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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7)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말씀: 계2:8-11.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주님은 요한에게 각 교회의 천사에게 글을 쓰도록 하시면서 자신을 다르게 표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 특성, 사역을 일곱 교회를 통해 일곱 번에 걸쳐 말씀해 주십니다.
☛ 에베소 교회에는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있는 자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자”(계2:1)라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오,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 서머나 교회에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자”(계2:8)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는 처음인 구약의 주 하나님(여호와, 아버지)과 마지막인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예수, 아들)는 삼위일체 안에서 동일한 주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심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버가모 교회를 향해 주님은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을 가진 자”(계2: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영(호흡)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칼이요 소멸하는 불입니다(살후2:8).
☛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주님은 “불꽃같은 눈과 정제된 놋 같은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계2:18)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전에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께서 지금은 영광을 받으셨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 사데 교회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자”(계3:1)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고 권능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상 다섯 교회에 주님은 이미 1장에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 필라델피아 교회는 “거룩한 자, 진실한 자, 다윗의 열쇠를 가진 자”(계3:7)라고 하십니다. 필라델피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 대해서는 1장에서 계시되지 않은 내용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시오, 진리이십니다.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한 자도 없으나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사망과 지옥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시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께서 필라델피아 교회 앞에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열쇠는 문을 열고 닫는데 사용합니다. 주님께서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주님이 닫으시면 아무도 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길이요, 문이십니다.
☛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에게 주님은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자”(계3:14)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단 한 번도 No라고 거절하시거나 불순종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아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 아멘이 되었습니다.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의 인장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가 되고 그분 안에서 아멘이 되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니라.](고후1:20). 예수님은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입니다. 유일하게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요3:13)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신실하고 진실하게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그분에 의해,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고(계4:11)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 지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일곱 교회의 천사에게 글을 쓰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에 자신의 특징적인 모습을 다양하게 계시해 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고도 풍성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를 선별하셔서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일곱으로 계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자기 계시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 보십시오. 주님을 아는 지식보다 더 귀한 지식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지 일곱 번에 걸쳐 주님께서 친히 자기소개 형식으로 말씀하셨으므로 교회는 예수님을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생각하거나 상상할 때 이 말씀에 따라 생각하지 않고 캐톨릭 성화나 전승에 따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망상이요, 허상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2:8). 아마 성경을 읽는 분들도 ‘서머나’란 지명은 이곳에서 처음 볼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 서신서 어디에도 이 지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 교회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서머나란 이름은 “몰약”이란 향료에서 유래합니다. 몰약은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처음 받으신 선물이고(마2:11),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입니다(막15:23, 요19:23). 몰약은 8-9피트(2~2.5m)의 높이로 자라는 가시 돋친 나무로 매우 쓴 맛을 지니고 있지만 그 향기는 대단한 특산물로 아주 귀했습니다.
몰약의 특징은 두드리고 으깰수록, 짓눌리고 부서질수록 더욱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기에 그 이름에서 고난과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교회임을 암시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서머나 교회는 순교의 향기를 드러내었고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공인한 밀라노의 칙령까지 혹독한 핍박을 받은 교회입니다.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 가는 부유한 항구 도시였고 일찍부터 유대인들이 많이 정착했는데 이들이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크리스천들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불리는 폴리캅이 이 교회의 감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8)고 하십니다. 교회의 천사에게 쓰는 두 번째 글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이미 썼고 이제 서머나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 주님이 쓰라고 불러 주신 것들을 기록합니다.
서머나 교회의 천사가 누구입니까? 디모데, 디도, 두기고, 마가와 같은 사람들이나 소위 속 사도라 불리는 폴리캅에게 쓴 것이 아닙니다. 가브리엘이나 라파엘이니 하는 천사가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의 천사는 서머나 교회의 모형이라기보다는 ‘현현’입니다. 주의 천사, 어린아이의 천사, 베드로의 천사, .......그의 “영”(천사)은 현현(나타남, 실체를 보여 주는 현상)을 말합니다. 요한이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글을 쓰면 이 글은 서머나 교회로 보내지고 교회에서 한 명이 회중들 앞에서 이 편지를 읽으면 여러 사람이 듣고 모든 사람이 믿고 지켜야 합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인 자...”(8).
이 구절은 구약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표현입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니라.”(사4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약에 계시된 주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며(빌2:6),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이시며(요10:30), 강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라 불리시는 분(사9:6)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십니다(요일5:20). 예수님은 만군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부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신비를 정확히 알고 믿고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은 때로 자신을 아들로 계시하시고 때로는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 동일하신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인 자”란 표현은 자신을 주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들을 비롯한 이단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동등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시편과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자신에 관해 증언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처음인 자가 시온에게 이르기를, 보라, 그들을 보라, 할 것이며 내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사41:27). 처음이신(The First)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시작은 누구입니까? 골1:18, [또 그분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시니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 가운데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그분(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작이시오”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란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처음이신 분, 시작이신 주 하나님이 바로 그분이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오, 영광의 광채이십니다(고후4:4, 골1:15, 히1:3).
거듭난 성도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면 성경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라고 복수로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만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만 생각하고 그분이 창조주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더라.](요1:1-3) 이 문장에서 지칭하시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곧 하나님이요, 창조주라는 사실을 말씀을 읽으면서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개역성경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개역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양을 따라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는데 혼을 부인하고 혼이 없는 사람을 지으신 분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7절을 개역성경으로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개역; 창2:7)“생령(生靈)”은 사는 영으로 혼을 부인하여 “살아 있는 혼”이 없는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변개시켰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절도 개역성경으로 보십시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개역; 고전15:45) 역시 아담은 산 영으로 “살아 있는 혼”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다시본문 계2:8b 로갑니다. [...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8).
예수님께서 전에 죽으셨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당대 예루살렘의 유명한 사건이었고 유대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으로 불렀고 추대하려 했던 예수란 청년을 로마인의 손에 넘겨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살아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는 이가 극히 적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고, 무덤에 묻혔던 그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이 육신의 몸을 벗고 영과 혼이 살아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못 박혔던 손과 발,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가진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은 그분의 출현을 보고 “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그분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지라 거짓말이다, 속이는 것이다, 헛것을 본 것이다, 제자들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전에 죽었었으나 지금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 땅에 살았다가 죽어 버린 어떤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있는 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선포가 헛되고 너희 믿음도 헛되며](고전15:14). 성경은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다면 너희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고전15:17).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에 죽으셨다가 지금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그분의 부활은 거짓이 되고 부활의 진리, 선포는 헛소리에 불과하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없으면 우리의 죄는 사해질 수 없습니다. 나의 구주, 우리의 구원자는 나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걸로 끝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죽음이란 사실은 부활을 통해서만 입증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심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의 죄가 없으심의 증거이며 우리들의 죄가 지옥에서 해결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전에 죽었다가 지금은 살아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소절은 그리스도의 생애,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압축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죽고 없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아니라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 계신 이를 믿고 따르는 무리들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나를 위해 일으켜지셨고 나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전에 죽으셨으나 지금 살아 계시다는 이 진리는 요한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하게 선포되는 말씀이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반복해서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고통과 죽음의 향기를 늘 품고 있기에 주님은 그들에게 “죽었으나 살아 있는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의 이름을 위해 죽음의 위험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말씀보다 더 은혜롭고 복된 말씀은 없습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알며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계2:9). 주님의 칭찬입니다.
주님은 “네(서머나 교회의 천사=교회)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생애 사역 동안 주님이 하신 일(행위), 환난과 궁핍을 압니다.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주린 적이 많았고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밀 이삭을 따서 먹었습니다. 주님은 신실한 여인들의 연보(눅8:3)로 생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겪은 환난과 궁핍을 압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구제를 바라는 앉은뱅이를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행3:6)라며 그가 바라는 돈을 주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그 일행들의 환난과 궁핍을 압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 많은 인내와 고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감옥에 갇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고후6:4-5).
주님의 일을 하는 신실한 사도들, 그분의 사역자들의 행위와 환난과 궁핍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역시 서머나 교회의 행위, 환난, 궁핍을 잘 아십니다. 현대 교회는 가난을 죄나 믿음 없음으로 여기며 물질적 부와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며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이는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삼상2:7, [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것도 주께서 주신 복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친히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약2:5). 물질적 가난은 영적 부요함입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고 하늘에 보상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9).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궁핍을 보시면서 “그러나 네가 부유하도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믿음의 부요함, 영적 부요함, 은혜의 부요함, 열매의 풍성함을 말씀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니라.](고후6:10). 서머나 교회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교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고 있는데 그분께서 부요하셨으나 너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자신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우리가 부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부요하도다.”란 말씀은 은혜와 믿음과 성령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9절입니다. [.........또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9). 오늘날 자칭 유대인들이 누구인지 보십시오. 유대인, 이스라엘이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유대인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참 이스라엘이다 외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단들, 캐톨릭, 오늘날 개신교도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유대인도 아니면서 메시아닉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코리안들도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을 영적 유대인, 영적 이스라엘로 믿고 기뻐하지만 착각이요, 오류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크리스천들을 영적 유대인이라고 동질성을 부여하며 친 유대교 정책, 친 이스라엘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유대인과 크리스천의 차이는 성경이 말하는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율법과 복음, 육신과 성령, 그림자와 실체, 종과 아들의 차이만큼이나 큽니다(갈4:24-25).
유대인이 크리스천이 아니고 이방인이 유대인이 아니듯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일 뿐 유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약속은 교회에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율법, 성전, 제사장 체계, 가나안 땅, 왕국 등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도 교회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교회는 회당이 아니고 교황은 대제사장이 아니고 사제들은 이스라엘의 민족의 레위 지파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영적유대인이라’고 외치는 그룹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캐톨릭이든 개신교인이든 침례교인이든 그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믿는 이들은 구약의 율법 체계, 제사장 체계 아래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로서 진리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일꾼들입니다. [이제 즉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신 뒤에 어찌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들로 돌아가 다시 그것들에 속박되려 하느냐?](갈4:9)
초대 교회 때 크리스천들에게 기어 들어와 할례를 행하게 하고 절기를 지키게 하며 율법 준수를 가르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요...”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입니까? “사탄의 회당인 자들”(계2:9, 3:9)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천사들이 있고, 자신의 사역자들이 있고, 자신의 회당이 있고,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의 왕국이 있고 자신의 그리스도(적그리스도)가 있고 자신의 대언자(거짓 대언자)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형하는 자들이니라.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변형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변형된다 해도 그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9).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사탄의 회당’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있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성모독 하는 자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구원 받기 전의 고백입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그들에게 형벌을 주고 그들에게 억지로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게 하였으며 그들을 향해 심히 격분하여 심지어 낯선 도시들에까지 가서 그들을 핍박하였나이다.](행26:11). 바울은 유대인으로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인이었고 열심히 주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크리스천들을 체포해서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게 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성모독이란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신성모독자입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신성모독자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신성모독자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누구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신성모독이 우상숭배라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시인하지 아니하는 것은 가장 큰 신성모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분의 속죄 사역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역시 신성모독입니다.
다시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전에는 신성모독 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오히려 긍휼을 얻었으니 이는 내가 믿지 아니하는 가운데 알지 못하고 그것을 하였기 때문이라.](딤전1:13). 바울은 유대교에 있었던 시절의 자신을 ‘신성모독 하는 자’였다고 규정합니다. 그럼 지금 모든 유대교에 있는 유대인들은 누구일까요? 신성모독 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그들은 다 신성모독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사탄의 회당인 자들의 신성모독을 아노라.”(9)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믿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요14:1)
계2:10절입니다. [네가 장차 당할 그 일들 중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주님은 서머나 교회가 장차 당할 환란들을 잘 아십니다. 역사적으로는 로마의 10차례에 걸친 대 박해를 말합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었는지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 굶긴 사자들을 풀어 그들을 잡아먹히게 한 일이며 참수형에 십자가형이 연일 집행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들 중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10)고 하십니다. 역사적으로 크리스천들을 죽인 종교 고문은 그 악명이 자자합니다. 마녀로 몰아 화형을 시킨 일은 근대에까지도 자행되었습니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와 물질적인 복과 평안을 구하는 현대의 기독교는 성경적 기독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성도들의 고난과 박해, 피가 뿌려질수록 복음은 더 널리 퍼졌고 확산되었고 말씀은 증대되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주님이 죽으심을 통해 하신 일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
주님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구출”(히2:15)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둘 다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몰아냅니다(요일4:18). 주님의 은혜는 담대함을 줍니다. 주님의 평강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장차 당할 그 일들(고통)...”(10).which thou shalt suffer. 성경 본문은 “너는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정직하십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평안한 삶을 약속하거나 보증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니라.](요16:33b)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도 그가 얼마나 큰 고난을 받을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평안, 기쁨, 풍요, 즐거움, 행복만 가득한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나](딤후3:12). 여러분에게 이런 저런 고통이 있고 환란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믿음이 적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모든 일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닥치나니 곧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 선한 자와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 희생물을 드리는 자와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한 가지 일이 닥쳐서 선한 자가 어떠함같이 죄인도 그러하며 맹세하는 자도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자와 같으니라.](전9:2,고전10:13) 그러나 주님을 믿음으로 인내하면 보상을 하십니다.
다시 10절입니다. [........ 보라,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10). “마귀가...너희를 시험하리니”(10)란 본문은 정확히 말하면 -“너희는 시험(단련)을 받으리니”(that ye may be tried-KJV)입니다. 성경은 ‘너’(단수)라고 말하다 “너희 중에서...”(복수)로 변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천사가 한 명의 영적 존재나 사역자가 아니라 ‘교회’를 의미하는 예입니다.
마귀는 교회 성도들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교회를 시험했습니다. 교회에 박해와 고난이 가해지면 생명이 없는 교회는 순간적으로 와해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교회는 더욱 견고해집니다. 마귀(헤롯)는 성도들을 죽일 수도 있고(야고보), 감옥에 던져 넣을 수도 있습니다(베드로). 그 때 교회는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 때 초대 교회는 무엇을 했습니까? 함께 모여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마귀는 다양한 방법, 다양한 모습으로 오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를 단련하려고 오는 시험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어떤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가 넘치는 기쁨으로 또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12-13).
마귀가 도전하는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잠든 교회, 죽은 교회는 마귀의 원수나 대적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시련이 온다고 말합니까? “너희를 단련하려고...” 불같은 시련이 옵니다. 시험이 오는 목적은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 너희 믿음의 단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약1:2-3). 시험으로 단련된 믿음은 정금 같은 순수한 믿음이 됩니다.
“열흘 동안...”(10). 이 말은 길지 않은 일정 기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일주일, 보름, 한 달 단위로 기간을 정할 때 ‘열흘’은 일상적인 짧은 기간입니다(창24:55, 행25:6). “열흘 동안”이라면 당시 중동이나 현재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한 열흘 정도, 열흘 거리, 열흘 뒤에...이런 말은 일상어로 쓰이는데 한 달의 1/3에 해당하는 그리 길지 않는 시간의 길이를 일상적으로 말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아마 열흘 정도 걸릴 거야.” 정도입니다.
[...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10). 주님은 고난 속에 있는 혼들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과 더불어 “신실하라.”고 하십니다. 주목하십시오. “너는 죽을 때까지 신실하라.”가 아니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입니다. *Unto death. until death.
주께서 그러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곧 십자가로 인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느니라.](빌2:8).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겼으며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환란 성도들은 죽기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가 바로 신실함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생명의 관을 약속하셨습니다.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冠)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생명의 왕관은 시험을 통과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왕관(crown)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이 왕관을 얻고자 절제하고 일하며 인내로 달리고 싸웁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왕관을 얻기 위해 그 일을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아니할 왕관을 얻기 위해 하느니라.](고전9:25).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왕관을 얻고자 애를 써야합니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듯 보상도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상은 각 사람이 일한대로,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양떼를 돌보고 먹이는 사람들에게는 ‘영광의 왕관’을 주십니다(벧전5:4). 혼들을 이겨온 사람들에게는 ‘환희의 왕관’을 주십니다(살전2:19). 저 하늘에서 주님 앞에 서있는 혼들 중에 우리가 복음을 전한 혼들이 서 있다면 우리는 기쁨과 환희의 왕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의의 왕관’을 주실 것입니다(딤후4:8). 언제나 매사에 신실하십시오.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말씀은 신실함의 정도, 크기에 관한 말씀이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에 관한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계2:11).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쓴 이 글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주목할 점은 주님께서 친히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본문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자는...”(11). 현재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이기는 자이므로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않습니다(요일5:4,5). 큰 환란 때는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계15:2)이 곧 끝까지 견디고 죽기까지 신실한 자들로 이기는 자입니다. 큰 환란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해도 짐승의 표를 받거나 그 형상에 경배하면 그는 구원 받은 자가 아닙니다.
서머나 교회는 순교자들이 넘치는 교회였지만 이기는 자들은 육체의 죽음, 첫째 사망(죽음)을 겪을 뿐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이 무엇입니까? [사망과 지옥이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계20:14). 성경에 따르면 뭔가가 불 호수에 던져지는 것 즉 사망이든 지옥이든 마귀든 사람이든 뭔가가 ‘불 호수’에 던져지는 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하시니라.](계21:8).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 던져지는 자들은 거기서 자기 몫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저 하늘에서 자기 몫을 받느냐? 불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게 해를 입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구원 받은 크리스천은 그 누구도 둘째 사망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할 몫을 가진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런 자들을 다스릴 권능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계20:6).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은 모두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 있는 크리스천들은 모두 저 하늘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참고로 오늘날 볼 수 있는 거짓 유대인, 사탄의 회당을 살펴봅니다.
율법주의자. 안식일 준수, 음식 규례 준수, 절기 준수 따위를 주장하는 안식교와 메시아닉 유대인 등이 그런 자들입니다. 주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거짓 유대인이며 사탄의 회당입니다.
British Israelism. 이스라엘의 지파 중 일부가 영국 아니면 다른 어딘가로 이동해서 그 후손들이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일으켜 유대교를 보존한다는 주장입니다. 영국의 암스트롱 교회와 미국의 몰몬교 등이 대표적인 자들로서 이들은 유대인들이라고 하지만 거짓 유대인이며 사탄의 회당입니다.
왕국 건설자들(Kingdom Builders). 기독교 복음의 세계화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왕국, 의의 왕국을 세운다는 자들로서 종교 정치꾼들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바티칸이란 주장을 한 캐톨릭을 비롯해 개혁 교회들, 장로교회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 분리. 레위 제사장 체계를 신약의 성직자 체계로 원용하여 활용하는 모든 종파들은 거짓 유대인이요, 사탄의 회당입니다.
은사주의자들. 이스라엘에 주어진 표적들을 교회에 적용하려 시도하는 이들로서 거짓 유대인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 주어진 땅과 물질적 번영, 풍요, 다산, 장수, 건강에 대한 약속들을 크리스천들에게 적용하려는 것 역시 거짓 유대인에 사탄의 회당입니다.
역사는 돌고 돕니다. 지금 있는 일들은 이미 전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 일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록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며 “귀 있는 자는...들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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