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문선명선생은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골돌히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불행으로 꽉 찬 인간세계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인간의 가치와 절대사명을 추구하는 마당에 들어 명철하고 심각한 선생으로 이는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노심초사한
나머지 마침내 인생의 목적과 해야 할 일의 윤곽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전인류로 하여금 이 고통, 이 불행, 이 비극, 이
죄악으로부터 해방케 하는 일, 세상에 이 일을 하는 오직 하나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이 이상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이 일을 맡아 감당하자. 생각건대 우리 인간의 조상들도 다 이런 불행 속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현세인들도 이렇게
질곡 속에서 살고 있고, 또 그냥 두어두면 우리 후손들도 언제까지나 이러한 지옥생활을 계승해서 하게 될 것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두렵고 떨리는 인생의 비애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 왔다간 선인들, 즉 조상들을 해방시키고 현세인을 구원하고, 그리고 우리 뒤에는 다시
불행도 비극도 고통도 죄악도 없도록 영원한 이상향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 이 일을 내가 하자, 이렇게 선생의 결의는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즉 선생께서 16세 되시던 해의 부활절날인 4월 17일이었다. 이 날이 진짜 부활절인 것도 이때
선생이 처음 아셨다.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신 가운데 비로소 밝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일반 기독교에서 지키는 부활절 기념일은 해마다
다르다. 그것은 예수님의 돌아가신 날을 알지 못함으로써 그 부활날을 가려낼 길이 없던 중, 서기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 ‘춘분 후 처음
맞는 만월 직후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기’로 약정한 때문이다. 아무튼 이 날 소년 문선명선생의 기도 가운데 홀연히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엄중한 당부를 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선생께서 그 무렵 내심깊이 작정해 나오시던 인류구원사업에 대한 소명이요, 공식하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선생은 처음 몇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러면 이것이야말로 선생자신이 원하고 결심했던 일이었는데, 정작 공식적인 소명이 내려지자
사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사적인 단순한 결심과 상대적인 계약관계와의 사이에는 그 책임면에서 전적으로 다른 것이
있는데 더구나 하늘의 엄중한 소명인데야, 게다가 어린 소년으로서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대가 아니고는 이
중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거듭 당부하시는 예수님이었다. 마침내, 선생은 이 대명을 받아들이셨다. 실로 천지의 마음이 일점상에서 결탁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후 선생은 밤이나 낮이나 오직 이 한 일, 하늘의 섭리를 위하여 온 심신을 다 바치는 바 되었다. 이리하여 그
어린 나이에, 선생은 몇 겹의 입장을 겸하셨는지 모른다. 학교의 스승이나 학생들 앞에서는 남다를 것 없는 하나의 학생이었고, 집에서의 부모
앞이나 동기 가운데서는 범상한 가족의 한 사람으로 처신하면서 그 내면생활은 언제나 하늘의 뜻일(섭리역사)을 위하여 마음을 쓰지 않는 때가
없으셨다.(통일교회사 상권, 12쪽)
<말씀>
16세 때 얼마만큼 심각한 자리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제일 어렵고, 예수님과 종교단체들이 제일 어려운 최후의 때였습니다.
한국이 일본 치하에 들어가서 코너에 몰려서 갈 데가 없는 삼각지대에 있었습니다. 하늘땅과 하나님도, 5대 성인들도, 종교권도 전부가 한 점에
모였습니다. 그러니 나도 이 한 점에 소명적 책임이 있으니까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니까 나를 중심삼은 가정이라든가 한국
자체가 지극히 심각한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밥을 먹으려야 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다 보입니다.
순식간에 천하가 다 무너지겠는데, 그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참2.3.2:7, 554-257,
2007.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