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여행이 각광받고 있다. 제법 오래전부터 훌쩍 떠나서 제주도 올레길을 걸었다. 구멍 숭숭한 검은 돌담길을 걸으며 도시에서 채워진 팍팍했던 마음이 뚫리게 되고 바람에 흘러가듯 발길이 자유로워진다.
제주에는 모든 삶과 문화가 돌로부터 시작된다. 현무암을 다듬어 집 담을 쌓는다. 죽은 혼을 편안하게 산담을 쌓았고, 밭과 밭의 경계인 밭담을, 집과 집을 이어주는 올레길도 만들었다.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불턱을,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갯담을 쌓았고 해적과 왜구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돌담 성을 쌓았다.
늘 거센 바람과 맞서야 했다. 제주 사람들에게 돌은 찬미 대상이 아니라 투쟁과 극복의 대상이었을 테다. 돌담은 생활 그 자체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겨내는 방법을 지혜롭게 터득한 듯하다.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돌탑이다. 산길에서나 들길에서 마주하는 여러 형태의 탑들이다. 바닷가에도 불을 밝혀 어부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도대’도 볼 수 있다. 정성 들여 쌓아 올린 돌탑을 보면 제주 사람들의, 간절함의 표현으로 보인다. 오래전부터 바다에서 삶을 건져 올리는 척박한 환경에서 힘든 생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겐 돌탑은 주술적 의지였고 신앙의 대상이었다.
올레 4코스 해안 길을 걸을 때다. 이곳에는 유난히 돌밭이 넓게 깔려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누군가의 간절한 기원을 담아 쌓아 놓은 셀 수 없는 돌담들을 볼 수 있다. 먼저 걸었던 수많은 사람이 안고 온 고통을 내려놓고 이뤄지고 싶은 소망을 돌 하나마다 담아 정성과 간절함으로 쌓아 놓고 돌아갔나 보다.
친구들끼리 쌓은 돌탑은 장난기가 보이는 평범한 돌무더기 같다. 젊은 연인들이 두 마음을 모아 무너지지 않게 예쁘게 쌓은 사랑탑이다. 별 모양은 없지만, 가족 건강과 시간을 들여 정성 들인 돌탑은 중년 부부의 자식들을 위한 간절함이 느껴진다. 힘든 길을 걷던 사람들의 오만 가지 시름들을 돌 하나마다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저 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소망들은 알 길이야 없지만, 저들이 돌 하나마다 정성 들인 손길이 보여 마음에 감동이 다가온다. 어느새 돌탑이 올레길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하고 거대하게 펼쳐지는 관광 풍경이 된 듯하다.
고향 마을 접어드는 고갯마루 오거리에도 작은 동산만 한 돌탑이 있었다. 언제부터 탑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탑의 내력은 짐작할 수 없지만, 그동안 보았던 어느 탑보다 엄청 컸던 것 같다. 다섯 마을 사람들이 면이나 대처로 오갈 때면 꼭 이 탑재를 통과해야 한다. 이곳을 지날 때 사람들은 그냥 무심히 지나갈 수는 없다. 돌 하나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올렸다.
그 시절 어머니도 간혹 면에 있는 장에라도 다녀오는 날에는 탑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튼튼하고 모양이 좋은 돌 하나를 미리 챙긴다. 탑 앞에 다가서서 원하는 소망이 떨어지지 않게 가장 안전한 곳에 돌을 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내 어머니의 젊은 한날의 고향 탑재의 간절했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멋모르는 나도 작은 돌맹이 하나 주워 탑 위로 던졌던 기억도 그대로 남아있다.
사람만 통하는 곳이 아니다.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도 이곳을 통과한다. 먼 곳을 걸어왔으니 어머니는 시원한 이곳에서 아픈 다리를 쉬었다. 그때 젊은 내 어머니는 참 고왔다.
몇 년 전이다. 고향 마을을 가는 길이었다. 어머니의 추억이 어려 있는 돌탑도 세월을 비켜 가지는 못했다. 흔적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무심한 자동차들만 오가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나는 옛 돌탑 자리에서 영원히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내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 속에 서성인다.
올레길에서는 늘 완주를 목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시간을 단축시켜 완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생각이 달라졌다. 재촉하던 발길을 멈추었다. 주위에 돌을 주워 모았다. 제일 밑으로는 안전하게 큰 돌을 둥글게 앉혔다. 가운데는 적당한 크기의 돌을 채웠다. 쌓다 보니 요령도 생긴다. 큰 돌 아래 작은 돌로 무너지지 않게 받침을 끼웠다. 정신을 집중하며 돌 하나마다 온 정성을 담아 탑을 쌓았다. 주변의 탑들과 견주어 봐도 모양은 그럴싸하다. 고향 탑재를 지날 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돌 하나 올렸듯 나 역시 자식 위한 어미된 마음은 내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올레 4코스에 내가 쌓은 공든 탑이 영원히 풍경으로 남겨지길 바란다. 다시는 내 마음이 무너지는 일도 없기를 빌며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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