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암살 장소서 만났다…美대사 부른 전두환 속셈
전두환 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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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금남로의 총소리
8회 5·18과 미국 책임론
5·18은 반미(反美)의 시작이었다. 5·18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후원자처럼 여겨졌다.
도청에서 마지막 항쟁을 이끌었던 윤상원 투쟁위원회 대변인은 계엄군의 재진입 직전인 26일 오후 4시 외신기자 회견에서 미국 기자들에게 요청했다.
주한 미국대사(글라이스틴)에게 연락해 계엄군의 재진입을 막는 중재를 해달라고. 이에 앞서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광주 시민들 사이에선 ‘미국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는 환호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5·18 이후 미국은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독재의 후원자로 바뀌었다. 미국은 광주의 비극을 초래한 신군부의 무력 동원을 공모하고 승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좌파 운동권에선 ‘반미’와 ‘민족해방’을 주장하는 세력이 주류를 형성했다.
글라이스틴 대사 ‘신군부는 미국을 무시했다’
글라이스틴 미국대사가 1980년대 초 최규하 대통령을 예방해 환담하고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5·17 이전까지 최규하 대통령을 공식 지도자로 예우했다. 신군부의 정권 장악에 반대했던 글라이스틴은 최규하를 예우함으로써 전두환를 인정하지 않는 메시지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5·17 이후엔 전두환 장군을 실권자로 인정했다. 중앙포토
5·18 당시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미국의 인권 대통령 카터가 임명했다. 정통외교관이자 전형적인 미국식 사고방식의 소유자로서 전두환 장군과 신군부의 행태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이었다.
그가 남긴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영어 제목은 ‘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다. 의역하자면 ‘미국은 한국과 깊숙이 얽혀 있는 관계지만, 한국 국내의 결정적인 사태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글라이스틴이 경험한 결정적인 사태인 5·18과 같은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