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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마지막 눈물
성경본문:계시록 21:1-4
○ 새 하늘과 새 땅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레26:11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1.사람은 어느 때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때론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지극히 감성적인 사람들은 눈 앞에 전개된 슬픈 현상들 때문에 쉽게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올림픽에서 어떤 선수들은 사자처럼 용감히 싸우고서는 마침내 메달을 목에 걸 때, 눈물을 흘립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그들은 사뭇 울먹거리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 때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지난날의 혹독한 고생을 돌아보고 주어진 영광을 기뻐하며 흘리는 눈물일 것입니다.
30년 혹은 40년을 헤어졌던 가족들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만남은 만나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에 젖게 합니다. 그들이 헤어지게 된 경위와 또 헤어져 지내면서 경험해야 했던 고생스런 일들은 그들이 극적으로 만나는 순간에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의 뜻대로 안될 때, 눈물을 흘립니다. 또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어떤 이는 결혼식을 하는 그 때,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이는 첫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좋아서, 또는 슬퍼서, 괴로워서 또는 기뻐서, 힘들어서, ...우리는 많은 경우에 눈물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우리들 중에 어떤 분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성도는 눈물로 그 간절함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병들었던 히스기야가 죽게 되자 하나님을 향해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주께서는 눈물로 호소하던 그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왕하20:5)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땅에 쓰러져 뒹굴며 거품을 흘리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 아들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그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이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만일 믿을 수 있거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소리쳤습니다. "주여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그는 눈물로서 주님께 호소했던 것입니다(막9:24). 주님은 곧 그 아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간절할 때 눈물을 흘립니다.
때때로 눈물은 고난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눈물의 빵으로 먹이시며 그들에게 많은 눈물을 주사 마시게 하셨나이다."(시80:5).
이것은 주의 백성의 기도에도 외면한 하나님의 분노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시80:4). 주님은 주의 백성을 향해 눈물의 빵을 먹이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눈물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우는 순간은 사람이 죽었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자기에게 있어서 아주 친밀하고도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사람들의 눈물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 사람의 입장이 되기 전까지 그 사람이 흘려야 하는 눈물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2.마지막 눈물
성경에서 눈물이라는 것이 나오는 가장 마지막 장면은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왕국으로 들어온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천년 왕국이 끝나고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하게 되는 때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습니다. 남편을 맞이하는 신부가 자기를 얼마나 예쁘게 꾸밉니까? 그 도시는 너무도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가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된 사람들과 함께 계시게 될 것입니다. 그 시대를 가리켜 천년 왕국과 흰 왕좌의 심판 뒤에 오는 영원한 왕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왕국에서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겁니다. 이후로, 다시는 사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울부짖는 것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니 이전 것들은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이 때 주님께서 닦아주셔야만 했던 성도들이 흘린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겠습니까?
3.그것은 고생을 회상하는 눈물이 아님
왜 성도들은 그 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고난받으며 살았던 것을 회상하며 흘리는 눈물입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휴거 된 후,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난 당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여러분이 포기한 일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미움과 오해받은 일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곤경해 처했던 일들, 예수님 때문에 당한 모든 고난에 대해 주님은 분명히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공의로운 보상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서 천년동안 이 땅에서 이루어질 주님의 왕국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받은 성도들에게 왕관을 수여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앞으로 주어질 왕국의 도시들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하실 것입니다. 주님처럼 변화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상을 받고 분봉 왕으로서 주님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생에서의 고난은 어젯밤에 꿈처럼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70년의 고생이 계속 내 마음 속에 남아 나를 괴롭게 한다면 그 주어진 보상은 위대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70년 고생은 그 날 결코 가슴에 사무치는 상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괴로움이 천년의 영광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성경은 말하기를 "현재의 고난이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8:17)고 했습니다. 그 때 흘리는 눈물은 고생스러운 지난날을 회고하며 흘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미 그 고생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죽은 후에 낙원의 위로와 또 부활의 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심판석에서의 왕관, 그리고 이 땅에 다시 임하는 때, 천년의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4.그것은 감격의 눈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때 흘리는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겠습니까? 사망을 당하지 않는 감격에서 오는 눈물입니까? 물론 그런 감격이 거기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임하시는 날, 성도들은 그분처럼 다시 죽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천년동안 통치하는 그들은 다시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러한 감격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인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통치한다"(계20:4)고 했습니다. 그들이 살아서...그들이 살았을 때, 그들은 이미 다시 죽을 수 없는 첫째 부활의 동참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 흘리는 눈물은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감격에서 오는 것이라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5.그것은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아픔과 관련된 눈물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 눈물은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과 아픔과 관련된 눈물입니다(계21:4). 그렇다면 믿는 자들이 사망과 슬픔과 울부짖음, 아픔을 혹독하게 느끼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그때, 흰 왕좌의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의 마지막 눈물은 흰 왕좌의 심판과 관계된 눈물입니다.
[계20:11-15]“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 자리마저 보이지 아니하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로 인하여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자기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고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그 때, 천년왕국이 끝나는 시절에 정말 중요한 한 사건이 있습니다. 흰보좌 심판입니다. 그것은 이땅에서 있게 될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죽은 자들은 큰 자나 작은 자나 할 것 없이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며 자기들이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의합시다. 이 심판의 자리는 믿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지상에 있게 될 최후의 심판인데, 거기에는 성도들이 불려나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어떻게 하는가 봅시다.
그 날 흰 왕좌의 심판이 거행되는 때, 거기에는 다른 많은 왕좌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심판의 왕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122:3-5] “예루살렘은 전체가 탄탄한 도시로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주의 지파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증거궤를 향하여 거기로 올라가니 이는 주께서 심판의 왕좌들 곧 다윗 집의 왕좌들을 거기에 두셨음이라”.
여기서 다윗의 집은 다윗의 위를 이어 가지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는 많은 왕좌들이 있습니다. 심판의 왕좌는 하나가 아닙니다.
[단7:9,10] “내가 본즉 왕좌들이 놓여 있고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왕좌는 맹렬한 불 꽃 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으며 불이 강같이 흘러 그분 앞에서 나오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은 천천이요, 그분 앞에 서 있는 자들은 만만이라. 그분께서 심판을 베푸시는데 책들이 펴져 있더라”.
다니엘서에 의하면 옛적부터 계신 이가 심판을 집행하실 때, 거기에는 크고 흰 왕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왕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물을 새롭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9).
또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한 왕국을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기어 너희로 하여금 내 왕국에서 내 상에 앉아 먹고 마시며 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려 하노라"(눅22:29,30)
주님은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왕좌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또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보니 왕좌들과 그 위에 앉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계20:4). 천년왕국 때, 왕좌들에 앉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죄인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심판 받으러 나오는 그 때,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심판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이미 치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코너에 몰려 심판을 받게 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찬송가470장 4절>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러나 이 복되고도 좋은 일이 그 날에 우리는 사망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고 슬픔과 아픔과 울부짖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 곁에서 그분의 심판을 지켜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는 참으로 엄중하고도 진지한 자리입니다. 그 귀한 일이 벌어지는 그 때에 우리가 다른 데 놀러갈 수 있겠습니까? 골프를 치러가거나, 재미있는 영화를 보느라 거기에 없겠습니까? 그 순간이 어떤 순간입니까? 죄 아래 진행되어온 과거의 역사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 아닙니까? 죄인들을 추궁하는 마지막 자리가 아닙니까? 그 순간에 분명, 우리도 주님의 옆에 함께 배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이 한사람, 한사람씩 불려나올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으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들이 죄 가운데 살았던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죄인들을 위한 피 흘리며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던 구주 예수님을 거절한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눈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으리라."(살후1:8,9)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멸시한 자도 두 세 증인으로 인하여 긍휼을 얻지 못하고 죽었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영계 무례히 행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해 보라"(히10:28,29).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추궁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 추궁 당할 때, 그들은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심문하실 때, 그들은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일에 대해 말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심판석에 앉은 그분께서 거기 기록된 책을 펴서 그가 언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을 무시했는지를 들추실 것입니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있는 어떤 성도를 일으켜 세워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에 대해 분명히 상기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심판이 집행될 때, 아,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어머니가 거기에 등장했습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묻습니다. "분명히 네 아들과 딸이 나를 믿으면서 나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했건만 왜 거절했느냐?"
그녀가 불못에 던져지기 위해 끌려갈 때, 여러분은 거기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생전에 분명,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였지만, 그녀는 나와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과 저주 속으로 끌려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여러분들은 담담히 서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목석처럼 꼿꼿이 서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심판의 자리는 그것을 당하는 자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자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성도들에게도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거기는 사망과 슬픔과 아픔과 울부짖음이 가득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삼촌이 끌려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불못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삼촌이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마주친 눈빛이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것에 대해 내게 한마디도 안했는가?" 하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오빠나 형, 동생들이 끌려나와 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왜 강력하게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어떻게 그리 간단히 말하고 말았느냐?"며 원망하는 눈망울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평생 착하게 산다고 노력했던 여러분의 친구가 불려나올 것입니다. "그래 제 만은 구원받았어야 했는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착한 친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까닭에 불못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며 울게 될 것입니다.
남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살면서 인생의 고생이란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겪은 여러분의 선배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제 멋대로 악하게 살았다고 한다면 그래도 덜 속상하겠는데, 이 세상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불못으로 끌려가는 그의 모습이 영 안타까워서 그만 여러분은 얼굴을 감싸고 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공 잘 던진다고 칭찬했던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올 것입니다. 공 잘 친다고 상 받고 좋아하던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올 것입니다. 달리기를 잘한다고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이 거기에 끌려올 것이고, 여러분에 눈에 익은 가수나, 탈랜트, 배우들도 거기에 끌려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동네의 슈퍼 아주머니가 끌려나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녀를 알아보고 고개를 흔들며 울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참담한 판결의 현장에서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은 기쁨을 채 말하기도 전에 멸망으로 가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실지로 여러분을 괴롭게 했던 많은 사람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지는 그 때, 여러분은 때때로 그 사람이 그렇게 미웠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고 울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웃을 수 없습니다. 고소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울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서 모든 죄인들이 심판받는 그 때, 여러분은 눈물로 그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왕국은 여러분의 것이 되었으나 그 마지막 심판에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간절하게 저 사람에게 말해줄 걸"
"미루지 말고 그 때 전해주어야 했었는데...."
"두려워하지 말고 똑똑히 얘기해주었어야 했는데...."
여러분은 가슴 아픈 순간을 맞이하며 어쩔 줄 몰라할 것입니다.
6.다윗의 눈물
우리들은 성경에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 아버지를 대적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삼하14:25). 그가 헤브론에서 반역을 꾀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다윗의 궁을 점령하였습니다. 다윗은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이스라엘을 소집해서 다윗을 죽이고자 나아왔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군대를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의 손에 세 때로 나누어 전장에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보낼 때, 꼭 당부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청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하라"(삼하18:5).
그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죽이지 말고 살려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요압과 그 부하들이 청년 압살롬을 죽이므로서 그 전쟁에 임했던 모든 이스라엘은 자기의 곳으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전령이 다윗에게 왔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주 왕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주셨나이다."(삼하18:28) 라고 보고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물었습니다.
'청년 압살롬이 무사하냐?"(삼하18:29).
전령이 대답했습니다.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큰 소동이 있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삼하18:29).
다시 두 번째 전령이 왔습니다.
"주께서 이 날, 왕을 대적하여 일어난 자들에게 왕의 원수를 갚으셨나이다"(삼하18:31).
그 때 다시 다윗의 물음이 이것이었습니다.
'청년 압살롬은 무사하냐?"(삼하18:32).
다윗의 최고 관심은 무엇입니까?
압살롬이 죽었느냐 살았느냐였다는 것입니다. 제발 그가 살아있기를 바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떻게 했습니까?
"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하며 슬피 울고 애곡하였습니다. 왕이 자기 아들로 인하여 근심한다 함을 들은 백성들에게 그 날의 승리가 애곡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왕국을 도로 찾았지만 아들이 죽은 슬픔으로 애곡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우리들은 영원한 왕국을 얻겠지만 흰 왕좌의 심판이 있는 그 때, 우리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슬픔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오, 내 어머니, 내 어머니" "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오, 내 친구야, 내 친구야...."
7.예수님의 눈물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던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보시며 우셨습니다. 그것은 암탉이 그 새끼를 모으려함 같이 모으려 했던 그 많은 일들을 뿌리치고 제멋대로 가기를 좋아한 도시의 멸망이 눈에 그려졌기 때문입니다(누19:41-44). 예수님께서 그 사랑하는 도시를 보고 우셨듯이 우리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울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새하늘과 새땅이 주어졌을 때, 주님은 우리들이 흘린 눈물을 씻어주실 겁니다.
8.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먼저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 흰 왕좌의 심판 때, 죄인으로 불려나가지 않도록 은혜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그분이 약 2000년 전에 흘리신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의 나의 모든 죄악, 불법, 가증함, 더러움 등을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죽으시고 장사지내셨다가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신 것은 나로 하여금 마지막 때, 거기에서 심판 당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왕좌에 앉아 심판하는 자로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주님,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주시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두 번째로, 그 때,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당하게 될 사망의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고 울부짖고, 아파하지 않으려 한다면, 기회를 자꾸만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효도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모님에게 순종했다고 하더라도 믿는 성도인 자식이 그 심판의 때에 죽어가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면 그것보다도 괴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친구에게 따뜻하고 그들을 사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 그 소중한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면, 그것도 살아있을 때, 한번도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이 없이 그가 죽어가는 것을 본다면 과연 여러분은 그 친구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이며 은혜 받을 때입니다. 우리들의 소중한 관심이 그 심판의 자리에서 불못으로 떨어질 사랑하는 사람을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을 기회는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뿐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어떤 사람에게는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으며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 말씀드립니다.
혹시 이중에 그 마지막 심판 때, 죄인으로 끌려나가 영원한 불못의 심판을 받을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에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죄인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은 죄인을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한 구세주요, 인간에게 복된 소망을 주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십시오.
이 중에 어떤 분은 주님과 함께 왕좌에 앉아 심판하는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치루신 갈보리의 심판으로 그 날 심판받지 않기 때문에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 구원받지 못한 우리들의 아버지가 거기에 끌려나오고, 예수님을 거절한 우리들의 어머니가 불못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될 때, 그리고 사랑하는 형이나 오빠, 동생들이 주님을 외면했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으로 내밀리는 것을 볼 때, 우리들은 많이 울게 될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전도하지 않는 자는 많이 울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게 하기 위해 많은 관심을 가졌어도 그 혼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많이 울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순간인데도 나중에 하자고 말한 사람은 그 나중에 울게 될 것입니다. 전도를 어렵게 생각하고 전도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전도를 싫어하는 사람, 또는 전도는 목사님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도는 말주변이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도는 시간이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 전도는 왠지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은 그날에 많이 울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해야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