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마가복음 1:1-20
요절/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은 A.D. 65-70년 사이, 마가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 대박해로 인하여,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차례로 순교를 당하고,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억울하게 화재의 누명을 뒤집어쓴 채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로마 행정장관의 약식재판으로 수십 명씩 사형에 처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로마의 신자들을 격려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외적인 박해는 없으나, 극도의 상대주의와 혼합주의로 말미암아 복음신앙이 크게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공부를 통하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견고한 믿음을 주사 구원의 은총을 충만케 하시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섬기신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고 배우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첫째, 복음의 시작이라
여러분, 성경의 첫 장을 열면, 오고 가는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광명을 준 웅장한 선포가 나오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마가복음서를 열자마자 이와 비견되는 장엄한 선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시며, 복음이요,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시작"은 창세기 1:1절의 "태초"와 같습니다. "시작"에 정관사가 붙어, "The beginning", 곧 "그 시작"입니다. 우주역사의 시작(창조사역)에 동참하셨던 성자 예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임한 곳에 "진정한 시작"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작"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시작이 반이다"는 말도 있습니다. 일단 무슨 일이든지 시작만 하면 이미 반절은 이룬셈이라는 뜻이지요? 또한 시작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전체가 좌우됩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생활을, 놀고 연애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그렇게 4년을 흘러보낼 수 있고, 진리를 찾고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시작하면, 한 시대를 섬길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준비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에는 "시작"이 많습니다. 어머니의 태속에 잉태될 때, 우리의 생명이 시작되지요? 다음으로 탄생은 역사적인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일을 얼마나 중히 여깁니까? 대학에 입학하는 날, 대학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날 여러분들은 가슴이 설레였지요? 졸업하고 직장에 입사하는 것도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 윤성한, 장연주 목자들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가리켜 제 2의 인생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정월 초하루가 되면 지난해는 망년(忘年)을 하고 새롭게 시작해보고자 눈물을 머금으며 다짐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혈서를 쓰기도 합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돈들이고 시간들여서 동해안까지 가서 여관을 얻어 잠을 자고,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며칠도 못가서 작년이다 다름없이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시작은 진정한 시작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영접할 때,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죄사함이 있고,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삶이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학문을 많이 하여 박사가 되었다고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직장을 얻었다고, 결혼을 했다고, 돈을 모았다고, 인생이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적인 문호 마크 퉤인이 임종을 하면서, "내가 인생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하고 말했다고 하지요? 이는 시작도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영접할 때, 비로소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없다고, 쌓아놓은 돈이 없다고, 혹은 능력이 모자란다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시작을 했다는 그 자체로 우리는 인생을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젊은날 청년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의 진정한 시작을 하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요즈음 정누가, 정사라 목자님들이 "정누가 성형외과" 시작을 앞두고 매일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니다. 성형외과 개원은 큰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를 계기로 두 목자님들의 내면에 그리스도 복음을 충만하게 영접하게 된 것이 더 큰 시작입니다. 최영주 학사는 영어실력이 특출합니다. 마음이 높았던 그는 계속 취업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때 회개하고 "하나님 이번에 붙이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기도하였는데, 그날 현대에 붙었습니다. 회사생활과 내적 변화가 동시에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현실 문제들로 마음이 냉랭해지고 은혜가 메마를 때, "그 처음 시작의 감격의 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역동적인 삶을 살려면, 이 시작이 매일 매일 새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2001년 들어 학생들 가운데 일어난 새로운 시작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에게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마가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붙들어 새로운 시작들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광야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어떤 환경에서 시작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광야"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선구자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복음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와 말라기는 세례 요한이 이 땅에 오기 수 백년 전에, 그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을 따라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마태 3:2절에 보면,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파했습니다. 광야는 황량하고 메마른 곳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맹수들이 어슬렁거리는 곳입니다. 척박하고 고단한 곳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늦동이로 얻은 외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얼마든지 그 시대의 종교 지도지도자로서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광야에서 기거하였습니다. 그는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습니다. 이 약대털은 낮에는 의복이지만, 밤이 되어 허리띠를 풀고 덮으면 이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뚜기와 야생 벌꿀을 따먹으면서 생활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5절에 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때, 광야에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그는 자만에 빠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인지, 자신이 그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는 것도 감당치 못한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9-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광야에 있는 요단강으로 세례 요한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의 삶을 출발하는 첫 행보가 세례를 받으신 것인데, 이것이 "광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한낱 죄인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인류의 메시야로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고자 결단하신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께로 내려왔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성삼위 하나님께서 동시에 임재하사 인치신 장엄한 메시야의 대관식이었습니다.
12,13절에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에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고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황량한 광야에서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치루셨음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게 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사단의 세력 아래에서 온갖 죄에 빠지고 고통을 당하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오셨기 때문에, 반드시 사단과 싸워 이겨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파하신 때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가는 그 당시의 상황을 "요한이 잡힌 후"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행위를 책망했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의인 요한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그 시대가 영적으로 광야와 같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 복음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역사가 "광야와 같은 시대에" "광야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역사는 외적 환경이 좋은 곳에서 일어나기보다 광야와 같이 어려운 곳에서 시작됩니다.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아무 부족함이 없고 일락을 즐길 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나 보면, 환란이나 시련을 당하여 가장 어려울 때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 자신의 경우를 돌이켜보면, 가난과 지방대학생이라는 열등감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알 수 없어 술에 취하여 방황하던 때, 곧 황량한 광야와 같을 때에, 배사라 선교사님과의 요한복음 공부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푹 익은 고구마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광야에서 시작되는 복음의 역사를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사 43:19) 오늘날 캠퍼스 청년들이 겉보기에는 잘 사는 것 같으나,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광야와 같이 황량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복음이 역사할 기회입니다. 여러분, 시련을 만나 심령이 상한 분이 있습니까? 지금 복음이 역사할 때입니다. 원하던 일에 실패를 하고 마음이 삭막해진 분이 있습니까? 지금이야 말로 복음이 역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목자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양치기 생활을 통하여 준비되었습니다.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광야에서 40년동안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되었습니다. 신약의 인물들은 어떠합니까? 앞서 살펴본대로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메시야의 사역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동안 복음의 사도로 준비되었습니다. 그가 쇠고랑에 묶인 죄수의 몸으로 로마 감옥에서 자기를 지키는 간수들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한 것이 로마 정복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스테반의 순교이후 극심한 환란으로 인하여 흩어져야 했던 광야와 같은 때에, 복음의 불씨가 온 세상으로 번졌습니다. 한국 전쟁이후 광야와 같이 폐허화되었던 이 땅에 복음의 역사가 불길처럼 시작되었고, UBF 복음역사도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역사를 이루려면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 내에 문제가 없어야 하고, 캠퍼스에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 이런 합리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니, 계속하여 일어나는 문제들과 씨름하며 갈등하느라 복음역사를 힘있게 섬길 수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29년의 목자생활에서 병이 나서 2주간이나 누워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허리병은 처음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한 이틀 쉬면 회복이 되겠지 생각하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누운채로 기도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지나고 두 주째가 되어도 일어날 수 없자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기도를 하고, 정사라 목자님이 놓는 침을 맞고, 전아브라함 목자님이 놓는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일어날 수 없는 육신으로 인하여 절망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제 동역자와 장인 영감이, 주의 종이 누워만 있으니 눈치를 주었습니다. 저는 마가복음 1장 본문을 묵상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때 사단이 마가복음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깨닫고 사단에게 분노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저의 심령에 "광야에서"라는 한 마디를 섬광처럼 비춰주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렇다! 광야에서 새 역사는 시작되었다!"저는 목요일에는 저의 동역자의 도움을 받아 운동을 통하여 허리병을 이기고자 믿음으로 수영장엘 갔습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이구 허리야! 광야에서!" "아이구 허리야! 광야에서!"를 외치며 수영을 하였습니다. 금요일에도 수영에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심령에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셨고, 통증이 계속되는 가운데도 결혼 주례사와 마가복음 메시지를 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훈련의 때에, 우리의 마음이 냉랭해지고 광야처럼 황폐화 되기 쉽습니다. 혈과 육의 싸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 한양 공동체가 지난 90년대에 여러 시련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캠퍼스에서, 마치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복음역사는 광야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 딸린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저의 믿음이 딸린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복음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광야와 같은"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복음이 역사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광야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능력만을 의지하므로, 나의 개인적인 삶에서, 그리고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서, "광야에서 시작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조건과 형편에 밀려 썬데이 크리스쳔으로 머물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생명력이 넘치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15절을 봅시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완성의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고, 하나님의 통치가 눈 앞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지금 눈앞에 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강권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회개란 마음에 거짓 왕들을 몰아내고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마음 첫 자리에 모실 때, 내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실 때,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사망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영생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믿음의 용기가 임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깨트릴 수 없는 평화가 임합니다. 그 무엇도 얽어맬 수 없는 자유가 임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다스림 아래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문제는 통치권의 문제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마귀 사단의 꾀임에 넘어가 마음 중심에서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기 자신을 왕으로 모셨을 때, 그는 낙원을 잃었고 영생을 잃었습니다. 진정한 존재의미와 사명을 잃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거짓 왕이 중심을 차지했을 때, 그는 끝없이 많은 죄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국은 죽음과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께서 인간의 불행의 근본원인인 통치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네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크리스쳔들을 무차별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마가를 통하여, 우리 인간이 경배해야 할 유일한 왕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들어도, 우리가 섬길 왕은 오직 예수 그분 뿐입니다. 이 고백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적으로 성실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들은 야곱처럼 자기 자신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14년간 외삼촌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도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풍나무 단풍나무를 흔들어 6년동안에 외삼촌의 재산을 거의 다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도망치다가 얍복강 가에서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걱정이 되었으나, 그래도 잔꾀를 짜내어 위기를 모면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얍복강 가에 혼자 남아있는 야곱에게 천사를 보내어 씨름해주셨으나 좀처럼 강한 자아가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킨 후에야 조금 깨어졌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참으로 끈질깁니다. 죽었는가 하면 어느새 살아납니다.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저는 목장이동 때마다 자아가 죽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누워있는 동안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의 자아가 다시 살아나서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안달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는지 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저는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먼지요 티끌이요 추한 죄인입니다. 주님만이 저의 왕이요 주이십니다. 만 왕의 왕이시오, 만 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지정의와 삶을 다스리옵소서!"
15-20절에는,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을 곧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그 아버지 세베데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복음역사의 초기부터 제자감들을 뽑아서 키우시는 제자양성 역사를 하셨음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광범위한 전도와 함께 소수의 제자양성을 병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택하신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결론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영접할 때, 본질적인 변화, 곧 진정한 시작이 시작됩니다. 복음의 역사는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와 같은 시대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