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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이 문화국장
“오! 해피데이...
윌리, 행복한 하루가 또 시작되려나 봐!
내가 말하지 않아도, 흔들리는 춤이 말하고 있어.
내 손을 꼬옥 잡고 어루만지는 당신의 손 내음.
그건 진실이야. 사랑의 진실.
오, 해피 해피데이.
바로 오늘이야!”
<해피데이 중에서>
사진: 베케트 오,행복한 나날들(1)
리얼리즘 최고의 작가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가 마지막에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나갔을 때, 사람들은 “근대 연극의 문이 열렸다!”라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새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됐을 때, 사람들은 “현대연극의 문이 뚫렸다!”라고 일갈(一喝)했다.
사진: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포스타
입센이 리얼리즘 연극의 문을 열어젖혔다면, 베케트는 앤티-리얼리즘 연극의 본격적 포문을 연 것!
19세기 후반기에 터진 연극의 리얼리즘은 고작 60년을 못 넘기고 막을 내렸다. 그리고 터져 나온 反리얼리즘을 외친 ‘反演劇’.
이오네스꼬, 쟝쥬네, 쟝아누이, 아라발, 뒤렌마트, 막스 프리쉬, 페터 한트케, 에드워드 올비, 해롤드 핀터 그리고 새뮤엘 베케트를 망라한 ‘부조리연극(Theater of the Absurd)’의 주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의 시대적 외침 위에 등장한 연극들은 리얼리즘 연극이 결국 영화나 TV에 파묻힐 뻔한 생명을 되살리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 가운데 우뚝 선 작가 중의 한 사람? ‘새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다.
사진: 베케트
사진: 베케트 초상화
우린 보통 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여전히 몰라도 기억한다. 필자는 1988년 뉴욕 링컨센타에서 배우 ‘로빈 윌리엄즈’와 ‘스티브 마틴’ 그리고 친구 ‘빌 어윈’이 7주라는 짧은 공연을 관람하며, 더 이상 ‘고도(GODOT)'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지만.... 여하튼 내게 그의 진정한 대표작은 '게임의 종말(End Game)', '크라프 마지막 테잎(Krapp's Last Tape)', '행복한 나날들(Happy Days)' 그리고 ‘대사 없는 막(Act Without Words)’, '오며 가며(Come & Go)'다. 필자는 운 좋게 ‘게임의 종말’과 ‘크라프 마지막 테잎’을 공연하는 행운도 누렸다.
사진: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3)
사진: (베케트 고도를기다리며(1)
새뮤엘 베케트.
그가 발표한 희곡문학은 소설가 카프카와 프루스트 그리고 쇤베르그와 죤케이지의 무조주의 음악 그리고 화가 미로와 칸딘스키를 버겁게 한다. 그는 분명 앞서가는 작가이며 연극의 공간과 라이브 아트의 진수를 넘나든 연극 드라마트루기의 장인(匠人)이었다. 거대한 서구 연극의 흐름을 뒤집은.... 삶을 담보로 곡예처럼 연명해 가는 현대인의 의식구조를 예리한 칼로 깊숙하게 해체를 가한, 치밀하면서도 동시에 통렬(痛烈)한 아픔을 詩的으로 승화시킨 마지막 모더니스트 작가다.
사진: 베케트 크라프 마지막테잎(3)
사진: 베케트 크라프 마지막테잎 포스타
“우리 셋이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
그냥 가만히 있자.
그 옛날 정원에서처럼 그냥 앉아 있자.
사랑의 꿈을 그리며.....”
<‘오며 가며’ 중에서>
‘새뮤엘 바클레이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1906.4.13.-1989.12.22.)’. 누구나 얼굴이 곧 그다. 근데 베케트가 그러하다. 그의 얼굴이 곧 작가이며 시인이며, 철학 명상가이며, 연극배우다. 학창시절 난 그의 얼굴사진으로만 송두리째 선망(羨望) 속으로 빠졌다. 그리고 그의 희곡을 섭렵(?)하려 했다. 이제 그의 작품을 연출도 연기도 그리고 작품에 대해 얘기 할 수 있는 연륜이 됐나? 그건 무대에서 보여줄 일......!
베케트는 아일랜드 더블린 폭스락(Foxrock)에서 측량기사 ‘윌리엄 베케트’와 간호사 ‘마리아 존스’ 사이 2남 막내로 태어난다. 다섯 살 때 음악을 공부했고, 1919년 영국의 천재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다녔던 ‘포르토라 왕립 학교’에서 수학(修學). 이어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에서 프랑스어, 이태리어, 영어를 배우며 현대문학을 전공, 문학의 길로 성큼 들어선다. 문학 외에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어 좌 타자(左 打者) 크리켓 선수로 많은 경기에도 출전했다.
대학을 마치고 1928년 빠리로 건너가, 소설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즈> 등당대 최고 반열의 작가 ‘제임스 죠이스(James Joyce)와 해후. 깊은 문학적 영향을 받는다. 제임스 죠이스 가족과도 가까워지며 죠이스의 딸이자 댄서 Lucia와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는데, 결국 그것은 죠이스와 베케트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초기(初期) 베케트에 큰 영향을 준 은인(恩人)은 ‘제임스 죠이스’다.
1933년 부친 사망 후, 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욘 박사와 2년간 치료를 하면서 그의 후기 작품인 ‘고도를 기다리며’에 영향을 받게 된다. 1932년 첫 번째 소설 <중년 여성에게 공평한 꿈>을 집필, 그러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는 수모도 겪는다.(그러나 1992년에 출간이 됨) 그 후에도 소설 <머피>를 집필하나 큰 반응은 얻지 못한다.
1938년부터 빠리에 정착. 화가 자코메티, 마르셀 듀상 등과 교유(交遊)한다. 그해 1월 베케트는 푸르던트란 이름의 악명 높은 포주에게 가슴에 칼을 맞고 거의 죽음 문턱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당한다. 이 일련의 사건은 그의 작품에 삶과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선문답(禪問答)으로 일관하게 만드는 계기(繼起)를 마련한다.
화가들과의 교유는 그에게 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1933년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보조 큐레이터로 지원을 하기도 한다. 그의 시각예술에 대한 관심과 조예는 당연히 작품에도 다양하게 영향을 끼친다. 유럽 최대의 전쟁비극, 2차 대전 중에 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그룹, ‘Gloria SMH의 일원으로 활동, 한때 게슈타포에 잡힐 뻔한 일도 경험 하는 등, 독일 나치를 철저히 혐오한다. 그러나 2차 대전은 그에게 작가로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가난, 실패, 추방, 상실’에 처한 ’알지 못하는 자, 알 수 없는 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확대하는 새로운 작품 방향으로 선회(旋回)한다.
사진: 베케트 1막극, 크라프 마지막테잎과 대사없는 1막 포스타
창작의 열혈 작가(作家)는 자신의 내면이나 주변의 삶으로부터 실마리 모티브를 찾는 법. 드디어 1948년 베케트는 연극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바로 그해에 프랑스어 쓴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길로 물꼬를 터준 대표작이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1953년에 비로소 초연됐을 때 연극평론가 Vivian Mercier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관객을 붙들어 놓는 새로운 연극’이라 말한 것처럼 사실주의 연극만 보던 일반 관객들에겐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베케트의 기이한(?) 연극에 찬반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5년 런던, 그리고 미국과 독일에서 성공을 거두며, 베케트는 마침내 세계적인 극작가의 입지를 갖게 된다.
사진: 베케트 엔드게임(1)
사진: 베케트 엔드게임(2)
연극에서 블랙 코미디와 넌센스적 유머를 표현한 작가는 많지 않다. 아니 아주 드믈다.(그래서 진정 아티스트 아닌가?) ‘고도를 기다리며’는 엄밀하게 코미디인데 그의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절절한 뼛속 깊은 비극(悲劇)이다. 이어 발표한 <엔드 게임1957>, <크라프 마지막 테잎 1958>, <행복한 나날들 1961> 등 역시 새로운 연극의 場을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처음으로 많은 지문(指文), {사이}와 {침묵}을 제시한 작가는 그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그의 작품이 무대 형상화 될 때, 위 지문을 완벽하게 메꾸고 완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베케트의 연극이 아닌 셈.....
1961년 베케트는 비밀리에 영국에서 ‘스잔’이란 여자와 결혼. 그러나 반면 BBC 대본 편집자인 Barbara Bray(2010년 사망)라는 ‘작고 매력적이고, 예리하고 지적인 여자’와도 아내 스잔과 병행하며 지속된 관계를 이어갔다.
마침내 1969년 베케트는 아내 스잔과 튀니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한다. 아내 스잔이 말했다. ‘노오벨 상을 받은 건 재앙이야!’(역시 베케트의 아내답다)
비로소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베케트는 1989년 7월 아내 스잔이 사망한 후, 5개월 뒤 파킨슨병과 폐기종을 앓으며 요양원에서 역시 세상을 떠난다. 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된 두 사람. “회색이라면 어떤 색이든 상관없어야 한다”란 베케트 다운 묘비명을 남기고, 그는 여전히 회색 빛 'GODOT'를 우리에게 기다리게 해놓고, 많은 작품에 물음표를 남겨둔 채 영면(永眠)했다. 베케트는 분명 평자나 학자들이 언급한 ‘부조리연극’ 세계의 울타리를 넘어, 연극의 새로운 문법과 어휘를 창조하고 떠난 것이다.
작가로서 그는 세 가지 시기로 대변할 수 있다.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초기작품 시기’. 둘째는 1945년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걸작품을 썼던 ‘중기작품 시기’. 그리고 셋째는1960년대 초반부터 1989년 사망 때까지 작품 길이가 점점 짧아지는 ‘말기 미니멀 시기’다.
사진: 베케트 엔드게임(3)
말년의 작품들 가운데 <Breath 1969년>는 공연시간이 채 60초도 안 되는, 등장인물이 없는 초미니멀 작품이다. 그 외에 <Not I 1972년>, <That Time 1976년>, 오페라 <Neither 1977년>, <A Piece of Monologue 1979년>, <Catastrophe 1982년>, 그리고 마지막 희곡 <What Where 1983년>는 죽음 앞에 장탄식의 숨소리처럼 여운 있는 대사의 울림으로 남게 만들었다.
이 대가의 마지막 시집 <Comment dire 1988년>는 ‘말이 무엇인가? 왜 필요한가?’를 속삭이듯 자신을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는 찾을 이유가 없는, 무능력과 씨름하듯 보이는 자아(自我)와의 투쟁을 담담히 그리고 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작가 새뮤엘 베케트.
‘과연 연극은 무엇인가?’, ‘예술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를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관통하며 통찰한 최고의 끝자락 단말마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극작가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로서의 나의 롤모델.
사진: 베케트 엔드게임 포스타
이 허랑한 세상..... 누구도 그의 명작을 연기할 배우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을 것. 그러니 베케트에게 배우는 갈 곳 잃은 철없는 슬픈 왜가리다! 결국 나처럼 ‘뱀나무 밑에 선 바나나맨의 노래’나 부르는 애수(哀愁) 어린 ‘졸광대’에 불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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