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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의 네가지 벗. 종이, 붓, 벼루, 먹.(紙筆墨硯)=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 [내용]문방이란 문한을 다루는 곳 즉 ,문사들의 방이란 뜻이다. 문방에 없어서는 안 될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의 사우라 하며 혹은 문방사후, 사보라고도 한다. 문방사후란 것은 사우를 의인화시켜 각각 벼슬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문인의 서재를 문방이라 하고 수업의 장으로 존중해왔으며 문방구를 애완 하는 역사는 한·위·진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으나, 남당의 이욱이 만들게 한 이정규묵·남당관연··오백현의 붓은 남당4보라 부르고 문방구 역사의 기초를 이루었다. 송대에 이르러 이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고, 종류도 연적·필세·도장 등 45종에 이른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이 이미 610년일본에 건너가 채색종이·먹의 제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 문방의 역사를 말해준다. 붓: 짐승의 털을 추려서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竹管)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킨 것으로 호(毫)의 끝을 봉(鋒), 호의 끝부분 반을 전호(前毫), 그 필두(筆頭)까지의 짧은 털은 부호(副毫)라 한다. 털로 된 모필 이외에도 죽필(竹筆)·고필(藁筆)·갈필(葛筆) 등 특수한 것이 있다. 호는 주로 토끼털(紫毫라고도 함), 양털을 비롯하여 이리·너구리·사슴·족제비·말·고양이·노루등의 털과 쥐수염·닭털·태발(胎髮) 등으로도 붓을 맨다. 털이 부드러운 붓을 유호필(柔毫筆), 탄력이 큰 털로 맨 붓을 강호필(剛毫筆)이라 하고 유호에 강호심(剛毫)을 박은 것을 겸호필(兼毫筆)이라 한다. 또 털의 길이가 긴 것을 장봉(長鋒), 짧은 것을 단봉(短鋒), 보통의 것을 중봉(中鋒)이라 한다. 토끼털은 중추(仲秋) 무렵의 것을 상질로 치고, 사슴털은 여름 것을 취한다. 필관은 대개 대나무를 쓰지만 나무·골각·보옥·금은·도자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먹:먹[墨]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漢代) 초라는 정설이 있다. 붓은 진대(秦代)의 몽염(蒙恬)이, 종이는 한대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나, 먹의 발명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붓을 쓰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먹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를 골편(骨片)이나 금석(金石)에 새겼다. 이를 갑골시대(甲骨時代)·금석시대라 한다. 그 후 인지(人智)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나무 조각이나 나뭇조각 또는 천 등에 문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한다. 당시 죽간에 쓰던 것은 붓이 아닌 죽정(竹挺)이란 것으로 옻[漆]을 묻혀 썼다. 그래서 그 문자의 획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 하여 죽첩과두문자(竹牒??文字)라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쓴 글씨도 모두 이 죽간칠서(竹簡漆書)였다. 견백(絹帛)이란 천(명주)은 종이보다 다소 먼저 발명되었다. 죽간시대에 이미 명주에 글씨를 썼으며, 이 글씨는 붉은 단서(丹書:붉은 광석이나 돌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을 붓에 묻혀 쓴 글씨) 아니면 검은 묵서(墨書)였다. 이때 묵서의 원료는 자연산 석날(石靭)이라는 일종의 광물이었다. 석날이란 오늘날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黑鉛)의 일종인 듯하며, 거기에 옻을 섞어서 썼던 모양이다. 그 후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그을음, 즉 연매(煙煤)를 옻 대신 썼다. 이어서 아교풀과 섞어 쓰게 되면서 드디어 제묵(製墨)의 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한(前漢)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먹은 만들지 못한 듯, 당시에 쓰였던 얇고 편편한 벼루와 마묵구(磨墨具)가 낙랑채협총(樂浪彩瑩塚), 그 밖의 한대(漢代)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25∼220년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이의 발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송연묵(松煙墨)을 생산하였고, 유연묵(油煙墨)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남당(南唐)의 후주(後主)가 먹의 사용을 장려하여 이정규(李廷珪)와 같은 유명한 묵공(墨工)이 나왔고, 그 후 송(宋)·원(元)·명(明)·청(淸)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묵공이 배출되고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한국의 제묵 연혁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며,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격(品格)이나 질이 매우 좋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묵(朝鮮墨)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먹은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먹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제지법과 제묵법을 610년에 전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자신들도 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의 먹을 수입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한다. 종이: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하여 만든 양피지(羊皮紙:parchment),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깎아서 만든 것과 같은 것들은 모양과 용도가 같아도 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제2의 종이'나 '제3의 종이'라고 하는 레이온·합성섬유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 모양으로 만든 것들도, 종이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종이관계 국제회의에서 여러 차례 논의한 바, 그것들을 종이의 범주 안에 넣어 취급은 하지만 종이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식물의 섬유를 원료로 한 것'으로 결정하였다. 종이는 크게 한지(韓紙)와 양지(洋紙)로 나누며, 한지는 수록지(手질紙)와 기계지(機械紙)로, 양지는 종이(좁은 뜻의)와 판지(板紙)로 다시 나눈다.양지의 주된 원료는 목재펄프이며, 한지는 닥·삼·마 등의 인피섬유(靭皮纖維)를 원료로 하여 사람의 힘으로 제조되었으나, 근래에 와서 목재펄프를 섞어서 기계를 사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양지와 한지의 구별은 점차 애매하게 되어 가며, 제품의 외관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지의 종이는 섬유를 단층으로 조성하여 만들며, 판지는 지층을 여러 겹을 조성하여 물을 머금은 상태에서 압착함으로써 섬유가 서로 엉겨 붙도록 하여 만든다. 그러나 종이의 두꺼운 것과 판지를 외관상으로 정확하게 구별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종이의 두께는 g/㎡로 표시하는데, 이는 1×1m짜리를 저울에 달았을 때의 결과값을 말하며, 거래 단위는 관례상 t(M/T)을 사용한다. 벼루:간다는 뜻에서 '硏'자를 동의자로 쓴다. 대개는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 도연(陶硯)도 있고 옥·유리·비취·수정 등 보석류라든가 금·은·동·철·목(木)·죽(竹) 등으로도 만든다. 형태는 직사각형·사각형·원형·타원형·풍자(風字)형 등이 있다. 물론 다른 의장(意匠)으로 만들어진 것도 더러 있다. 먹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堂), 또는 묵도(墨道)라 하고 갈려진 먹물, 즉, 묵즙이 모이도록 된 오목한 곳을 연지(硯池), 또는 연홍(硯泓), 연해(硯海)라 한다.벼루가 구비하여야 할 첫째 조건으로는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