기온 아래 따뜻한 한낮의 햇볕과 맑은 공기. 이런 기후는 달랏이 화훼와 채소 재배 산업의 대표적 도시로 성장한 원동력이다. 바로 그 현장을 방금 보고 나오지 않았는가.
나도 그렇지만 메콩 삼각주의 찌는 일상에 익숙한 베트남인들에게 이곳은 얼마나 이국적인 느낌인가. 그래서 그들은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온다. 아마도 프랑스 인들은 이곳에 작은 파리를 남겨두려 했던 것만 같다. 늘 그들은 많은 공사에 시달려 적자를 면치 못했었다. 자국과 유사한 기후 조건을 가진 이곳, 수많은 샬레 스타일의 화려한 별장과 시내에 에펠탑의 모형이 그 증거다. 꽃의 문화를 사랑한 도시, 이런 정취에선 또 어느 공상이 현실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크레이지 하우스’. 나는 안 가보았지만 익히 TV로 보아 아는 장소다.
공상인지 상상인지 현실인지 이를 본 구경꾼들의 의문 부호 열, 왜 하필 ‘crazy’,매표소 직원의 말이 해답이다. “이 집이 정상으로 보이세요?” 전깃줄로 만든 거미줄부터 얽힌 콘크리트 나무뿌리의 통로는 기괴한 객실로 통하는데 호랑이, 곰, 독수리, 거미, 기린 등의 방 이름에 ‘딱’ 맞게 디자인되어 있다. 14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수학했다는 건축가의 전력은 건축물에 대한 해석에서 한층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현대인들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강조하고자, 정글에 사는 소수민족의 집을 모티브로 했다는데.
그야말로 crazy한 이 건축물의 예외성도 달랏이니 수용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 높낮이에 해당하는 문화의 동질성이다. 아닌 말 이 하우스가 호치민에 존재한다면 상상조차 어렵다. 그리고 들른 곳. 베트남 자수박물관 슈콴(XQ). 붓 대신 바늘, 캔버스 대신 천, 물감 대신 오색실로 그려진 베트남 전통 자수화, 이름 하여 짠테우(Tranh Theu). 한 땀마다 혼을 담아 바늘과 혼연일치된 자수 예술가들에게 바느질은 차라리 간절한 신앙이다. 단순한 기능이 아닌 예술로의 승화를 위해 영감에 깊이를 더하는 과정은 구도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화폭 위로 그들은 세상을 재창조한다. 웃고 울며 사랑하고, 평화롭고 때로는 잔인한 슬픔이었던 그 모든 것들을 투영하여 되살려 놓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호흡을 고른다. 정관자재라 할까. 마음이 풀리면 손이 나비처럼 날아 바늘과 호흡이 비로소 일체된 몰아지경으로서 한 땀 한 땀 실상으로 살아난다. 천사의 옷에는 솔기가 없다하듯 신 들린 재사의 손끝을 통해 만든 수는 정녕 수가 아니라 그림이다. 소담한 꽃, 목을 길게 늘인 봉황, 구름위에 하늘이 금세 화사하게 제 세상으로 날아갈 것만 같다. 그들에게 바늘은 붓이요 천은 캠버스이고 오색실은 물감이다. 짠테우도 생각해보면 도를 닦는 것이고 마음 수련이다. 소박한 건물 외관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그 규모와 예술적 깊이가 실로 놀랍다.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데 짧게는 3개월에서 정밀한 작품은 6개월까지 하루 8시간 종일 매달린다고 한다. 이 자수가들에게 바느질은 무엇일까? 기능? 예술? 신앙?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화폭 위에 몰입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전통적으로 베트남 자수는 노동, 외모, 언어, 행실이라는 네 가지 유교적인 덕목을 따르는 베트남 여성들에 의해 이어져 왔다. 초기 자수는 단지 생활 속에서 여성들 스스로의 감정 표출 수단이나 집안의 장식을 위해 사용되다가 본격적인 예술로 승화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다. 레꽁한 (Le Cong Hanh)이 중국으로부터 자수 기술을 습득하여 베트남 고유의 자수기법과 결합, 독창적이고도 창의적인 작품을 개발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전국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에 (Hue)는 윙 (Nguyen) 왕조가 이곳에 고도를 건설할 무렵부터 장려되어 왔는데 바오다이 황제의 어머니인 호앙티꾹 (Hoang Thi Cuc)은 자수의 달인이었고, 남평 (Nam Phuong) 황후 역시 프랑스 유학시절 그곳에서 서양의 자수기술을 습득한 이후 그것을 전통자수기법과 잘 조화시켜 독특한 궁전 자수화를 창조해냈다. 후에 여성의 세밀하고 아름다운 미적 감각이 충분히 가미된 후에 자수화 (이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실크자수였음)는 윙 왕조의 황족들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던 특산품이었다.
1990년 이후 보방구엉 (Vo Van Quun)과 호앙티쑤언 (Hoang Thi Xuan)이라는 걸출한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실크자수의 황금기가 도래했다. 이때 이후 그동안 범람했던 중국풍의 화풍이 서서히 사라지고 베트남 고유의 민족 문화적 특색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통적인 자수화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인들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 심지어 농촌 삶의 소박함까지 담은 완전히 베트남 적인 그런 자수였다. 베트남 자수화는 마치 그 속에서 대상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다이나믹한 생동감과 뛰어난 상상력, 그리고 어디서 시작했고 어디서 끝이 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하다.
반 투명한 천위에 앞면과 뒷면 모두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수가 놓여 있다.
심지어 앞, 뒷면이 다른 그림으로 수 놓은 자수까지
자수화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영역이 바로 초상화라 한다. 아무리 손기술이 좋은 장인이라도 초상화 한 작품을 제대로 만들려면 최소한 3개월은 걸린다.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 낚시에 몰두하는 노인의 느긋한 얼굴 표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내는 것은 웬만한 손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풍경화와 달리 초상화에서는 수정이란 단어 자체가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고도의 집중력과 세심한 배려가 요구된다. 이렇게 탄생된 작품 하나하나에는 가정과 이웃을 향한 희망, 사랑, 믿음, 우정 등이 고스란히 수놓아져 있다. 자수 풍경화의 경지 또한 이에 버금간다. 물소 등에 올라 한가로이 피리를 부는 목동, 해변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뛰노는 아이들, 뙤약볕에서 농사짓기에 몰두하는 농민 등을 담은 생명력과 정감이 넘치는 각각의 풍경화 속에도 고향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애정, 그리움을 가득 들어있다. 베트남 여성들의 뛰어난 손기술, 고귀한 정신세계를 고루 담은 베트남 전통자수화, 수년에 걸쳐 마음과 정신을 함께 연마해나감으로써 완성되는 ‘짠테우’야말로 베트남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대표할만한 고귀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과 사실감, 무엇보다 정교함에 나는 그만 혼이 빠지고 또 정신이 나가고 말았다. 가격표를 보았다. 작은 소품이 우리 돈 백 만원, 석박사 사모님이 말한다. 우리나라 재벌 김00는 2억 주고 사갔대요. 입이 쩍 벌어졌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들이다. 사실 순간 나는 혼이 나갔었다. 나는 달랏을 그간 우습게 본 경향이 있었다. 바로 GNP로 세상을 보는 억지가 빚은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화장실이 급해 들르는 사이 나는 일행과 헤어지게 됐다. 나와 그들을 찾는 둥 마는 둥 가본 사람은 알지만 미로는 끝이 없다. 가다가 한국관도 만나고 일본관도 만났다. 왠 한국의 전통 솟대와 장고가 거기에 있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그 상황 그게 문제가 아니다. 출구가 문제다. 가다보면 막혀 있고 ‘이것 봐라.’를 아마 열 번 정도는 외쳤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 빠져 나왔다. 그러니 혼났다고 할 수밖에.
나중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 한베 문화 교류협회에서 그곳에 한국 관을 개설했다. 나는 그러니까 그들의 작품을 본 것이다. 이 자수관은 2001년 12월 문을 열었다는데 ‘보 반 쿠안(Vo Van Quan)’과 ‘호앙 르 쑤안(Hoang Le Xuan)’ 두 예술가 부부가 설립했다고 한다. 부인인 호앙 르 쑤안은 후에의 전통 자수 기법을 그대로 전수받은 인물로 하노이, 호치민, 나짱, 후에, 다낭에도 센터가 있고 하와이, 러시아, 샌프란시스코에도 지사를 두고 있다고 한다. 팜플렛을 보니 자수 소품에서 옷까지 판매하는 숍과 카페, 자수 예술가들이 직접 광장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공연도 펼치는 것 같았다.
일행들이 그런데 아직도 안 나왔다. 그들도 나처럼 헤매는 것은 아닐까. 기다리기가 무료해서 옆집을 기웃했다. 꽃의 도시답게 일반 집인데 꽃들이 제법 많고 소담하다. 나는 안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이것은 또 뭔 일, 사나운 개가 짖으며 돌진하는 게 아닌가. 하마터면 뉴스에 나올 뻔 했다. 할머니 한 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단침입자인 나에게 한 것인지 아니면 개를 부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쫓아오던 개가 행동을 멈췄다. 나는 거의 그로기 상태다. 다행히 나만 얼이 빠진 게 아닌지 다들 나오자마자 어디서 커피 한잔이라도 하자고 아우성이다.
시내 중심가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지만, 맛은 그만이라는 L'viet 카페 맛집. 곳은 커피공장과 카페가 결합된 형태로 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다소 독특한 구조였다. 나는 솔직히 커피를 잘 모른다. 마시면 잠이 안 오기 때문 거의 기피수준이다. 그렇지만 커피를 무시 할 수는 없는 처지다. 아내가 커피 광이기 때문이다. 판매하는 곳으로 갔다. 가 봐야 알리 만무다. 석박사님이 내 무식함을 아는지 나는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 하며 콕 찔러준다. 커피 봉지 두어 개를 샀다. 아라비카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도대체 이 커피가 무얼까.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아내에게 잘난 척을 할 것이 아닌가. 돌아와 부랴부랴 찾은 상식이다.
L'viet 카페 맛집.
한국이 커피를 제일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의외로 베트남이다. 나는 여태 브라질이나 콜롬비아인줄 알았다. 특히 우리의 커피믹스에 소요되는 커피 원두는 대부분 베트남산 로부스타로 일려지고 있다. 로부스타는 평지에서도 재배되는 종류이며 베트남 대부분 농장에서는 이 로부스타를 재배하기 때문이다. 로부스타와 달리 아라비카는 해발 15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서 많은 비를 맞으며 익어야 하며 배수가 잘되어야 하는 토질이어야 한다고 한다. 화산지대의 산에서 재배되는 아라비카 커피가 유명ㅇ한 것도 이러한 특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슬람 사람들이 밤새 기도를 하면서 졸음을 이기는 차로 이용하던 것이 커피의 원조였다 하니 내가 커피 마시면 잠이 안 오는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인 거다.
L'viet 카페 맛집.
초기 에티오피아의 산지의 커피를 아라비아 반도 모카 지방에서 생산한 제품을 모카커피라고 부른다. 로부스타와 달리 작은 잎사귀를 가진 것이 아라비아 커피나무다. 커피믹스 커피에 사용되는 원두는 제조공정에서 충분한 향과 맛을 살릴 수 있으므로 값이 저렴한 로부스타를 사용하고 반면에 값이 비싸지만 드립만으로 내려서 마시는 커피에는 아라비아 커피가 제격이다. 배수라든지 토질문제가 중요하기 때문 생산량이 적은 아라비카는 당연히 가격이 비싸다. 아라비아 반도의 모카, 인도네시아 자바, 중남미 못지않게 커피의 맛을 내는 베트남 최고의 커피는 단연 달랏지방 커피로 그 중 락증커피는 베트남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나는 달랏에 아라비카 커피 전문업체가 많은 것을 알 것 같았다. 아라비카도 나름 세분화되어 있다는데 이 정도 상식만 해도 나로서는 큰 수확이다. 아무튼 나는 아라비카 커피를 제대로 산 것이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여정, 다시 춘향호를 지나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건설했다는 카톨릭 성당(Domaine De Marie)을 향하는 발길. 도멘 드 마리 (Dome de Marie)는 카톨릭 수녀원이다. 1940 년 초기 건축으로 프랑스와 베트남 건축 양식이 같이 묻어난다. 로마 카톨릭 교구의 일부분으로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운영도 같이 병행하고 있다는데 교회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 17 세기 프랑스 건축을 연상시키는 스타일이다. 벽은 특이하게 핑크색 석회암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올려 보았다. 그런데 3미터는 되는 성모 마리아 동상이 하늘을 나는 듯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상이 묘하게 베트남 여성을 닮았다. 1943년 프랑스 건축가 인 Jonchère에 의해 디자인되었다는데 Decoux 여사가 기증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1944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프랑스 Indochina 주지사인 Jean Decoux (1940 년 7 월~1945 년 3 월 9)의 아내로 이 성당에는 그녀( Suzanne Humbert)의 유골이 있다. 그녀의 무덤은 교회 로비 바로 뒤에 있으며, 많은 꽃이 있는 넓은 부지에 위치해 있다.
나는 성당 뒤쪽에 수녀들이 짰다는 스웨터와 모자등이 전시된 곳을 찾았다. 어제 밤에 야시장에서도 보았지만 의외로 털모자를 많이 선호하는 그들이다. 추위에 익숙하지 않아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호치민의 습기에 녹아난 것처럼. 모자를 써보았다. 너무 작다. 내 머리가 큰 게 아닌데 이상타 싶은데 가만히 보니 모자를 쓴 사람들은 모두 여자다. 남자의 위신과도 관련이 있는지 그러고 보니 남자들이 털모자를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성당 초입에서 만난 달랏 피자 반짱능 만드는 아줌마다. 정말 맛이 있었다. 나는 아예 아줌마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앉은 김에 호객행위를 했다. 중국 광시성에서 왔다는 일가족을 맞이했다. 나는 다짜고짜 인삼사탕부터 주었다. 덕분에 4장이나 팔았다. 아줌마가 바쁘니까 돈도 내가 대신 받았다. 내가 그녀 남편인 줄 알았던가. 아줌마도 중국 사람들도 재미있다고 싱글벙글, 그 순간은 의미 똑같은 지구촌 한 가족이 된 셈이다. 이 소박한 한 풍경은 문명으로 파악하기는 역부족이다. 여행은 얼빠진 짓도 crazy한 것도 비정상적인 것도 아무렇지 않게 정상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탄력을 지녔다. 이것이 곧 문화의 소산이 아닐까. 여행은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건설 그리고 마음 문화 축제라 할 것이다. 그런 나의 문화는 오늘도 꽃이 만발한 화창한 봄날이다. 달랏처럼.
Domaine De Mar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