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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꿈의 공장인가
<인사이드 잡>(찰스 퍼거슨, 다큐멘터리, 12세, 2010)
1.
나는 어려서 꿈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듣고 자랐다. 졸업 혹은 입학 감사 예배 때마다 설교자들은 예외 없이 말했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꿈을 꾸어야 한다고. 이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성경 인물인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다니엘 등을 전형적인 아이콘으로 소개하였다. 게다가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예수 역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현실에서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했다면서 꿈은 고난과 죽음도 이기게 하는 힘이라 말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기론 구체적인 직업을 언급했던 것 같고, 종종 위인들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 같다. 결국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꿈을 꾸라는 말이겠다. 여기에 덧붙여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는 말씀을 전해주면서 그것이 마치 성공을 위한 비결인 것처럼 소개하였다. 70년대 80년대에 청소년 및 청년시절을 보낸 내게도 그렇지만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교회는 꿈의 공장이었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꿀 수 있는 꿈을 만드는 엔지니어였고, 목회는 꿈을 경영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꿈이 ‘비전’으로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성공하는 목회자를 조회하면 예외 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비전을 제시하는 목회자”다.
최근에 흥미로운 글을 하나 접했는데, 『강신주의 다상담3: 소비, 가면, 늙음, 꿈, 종교와 죽음』이다. 이 글의 저자인 강신주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보는 철학적 입장을 설명하면서 자본주의를 기독교와 비교한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행복을 약속하면서 등장”했고, 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은 백지수표와 같은 이미지”인데, 신의 말을 잘 듣고 사는 것은 신에게서 한도가 없는 신용카드를 받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천국이 없다면 어떨까. 그는 스스로 의문을 던지곤 대답한다. 그의 표현을 옮겨본다면, “이게 웃기는 거죠. 열심히 말 잘 듣고 살았는데, 죽어 봤더니 천국이 없으면 황당한 일이잖아요.” 이어서 그는 바로 이런 약점을 보완한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행복을 내세에까지 미루지 않고 바로 이 현세에 달성하도록 만드는 종교”다. 강신주는 자본주의의 종교적 속성을 말하기 위해 기독교를 언급한 것이지만, 적어도 그에게 기독교는 ‘현세에서 행복이 내세로 미뤄지면서 현실에서는 꿈을 꾸게 하는 종교’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인지한 기독교 이미지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서 먼저 그가 그렇게 느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그러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그의 기독교 이미지는 어떤 부분을 통해 얻어진 걸까? 사회가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젊은 세대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했을 때, 이들에게 꿈을 갖게 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도록 고무한 단체는 기독교였다. 조선말이나 일제 강점기, 그리고 전쟁 중이나 전후 경제개발 시기에 젊은 세대들에게 희망은 기독교였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기독교는 빛을 발했다. 이 시기에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말했고,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해주었다. 강신주의 글을 접하면서 나는 어려서부터 들었고 또 지금까지 강단에서 계속되고 있는 설교와 묘하게 겹쳐지는 부분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사용한 강신주의 표현은 기독교와 교회의 설교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적어도 필자가 들어왔던 바에 따르면 그렇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확실한 구원관과 하나님 나라의 존재를 확신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라고도 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으며, 구원 받는 자들이 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냥 믿고 받아들였을 뿐, 왜 이것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신학을 공부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과거나 현실의 모든 것을 미래로 옮겨놓는 힘은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하고, 내세에 누릴 행복을 위해 현세의 고난을 기꺼이 감수할 힘 역시 확실한 구원관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에서 온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기독교 신앙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결국 강신주가 던진 ‘만일 천국이 없다면?’ 그래서 ‘꿈이 악몽으로 밝혀진다면?’이라는 의문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대응책이었다.
한국 기독교 혹은 한국 교회가 말하는 꿈의 힘을 의지해서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실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만나면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일이겠다.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자본주의 시대의 기독교는 채워주었다. 막스 베버는 이 역할을 수행한 것이 칼뱅이라고 보았지만, 베버는 무엇보다 기독교 정신이 지배적인 사회에서의 자본주의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독교 정신이 사라진 자본주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자본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꿈을 설계하는 설교자들이 의외로 많다. 다시 말해서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마냥 내세로 미루지 않고 복을 누리며 사는 가능성을 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들이 제시한 바대로 꿈을 꾸며 산다. 그 꿈은 어떤 꿈일지 궁금해진다.
설교에서 들었던 꿈이 잘못임을 알게 된 것은 성경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진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언급한 꿈의 사람들은 사실 그들 자신이 꿈을 꾸지 않았고 하나님이 꿈을 통해 보여주신 것임을 알았을 때, 나는 기독교인들에게 꿈을 설교하면서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 거의 사기에 가깝다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꿈을 말하면서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준비하고, 내세의 복을 위한 헌신이었다. 내세를 위해 헌금을 하고, 내세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내세를 위해 헌신하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것이 요지다. 실제로 그렇게 말한 설교자들은 현실에서 많은 복을 받았다. 대형교회 목사가 되었고, 엄청난 사례를 받았고, 좋은 집과 환경에서 살았다. 일부 성도들은 성공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공을 위해 저지른 불법은 감사헌금과 헌신과 간증으로 대체되었다. 그토록 꿈을 설교했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각종 스캔들에 휩싸이고, 그 때문에 발생한 교회 갈등과 분열은 현재의 한국 교회 민낯이 아닐까. 도대체 이 일로 상처를 입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릴 때부터 줄곧 들어왔던 꿈은 악몽이었음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2.
2008년에 발생한 미국 발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실상은 경제에 관해 무지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것을 다룬 영화들을 보면서 경제용어 이해에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영화 이해는 차치하고 금융위기의 실상과 역학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을 비롯하여 여러 관련 자료들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몇 군데는 그냥 퍼 나르는 수준으로 옮겨놓았음을 밝힌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는 공인된 금융 공학자들에 의해 기획된 불량 금융상품들 때문에 발생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거의 사기와 같은 일이라서 흔히 “폰지 사기”로 비난받는다. 찰스 폰지(Charles Ponzi)라는 사기꾼의 이름에서 따온 말인데, 폰지는 1920년대 미국 보스턴에서 희대의 다단계 금융사기극을 벌였다. 그는 개발 붐이 한창이었던 플로리다에서 실제 자본금 없이 소비자에게 50%라는 고수익 상품이라고 소개하여 투자자들을 끌어 모은 다음 나중에 투자하는 사람의 원금을 받아 앞 사람의 수익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개발 붐에 따라 주택가격도 상승하였기 때문에 투자자를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개발이 한창이고 또 투자자가 모일 때는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더 이상 투자자를 모으지 못하면서 폰지는 지불할 배당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 이상 지불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국 사기죄로 구속되었다. 그 후 ‘폰지 사기’는 수익에 비해 이자가 클 경우 발생하는 경제위기를 나타내거나 채무자가 지속적으로 빚을 굴려 원금과 이자를 갚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2008년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금융위기를 ‘폰지 사기’로 여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들은 <인사이드 잡>,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J.C. 챈더, 2011), <빅 쇼트>(아담 맥케이, 2016), <머니 몬스터>(조디 포스터, 2016) 등이 있는데, <빅 쇼트>, <마진 콜>, <머니 몬스터> 등은 금융회사들에 주목해서 그들의 경영방식과 금융위기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면서 각종 잘못된 행태들의 실상을 파헤쳤다. 그들은 부풀렸고, 속였고, 조작했고, 결과에 대해 무책임했으며, 타인의 손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일에만 급급했다. <빅 쇼트> 역시 월 스트리트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돈을 번 네 명의 천재들을 통해 부동산 담보대출의 부실, 곧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폭로하면서 정부의 무책임을 비난했지만, <인사이드 잡>은 다른 영화들과 달리 주로 미국 행정부 경제 담당 공무원들과 당시 자문역을 맡았던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들로 이뤄진 다큐멘터리이다. 2011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작품상을 수상했다. 총 5부로 다뤄졌는데, 어떻게 이런 금융위기 상황이 오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국민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마치고 있다. 전문적인 경제 문제를 다루는 영화라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감독은 아이슬란드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면서 출발한다. 아이슬란드와 같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극히 안정된 구조의 나라조차도 총체적인 위기를 피할 수 없었던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감독은 2008년도 미국 발 금융위기와 그것의 원인을 파헤친다. 영화가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바로 부시와 클린턴 정부의 탈규제정책이다. 탈규제정책이란 상업은행(Commercial Bank)과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을 구분시키는 법을 완화하는 정책을 말한다. 이 법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카터 글래스와 헨리 스티걸 의원은 경제 대공황의 이유로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방만한 경영 태도에 주목했는데, 이에 따라 두 의원은 은행의 경영을 규제할 제도적 장치가 부재하다는 공통된 인식하에 법안을 제안하였다. 소위 ‘글래스-스티걸법’은,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구분시켜 상업은행이 고객의 예금으로 투자은행이 하는 일들(주식, 채권투자 등)을 할 수 없도록 하며 이 둘의 겸업을 금지시키는 법이었다.
그런데 미국 의회는 각종 금융로비스트들에 휘둘려 규제정책을 고수하는 공무원들을 자리에서 내쫓은 다음에 소위 탈규제정책을 가능하게 한 ‘그램리치 불라일리 법’을 1999년에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은행과 증권, 보험업이 서로 경쟁할 수 있게 만들어 더 효율적인 금융시장을 만들자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로써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구분은 유명무실해졌고, 두 회사가 합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시티그룹의 탄생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탈규제 정책으로 가능해진 대출 및 고수익 투자를 통해 금융업 종사자들은 많은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는 사태의 진행상황을 눈치 챘지만,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결국 일이 터지면서 비로소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영화는 금융위기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특히 금융업 종사자들이 정부의 경제 분야 관리로 등용된 것과 그들의 탈규제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유명대학교 경제학 분야 교수들의 논문과 자문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들은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좋은 집에 살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었으며, 그 꿈들을 학문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논문 집필과 자문활동을 통해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금융회사로부터 받았지만, 정작 위기가 닥쳐왔을 때는 정부나 교수들 누구도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금융회사의 CEO들 조차도 방만한 운영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의 구제 금융으로 받은 돈으로 자신들의 퇴직수당을 받아 챙겼을 뿐이었다. 매우 인상 깊은 인터뷰는 이 사태의 핵심을 잘 짚어준다고 생각한다.
“엔지니어(다리를 만드는 공학자)보다 금융 분야 엔지니어들이 왜 4~100배 더 받는 거죠? 엔지니어들은 진짜 다리를 만들고 금융 분야 엔지니어들은 꿈을 만들 뿐입니다. 그런 꿈들이 악몽으로 밝혀지면, 다른 사람이 비용을 지불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금융위기의 피해자들은 결코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범죄자로서 오히려 자신들의 배당금을 모두 챙겨나갔고, 당시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정부 책임자들은 오바마 정권에서 다시 등용되었다. 금융위기로 일자리를 잃고,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결국 중산층을 포함하여 그 이하의 경제수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금융위기의 원인을 파헤치는 여러 영화들을 보고, 특히 <인사이드 잡>을 통해 드러난 탈규제정책의 실상과 이런 정책을 추진한 사람들과 그 일들을 학문적으로 지지해준 사람들을 보면서, 묘하게 한국교회의 현실과 유명 목회자 그리고 그들에게 학문적인 근거를 제시했던 일부 유명 신학자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악몽을 꾸게 한 장본인은 목회자와 신학자인데, 피해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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