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실 전통마을과 송림
조선시대 전통가옥의 모습과 고즈넉한 돌담길을 간직한 금당실마을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할 수 있는 땅으로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이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고, 99칸 저택터, 금곡서원, 추원재 및 사당(민속자료 82호), 반송재고택(문화재자료 제262호), 사괴당 고택(문화재자료 제337호) 등 고가옥과 문화재가 있어 마를 전체에 전통미가 가득하다.
마을 안길은 아름다운 돌담길로 이어져 있고, 천연기념물 제469호인 송림은 넓은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식혀준다. (출처 : 예천군)
십승지(十勝地)란?
조선 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3재(전쟁, 흉년, 전염병)가 들어올 수 없는 땅의 기운이 좋고 청정하고 안전한 지역을 말하는 한국 천하명당지를 말한다.
십승지(十勝地) 장소
영월 영월읍, 봉화 춘양면, 영주 풍기읍, 예천 용문면, 상주 화북면, 보은 속리산면, 합천 가야면, 공주 유구읍, 무주 무풍면, 부안 변산면, 남원 운봉읍
금당실 소개
금당실은 13세기 초 감천문씨 문헌(文獻)에 의해 개척된 곳이며, 이후 증손자 문억경의 사위들인 박종린과 변응녕이 정착하여 살았다.
‘금당실에 가면 옷 자랑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듯이 선비의 예법과 반가의 문화의식을 잘 간직한 마을이며, 금곡천과 선곡천이 마을을 감싸고 도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나 금곡천을 따라 마을 앞쪽이 열려 있어 허 한 이곳을 막고 보(補)하기 위해 솔숲을 조성하여 마을의 액운을 막았다고 한다.
남사고는 예천에 있는 금당동의 북쪽은 지세가 깊지 못해 밖으로 드러나 있으나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아 여러 대(代)에 걸쳐 편안함을 누릴 것이다.’ 라고 하여 일찍이 피난처로서 적지임을 예고하였으며, 임금의 수레가 이곳을 미치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동학란 당시에 동학의 북접이 본부를 두고 관군을 격파해 버린 일이 발생하여 병과불입지지(兵戈不入之地)로서의 명성이 흔들렸으며, 구한말 양주목사를 지낸 이유인이 왕의 피난처를 마련키 위해 금당실에 99칸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로서 임금의 영향이 미쳤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한편 사금을 채취하려는 러시아 광부 치사(恥事)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비보림(非保林)의 소나무들을 베어 팔았던 일이 발생하여 상당수의 숲이 사라졌다고 한다. (출처 : 예천군)
금당실 마을 소방도로변에 청기와 벽돌집 지붕을 독특하게 꾸미고, 원형 통유리창문을 만든 1층 양옥집 아주머니 한 분이 안동에서 이사온지 오래 되었는데 맞며느리로 많은 고생을 하여 부군이 이 집을 지어 부인 명의로 하여 선물하였다고 했다. 명패도 부부로 되어 있었다.
마음씨 곱고 인심 좋은 김씨 아주머니께서는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러 들른 우리 일행 모두에게 음료수 제공까지 하였다. 참으로 즐거운 하루가 되었다.
금당실 마을 방문기
금당실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교문화를 그대로 보존하여 거의 대문을 만들지 않고 돌담과 고유의 꽃과 식물을 가꾸어 마치 수백 년 전 마을을 걸어보는 기분이다.
골목길을 계속 돌아가노라면 길 이름, 가옥 거주자 이름, 주막 등 자상하게 나무표지판으로 안내되어 있고, 또한 한옥체험관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방문객에게 편의를 제공코자 농산물홍보관, 주차장, 깨끗한 현대화장실 등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도시의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고 손에는 달랑 책 한 권만 쥐고 달밤과 새벽 맑은 바람을 맞이하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 사라지게 되는 좋은 힐링의 장소라고 느껴진다.
사진촬영 : 임영태, 이태희
감사합니다
첫댓글 구석구석 담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예천(醴泉)의 명승지 삼강주막
~ 강문화 전시관~초간정 용문사를
답사 후 전통마을 '금당실마을' 의
평화로운 농촌풍경과 5월의 맑은
뭉개구름은 관광객(대구행정동우회)
을 황홀경에 빠져 들게 하였습니다.
'가야돌' 작가님의 기행기에도 또다
시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감사합니다.👏
Wonderful:
가야돌 국장님, 동영상 촬영만으로도 여념이 없을 것인데 언제 이렇게 훌륭한 작품사진들을 골고루 알뜰하개게 올려놓았는지,
대단하고 훌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