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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화의 욕구와 전략화의 필요성
- 『수필시대』 9/10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수필은 '文樂'이 아니라, '文學'이 되어야 한다. 수필을 살리는 길은 수필을 고급문학화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필은 독자의 기호에 맞게 끌려 다닐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독자를 이끌 수 있도록 본격수필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수필이 '누구나‘ 쓸 수 있는 신변수필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쓰여지는 문학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 수필가들로 하여금 수필창작이 매우 체계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성과와 연결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수필가는 수필을 창작할 때 주제의식을 작품 속에 문학적으로 내면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고, 또한 수필가는 목표를 달성해 달라는 수필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려야 할 것이다. 고급수필의 창작에 필요한 지적 통찰력도 매우 체계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성과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데서 수필은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본격수필의 창작 과정 또한 이러한 내적 요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전략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고 하겠다.
II.
류순희의 <생 그리고 사>는 '삶과 죽음'이란 인간사의 본질적 테마를 의미화한 수필이다. 이 수필은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내세우고 있는 데서 존재 가치를 담고 있는 수필이다. 주제 지향성의 측면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인류 공통의 문제이니까 보편성의 획득이 가장 용이하다 할 것이다. 수필은 개인적 경험의 특수성이 문학의 보편성으로 승화되도록 체험을 변형하고 보수해서 탄생되는 것이다. 과연 이 작품은 그런 과정을 거쳐 전략화된 것일까? 주제와 제재와의 상관성에서 수필의 성공이 결정된다고 볼 때, 이 수필은 대상이 되는 생사의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제재에서 적절한 유사성을 찾아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유사성을 갖는 제재가 수필의 제목으로 나타날 때, 수필 쓰기는 전략화에 성공하는 것이다. 서술성의 요체는 제목으로 함축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문학성은 작가가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장례식장을 방문하여 문상을 하고 난 후, 문득 폭설을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폭설’은 생사의 의미로 상관화된 제재로서, 작가가 논리적인 사고의 틀 속에서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얻은 최적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폭설’이란 좋은 제재를 제목으로 정하지 않았을까. 아쉽다. 죽음과 삶을 나타내는 생사를 ‘생 그리고 사’로 늘려 쓴 것도, 한자를 병기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차라리 ‘폭설’이라고 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
아직 생을 거두기엔 이른 영혼. 그 때문에 장례식장은 어제 내린 비만큼이나 음울하다. 한 곁에 앉은 여린 상주의 파리한 얼굴이 보인다. 가슴이 먹먹해 온다. 제 짝을 찾아주지도 않고 떠난 그는 뭐가 그리 바빴을까. 겨우 정신을 챙겨 어색한 조문을 하고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갖은 음식이 차려진 곳에 모여 앉은 지인들이 웅성거리며 음식들을 씹고 있다. 문득, ‘폭설’이 생각난다.
곡(哭)을 하다 배고프면 국수를 먹었다.
…… 중략.
피가 비치는 돼지고기에 독한 소주를 먹으며
내년 농사 걱정을 했다.
-이상국
폭설……. 그래, 이것은 분명 폭설이다. 하루사이에 삶의 발목을 붙들어 고정시키는 일. 나머지 사람들의 발까지 묶어 그 폭설이 질퍽대며 맨 땅을 드러날 때까지 기력을 잃게 만드는 일. 그 경계선에 가두는 일. 온통 하얗게 덮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는 일. 그 폭설이 서서히 녹아 질척이는 땅이 단단해 질 때까지 살아 숨 쉬는 가슴에 하나의 돌덩이를 얹어 놓는 일…….
폭설 속에 갇혀 앉은 이들은 고인을 떠올리며 배우가 된다. 울다가 웃다가 한탄한다. 그러다가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를 집는다. 나도 상주의 권유로 젓가락을 든다. 편육 한 점을 집어 들어 새우젓을 듬뿍 찍는다. 그러나 별 생각이 없다. 자꾸만 먹으라고 채근하는 상주를 제 자리로 돌려보냈다.
- 류순희의 <생 그리고 사> -
전통적인 장르 분류법에 따르면, 수필은 교술 갈래에 속한다. 평자는 수필을 교술 장르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주제적 양식'으로 분류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이미 헤르나디는 문학의 양식을 4분하면서 수필과 평론을 주제적 양식이라고 하였다. 교술이라는 말 속에는 주장한다는 말이 있어서, 가치 개념으로 볼 때, 교술은 수필의 내포를 다지기보다는 수필 외연의 확대를 가져 올 수 있다.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 중심의 문학이기 때문에 '교술'보다도 주제적 양식이라는 갈래 분류가 더 설득력이 있고 어울린다고 하겠다. 내용은 직접화하되, 주제는 간접화하는 것이 본격수필의 구성 전략이다. 결국 수필의 문학성은 제재와 주제의 상관화에 이르러 서술성으로 나타남으로써 완성된다. 인용 예문에서 볼 수 있듯이 작가는 폭설에 갇힌 지상의 모습에서 장례식 풍경을 보는 참식한 인식을 보인다. 폭설 하에서 무기력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고인을 앞에 둔 상주의 심정과 무엇이 다를까. 삶의 터전을 생과 사의 질서가 사라진 공간으로 인식하는 작가의 기량은 형상의 측면에서 매우 빛난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본질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완성된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감을 가볍게 떨칠 수 있는 삶의 모양은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생과 사의 경계를 만들어야 할 시간임을 인식함으로써 작가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생과 사 사이에 아무런 편차가 없다면 삶의 완성을 위한 노력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찰이란 생사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는 사이고, 생은 생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생사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작가는 완성된 시간에의 추구로 나아가고자 한다. 상실 극복의 내적 욕구가 제대로 작용한 것이다. ‘폭설’을 제재로 생사의 공간을 형상화한 것이 이 작품의 문학성을 드높였지만, 제목 짓기의 실패로 그 맛이 약화됨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상혜의 <겨울바다>란 작품은 ‘떠남’과 ‘내면 관찰’을 완성된 삶의 향유를 위한 수단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수필은 ‘바다에 오고 싶었다’는 서두로 시작한다. 작품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들은 ‘왜 작가는 바다에 오고 싶어 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건 뻔한 일이다. 작가는 독자의 궁금증을 고려하여 그 이유를 도입부에 함축적 표현으로 상상화하고, 주제의식의 구체화를 도모하고 있어 독자의 감각을 신선하게 일깨우는 데 성공한다. 바위의 한 난간을 우주의 한 모서리로 인식하는 모습과, 바람을 맞으며 존재의 족쇄들을 풀어내는 모습이 도입부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바다에 서서 삶의 권태를 전지해내고, 가슴에 맺힌 울혈도 풀어놓으면서 작가가 망망한 저 수평선 너머에서 또 다른 존재를 발견하는데, 이 지점에서 수필의 문학성은 빛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서두에서 지식인이면 반드시 가져야 할 생태적 세계관을 노정하고 있다. ‘바다를 나는 가마우지는 나의 떨잠을 슬픔으로 적신다’라는 진술을 통해 작가는 인간 중심주의를 배격하는 물아일체의 동화를 작품 속에서 수용한다. 발단부가 주제의식을 상상화하여 의미화했다면, 전개는 종족 제재의 구체화 단락으로써 예시를 통해 바다물결과 칼바람이 주는 의미를 새롭게 인식해 나가는 과정으로 채웠다. ‘칼바람은 귀뿌리보다 마음을 더 핥는다’는 표현이 싱싱하고 선연한 이미지로 다가선다. 작가는 겨울 바다를 '철학의 아키타입'으로 인식하는데, 질곡의 세월을 해풍으로 날려주고, 삶의 무게도 바다로 침몰시키기 때문이다. 옥에 티라면, 작가가 마지막 단락에서 겨울바다를 보며 ‘근원적 사색을, 철학적 인생을 닮고 배우자!’고 주창하는 부분이다. 이 작가도 결국 겨울 바다를 보며,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나 수필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독자에게 강요하거나 권유해서는 문학적 효과를 거둘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글이다. 마지막 문장을 좀더 함축적으로 처리해서 서술성을 최대한 살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겨울 바다는 철학의 아키타입(archetype, 원형)이 아닐까. 인간들은 깊은 바다의 침잠, 그 속의 사색을 철학으로 낚는 것 같다. 우리는 이곳에서 근원적 철학을 사색하고 인생철학도 배운다. 펼쳐진 철학의 지침서가가 바로 영원한 침묵의 바다다. 잠언처럼 다독이며 마음을 적시는 바닷물 소리가 항상 우리를 부른다. 질곡의 세월은 해풍에 다 날리고 허리 휘는 삶의 무게랑은 바다로 침몰시키려는가. 慈心의 충만한 해일이 넘치는 바다! 언제나 우리를 품어 줄 것이고 또 출렁이는 품을 벌리고 한결같이 우리를 기다린다. 멀리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그림 같은 배 한 척! 소박한 꿈이 담긴 것 같아 아름답고 따뜻하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의 일호이지만 우주를 항해하는 주인이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지만 전체이다. 바로 우리가 우주가 아닐까. 그러니 가벼움에 날아갈 것이 아니라, 우주를 향유하는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만 같다. 마음이 자못 소쇄하고 흔쾌해진다. 이래서 이 아포리즘(aphorism)의 겨울바다가 그렇게 그리웠나 보다. 오늘도 나는 나래를 펴며 광활한 우주를 향해 외쳐본다.
“근원적 사색을, 철학적 인생을 닮고 배우자! 이 겨울 바다에서…… ”
- 박상혜의 <겨울바다>에서 -
인용 예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우리 사회 인간 삶의 한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적 가치관의 그림자가 구석구석 남아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여성이 배우자의 불평을 감수하면서 여행을 떠나는 것에 당위성을 찾기 힘든 건 사실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바다를 찾을 수 있는데, 왜 작가는 그동안 그렇게 바다를 갈망했을까라는 의문제시를 통해 독자의 입장에서 아직도 억압적 여성 현실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안정만을 추구해온 자신의 생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는 작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철학적 여과를 통해 반전과 비상을 꿈꾸는 작가는 침묵의 겨울 바다를 자기 주도적 삶의 심리적 공간으로 잘 그려내고 있다. 삶에 대한 처절한 우주적 인식이 바다로 떠나는 여행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배가한다. 수필은 자신의 생각과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을 언어를 통해 솔직하게 재현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구체적으로 규명할 때, 힘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간적 삶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개념화를 통해 삶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데 치중함으로써 무엇이 진실로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해 아쉽다. 그러나 경험의 구체화가 미진해 손맛이나 향기는 부족하지만 내용적으로 깊은 사색과 철학이 응결되어 손맛을 내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다. 겨울 바다를 통해 우주를 향유하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진술로 볼 때, 그녀는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를 아는 작가다. 작가는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현실 속에서 안주하려하는 자세를 구속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 기분대로 살 수 없는 현실은 서글픈 것이다. 겨울 바다를 일상에 갇힌 인간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또 하나의 반려로 인식하는 자세가 새롭고 은비롭다.
신미경의 <사라진 액자>는 철근콘크리트를 걷어내듯 인간의 양심을 벗겨내는 작가의 내면의식이 내비치는 글이다. 서구에서는 주로 자연을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어디까지나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한마디로 질서의 융합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자인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자연의 진리를 ‘사라진 액자’에 견주어 잘 살려내고 있다. 여기서 ‘액자’는 자연 그대로의 공간을 의미한다. 작가는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수필을 통해 잘 서술하여 수필에 문학성을 더하였다. 작가가 ‘지금, 현재, 여기’를 지향하면서 ‘있어야 할 것’들에 관심을 놓고 ‘환경 보전’을 주제로 설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란츠 알트가 생태학과 경제학간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단순한 이론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접목시키고 있는 차원에서 이제 수필가들이 환경 문제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처사다. 작가가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은 환경 또는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수필가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우리 동네뿐이랴. 지구촌 곳곳에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문명의 세계는 야금야금 산림을 훼손하고 있다. 지구의 허파, 산소 공장이라는 아마존 밀림조차 일 년에 여의도 부지의 배만큼 숲이 없어진다고 한다. 내 아이에게 걸어서 몇 걸음 안 되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편리함을 주기보다는, 창으로 사시사철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숲을 보여주고 싶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숲을 바로 내 눈앞에서도 봐야만 하는 그 현실에 비애감이 몰려온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텔레비전을 본다. 이젠 현란하게 움직이는 액자를 보며 바보처럼 웃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땅을 찾으러 이동하는 철새처럼, 어딘가에 숲이 보일 것 같은 내 안의 작은 창 그 액자는 차츰 추억 속으로만 사라지고 있다.
-신미경의 <사라진 액자> 중에서-
자연 친화를 통해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은 작가의 시야가 밖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삭막한 콘크리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 속에는 떠나고자하는 심리와 함께 자연에 대한 동경이 동시에 싹트게 마련인 것이다. 더욱이 생활이 윤택해 지면서 가족의 여가 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면서 많은 도시인에게 이웃과 같이 자연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 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창이 있는 생활 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연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남편과 자식이 빠져 나간 사이, 시공의 공백을 메워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주부 작가들이 창을 통해서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거나 소통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개발과 보전이라는 갈등은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주부작가들은 수필 속에 작가의식을 심으려고 자연의 파괴문제를 터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정에 취해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여성수필에 대한 비판을 극복할 수 있다.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위해 ‘자연’을 ‘액자’로 처리한 것도 매우 적절했고, 실제로 작품성을 드높이는 데 이것이 기여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글의 분위기가 단조롭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아쉽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나 반전이나 역행성의 묘미를 불러올 전환 구조나 파격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안경덕의 <걸레의 미학>은 앞의 글과는 확실히 다르게 인식과 형상미학이 빛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출발은 가게에 화재가 났을 때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면서 사용한 걸레를 삶으면서 이웃 사람들의 정을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걸레를 제재로 한 수필인데, 작가는 이 걸레를 삶으면서 ‘걸레’의 의미화를 통해 어머니의 향내와 모습을 문학적으로 잘 보여준다. 작가는 전개부에서 걸레의 여러 가지 장점을 설득력 있게 진술하는 데도 성공한다. 특히 어머니의 삶을 숙명적으로 걸레와 연결시켜 그 걸레를 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서 이 작품은 빛을 발한다고 하겠다. 이 수필의 미점은 문학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함축성도 있고, 참신성도 보이며, 탄력성과 형상성도 돋보인다는 점이다. 결말에 가서 '걸레 삶는 솥에서 어머니 냄새가 난다'라는 표현으로 주제를 살짝 감출 줄도 안다. 작가는 이런 주제를 의미화하기 전에, 일반적인 걸레의 속성을 지우는 작업을 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더러움’에서 ‘성스러움’으로 전이되도록 ‘걸레’의 역할과 가능을 미화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 수필의 주제문이기도 한 결말 문장 바로 앞에 주제정신을 담고 있는 예시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글에 설득력을 준 점도 좋았다. 걸레를 통해 사라진 시골의 인정을 복원하고, 전통적 한국의 정을 부각시키는 이 수필의 묘미는 아무래도 참신한 인식이라 하겠다. 다양한 생각을 시도하면서 참신한 인식으로 수필의 출발점을 확보하려는 치열성이 돋보인다.
언제부턴가 걸레를 함부로 취급 하지 않게 되었다. 칙칙하고 게저분한 하다기보다 듬직하고 고마운 것이라고 인식한다. 쓰고 난 다음은 바로 씻어서 햇볕이랑 바람이랑 어울러 한껏 놀게 해준다. 마지막에도 씻어 말려서 헌옷과 친구해서 떠나보낸다. 만날 들무새를 하느라 지쳤을 구박덩이 걸레를 위로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걸레는 물기에 젖어 있는 것도 지겨울 것이고 비틀어 짜놓는 것도 싫어 할 것이다. 이것은 내 핑계일지도 모르겠다. 걸레를 햇볕에 말리는 것은 꿉꿉한 내 마음을 꺼내 말리는 것이고, 반듯하게 개어 놓는 것은 어수선한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는 것일 게다. 걸레질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다. 고향집의 반지르르 윤이 났던 대청마루다. 마루에서 마주보고 맷돌질을 하셨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정한 모습이, 동생들과 함께 마루 끝에 앉아 도란도란 별을 헤던 그 밤이 전시장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지저분한 것은 다 차지하면서도 지청구가 없는,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걸레, 그 단어 속에 어머니라는 이름이 포개진다. 좋은 것은 자식에게 다준 우리들의 어머니와 걸레는 닮았다. 걸레 삶는 솥에서 어머니 냄새가 난다.
-안경덕의 <걸레의 미학> 중에서 -
‘걸레의 미학’은 맛있는 에세이다. 수필이 고급문학이라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문학성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미학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미학성의 본질인 난해성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는 작가의 예술적 안목이 수필 작품 속에 투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수필은 본격수필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걸레 앞에 서면 희생과 헌신으로 인고의 삶을 살아왔던 우리 어머니들의 영상을 떠오르게 하는 적절한 묘사가 문학성을 확보해준다. 걸레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면서 문장을 따라가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주는 가치는 하찮은 제재를 미적으로 승화시켜낸 데 있다. 작가의 미적 감식안이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하겠다. 더러운 걸레를 통해서 전통적 여인의 우수와 동양적 가치를 읽어내는 작가의 안목은 인식 그 자체다. 독자들이 발견해내지 못하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예리하게 밝혀 자신의 삶 속의 느낌과 인식을 정서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수필은 감동을 준다. 자식을 위한 맹목적 어머니의 사랑을 ‘걸레’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문단 전개도 순조로웠다. 결속성의 원리에 반하는 브레이크가 없어서 어느 작품보다 깔끔했다.
III.
이제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는 사람은 바보다. 수필이 비전문적이라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쓰여지고 있다는 현실을 하루 빨리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의미 없는 잡다한 일들을 주제화 전략 없이 끄적거려 놓거나, 즉흥적인 생각을 표현하지 않고 문자로 표출하여 기술하는 글이 수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수필은 내면성의 요건인 동일성의 추구, 상실감의 회복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않는다. 수필 구성의 특성이 유동에 있고, 유동성이란 무형식의 형식을 말하는 바, 그렇다고 문학적 전략화와 정서적 질서화가 무시되면 그것은 수필 이전에 문학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전략화'는 규범화된 유형이 아니고, 고정화된 사고도 아니다. 주제와 제재 중심의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으로써 창작 과정에서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작법인 것이다.
본론에서 다룬 류순희의 <생 그리고 사>, 박상혜의 <겨울 바다>, 신미경의 <사라진 액자>, 안경덕의 <걸레의 미학>은 참된 고뇌의 자기 노출이 있어 작은 감동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깊이 고뇌한 흔적과 전략화의 노력이 보였다. 장사현의 <관능의 늪, 그 생명력의 향방>을 읽으며, 핏줄처럼 돌아가는 네온 불빛에 끌려 성인텍에 들어가 보니 500여 명이나 되는 노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는 진술에 놀랐다. 이런 현상을 노인 문제로 인식해야 할지 노인복지로 봐야할지 모르겠다. 충격적인 정보였다. 부엌에서 밥을 지으며 할머니를 생각하는 정은영의 <부엌 밥솥 할머니>는 우리 전통의 정서를 자극하는 한국적 수필이다. 서사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수필의 묘사 또한 맛깔스러웠다. 이 두 편 외에도 <수필시대>에는 좋은 수필이 많았으나 지면 관계로 다루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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