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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타성인 연안 차가 문절공 22대손입니다. 지역에 안타까운 문화재가 있어 이를 연구하고 보존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자 하여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창녕 성씨 문중에서도 지대한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메일로 연락하여 주시면 성심껏 답해 드리겠습니다.
(chaju77@hanmail.net)
봉화군 축제산업에 관한 발전방향(Ⅱ)
가칭<이몽룡 축제를 개최하자>
차 주 성
(시인,한국문인협회원)
목 차
Ⅰ. 서 론
Ⅱ. 계서당과 춘향전과의 관계
1. 계서당
2. 성안의와 성이성의 이력서
3. 춘향전 속의 성이성
4. 이몽룡의 유적 및 유물
Ⅲ. 이몽룡 축제의 발전방안
Ⅳ. 결 론
Ⅰ. 서 론
한반도의 위치는 확고하다 우선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용케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선진국대열에 동참하려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또한 미래 지향적인 인류 평화를 위해 애쓰는 노력은 국제 사회에서 어는 정도 인정을 받는 모양이다.
이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지내 온지 벌써 60년이 가까워 온다. 남한은 각종 생산성 있는 자원,정치력,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민족정신으로 후진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자존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효과를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갑작스레 3차산업으로 쏠림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그 중 부족한 자원을 관광이 한 몫을 차지 하므로서 각종 축제를 연구, 개발하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각종 산업자원을 연구 개발하여 관광자원화하고 이를 축제행사에 연계하여 지역 경제 발전과 지역민들에게 일정한 소득에 영향을 주는 산업을 축제산업이라 한다면 이러한 자원을 갖고 있는 지방정부는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지역민에게 소득향상에 도움을 주고 경제 발전 및 지역간의 불균형 격차 해소, 교통, 문화, 사회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축제산업은 이러한 각종 자원을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고증을 거쳐 관광지화하고 있으며 이나마의 자원도 부족하다하여 현재 지방정부는 전국적으로 TV드라마의 촬영세트장도 적극적으로 유치, 대규모 관광지로 조성 홍보하고 있다. 이는 지역경제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문화 및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나아가 민족성을 일깨우는데 일조하고 있음에 그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창녕의<대장금><상도><허준>촬영지, 강진의 <허수아비>도로, 곡성의 <심청관광단지>, 장성의 <홍길동 태생지> 하동의<토지>세트장, 구례의 <태백산맥>세트장, 제천,문경,안동의<왕건>세트장, 무안의 <불멸의 이순신>세트장, 등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Ⅱ. 계서당과 춘향전과의 관계
국도36호선에서 지방도915호 물야방면 도로를 가다보면 도로변에 계서당 안내 표지판이 있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소재 계서당은 국가지정문화재 민속자료제 171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 계서당 주인은 성이성 선생으로서 선생은 평생 공,사 구별없이 청렴, 결백하여 검소하게 살았던 인물로서 1695년 숙종21년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1786년 정조10년 오천서원에 주향되고 있다. 청백리는 대간 및 대신들의 추천에 의해 청렴한 관직자로서 조선시대 전 기간 중 본관 44씨족에서 219명을 배출하였는데 창령 성씨 문중은 5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昌寧 成氏는 왕조별로 과거급제자도 136명을 골고루 배출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총 123개 姓氏에서 15,151명의 합격자 중 李,金氏 5,200여명을 제외하면 상위권에 속하고, 領相 366명을 배출하였으며, 호당 303명,공신이 8명,서화가에 728명이 배출되었고, 忠,孝에 있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名門族 姓氏이다.
그 昌寧 成氏 門中 成以性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고대소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선생의 유년시절과 부 성안의의 관직생활과 당시의 시대적 환경, 및 소설의 내용과 작품이 모두 선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1. 계서당
계서당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봉화사람 儉校公派 부용당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아들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1595∼1664)이 광해군 5년인 1613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그가 과거에 장원 급제해 어사로 부임할 당시 사용했던 어사화와 창녕 성씨 족보 등 수십여점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특면 6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의 사랑 채(정면 3칸,측면 3칸)와 중문칸으로 연이어져 있다.
이 곳이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고대소설 춘향전의 내용은 실화이며 그 주인공은 이 곳 계서당의 주인인 성이성 선생으로 이몽룡의 실제인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춘향전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최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 라는 주제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성이성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학계는 물론 사회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이몽룡은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반상가효는 만성효요,촉루낙시는 민루낙,가성고처도 원성고라." 한 뒤 서리가 암행어사출두를 소리치며 나아가 당일 파출수령 6인과 그 밖의6인에 대한 서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는 성이성이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몽룡과 흡사한 성이성 선생의 행적내용이 계서공파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계서선생일고>, <암행록><필원산어>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2. 成安義(父)와 成以性(子)의 이력서
가. 성안의의 이력서
1561년(명종16년) 창녕현에서 출생, 의병장 호는 부용당 벼슬은 우부승지다. 두문동72현 중 성만용의 7대손이다. 5세 때부터 학문을 하기 시작하여 15세에 이르러 寒岡 鄭求선생 門下에서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스승이 창녕현감으로 부임하여 부용서재를 지어 강론하다가 선생에게 물려 주어 부용당이란 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다. 경상도관찰사 백암 김륵(영주출신,宣城 金氏)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그의 종손녀와 혼인한 뒤 백,계씨와 양친 등 모든 가족을 창녕에서 처가인 영천 두암촌(신암리)으로 피란시키고 (봉화 입향조로서 이 때부터 가두들에 정착, 자손들이 번성을 누렸다. )
창녕으로 돌아와 1,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으며 7월경에는 곽재우와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5년 아들 이성이 출생하고 형조좌랑,예조, 병조좌랑을 거치며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598년 병조정랑으로 승진하면서 대구,경주,울산, 안동 등에서 군량을 조달, 수송에 공을 세웠으며 왜적의 군량을 수습하여 전승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난후에 영해부사를 제수하여 4년간 재임하던 중 부모상을 동시에 당하였으나 1607년 상복을 벗자 남원 부사에 제수하여 3년을 재직하고(이 때 이성의 나이 13-16세로 춘향전이 생성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광주목사로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 영천으로 귀향하여 계서당에서 13여년동안 후진을 가르쳤다. 1614년 伊山書院 院長으로 재임 시에는 舊書院廟宇를 內林里 林皐로 옮겨 敬之堂으로 다시 짓기도 하였다.
이후 영천(봉화)에 은거하다가 상주 북쪽 가고산장을 짓고 잠시 후진을 가르치다 인조반정 후 성균관 사성을 제수 받고 상의원정, 봉상시정을 제수 받았으며 선생이 64세 되던 해에는 이괄의 난으로 아들 이성과 함께 어가를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 때 원종공신 통정대부 군직의 녹훈을 받고 제주 목사에 배명 3년간 봉직하다 영천(봉화)으로 돌아 올 때에는 행장이 단촐하여 제주민이 부모를 잃은 듯하여 송덕비를 세워 선생의 공덕을 기렸다. 이 때 아들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선생은 우부승지겸 경연참찬관,춘추관편수관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부임치 못하였으며 그 이듬해(69세) 슬하에 5남5녀를 두고 계서당에서 졸하여 영천군 동석현 경향지원(이산면 두월2리 석현)에 장사하였다.
사후 조정에서는 증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양관(홍문관,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추증하였으며 후에 순흥가고에 별묘를 세우고 사판을 봉안하였다.
나. 성이성의 이력서
선생은 1595년 선조28년 임진왜란 중 영주시 동면 문단리 외가(宣城 金氏집성촌)에서 출생, 남원 부사를 지낸 부용당 판서공 성안의(芙蓉堂 成安義)의 아들로 1607년부터 3년여동안 남원에서 부친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 때 선생의 나이 13세-16세가량으로 춘향전이 생성되었다고 여겨진다.)
22세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였으나 광해군시대에는 혼란하다하여 나아가지 아니하고 은거하다가 1627년 인조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다. 선생이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39세에는 사헌부 감찰, 사서,병조좌랑겸 춘추,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원종 추숭론으로 상소하고 귀향하자 사서에 제수하는 것을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 해 부임하여 부수찬, 부교리에서 수찬,교리,지평,정언,문학을 두루 거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찬으로 귀향하여 지내다가 경상감사 沈演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43세에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로 나섰으며 45세에는 병조정랑,수찬,장령,교리,사간으로 배명받았으며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 등 네 차례에 걸쳐 어사를 지냈으며 46세에 합천현감, 54세에 담양부사 59세에 창원부사, 60세에 봉화로 귀향하였다. 61세에 진주목사, 66세에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에 대한 선정을 베풀자 고을민들은 송덕비로 답례하였다. 1660년 평양감사 임의백이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극찬하였지만 슬하에 6남3녀를 두고 선생은 1664년 현종5년 향년 70세로 계서당에서 졸하였다. 선생의 묘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束洞,속골)에 있다. 특히 선생의 다섯째 아들 文夏는 36세 때 禮安의 陶山書院 院長을 역임하였으며 지금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3. 춘향전 속의 성이성
가. 춘향전의 의미
춘향전은 작자 미상의 우리나라 고대소설로서 소설 제목과 내용에 있어서 120여종이 넘는 문학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고대소설 춘향전은 “남원부사 성안의의 아들 成以性(이몽룡)과 퇴기(退妓)의 딸 춘향이 남원 광한루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한다. 신임사또는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나 춘향은 일부종사(一夫從事)를 내세워 거절하다가 옥에 갇히게 된다. 후에 成以性(李夢龍)은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와, 탐관오리 신임 부사의 생일 잔칫날 어사 출두하여 부사를 봉고파직(封庫罷職)하고 춘향을 옥에서 구출, 정실부인으로 맞아 백년해로한다”는 내용으로 조선시대 실제 러브스토리를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지어 놓은 것이다. 사실은 서로 만나지 못하였음을 역사적 사실과 기록 등으로 보아 추측할 수가 있다.
또한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은 이 몽룡이고, 이도령의 실제 이름은 성이성이며, 여주인공인 성춘향은 성이 이씨라는 사실을 숨겼는데 당시의 양반신분에 따라 공개할 수 없는 제약을 받는 사회임으로 작자가 임의로 남,여의 성을 바꾸어 쓴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춘향전은 신분에 구애받지 아니한 파격적인 최초의 러브스토리라는 점이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몇 가지 설화 형식을 갖추어 현재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춘향전은 실존인물인 성이성의 역사적 사실과 구전, 설화 등 허구를 반반씩 접목하여 창작한 작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몽룡은 “봉화의 실존인물 성이성”이다.
이 곳이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고대소설 춘향전의 내용은 실화이며 주인공이 이 곳 경북 봉화군 물야면 계서당의 주인인 성이성 선생으로 실제인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춘향전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성이성이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설 교수는 성이성은 조부의 3년 상을 마치고 남원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성안의를 따라 남원에서 사는 소년시절, 소설속의 춘향이를 만나게 됐을 것이라며 봉화 가평리 계서당이 '이 도령의 생가터'라고 추정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이몽룡은 "金樽美酒는 千人血이요, 玉盤嘉肴는 萬姓肴요,燭淚落時는 民淚落, 歌聲高處도 怨聲高" 라는 시를 써 보이자 모두들 의아해 있을 즈음 서리가 암행어사 출두를 소리치며 당일 파출수령 6인과 그 밖의6인에 대한 서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는 성이성이 쓴 시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춘향전의 두 주인공 춘향과 이도령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설 교수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및 구전되는 설화를 면면히 대조 확인한 결과이며, <계서선생일고>에 나오는 암행록에는 “(중략)밤잠을 설쳐가며 소년시절을 회상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광한루에 있는 성안의의 송덕비는 이몽룡의 실존인물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라고 했다, 1999. 12. 4. 20:00-21:00까지 KBS 1TV 역사스페셜(담당 장영주)에서는 이몽룡은 실존인물이고 성이성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자료와 기록을 찾아 검증하였음을 방영하였다.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 연구논문을 발표한 뒤 1999. 11. 3.과 11.23. 일본 및 국내에서 위와 같이 공식적으로 언론 및 학계에 발표하자 설교수의 논문 발표를 근거로 해서 <춘향전>의 이몽룡이 실존 인물 성이성임을 10여 차례에 걸쳐 11.18.조선일보, 11.18. 12.7. 12.13.매일신문, 12.1.대구일보, 12.2.시사저널, 12.7.신경북일보, 12.8.국민일보, 12.8.영남투데이, 12.9.대한매일, 12.10.양백일보, 등에 앞 다투어 집중적으로 홍보하였으며 봉화군에서도 전국 각처에서 상당한 관심이 집중, 문의가 쇄도하여 홈페이지에 소개하며 좋은 아이템이나 의견 제시를 원하고 있음에도 관광자원의 개발 및 생가 복원 및 관광 사업 추진을 계획한 사실이 있으나 무슨 이유인지 아직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4. 이몽룡(成以性)의 유적, 유물 발굴
계서당을 비롯하여 이몽룡이 유년시절에 놀던 폭포, 연못 정자를 조성하고 계서초당(현재 행정구역상 영주시 이산면에 위치하고 있음)의 현판 및 정자와 성이성 사당을 보수하고 임금이 미행하다 마시고 쉬었다던 어와정과 왕산, 성이성의 묘 및 석물과 비석, 부용당 성안의 사당별묘, 광한루의 성안의 성덕비, 부용당 재실, 성이성의 어사화 및 사선, 분실된 영정, 교지, 문과 시험답안지, 국조방목, 전고대방전, 필원산어, 교와문고 3권, 계서선생일고(호남암행록), 등 인근 지역에 흩어져 보관되거나 사라진 유물 유적을 한 곳으로 보관 전시 복원하여야 하고 영주, 남원, 상주, 창녕일원 및 광한루에 있는 흔적을 찾아 발굴하여야 할 것이다.
Ⅲ. 이몽룡축제의 발전방안
경상북도내 축제현황을 보면 5종의 문화관광지원축제행사<봉화 송이축제 포함>가 있고 9종의 도지원축제행사가 있으며 도내 시,군 자체축제행사가 민속놀이 및 이벤트성 행사를 포함하여 약 115종의 행사를 각각 1년 내내 치르고 있다.
지역마다 대표성을 띠는 농산물, 사회, 문화, 역사 등을 홍보하는 축제행사가 대부분으로 겹치기행사도 하고 있으며 이 중 역사성을 띠는 축제행사는 115종 가운데 8개에 불과하다. 또한 문학이 관련된 문화재는 도내 두 곳 밖에 없다. 이러한 경북도내 축제현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계서당은 역사적 및사회, 문학적 자료로서의 가치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으므로 축제행사를 치루어도 무방할 것이다.
계서당 개발 발전방안으로는 축제 준비위를 구성,지속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그 구성원으로는 민간 기구로만 준비하는 방법과 지방정부에서 위임하는 자와 계서당 후손 중에 관련이 있는 자 및 종중 대표자와 지역문화재관련 학계 대표자, 지역 직능대표자로 구성하는 방법 등 다방면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문화관광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몽룡의 유물과 유적을 복원 수리하여야 하며 이전이 가능하다면 이전하여야 하고, 불가능하다면 모형으로라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 전국 최초로 <관광 벨트화>를 연구하여 인근 안동시 및 영주시와 협의하여 [안동 도산서원(계서당 주인 성이성의 5男 文夏는36세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재임한 기록이 있음)- 봉화 계서당- 영주 부석사, 소수서원,선비촌- 소백산 온천]을 연계한 테마관광버스를 정기적 노선으로 운행하도록 연구,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이황 선생과 도산서원과 성이성의 5男 文夏와 소수서원과 선비촌이 모두 관련이 있는 역사적 자료이다.
또 <춘향전>학술대회를 봉화에서 개최하여 조선시대 정신문화가 숨쉬는 청정문화의 도장으로 유학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문화의 광장으로 가꾸어 지역 이미지 제고와 한국봉화를 홍보하는데 앞장서서 문화, 사회, 역사, 인물 탐구에 이바지하고, <글짓기제전> 및 <전국이몽룡연극제 개최>, 봉화 고유의 판소리 발굴, 관광봉화 홍보용 <가요>를 공모 제작하여 관광 봉화를 알리는데 온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미 노래 및 오페라,판소리는 중앙에서 제작 완료되었다고 한다. 행사계획만 공시하면 발표할 것이라고 들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계서당 유적지 성역화 계획은 구체적인 조감도를 놓고 종중과 협의 관광단지로 조성, 지역경제에 일조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기념관 건립으로 유물 유적을 영구 보존하여 정치,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연구에 이바지 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다양화하는 관광 수요에 능동적으로 공급체계를 갖추는데 자료홍보, 도로,교통정비 등에 군,민의 지혜를 모아야하며 세계화의 시류와 지방자치제도의 시행으로 지역간의 균형발전에 대한 군민의 요망 및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봉화군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관련 가문의 종중과 지방정부의 협의를 우선시하여 역사적인 기록 및 고증작업에 대한 자문과 자료를 수집하여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에는 30여년간 스승으로부터 사사받으며 이몽룡(成以性)에 대한 끊임없이 연구해 온 연세대 설성경 교수의 충분한 자문이 있어야 할 줄 안다
이러한 문화관광 및 지역경제에 이바지 하기위해서는 문제점이 다소 제기될 수 있다. 축제행사라는 것이 일정한 장소에서 치루기 때문에 행사를 치루지 않은 지역간의 불균형과 소득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타 지역간의 괴리감을 들 수 있으며 도시화정책에 대한 정주 인구의 감소로 인하여 행사의 의미 축소가 염려 되고, 행사와 관련 역사의식이 있는 전문 인력의 확보가 어렵고, 전국 행사로 인한 예산의 부족과 교통망이 취약하므로 동서고속도로의 조기착공을 위해 인근 시,군과 협의하여야 하며 행사에 따르는 관광객 수용의 어려움도 문제가 될 것이다. 특히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서 역사성이 없는 지역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정책도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축제의 남발로 인하여 지역민들의 흥미 감소를 염려하여야 하고 손색없는 계서당 성역화 사업에 있어서 예산 부족에 따른 홍보문제에 대하여 종중의 협조가 있어야 할 것이며 지도 제작업체에 대하여 계서당 표시를 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야 할 것이다.
Ⅳ. 결 론
성이성(成以性), 그는 분명 오늘날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청백리의 모범이요, 흰눈같은 선비의 표상이다. 종중의 자랑이자, 봉화의 자랑이요 한국의 자랑이며 가는 곳마다 善政을 하고 治績을 남겼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의 고향 봉화, 선비문화와 정신이 350여년간 숨쉬고 있는 淸淨 奉化, 청정한 청백리 성이성을 淸淨하게 한국관광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선비, 선정을 하고 귀향할 때는 항상 침구만 갖고 다니는 청백리,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진정한 봉화인 성이성, 사후 수 십년, 수 백년이 지나야 명예회복이 되는 선비에 비하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선비인가. 청정 봉화에 걸맞는 관광봉화의 성이성일 것이다.
남원시는 호적도 없는 춘향이 이름 두자갖고 90년 동안 살고 있다.(금년들어 춘향제는 90회째임)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자, 고향도 모르는 여자, 벼슬은커녕 족보도 없다. 청백리는 더욱 아니다. 그런데 이름 두자갖고 춘향제 때마다 100만 명씩 끌어 모으고 광한루에 100만명씩 찾아다니며 해마다 200만명씩 찾게 만든다. 1년에 200만 명, 10년이면 2000만명, 20년이면 4,000만명이 남원을 찾았다는 것이다. 90년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내년이면 더 많은 인파가 남원시를 찾을 것이다.
그런데 권위 있는 학계가 찾아 준 이몽룡을 7년째 방치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봉화군민 전체가 계서당 관광안내원이 되어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이몽룡은 봉화에 있는데 왜 저들이 이몽룡을 선발하도록 놔두는지 모르겠다. 영남의 성도령제, 호남의 춘향제가 함께 한다면 영호남 화합차원에서라도 뭔가 있을 것이다.
봉화는 초라한 안내판 하나 세워놓고 그 것이 다인 양 승용차 1대의 주차시설도 없이 잠재력 있는 엄청난 관광자원을 버려두고 있는 것이다.
봉화군은 2003.11. 유교문화권관광개발사업으로 추진중인 계서당 주변정비사업이 2004-2006년까지 진입로정비,주차장조성,조경 및 편의시설,문화재보수사업을 계획한바가 있으며 2004.5. 계서당(이몽룡생가) 주변정비사업으로 문화유적을 정비하여 문화유산을 보전,전승하고 수려한 경관과의 조화로운 개발을 통하여 문화관광단지조성을 2004-2006년까지 총사업비 10억원과 지방비를 포함하여 지원하기로 하였고 지방재정투융자 심사완료를 2003년에 완료하고 부지매입 및 기본설계용역을 2004년에 하고 2005년에 주차장조성 및 조경,편의시설을, 2006년에 문화재 정비를 하기로 2회에 걸쳐 종중에 공문을 보내 약속을 한 사실이 있음에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여 현재까지도 주차1대시설 전무하여 불편하기 그지없다. 어떤 입김의 작용을 받는 편파적인 집행이 아니라 공정한 집행을 하여야 할 것이다. 공정한 집행이었다면 의혹이 있을 수 없다. 부지 매입은커녕 착공조차 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아무래도 문중의 힘이 약해서 일 것이다.
청백리 집안이어서 그렇다. 충효의 집안이어서 그렇다. 문중의 힘이 약하면 홍시가 떨어진 후 주워 먹어야 한다. 그러나 계서당은 한 문중의 것이 아니다. 봉화군민의 것이다.성안의,성이성 부자는 관향인 창녕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 곳 봉화에서 여생을 보냈다. 자손들도 영주 봉화에 그대로 눌러 앉았다. 자원이 없는 곳에 큰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춘향이 남원시를 살리고 있듯이 앞으로 이몽룡은 봉화를 먹여 살릴 것이다.
아니면 문화단체 및 압력단체가 없어서 약속만 하고 미루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학계에서 발굴해준 역사적 사실과 종중의 자료가 거짓일 것이다.
지역의 국보급 문화재와 역사를 찾아 준 학계와 관련 교수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며 그 뜻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보물을 찾아 주었음에도 보물로 여기지 않는 것은 학계가 찾아준 것이 보물이 아닌 것과 같다. 보물이 아닌 것으로 학계에 발표하고 방송을 타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것은 성씨 문중의 것만이 아니라 조선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역사이자 문화재이며, 문학이자 사회인 것이다. 이제는 지역민이 일어설 때다.
봉화군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 대표될 수 있는 문화재, 앞으로 관광지도에 남원에는 광한루가 표시된 것처럼 봉화에는 역사와 사랑을 품에 안고 사는 선비의 계서당이 표시되어야 한다. 엄청난 보물자원을 두고도 수년간 방치한 것은 지역경제의 손해를 불러 왔을 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문화적 욕구를 외면한 것이다.
관내 선비가 많다고 하지만 유일하게 청백리를 배출한 고장, 역사와 문화와 최고의 선비를 배출한 고장, 전란도 피해간 천혜의 고장이 아닌가, 이제 청백리의 깃발을 세우자. 淸淨한 성이성을 세우자. 팔자소관으로 산간벽지에서 살아온 민초들의 한숨을 들어주어야 한다. 이 땅에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도록 노력한 암행어사의 호령으로 봉화를 전국관광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가두들아 일어나라. 봉화여 일어나라. 그렇다. 관심은 있으나 무사안일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은 가라. 젖과 꿀이 흐르는 봉화로 거듭나기 위하여 이제 역사와 지역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