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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장 때를 분별함 (5)
5. 마지막으로, 이 시대는 우리의 영혼을 기름지게 할 옛 방법들을 일상에서 확고하게 지켜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근래 몇 년 사이에 이 땅에 대중적인 신앙 활동 – 더 나은 표현이 없어 이렇게 씁니다 – 이 급격히 늘어난 것을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예배들이 희한하게 늘어났습니다. 예배 처소마다 기도 모임과 설교와 성찬식이 행해지고 있는데, 예배 처소가 지난 50년 전보다 적어도 10배는 더 늘어났습니다. 본당에서 드려지는 예배뿐 아니라, 농업회관이나 마일드메이 회의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모이는 집회, 그리고 밤낮으로 행해지는 선교 예배 등은 이미 일반적이고 친숙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임이 사실상 하나의 예배 형식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중에게도 인기가 있습니다. 요컨대, 지난 사반세기는 공적인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라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신앙에 있어서 사도 시대의 진취적인 모습이 되살아나고,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전9:22). 이전보다 짧아진 예배시간, 국내선교, 그리고 생키나 무디 같은 사람이 하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무관심과 무감각, 무신경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8). 영국의 예언자들과 의인들은 이런 일 보기를 소원했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윗필드나 웨슬리가 살아생전에 영국의 대주교와 감독들이 선교사역을 허락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할을 감당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엘리사 때의 사마리아 장관처럼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7:2).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증가 일로에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동반하지 않는 대중적인 신앙 활동은 견고하지 못하고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할 만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기 있는 설교자를 항상 쫓아다니고,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열광적인 대중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항상 새로운 자극과 흥분과 대중의 구미에 맞는 색다른 설교를 열망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아주 건강하지 못한 기독교를 양산하게 되고, 많은 경우에 영혼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불행하게도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종종 일시적 감정과 교회당의 분위기에 이끌려 실제로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계속되는 종교적 흥분이 있어야만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이렇게 된 사람은 아편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처럼 더 큰 흥분과 자극을 찾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족과 권태감에 서서히 빠져들게 됩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많은 경우 이런 사람들이 결국 생명 없는 불신앙의 상태로 미끄러져, 아예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살아간 사람의 결국이 이렇습니다! 오, 하나님의 영광이 엘리야에게 드러날 때 결코 바람이 불이나 지진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 가운데 드러났다는 사실을 사람이 기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왕상19:12).
저는 이제 이 주제에 대하여 경고를 발하려고 합니다. 저는 결코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사그라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바라는 것은, 하나님과 각 사람 사이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식물이나 나무의 뿌리는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땅을 파고 뿌리를 살펴보면 보잘것없고, 지저분하고, 투박하기만 합니다. 열매나 이파리나 꽃과 비교해서 전혀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잘것없는 뿌리야말로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과 건강과 생기와 풍요함의 참된 근원입니다. 뿌리가 없는 식물은 이내 죽고 맙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모든 생동적인 기독교의 뿌리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없이도 우리는 집회나 강단에서 담대하게 뽐내고, 큰소리로 노래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고,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사람의 칭찬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혼인 예복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입니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1) 개인 기도에 더 열심을 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온 영혼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기도가 있고, 죽은 기도가 있습니다. 아무 열의와 수고가 없는 기도가 있고, 격렬한 울부짖음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공개적으로 신앙에서 떠남으로써 교회를 놀라고 당혹스럽게 하는 자는, 사실 이미 오래 전에 기도의 자리에서 떠난 자입니다. 이들은 은혜의 보좌를 무시했습니다.
(2) 개인 성경 읽기에 전력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모든 오류의 시작이고, 꼼짝없이 마귀의 수중에 떨어지게 합니다. 지금은 50년 전보다 성경을 현저히 덜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게으르고 부주의하고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습관만 없었어도, 이렇게 많은 영국 사람이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거나(엡4:14), 회의주의에 빠지거나, 거칠고 편협한 열광주의에 빠지거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했도다”(마22:29). 강단에 펼쳐진 성경책이 가정에 있는 성경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3) 개인묵상과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자기 영혼과 대화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자 중보자이신 그분께 쏟아 놓기 위해서, 우리는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아주 은밀히 고백해야 할 죄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고해실과 같은 교회당 한 켠에 있는 작은 상담실이 아니라 은혜의 보좌입니다. 어떤 신자는 절대 혼자 있는 법이 없고, 영적 양식을 찾는다면 항상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니느라 혼자 조용히 앉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고 점검해 볼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대중적인 신앙 활동을 하면서도 여전히 연약한 신앙을 가진 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바로의 꿈에 나온 파리한 소처럼 되어 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영적 번영은 대부분 우리 개인의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과 기도와 성경 읽기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친교를 위한 시간을 내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슬프게도,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복음주의 조상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방편이나 기회에 있어, 우리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했습니다. 윗필드, 웨슬리, 롤런드 같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러 교회나 벌판에서 때때로 모이는 것 말고는, 지금처럼 많은 군중이 제대로 모양을 갖춰서 집회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집회가 그렇게 인기가 있지도 않았고 세련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칭찬보다는 욕설과 핍박이 더 많이 뒤따랐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가진 도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이들을 따라올 자가 없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지금 우리 시대가 누리는 것과 같은 많은 모임과 집회, 선교회, 모임 장소가 없었고, 갖춰진 시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기로 이들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훨씬 더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들을 통해 회심한 사람은 지금 우리 시대에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래 참고, 잘 견디며, 분명한 색깔을 나타내고, 안정되고, 견고한 뿌리를 내렸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보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친밀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개인적으로 그분을 칭송했기 때문에, 공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따라갑시다! 우리도 가서 저들과 같이 해야 합니다.
이제 몇 가지 실천적 적용을 덧붙임으로써 이 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1) 자신의 영혼과 관련하여, 이 시대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제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지금처럼 많은 덫과 함정이 도사린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그 함정들은 얼마나 그럴싸하고 교묘한지요. 여러분이 내딛는 발걸음을 조심하십시오. 자기 영혼을 파멸시키고 영원한 슬픔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사상이 자유라는 허울 아래 불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분열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그럴듯한 구실, 이른바 관용과 박애라는 미명 하에 교리적 진리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결단할 날이 오기만을 바라면서 계속해서 결단을 미루고 삶을 허비하다가 결국 문이 닫히고, 굳은 양심으로 아무 희망도 없이 죽어 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둘러싸여 있는지 자각해야 합니다. 좀 확실하지 않더라도 다른 것은 내버려 두고, 여러분의 부르심과 선택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일어나 부지런히 힘쓰십시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오기만 하면, 전능하신 구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친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맞아 주실 것입니다. 변명으로 뭉그적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바로 오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누구와 함께 가겠다고 기다리느라 지체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기다리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위험한 시대입니다. 극소수만이 생명의 좁은 길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어떻게 해서든 그 소수에 포함되도록 힘쓰십시오.
(2) 다른 사람의 영혼과 관련하여, 이 시대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여러분은 지금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섬김의 기회가 이렇게 활짝 열려 있던 적이 또 있었을까요? 희어져 추수할 밭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활짝 열린 기회를 잘 사용하십시오.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십시오. 여러분의 숨을 거두기 전에 조금이라도 선을 행하십시오.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여러분이 땅에 묻힐 때는 여러분이 태어났던 때보다 더 나아진 세상을 보겠노라고 결심하십시오. 친척과 친구와 동료들의 영혼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종종 연약한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거룩한 솜씨로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려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다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아끼고,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태도를 버리십시오.
선행에 좋은 결과가 있고 없고는 여러분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선의로 힘쓰고 애써도 상대방이 여러분의 노력을 항상 그렇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여러분의 노력이 여러분 자신에게는 항상 유익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항상 선을 행하기를 힘쓰십시오. 건강의 비밀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몸과 영혼 모두를 건강하게 합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우리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행20:35). 하지만 심오하고도 고귀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3) 마지막으로 성공회와 관련하여,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엇이 무엇인지 압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역사적 전통에 충실한 유서 깊은 교회에게 참으로 힘겹고도 위험한 시대입니다. 사공이 교회라는 배를 이미 흉흉한 바다 한가운데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밖으로는 교황주의자와 불신자와 자유주의자의 위협을 받고 있고, 안으로는 배교자와 거짓 친구와 겁에 질린 사역자로 인해 원기가 다 소진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회가 성경과 종교강령과 개신교 종교개혁의 원리를 굳게 고수하는 한, 교회를 강력하게 고수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종교강령을 배 바깥으로 팽개치고, 저 오랜 종교개혁의 깃발마저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만약 성공회가 이런 것을 팽개치는 때가 온다면, 그때가 바로 여러분이 이 파선한 배를 버리고 떠날 때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이 낡은 배를 고수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고 교회에서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겁쟁이처럼 교회를 떠나야 합니까? 교회를 떠나 어디로 갑니까? 어디에서 더 나은 기도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많은 죄악이 여전히 있지만, 교회 말고 또 어디에서 이처럼 많은 선을 볼 수 있겠습니까? 교회로 인해 서글픈 때가 참 많습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있는 가시적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다 마찬가지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게 맑은 날씨 같은 교회는 이 땅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 어디서나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 가라지가 없이 자라는 밀은 없습니다.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이 땅에서 복음적 설교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행해지고 있고, 국내외적으로 더 많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지난 세기에 여섯 명의 사람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며 고독하게 살아갔던 윌리엄 로매인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보았다면, 아마도 우리의 나약함과 감사하지 않음을 신랄하게 꾸짖었을 것입니다.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시기하는 구경꾼과 안에서 침울하게 불평만 하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 무슨 말을 하든, 교회 안에 있는 반半교황주의와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영국 개혁교회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렝고의 전장에서 나폴레옹이 오후 4시에 했던 유명한 말처럼 말입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만약 영국 교회의 충성된 지체들이 구명정을 띄워 교회를 떠나려 하지 않고 서로를 냉담하게 바라보는 대신 듬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 주고 서로 다투지 않는다면, 조국 교회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며, 우리 후손에게 대대로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 이 자리에 우뚝 서서 이 자리를 지킵시다. 물이 조금 샌다고 배를 버리고 떠날 생각에 급급하기보다, 오히려 펌프를 설치하고 그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교회를 고수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힘써 싸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교인이야말로 “시대를 분명하는” 신자라고 저는 믿습니다.
첫댓글 제가 정말 바라는 것은, 하나님과 각 사람 사이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증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자 중보자이신 그분께 쏟아 놓기 위해서, 우리는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동반하지 않는 대중적인 신앙 활동은 견고하지 못하고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할 만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기 있는 설교자를 항상 쫓아다니고,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되는 열광적인 대중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항상 새로운 자극과 흥분과 대중의 구미에 맞는 색다른 설교를 열망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아주 건강하지 못한 기독교를 양산하게 되고, 많은 경우에 영혼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불행하게도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종종 일시적 감정과 교회당의 분위기에 이끌려 실제로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면 계속되는 종교적 흥분이 있어야만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이렇게 된 사람은 아편 중독자나 알코올 중독자처럼 더 큰 흥분과 자극을 찾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족과 권태감에 서서히 빠져들게 됩니다..
영적 번영은 대부분 우리 개인의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과 기도와 성경 읽기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친교를 위한 시간을 내기로 결심하지 않으면,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슬프게도,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간과되고 있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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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라일 목사님이 우려하는 것들이 이 시대에도 같습니다.. 교회 집회에 가면 열광적인 신자들이 많으나 생활현장에선 그런 열정적인 신앙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미쳐도..그리스도를 위히여...온전하여도 그리스도 때문에...하였습니다..
이런 신앙은 공중 예배 때보다 홀로 있을 때 더 하나님께 대해 열렬합니다.
이런 현상은 골방 안에서 주님과 깊은 친교가 있을 때에 성취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에게 예수에 미친자들처럼 나타나야 합니다. 완전히 미친 자들입니다.
그런 이미지가 풍기지 않을 때 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평생 단 한명도 예수에 미쳐버린 제자를 낳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에 미쳐야 예수에 미친 사람을 일으킵니다.
전 매일 주력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처럼 완전히 나의 정신세계가 그 세계에 젖어 지내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 속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완전히 현실세계를 잊어버린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세상도 없고,,,나도 없고..구속한 주만 보이도다!...가 실현됩니다....전 약간의 맛을 보았기에 완전히 내 하루가 종일토록 그렇게 되기를 열망합니다...그래서 할 수 있으면 모든 시간을 찰스라일 목사님의 조언과 같이..
성경..기도...찬양에 투신합니다...
난 예수에 미쳐야 합니다...주변사람들이 저 사람 완전히 미쳤다...라고 평판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는 완전히 예수에 미쳐버린 인간입니다.
성령의 의지....성령의 견해,,,성령의 잠재력이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 영혼입니다...육체의 능력은 간 곳없고...성령이 완전히 압도해 버렸습니다...죠지 뮬러...웨슬레...찰스 피니.....이반 로버츠....완전히 그 상태에 진입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다니엘과 세 친구들....이사야...세례요한...예수....사도들....완전히 미쳐버린 인간들입니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정신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세계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뭐 걱정 근심이 있겠습니까? 육체의 욕망이 그의 삶에 지배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겠습니다. 뭐...먹고 싶은것이 생각나겠습니까? 좋은 차...좋은 집,,,그런 것들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부럽겠습니까?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오직 주의 얼굴표정이 기뻐하시니 나도 덩달아 기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