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화운동·의료선교 헌신한 이건오 장로 소천
포항성시화 씨 뿌려… 각종 홀리클럽 결성 주도
말기 전립선암으로 경기 안양서 하나님 품에 안겨
세계성시화운동과 의료선교에 헌신해온 이건오 전 한동대 선린병원장(서울시민교회 장로)이 4일 오후 8시 37분쯤 81세 일기로 소천했다.
이 전 원장은 10여 년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오다 최근 안양샘병원으로 옮겨 입원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포항 교계인사들은 “포항성시화의 씨를 뿌리고 기관장홀리클럽과 성시화운동본부 등을 출범시키는 등 성시화운동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분”이라며 애도했다.
고인은 1962년 부산대 의과대 의학부를 졸업한 뒤 가톨릭대 의과대학원 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부산침례병원과 고신의료원 수련의 등을 거쳐 해군 군의관, 서안복음병원 원장, 한동대 포항선린병원장, 인산의료재단 선린의료원장,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장, 북한의료선교위원장, 고신대 의대 교수, 기아대책 이사,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등을 지냈다.
또 CCC 아가페의료봉사단 고문, 성산 장기려 선생 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및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이사를 역임했다.
고인은 장기려 박사의 제자로 평생을 의료선교를 통한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헌신했으며, 병원장으로 재직하는 곳마다 의사와 간호사들을 의료환경이 열악한 해외 여러 나라로 파송해 의료선교사역을 감당했다.
한동대 선린병원장으로 부임한 뒤 포항에 성시화의 씨를 뿌렸다.
당시 정장식 포항시장과 함께 기관장홀리클럽을 결성한데 이어 성시화운동본부 출범에 기여했다.
펑신도홀리클럽과 언론인홀리클럽 성경공부를 10년 가량 지도하며 성시화의 일꾼으로 세웠다.
고인은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피스메이커가 수여하는 피스메이커상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5호실에 마련됐으며, 입관은 6일 오후 2시 30분, 발인은 7일 오전 8시, 화장은 서울추모공원, 장지는 7일 오전 10시 10분 용인공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장연수(장내과의원 내과전문의)씨와 아들 이상우(안전성평가연구소 연구원), 딸 이현주(안과의사)·이현경(특허정보진흥원 연구원), 며느리 박이레씨, 사위 강석범(국립암센터 산부인과 전문의)·이주영(안양샘병원 내과전문의)씨가 있다.
도충현 지도자홀리클럽 총무(포항중앙교회 원로장로)는 “제1회 세계성시대회를 포항에서 열 수 있었던 데는 이건오 장로님의 역할이 컸다”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성시화운동에 헌신한 장로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고인의 소천을 아쉬워했다.
언론인홀리클럽 회원들은 “언론인홀리클럽이 출범했던 2003년 9월 1일부터 장로님께서 선린병원을 떠날 때까지 10년 가량 언론인홀리클럽 회원들에게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제공하며 지도해 왔다”며 “장로님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으로 지역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고인은 고교 1학년 가을에 친구들에게 떼밀려 동네에 새로 생긴 교회에 출석했다. 교인이래야 20명 정도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전도사님의 가르침은 매우 강하고 뜨거웠다. 교회 안에 학생회를 만들었고 성경과 기도를 배웠다. 어느 늦은 여름 날 밤, 처음으로 전도사님을 따라 철야기도를 드렸다. 그날 밤 그의 죄들이 파노라마처럼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고3이 되었을 때 신학교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가 족보에서 파버리겠다는 준엄한 질책을 받았다.
전도사님으로부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그때에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신학교에 가도 된다란 조언을 받았다.
그는 고3이었지만 작은 시골 교회의 교회학교 부장과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모든 교회학교 예배 인도는 그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수요일 저녁 교회학교 설교를 맡았다. 교회학교 설교집 중에서 설교 하나를 골라들었다. 한 의사가 무의촌에서 주민들을 섬기며 전도하는 간증이었다. 그 순간 ‘누가 이 의사와 같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그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는 설교하면서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은 시골 소년에게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의대를 가게 하셨다. 대학에서 김준곤 목사님을 통해 신령한 꿈을 품으며 신앙의 잔뼈가 굵어졌다. 민족을 가슴에 품게 되었고 세계 열방을 향해 눈이 뜨이면서 선교의 거룩한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의사로 성장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장기려 박사를 만나게 해주셨다. 그분은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또 주어서 자기 집 한 칸도 없으셨다. 그래도 죽음을 앞두고 “간디는 물레 하나만 남겼는데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배웠고 전인치유라는 소중한 개념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스승님들을 통해 그의 내면은 그렇게 영글어갔다.
그는 지구촌의 모든 족속을 향한 거룩한 부담을 갖고 의료 선교 사역을 도왔다.
한동대 선린병원장으로 부임한 뒤 그 병원을 선교 기지 병원으로 만들었다. 꿈도·소망도 없던 시골 소년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그 은혜 때문에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주고 싶은 열망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문의 : 02-3010-2000(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언론인홀리클럽 공동취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