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파계사(八公山把溪寺) / 전통사찰
- 대구시 동구 중대동
사적기에 따르면 804년(애장왕 5)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1605년(선조 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파계사는 영조의 탄생과 인연이 있는 절이다.
숙종은 현응에게 세자 잉태 기원을 부탁, 현응은 농산(聾山)과 함께 백일기도를 하였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농산은 숙빈 최씨에게 현몽하고 세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세자가 후에 영조로 즉위한다.
숙종은 현응에게 보답, 파계사를 중심으로 둘레 40리에 걸쳐 나라에 내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어 쓰라고 명하였다.
현응은 이를 거절하고 선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여 경내에 기영각(祈永閣)을 지었다.
1979년 6월 파계사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 안에서 영조의 어의(御衣)가 나와 이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파계사 안내문, 인터넷 백과사전 등 참조하였음)
파계사는 왕실의 원찰이었다.
처음 파계사와 인연은 1990년대 초인 것 같다. 대구지역으로 영업 왔다가 들른 적이 있다.
가끔 이 앞을 지나다녔지만 쉽게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다.
참 좋은 절이다. 다음엔 걸어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계사의 설화, 믿거나 말거나다. 사람이 죽어 바로 영혼이 다른 몸으로 태어난다?
영조의 직전 전생이 승려 농산,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의 직전 전생은 가난한 집 아이였다.
오후 다섯 시에 가깝다. 주차료를 받는 매표소에선 들어가라고 권한다.
보장각, 무엇을 보관하고 있을까?
진동루
범종각, 진동루 옆에 있다.
250년쯤 된 느티나무, 보호수이며 영조와 연관지었다.
파계사 설선당 / 대구시 문화재자료
1623년(인조 1) 계관법사가 지었다. 1646년과 1725년 두 번 중건하고 1976년에 중수하였다.
파계사 적묵당 / 대구시 문화재자료
만수문, 일반인 출입금지.
어느 스님을 만나서 이 안으로 들어가 마당에서 30~40분 가량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나이는 나와 비슷, 고향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청소년기는 경기도에서 보냈다고 한다. 만수문, 이 스님이 가르쳐 주었다.
응진전
원통전 / 보물
맞배지붕, 다포식으로 조선후기 건축물이다.
파계사 영산회상도 / 보물
1707년(숙종 33) 연잉군(훗날 영조)이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시주한 왕실 발원 불화다.
길이 340cm, 폭 254cm이며 비단에 채색하였다.
영산회상도는 부처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불승은 화기를 남기지 않은 모양이다.
파계사 건칠 관음보살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삼베와 옻칠을 여러 겹으로 만든 불상. 1979년 금색을 칠하기 위해 불상 안(복장)에서 영조 도포와 발원문이 나왔다.
1740년(영조 16)에 쓴 발원문에 따르면 이 불상은 1447년(세종 29) 중수(크게 수리함)하였다고 한다.
처음 만든 시기는 중수보다 앞선 시기일것이고 만든 기법으로 보아 고려후기로 여겨진다. (안내문)
수미단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존 상태가 깔끔하다.
(모레 은해사 백홍암에서 수미단(보물)을 보았다. 백홍암 수미단도 매우 보존 상태가 좋다)
산령각 / 대구시 문화재자료
파계사 기영각 / 대구시 문화재자료
1696년(숙종 35) 현응조사가 성전암과 함께 세웠다고 한다. 조선 왕실 위패가 있다.
창건주 심지왕사, 대공덕 중창주 계관법사, 중흥조 현응당 영원대사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조선 19대 숙종대왕선가지위, 조선 21대 영조대왕선가지위, 조선 22대 정조대왕선가지위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미타전
만수문으로 들어오면 이런 마당이 있다.
지장전
극락전
보장각, 여섯 시가 넘었다. 아까 있던 차들이 없다.
부도전
맨 오른편에는 조계종 원로 고송당 종협대선사 승탑과 비가 있다.
2024년 4월 25일 늦은 시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