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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은 단순히 맞냐 틀리냐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예언은 왜 생겨나는가, 예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여전히 사회적 영향력을 엄청나게 행사하고 있는 예언의 기능은 어떤 것인가 등의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해답을 추구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언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에는 ‘희망찬 미래에의 실현의지’를 고무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령 예언이 현실과 동떨어진 미래에의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갈등과 심리적 불안감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으로서 ‘일시적 위압감’은 됩니다. 그러나 예언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경우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 표출’을 유발시키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예언은 주어진 현실에 대한 재평가의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현실 개조를 위한 추진력’을 보강시켜주는 역할을 일정하게 한다고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입니다. 주로 한양 이씨의 멸망과 정씨가 계룡에서 흥기하리라는 예언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유래와 관련 계룡땅이 조선조 국초부터 국도의 후보지로 되어있고 또한 왕도의 기(氣)가서려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으므로 선조왕 이후 당쟁으로 조정에 뜻을 잃고 나라에 원을 품은 무리가, 인심을 동요교란시켜 혁명의 기운을 조성시키려는 목적에서 오랜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던 비기를 적용하여<정감록>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 같다.고 보고 있으며 저자와 관련해서는 개인의 사상체계를 보여주는 저서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수많은 민중들이 공유하고 함께 만들어낸 민중사상을 집약한 책입니다.
예언은 장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지시하는 것이므로, 이미 출현한 사실을 기술하는 것과 같이 명확하게 표현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때와 장소, 사람과 관계에 대하여 어느정도 불명료함을 가미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특히 예언을 지어낼 당시 당국의 기휘에 저촉되어 권력자에게 불괘감을 품게하는 경우가 있고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탄압을 받게 되고 그럴수록 더 깊이 민중의 가슴속으로 숨어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재 생산되고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방식을 살펴보면 보통사람이 얼핏 보아서는 용이하게 해석할 수 없는 듯한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통례입니다. 즉 그 표현은 일반적으로 다른 문장처럼 솔직한 면이 적고, 각종 선회적, 은어와 우회적인 문장을 다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해석에 있어서는 , 이러한 표현에 사용된 선회적인 은어와 우회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정감록』 역시 문장이 난해한데다 은어와 파자가 복재해 있고, 오자 및 탈자가 있다고 많은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예언서에는 고려이후 비기에 통용하는 지리풍수적 술어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명확하고 평이하게 해설한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太神歲壬申乙巳運 五百而七四始末(태신세임신을사운 오백이칠사시말=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 태조 등극하고, 을사년에 을사조약으로 망하기 직전까지 대략 500년의 운이며, 74년은 7X4=28대왕으로 조선이 멸망한다는 뜻으로 해석)
七斗歌(칠두가=칠두는 북두칠성이요 생명과 영혼을 맡은 하느님이시니 이것을 永生하는 농사를 짓는것에 비유한것)
어양지말(魚羊之末=魚와 羊을 합치면 선(鮮)이 되는데 이는 이씨 조선말을 뜻한다.
다만 우리가 나름 이책을 해석한다면 조선시대 민중들이 가졌던 세계관과 역사관을 고스란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책에서 진인은 기존 질서에 대항해 싸울 영웅이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민중적 메시아(구원자)’로 등장합니다. 진인은 실제로 장수를 거느리고 기존의 집권세력을 대신해 정권을 장악하여 민중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 잘먹고 잘 사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줄 존재로 기대하는 민중들이 믿고 의지했던 예언서이자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정감록은 한 권의 책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비결서의 집성이며 이본이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감결(鑑訣)을 비롯하여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역대왕도본궁수」「삼한산림기」「무학비결」「오백론사」「도선비결」「남사고비결」「토정가장결」「서계이선생가장결」「두사총비결」「옥룡자기」「삼도봉시」등의 짧은 비결서 수십 종을 총칭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정감록』은 단일한 체계와 일관된 형식을 갖춘 책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단편적인 비결서가 합쳐진 책입니다.『정감록』의 이본은 모두 50여 종이나 되며, 내용은 같지만 이름만 다른 것까지 합치면 무려 73종이나 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처음 등장한 것은 영조 15년(1739) 5월 평안도 삼등현에서 발생한 국경을 넘는 죄인에 대한 기록과 관련한 『비변사등록』에 『정감록』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후 정조 9년(1785) 2월 경상도 하동(河東)에서 일어난 반란 음모사건인 ‘이율과 양형’사건에서는 『정감록비기』가 조정의 주목을 받았으며 정치권에서 밀려난 홍복영과 이율은 중인 신분인 양형과 천민 신분인 문양해를 매개로 지리산에 은거하고 있는 산인(山人)집단과 연계하면서 거사를 추진하기도 합니다.
『정감록』은 단순히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을 알아보는 차원의 예언서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과 국가의 운수를 예언하는 비결서라고 보는 것 도 『정감록』을 연구하는 학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정감록』에는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니면”이란 표현과 함께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죽이 흰색으로 변한다. 거친 개펄에 조수가 일어 배가 다니며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일고 붉은 기운이 3일간 감싼다”귀절을 놓고 옛 선지자들은 위의 예언이 이뤄진 다음에 인류사의 대변혁이 오리라 했으며, 이 엄청난 사건을 후천개벽이라 일렀고 그때에는 만물중생이 참으로 온전히 해방된 삶을 누리리라 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계룡산이 그 개벽시대에 나라의 중심이 된다고 전한 이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종교단체를 꼽는다면 보천교라고 종교단체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최근에도 있었습니다. ‘계룡산 바위들은 20여년 전 까지만 해도 검은 색이었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변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흰빛을 많이 띤다. 산성비 때문인지 풍화작용에 의해선지 그 이유는 알 수없으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옛 선지자들의 혜안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지금처럼 국가의 정체성이 기초부터 흔들렸던 암울했던 시대상황에서 절망과 좌절을 딛도 일어나 새로운 앞날을 제시하고 희망을 노래하고자 애썻던 선각자들의 예지가 담긴 ‘묵시론적 복음서’로 이해해도 좋을 듯 합니다.
이런 정감록과 관련 일제시대 역사학자 이능화 선생(1869-1943), 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박사(1896-1989) 양인은 엉터리 예언서라고 단정했습니다. 아울러 민족 주체 사상을 연구했던 최남선 선생(1890-1957)은 그의 저서 「조선상식문답」 (1947년 간)에서 역시‘허무맹랑한 예언서’로 결론지었습니다. 혹자는 이능화, 이병도, 최남선 등 3인의 전력과 관련 일제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으로 폄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언서를 연구하면서 제일 먼저 따져봐야 하는 것으로 저작 연대입니다. 그것은 특정 사건을 전후하여 새롭게 첨가시킬 수 있는 개연성을 배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감록의 경우 많은 분들이 ‘송악은 왕씨의 오백 년 도읍지, 그 후 한양은 이씨의 도읍할 땅, 그 다음 계룡산은 정씨의 800년 도읍지’라는 귀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할 것을 맞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에 하나 이 책이 이태조가 위화도 회군, 그리고 조선을 창건한 이후 쓰여졌다면....고려왕조의 몰락, 그리고 조선의 건국을 맞추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작연대와 관련 조선조의 성립 이후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저작연대와 관련
①조선조 건국이후 역성혁명으로 이반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세력이 지었다는 설,
②정씨 왕조가 등장하는 시점과 관련, 선조 때 왕조 교체를 꿈꾸던 정여립(1546-1589)지지 세력이 지어냈다는 설,
③난리때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10승지(보은 속리산, 안동의 화산, 남원의 운봉, 전북 부안의 호안, 무주의 무풍, 강원도 영월, 경북 예천, 충남 계룡산, 합천의 가야산, 경북 풍기의 차암 금계촌)가 나와 있다는 것을 들어, 임진·병자 양란을 경험하고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양란 이후 전쟁위기설에 따라 민중은 자신들의 살길을 스스로 찾아야하는 급박한 상황에 몸을 의지할 곳을 찾았습니다. 그 실례로 십승지 피난 시기와 관련 “장씨가 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것이 삼복의 더위의 때이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가리라,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게 되고, 중간에 들어오는 자는 죽을 것이다”며 이곳은 “곡식 종자를 삼풍에서 구하고 사람 종자를 태백,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이 열 군데는 병화가 들어오지 못하고 흉년이 들지 않는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0승지 모두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정감록의 등장시기
세조와 성종때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참서 목록 중에서 정감록이란 제목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 “백두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금강산으로 옮겨 안동의 태백산(太白山)과 풍기(豊基)의 소백산에 이르러 산천의 기(氣)가 모여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정씨가 8백년 동안 도읍할 땅이고, 뒷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조씨(趙氏)의 1천년 도읍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 氏)의 6백년이 되리라. 그러다가 송악으로 되돌아와 왕씨가 부흥할 땅이 되겠는데,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아 고찰 할 수 없다”며 왕조를 통한 정권교체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국민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지도자를 뽑는 직접민주주의가 수립되면서 왕조을 통한 정권교체는 상상 할 수 없는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정감록의 맹점
아울러 정감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①조선이 망할 무렵에 대한 예언은 조금이라도 맞아야 할 것인데 망할 무렵에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맞지 않고,
②해방 그리고 동족상잔의 최대 비극 6·25 전쟁, 10·26 사태,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부자와 관련 언급이 없습니다. 6.25전쟁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큰사건, 우리민족사에 가장 지루하고 길었던 7년의 임진왜란과 관련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작성연대
이런 점에서 정감록이 임진왜란 이전에 쓰였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정여립의 난’과 관련성이 가장 높다는 생각은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살펴보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엉터리 예언서임을 알수 있습니다.
조선이 망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책이 건재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감록이 신비한 예언서로 인식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새로 종교를 창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기 신비화, 자신은(교주는) 오래전부터 예정된 메시아라는 개인 우상화의 도구로 인식될때 책은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한 예언서라는 허명에 편승 무분별하게 번역하는 역학가, 종교 지도자(정모 스님의 경우 『소설 정감록』이란 책을 내놓았습니다.) 번역가 그리고 출판업자들 때문에 지금도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고 윤색되면서 계속 출판될 것입니다.
심의 말이"백두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금강산으로 옮겨 안동의 태백산(太白山)과 풍기(豊基)의 소백산에 이르러 산천의 기(氣)가 모여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정씨가 8백년 동안 도읍할 땅이고, 뒷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조씨(趙氏)의 1천년 도읍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范氏)의 6백년이 되리라. 그러다가 송악으로 되돌아와서 왕씨가 부흥할 땅이 되겠는데,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아 고찰 할 수 없다. 이글은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 관련 글이다.
이런 민중들의 기대심을 이용한 종교 사기꾼들은 계룡산 주변의 변화 "돌이 희어지고 모래펄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리라" 계룡대가 건설되면서 쌓인 흙먼지로 주위의 나무를 비롯 사물들이 하얗게 된 인공적인 현상을 보며 가까운 날 좋은 세상이 온다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더 깊은 고통속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계룡대 건설과 함께 신도안 많은 순수한 종교단체들도 매도당하게 된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국가체계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분히 왕조의 연속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卞)씨 재상과 배씨 장수가 개국공신의 으뜸이 되고, 방성(方姓)과 우가(牛哥)가 그들의 수족처럼 되리라." 왕조를 통한 정권교체를 예언한 정감록은 그 자체만으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정씨성을 가진 정치인에 대한 기대는 막연함을 넘어 큰 여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실례로 지난 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정주영의 등장은 그 가능성을 열어 놓기도 했다. 그의 실패(대권도전)는 그후 아들대(정몽준)까지 이어지면서 우리사회는 정감록의 그림자를 쉽게 벗어 놓을 수 없는 듯 하다. 정주영씨 뿐아니라 .승려 정모씨 역시 출마를 준비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1999년 1월 10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사기)로 검찰에 긴급 체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정동영씨와 관련 “그는 모악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며 정도령이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여론은 아직 싸늘하다.
<정감록>의 또 다른 오류는 이땅의 분단은 물론 통일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남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일제의 국권침탈, 해방 그리고 동족상잔의 최대 비극 6.25전쟁, 10.26사태,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김일성 부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치권에서 이용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68년 제 3공화국의 집권층은 영구집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삼선개헌을 합리화하는 공작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전국의 역술인들을 동원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정도령’이고, 민중대망의 진인(眞人)이며, 미륵불의 현신(現身)이자 도래한 메시아라고 선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1987년 12월에 치러진 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후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때 노태우 후보 측에서는 “두미재전(頭尾在田)”이라는 비결을 제시하고, 이를 “이름의 앞과 뒤에 밭 전(田)이 들어간 사람이 미래의 지도자가 된다”고 풀이한 전단을 유포하여 홍보에 이용했다. 또한 이에 맞선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측은 『정감록』에 나온다는 “남해의 섬에서 진인(眞人)이 출현한다”는 내용을 들어 각각 자신들이 출생지가 남해의 거제도와 하의도라고 강조하면서 “대권을 잡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선전했다. 이 선거에서 양김은 노태우씨에게 참패했다.
1992년 12월에 치른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김영삼, 김대중,정주영, 이종찬 후보 사이에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보다 10개월 정도 앞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이 바로 “정주영 국민당 대표”라는 주장이 제기되었 다. 당시 박철언 국회의원은 이종찬 후보를 돕기 위해 ‘만경대 관악산인’ 명의로 ‘천의와 민심’이라는 유인물을 유권자들에게 우편으로 배달한 일이 있다. 이 문서에는 『정감록』을 인용하여 “『정감록』에 김씨 대통령은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급기야 당시 국민당의 김복동 최고위원은 “『정감록』을 보면‘정씨 성을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어 경제를 살리고 남북을 통일시킨다’라고 적혀있다”는 주장을 했을 정도다. 또 국민당에서는 “양김 시대는 끝이 나고 바야흐로 정도령 시대가 왔다”는 이른바 천운순환설(天運循環說)을 주장했으며, 국민당의 고문이던 김달수 씨는 『정감록』에 쓰여져 있기를‘임신년 동절(冬節)에 동쪽에서 정도령이 나타나 국태민안(國泰民安)하다’고 되어 있다“며 정주영 후보가 바로 정도령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가 나서서 경쟁을 벌였다. 당시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는 대선후보 가운데 자기만이 충청도 태생이므로 『정감록』에 나오는 정도령이 바로 자신을 지칭한다고 홍보하였다. 정씨가 아닌데도 계룡산이 있는 충청도라는 점만으로도 정도령을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잊혀질 만하면 『정감록』은 새로운 옷을 입고 다시 대중 앞으로 나타난다. 나라를 이끌 대통령이라는 최고지도자를 뽑을 시기만 되면 어떤 형태로든 『정감록』은 어김없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면 으레 조상의 묘를 이전해서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거나 그 후보 탄생지의 풍수적 지형이 대통령을 나오게 했다는 주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감록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특정 정씨성을 가진 문중의 예언서가 아닌 민중의 기대가 담긴 염원서라고 생각합니다. 正(바른)정치를 하는 그런 성군을 바라는 소망이 정도령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이 되는 엄청난 사건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서민들의 기대심리와 맞물려 지고 있는것이다. 이런 바램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격인 설명이라도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믿음직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것이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보다 어렵다”는 구절과 유사하다.
또 이곳은 "곡식 종자를 삼풍(三風.豊)에서 구하고 사람 종자를 태백,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이 열 군데는 병화(兵火)가 들어오지 못하고 흉년" 들지 낳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십승지 입주자격은 "후세 사람들이 만일 알아서 깨달으면, 먼저 십승지에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 하니 연(淵)이 "어찌하여 그런가"하자. 정이 "부자는 재물이 많으므로 섶나무를 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며, 가난한 사람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빈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차츰 알아 깨달은 사람은 그 시기를 보아 실행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역감정 부추긴 <정감록>은 민족의 수치
<정감록>이 우리사회에 끼친 해악으로 "영남 70개의 고을은 땅이 기름지고 산이 빼어나서 인재가 풍부하고, 호남은 등지고 달리는 산이 많으니 역적과 간사한 자의 소굴이라, 정권을 잡은 사람은 그 사람들을 끌어다 쓰기를 좋아하지 말라" 는 교훈(?)을 담고있다. 고려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 의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산지의 형세가 모두 거슬리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곳의 인심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지역차별을 담은 우리민족 최대의 부끄러운 책으로 기록 될것이다. 최근 왕건의 유언은 후대 첨사되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일제의 보호아래 기생하던 조선은 종문을 고하며 대한민국은 탄생했다. 다시는 어떠한 왕조의 등장도 거부하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다. 왕조로의 회귀는 사실상 불가능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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