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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맞선 '죄', 대가는 죽음이었다
프레시안 :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이승만 정권은 물론이고 극우 반공 세력 전반의 핵심 경계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2년 후 결국 진보당 사건이 터진다. 대선 후부터 진보당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하나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조봉암·진보당 사건을 볼 때 동병상련의 태도를 민주당이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의 지독한 탄압을 민주당이 받고 있었으면 그런 탄압을 더 극심하게 받고 있던 진보당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진보당 사건에서 조봉암과 진보당을 좀 편들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자유당과 함께 진보당 죽이기에 노력했다. 이 점은 이전의 여러 선거를 다루면서도 얘기한 바 있다.
진보당이 창당되면서 지방 당부를 조직하는데 이때 지독한 테러를 당했다. 부산에서 열린 경남도당 결성 대회를 시작으로 경북도당 결성 대회, 서울특별시·경기도당 결성 대회까지 다 아수라장이 되거나 있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고 그랬다. 전북도당을 결성할 때는 괴한들이 진보당 간부들을 상이용사회로 납치하고, 간부들을 곤봉으로 때리는 등 막 테러를 가하는 일도 일어났다. 전남도당의 경우 그보다 훨씬 잔인한 테러를 당했다.
(1956년 7월 권총과 단도로 무장한 괴한들이 진보당 전남도당 추진위원회 조직부장 임춘호의 집에 침입해 임춘호는 물론 임신 중이던 그 부인까지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전남도당의 다른 간부이던 조중한의 집에도 권총과 단도로 무장한 괴한들이 들이닥쳐 조중한을 칼로 찌르고 네 아이에게 칼부림을 했다. '편집자')
이러한 테러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던 때 국회에서 유일한 진보당 의원이던 김달호 의원이 '테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평화 통일 문제를 얘기하자 고함과 야유, 욕설 같은 것이 막 나왔다. 민주당의 김준연 의원은 김달호 의원의 발언을 대한민국의 국시를 도끼로 찍으려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김달호 의원을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조영규 의원은 김달호 의원의 발언이 소련의 세계 정책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소리를 치면서, 김달호를 조치해야 한다고 자유당 못지않게 주장했다. 그러면서 연이은 테러 사건에 대해 여야 의원들이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속으로는 '잘된 것 아니냐',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인다. 이런 것은 조봉암·진보당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테러, 여론 재판에 이어 등록 취소…사실에 부합하는 근거는 없었다
프레시안 : 1958년 벽두에 진보당 사건이 일어난다. 이해는 1956년 대선 후 처음으로 총선이 치러지는 해였다는 점도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1958년 5월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그해 1월에 진보당 간부들 검거가 시작되면서 진보당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나는 이 사건을 조봉암·진보당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초기에 언론에 보도된 것을 보면 아주 심각한 여론 재판이었다. 그런 현상이 근래에도 좀 있지 않았나. 수구 냉전 언론을 중심으로 해서 2014년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여론 재판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런 현상이 아주 심각했다.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하기 전날인 1958년 1월 11일 조인구 검사는 '진보당의 평화 통일론은 북괴의 남침 구호'라고 단정하고, 이를 엄단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언론은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조로 인삼이 든 상자를 받았는데 그 속에 든 괴뢰의 지령문을 보고 불태워버렸다'느니 '조봉암 집에서 불온 문건을 찾아냈다'느니 '김일성의 지령을 실천하기 위한 7인 위원회를 구성했다'느니 '간첩과 접선해 야합한 사실을 조봉암이 시인했다'느니 하는 별의별 이야기를 대대적으로 연일 보도했다. '김일성에게 보내는 조봉암 자필 편지도 조봉암의 집에서 발견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리고 정태영이 작성한 메모인 '강평서'가 특히 신문에 엄청난 것으로 보도됐다. 여러 언론은 이 강평서가 북한에서 내려보낸 비밀 지령서라고 대서특필하고 '<동양통신> 정태영 기자는 북괴와 연락 담당관인 것이 확인됐다', 이렇게도 보도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주장들이었다.
프레시안 : 검찰과 다수 언론의 색깔 공세에 이어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을 해산하는 일이 벌어진다. 극우 반공 세력이 쥐락펴락하던 살벌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여러 해 동안 고생해 싹을 틔운 진보당은 그렇게 해서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을 해산하며 제시한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여론 재판을 대대적으로 하고 나서 1958년 2월 25일 오재경 공보실장이 진보당 등록 취소를 발표한다. 그 당시에는 정당 등록을 정부가 취소할 수 있었다. 이게 참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1960년 4월혁명 이후에는 정당 해산 요건을 엄격하게 했고 그것을 1987년 6월항쟁 이후 헌법에 다시 못을 박았다. 그런 속에서 헌법재판소가 2014년에 통합진보당 사건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생긴 것이다.
2월 25일 정부가 발표한 등록 취소 이유는 전부 사실과 다른 것들이었다. 첫 번째 이유로 오재경 공보실장은 진보당이 대한민국의 국법과 유엔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 방안을 주장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유엔 결의에 배치되는 것은 오히려 북진 통일이고 진보당의 평화 통일은 그야말로 유엔 결의와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보실장이 진보당의 평화 통일 방안이라고 제시하면서 설명한 것은 진보당의 방안이 아니라 통일문제연구회 위원장 김기철 개인의 방안이었다. 김기철 개인의 안을 진보당의 공식 방안으로 뒤집어씌워서 발표한 것이다. 나중에 나오는 판결문에도 그건 진보당의 통일 방안이 아니라 김기철 개인의 안이라고 돼 있다.
두 번째 이유로 오재경 공보실장은 '진보당 간부들이 북한 괴뢰 집단이 밀파한 간첩, 밀사, 파괴 공작조와 항상 접선해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특수 부대인 HID에서 관리한 양이섭(양명산) 관련 논란을 제외한다면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정부가 제시한 두 번째 이유도 사실과 다른 것이었다. 세 번째 이유로 정부가 주장한 것은 진보당이 공산당 비밀 당원과 공산당 방조자들을 의회 의원에 당선시켜 그들을 통해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기도해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걸 입증할 자료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기소장에서도, 판결문에서도 그런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정부가 발표한 세 가지 이유는 전부 잘못된 것이었다. 그걸 가지고 진보당 등록을 취소했는데 그만큼 이 재판은 정치적 재판이었다. 그 당시 알 만한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조선일보>건 <한국일보>건 언론도 이것이 정치적 재판이라는 걸 염두에 두면서 보도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과 직결돼 있던 정치적 사건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법원에 난입한 괴한들, "조봉암은 벌써 조치됐어야 할 인물" 주장한 대통령
프레시안 : 진보당 등록 취소 발표 후 16일이 지난 3월 13일, 진보당 사건의 첫 번째 공판이 열린다. 그해 7월 2일 1심 판결이 나오는데, 판결에 불만을 품은 극우 세력이 물리력으로 사법부를 위협하는 초유의 법원 난입 사태가 벌어진다.
서중석 : 1심 재판장이던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에 대해서만 조봉암의 유죄(징역 5년)를 인정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불법 무기 소지로 유죄를 선고한 부분에 대해선 '그건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취지로 훗날 회고한다. (유 판사는 가깝게 지내던 변호사에게 "정치적 사건임을 고려해 무리하게 징역 5년을 선고했는데도 봉변을 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편집자')
그러자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대한반공청년회라는 데 속한 약 300명의 괴한이 법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반공청년회라는 것은 한국전쟁 말기 휴전 협정 체결 직전에 석방된 반공 포로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였는데, 이들이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라"고 외치며 법원에 난입한 것이다.
자유당에서는 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하 단체로 하여금 '친공 판사 규탄 대책 위원회' 같은 걸 결성하게 하면서, 법원 난입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거부했다. 민주당도 이상한 태도를 보였다.
(유병진 판사는 1심 판결에서 "조(봉암) 피고인이 간첩이라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며 평화 통일론이 국시를 위배하고 괴뢰 집단과 야합, 국가 내란을 기도했다는 공소 사실을 증좌할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법원에 난입한 이들 때문에 유 판사를 비롯한 1심 재판부는 며칠 동안 집을 떠나 피신해야 했다. <한겨레> 1992년 1월 31일 자에 따르면, 대한반공청년회는 4월혁명 때 반대 시위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법원에 난입한 이들은 진보당 사건 판결에 더해 류근일 필화 사건 및 '부역자'들에 대한 판결을 문제 삼아 유 판사를 용공으로 몰아갔다. 류근일 판결은 '무산대중 단결' 등의 표현을 담은 글을 발표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 류근일(훗날 <조선일보> 주필)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을 가리킨다. '부역자' 판결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을 떠나지 못했다가 부역자로 몰린 많은 시민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을 말한다. '부역자' 판결에 관한 책에 유 판사는 이렇게 썼다. "적 수중에 떨어진 시민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총 한 자루 없이 항거하다 죽으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피란이 최선의 길이었건만 그 기회조차 앗아버리고 거짓말만 하고 먼저 달아난 건 정부 아니었던가. (…) 내가 그 경우에 처했더라면 어떠했을 것인가." 권력층의 심기를 연이어 불편하게 한 유 판사는 1958년 말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는다. '편집자')
김구 암살 사건처럼 이 사건과 관련해 제일 관심을 끈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이 사건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월 12일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기 시작하고 13일에는 조봉암이 자진 출두하는데, 그다음 날인 1월 14일 경무대(오늘날 청와대)에서 보고를 받고 이승만은 "조봉암은 벌써 조치됐어야 할 인물이다", 이렇게 얘기했다. 3월 1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 홍진기에게 이 사건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홍진기 장관이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양명산)이 있으니 유죄에 틀림없다"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라면, 전에는 증거 없이 기소한 것처럼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이렇게 주의를 줬다.
1심 판결이 나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7월 4일 홍진기 법무부 장관이 중앙청 회의실에서 "1심에 비해 고법, 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게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공연히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得策)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고정훈의 무시무시한 증언, 그리고 대법원의 희한한 판결
프레시안 : 사안 자체가 정치적 사건이었기에 최고 권력자의 그러한 태도는 판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법부가 독립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시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2심 재판은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그 후 2심 재판이 열렸는데 이 2심 재판이 문제가 심각했다고 보고 있다. 2심 재판장을 맡은 김용진은 1951년 1.4후퇴 때 월남한 사람으로, 유명한 사상 검사였던 오제도 검사 등이 주선해서 판사로 복직했다고 한다.
여기서 HID 이중 첩자였던 양명산과 관련해 고정훈이 증언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정훈은 특수 기관에 있었던 사람인데, 양명산에 대해 여러 가지 증언과 주장을 했다. 4월혁명 이후에 고정훈은 '이승만이 특무대장 김창룡을 불러서 조봉암은 공산당이니 없애라고 지시했고 그걸 쪽지로도 남겼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고정훈의 주장에 의하면, 명을 받은 김창룡은 특무대 내정처장이던 김모 대령한테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김모 대령은 경무대 비서관으로 당시 실력자였던 박찬일, 그리고 자유당 강경파였던 장경근과 모의했다고 그런다. 그 후 장경근의 동생인 인천 지구 CIC(방첩대) 대장 장모 중령과 인천 지구 HID 대장 김모 대령한테 모종의 계획이 전달됐다고 고정훈은 주장했다. 인천 지구 HID 대장 김모 대령이 두 문관(엄숙진, 정태진)을 불러 지시를 내렸는데 여기서 이중 간첩으로 활용되던 양명산이 발탁됐다는 것이다. 엄숙진이 육군 HID에서 양명산을 데리고 대북 첩보 공작을 계속했다고 고정훈은 주장했다.
어쨌건 그러한 양명산이 1심 재판 때는 공소 사실을 인정했지만, 2심에서는 대부분 부인했다. 조봉암, 진보당과 관련된 모든 사항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재판장은 양명산이 2심에서 부인한 건 전혀 인정하지 않고 검찰의 기소 사실을 전부 인정했고, 평화 통일론 자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공소 사실에도 없던 '혁신 정치 실현', '수탈 없는 경제 체제' 이것들도 유죄의 증거라고 했다. 그렇게 되자, 2심 판결 직후 <조선일보>는 "이 사건은 얼른 믿기 어려울 만큼 의외의 범죄 혐의를 받았고 과연 그 범죄 혐의 자체가 현행법상 범죄로 성립할 수 있느냐는 근본적 의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심에서 조봉암과 양명산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나머지 간부들도 다 유죄 선고를 받았다.
프레시안 : 2심 판결 후 이승만 정권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2심 판결 직후인 10월 28일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이승만 대통령은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말도 안 된다. 책임 판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해서 중지했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홍진기 법무부 장관은 1959년 1월 22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3심 주심 판사인 김갑수 대법관을 포함한 대법관들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 측과 같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국가보안법은 1958년 12월 24일 2.4파동을 거쳐 통과시킨 그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가리킨다. 이어서 홍진기 장관은 '김갑수 대법관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그간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나도 이 대법관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 이렇게 아주 자신 있게 중앙청 회의실에서 이야기했다.
한 달 후인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김갑수 대법관 주심 하에 판결을 내렸는데, 아주 희한한 판결을 했다고 여러 글에서 지적하고 있다. 뭐냐 하면 진보당의 평화 통일론은 위법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양명산은 간첩 행위를 한 자이고 이자와 접촉한 조봉암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라면서 조봉암과 양명산에 대한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김대중 구명한 미국, 조봉암에게는 다른 태도를 취한 이유
프레시안 : 1심 판결 책임 판사를 처단하려 했다는 대통령, 그리고 대법관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는 법무부 장관의 발언은 이 재판이 어떤 재판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문제를 짚었으면 한다.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나. 이와 관련, 1970년대에 유력한 야당 정치인이던 김대중이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미국이 보인 모습과 조봉암에 대해 미국이 취한 태도는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조봉암·진보당 사건에 대해 미국 정부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진보당 사건이 났을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 자료를 보면 '증거가 박약하다'고 쓰여 있다. 그러면서 '진보당의 계획 경제나 평화 통일 등의 강령은 이승만 정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이렇게도 써놨다. 진보당 사건이 난 직후인 1958년 2월 미국 국무부 관리가 쓴 메모랜덤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체포는 아마도 조봉암의 개인적인 인기와 평화 통일 및 진보당의 사회주의 강령에 대중의 지지가 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만약 정부가 평화 통일 주장을 반역적인 것으로 재판에서 선언한다면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한 유엔과 미국의 정책을 범죄적으로 만드는 것이고, 유엔 총회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우리의 위치를 훼손할 것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라는 걸 이처럼 명확하게 하고는 있었다. 1심에서 조봉암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미국 국무부는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지 않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라'는 지시를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내렸다. 2심에서 조봉암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는 월터 다울링 주한 미국 대사한테 '한국 정부에 경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 후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상고심을 맡았던 재판부가 이를 맡으면서 재심 청구는 1959년 7월 30일 기각됐다. 조봉암 측에서는 재심을 다시 청구하려 했는데, 재심 청구가 기각된 다음 날인 7월 31일 사형이 돌연히 집행된다. 이에 미국 측이 "돌연하고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결정"이라는 정도를 한국 외무부 장관에게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이때는 이미 죽은 후였다.
대법원 판결 직후 조봉암은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 수가 있느냐"고 가족에게 말했다고 한다. 처형될 때 60세였는데 형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으로 돼 있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형 집행 후 이강학 치안국장은 조봉암 사형 보도를 자제하도록, 즉 하지 못하게 하거나 작게 다루도록 통제했다.
조봉암은 이렇게 해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김대중의 경우와 비슷하게 조봉암을 정말 살리려는 노력을 했느냐 하면, 그런 정도의 구체적인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어떤 자료도 나오지 않고 있다.
프레시안 : 미국이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1960년 4월혁명 시기를 살펴보면 미국 정부는 제1차, 제2차 마산의거가 있고 그러면서 4.19가 나기 전까지는 이승만 정부를 지지했다. 이승만 정부의 반공 정책이라는 걸 굉장히 중시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2.4파동, 그러니까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그 유명한 사건에 대해서도 그냥 항의하는 정도였지, '그래선 절대로 안 된다'는 식으로 월터 다울링 대사가 나오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다 인정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조봉암 사건에 대해서도 미국 측이 몇 마디 하기는 했지만 이승만 정부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항의를 하는 일은 없었다. 2심, 3심 판결이 난 이후에도 시간이 있었는데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강력한 조치라고 볼 수 있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은 '극동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이승만의 반공 정책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여기고 그런 속에서 다른 것, 즉 민주주의 훼손이라든가 조봉암 사건 같은 것은 있을 수 있는 희생이라고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2.4 파동 때 6개월간이나 국회가 공전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미국이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태도, 그러니까 '반공만 잘하면 무슨 짓을 하든지 지지하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점이 조봉암 사건에서도 똑같이 나타난 것이다.
프레시안 : 한국에 반공 정권이 필요하다는 것이 미국의 선택에서 핵심 요소로 작용했으리라는 건 수긍이 간다. 그렇지만 그 점은 이승만 정권 때만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조봉암과 김대중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달랐다.
서중석 : 1973년(김대중 납치 사건)의 경우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면이 있다. 확실한 것은 미국이 유신 체제를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유신 체제에 반감을 갖고 있었는데, 다만 '우리로선 그것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며 손을 놨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려 하면 그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은 미국 측이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 점에서 일본하고 달랐다. 일본은 유신 체제를 강고히 지지했다. 미국은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현실적으로 반공 정책을 잘 펴는 걸 미국이 인정한 면이 있다. 1980년(김대중 사형 선고) 경우는 전두환이 김대중을 정말 죽이려고 했느냐 하는 문제에서 불확실한 면이 있는데, 이때 미국으로선 자기 카드를 더 확실하게 갖고 싶지 않았겠나. 말하자면 한국에 대한 영향력과 관련해 미국으로선 김대중 구명 운동을 하는 것이 더 큰 정치적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던 측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52년 만에 누명 벗은 조봉암, 한국 진보 역사에서 특별한 존재
프레시안 :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조봉암은 그 후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52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늦게나마 잘못을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지만, 조봉암을 사지로 몰아간 이들과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세력의 힘이 여전히 강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의 화신인 것처럼 치켜세우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끊이지 않는 현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서중석 : 조봉암 사건이 정치적 사건이라는 것은 2011년에 가서 명확하게 됐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이 사건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고 보는데, 그해 1월 20일 대법원은 전원 합의 판결로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이렇게 돼 있다. "진보당의 강령, 정책은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 질서 및 경제 질서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는데도 원심은", 이건 1950년대 판결을 말하는데, "진보당의 강령, 정책이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거나 자유민주주의를 폐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는 공소 사실을 유죄로 인정하였던 바 원심 판결은 증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증거 재판주의를 위배하고 헌법과 국가보안법의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양이섭에 대한 부분도 살펴보자. 양이섭은 상해(상하이)에서 조봉암과 알던 사이였는데, 이 사람과 이어지면서 조봉암이 죽게 된 것 아닌가. "양이섭은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 부대에 의해 영장 없이 장기간 여관에 감금된 상태에서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았고 양명산(양이섭)의 북한 왕래가 육군 첩보 부대의 도움을 얻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양이섭이 원심 법정에서 한 진술과 배치되는 수사 기관 및 제1심 법정에서 한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믿기 어려운 점 등을 볼 때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부분은 증거 재판주의와 자유 심증주의에 위반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점 등을 근거로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했다.
프레시안 : 청년 시절부터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조봉암의 삶을 그간 여러 차례에 걸쳐 살폈다. 이를 압축한다면, 조봉암은 어떤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나.
서중석 : 조봉암은 뛰어난 현실 감각과 대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나라 진보 세력 가운데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보 세력이 6월항쟁 이후에도 그렇고 4월혁명 시기에도 현실에 적합한 정책, 정강을 제시했느냐고 할 때 그렇게 보기가 어렵지 않나.
또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예컨대 평화 통일만 해도 그 당시에는 용기를 갖지 않으면 얘기하기가 어려운 것이었고, 조봉암만이 강하게 주장할 수 있던 것 아니었겠나. 피해 대중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한 것도 그 당시 일반 민중의 고통을 생각할 때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지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던 것 아니었나. 그래서 조봉암은 정치적인 곡예를 많이 했고 여러 보수 세력과도 대화하고 관계를 맺었지만, 항상 지킬 것은 지키려 했고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하려 했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려고 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주권재경', '주권재깽'으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
프레시안 : 진보당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정치 상황을 조금 더 살폈으면 한다. 1958년은 총선이 있던 해였다. 진보당 사건이 이 총선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그리고 진보당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서중석 : 조봉암이 감옥소에 있을 때인 1958년 5.2선거가 치러진다. 이승만 정권 때 치러진 마지막 민의원 선거인데, 진보당 사건이 난 건 이 선거 때문이기도 하다고 당시 많은 관측자들이 봤다. (양원제에서 참의원은 상원, 민의원은 하원 격이다. 이승만 정권 때는 헌법에 참의원 조항이 있긴 했지만 참의원은 한 번도 구성되지 않았다. '편집자') 왜냐하면 진보당이 이 선거에 나서면 상당수 의석을 확보했을 것 아닌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당시 어떤 데서는 '진보당이 나섰다면 30석은 했을 것'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5.2선거는 이승만 정권이 개헌선을 확보하기 위해 굉장히 혼탁하게 치른 선거였다. 1954년 선거도 부정 선거, 경찰 선거였지만 1958년에는 선거 부정이 그보다 더 심했는데 특히 개표 부정이 아주 심했다. 1954년 선거와 큰 차이가 있다면 그 개표 부정을 이야기할 수 있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5.2 민의원 선거에는 도지사, 군수, 면장, 이장, 학교장, 교사 등 여당이 동원할 수 있는 공직자를 대거 동원해 선거에 투입했다. 대전시장이 민주당 선거 위원을 여당 위원으로 착각해서 "지금 무더기 표 준비도 잘돼 있다", 이렇게 말하는 진풍경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선거에서 투·개표가 엉터리였다는 걸 말해준다. 전국 각처에서 폭력배가 동원됐고 관권과 폭력이 노골적으로 결탁했다. 그러면서 야당 참관인이 자주 구타를 당했고 산림법 위반 같은 혐의로 구속되기 일쑤였다. 지방에 따라서는 3인조, 5인조로 집단 투표를 하기도 했는데, 2년 후에 있게 될 3.15 부정 선거의 양상이 이때 많이 나타난다.
한 신문이 5.2선거가 치러진 3일 후에 쓴 사설 제목이 '어찌 하늘이 무심하랴', 이랬다. 이 선거에서 하도 테러가 많이 일어나니까 한 야당 의원은 "주권재민이 아니라 주권재경, 주권재깽"이라고 비꼬았다. '경'은 경찰, '깽'은 깡패를 가리킨다. '경찰이 국회의원 제조업을 청부받았다', 이렇게 비난도 하고 그랬다.
이 선거에서는 선거 운동이나 투표에도 큰 문제가 있었지만 개표에서 아주 심각한 부정이 저질러졌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개표 도중에 전기를 끄고 부정 계표(計票)하는 올빼미 개표,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여당 표 다발 중간에 야당 표나 무효표를 끼워 넣은 샌드위치 표, 야당 참관인에게 수면제를 넣은 닭죽을 먹게 하고 임의로 개표한 닭죽 개표, 개표 종사자가 야당 표에 인주를 묻혀 무효표로 만드는 빈대 잡기 등 갖가지 방법으로 개표 부정을 저질렀다.
이렇게 개표 과정에서 부정이 심해서 선거 무효 및 당선 무효 소송이 무려 105건이나 있게 됐다. 그래서 대법원 판결에서 당선자가 바뀐 경우가 3개 선거구, 선거 무효 판결로 재선거를 한 곳이 8곳이나 있었다. 문제가 있는 대법원이었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 그 정도로 선거 사범도 많았던 선거다.
개헌선 확보에 실패한 이승만 정권, 결론은 다시 대규모 부정 선거
프레시안 : 5.2선거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이 선거는 놀라운 결과,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으로서는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결과를 가져다줬다. 자유당이 126석, 민주당이 79석을 차지했는데 이건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민주당이 개헌을 저지할 의석을 확고히 확보한 것이다. (나머지 28석은 통일당 1석, 무소속 27석이었다. 자유당에서 개헌을 하려면 원내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해야 하는데, 민주당은 3분의 1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편집자')
이 점은 1971년 총선하고 비슷하다. 1971년 총선에서는 야당이 1958년보다도 더 도시를 휩쓸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균형 의회를 갖게 되는데, 그래서도 유신 체제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어쨌건 5.2선거에서 자유당은 그렇게도 확보하려 했던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진보당도 때려잡고 민주혁신당도 이 선거에 나오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치러진 이 선거를 통해 보수 양당제가 확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후 항상 보수 양당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보수 양당제가 이때 일반화된 형태로 나타나서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보수 야당이 민주당, 신민당 식으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야권을 대표하지 않았나.
이 선거에서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도 주로 6월항쟁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16명의 의원을 뽑은 서울에서는 14명이 민주당에서 돼버렸고 자유당은 서대문을 구, 이곳 한 군데에서만 됐다. 이기붕이 거기서 나오려다가 인기가 없으니까 경기도 이천으로 도망을 가고, 문교부 장관을 했던 최규남이 그를 대신해 나왔는데 당선됐다. 부산에서도 10곳 가운데 7군데에서 당선되는 등 대도시는 민주당이 휩쓸었다. 이와 달리 농촌은 자유당이 휩쓸었다. 이런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도 장기간 계속된다.
프레시안 : 개헌선 확보에 실패하면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으로서는 다른 여러 정치적 수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에 어떤 선택지가 있었나.
서중석 : 이승만 대통령은 이 선거가 치러졌을 때 만 83세였지만, 절륜한 권력 의지를 가진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2년만 더 하고 그만둔다', 이런 생각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이 85세가 되는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이 선거를 볼 때 선택지가 3개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는 것이었다. 이건 6월항쟁 직전 민주정의당(민정당)이 개헌하려 했던 방식하고 닮은꼴이다. 뭐냐 하면 5.2선거에서 여촌야도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때는 여전히 지방, 시골에서 선출되는 의원 숫자가 대도시에 비해 훨씬 많지 않았나. 그것뿐만 아니라 '부정 선거 같은 걸 지방에서 적극적으로 하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전체 의석의 50퍼센트 이상을 확보하는 건 아주 쉬운 일 아니냐', 이런 자신감을 자유당이 가질 수 있었다. 민정당이 1986∼1987년에 했던 생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반대할 것 같으니까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권력을 대부분 놔두면서 형식으로만 내각 책임제 식으로 하는, 그러니까 '직선제는 안 하는 방식으로 개헌을 추진하면 이 대통령이 따라오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개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이것도 거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각 책임제 개헌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자유당은 첫 번째 선택지가 가장 쉽고 빠르게, 계속 집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봤는데 대통령 때문에 안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러닝메이트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건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와 이승만과 제대로 겨룰 만한 사람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조봉암은 감옥소에 있었고 1959년 7월 31일에는 사형이 집행되지 않나. 사실 재심 청구가 기각된 지 하루 만에 처형이 이뤄졌는데, 사형수를 그런 식으로 죽이는 건 찾아보기 힘든 일 아닌가. 어쨌건 '이 대통령에게 맞설 수 있는 야당 대통령 후보가 마땅치 않지 않느냐. 나오더라도 그건 별것 아니다. 그러니까 러닝메이트제를 지금이라도 도입하면 영구 집권을 할 수 있다', 자유당에서는 그렇게 봤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충분했다.
러닝메이트제에 대해서는 민주당 구파에서도 호의적이었다. 민주당 구파는 신파하고 워낙 사이가 나빴고, 이재학이 이끌던 자유당 온건파와 죽이 맞았다. 서로 결합해서 한때는 당까지 만들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쨌건 민주당 구파 쪽에서는 '러닝메이트제가 원칙적으로는 옳다', 이렇게 나왔다. 이 대통령도 러닝메이트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큰 호감을 보였다.
문제는 '러닝메이트제 도입이 선거법 개정으로 되는 게 아니다.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여러 달 검토한 끝에 얻게 된 것이다. 자유당은 '헌법을 개정할 때 민주당 구파한테 너무나 큰 선물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고민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 출범 후 개헌이라는 걸 몇 번 해봤지만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일이었나.
그래서 마지막 선택지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노하우도 많이 쌓였으니까 마지막 선택지로 대규모 부정 선거를 획책하게 되는데, 그게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