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3장
1.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1-9)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고대하십니까? 12: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의 사람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된 심령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된 심령에서 나오는 것은, 찌른 바 그를 바라보며 애통하는 간구입니다.
그리고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기서 선지자가 말하는 그 날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러면 이 날을 사모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간구가 있는, 새롭게 된 심령의 사람입니다. 곧 심령이 새롭게 되어서 자신의 구원자로 오신 그분을, 찌른 자임을 보게 된 그 사람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말씀에 소망을 두고, 그 날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러한 말들이, 이미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그 날은 이미 이루어졌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더러운 죄가 씻겨졌기 때문에, 또 다시 그 날을 바라보고 사모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에게 그 날은 이루어진 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선지자가 말하는 샘은 열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한 샘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모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같이 우리에게서 보게 되는 죄로 인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샘이 열리지 않았다면, 우리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하며, 예수님의 오심에 깊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예수님에게서 자기 일을 구합니다. 모든 간구가 세상에서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찌른 자라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그 같은 말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죄와 더러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러움을 씻어 주는 샘은, 이미 말라버린 웅덩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웅덩이에서 샘이 솟아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솟아나기를 고대하고, 성공과 부가 솟아나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더러움을 씻어 주는 샘이 아닙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오심으로 되어진 은총의 사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로만 예수를 부르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심령이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심령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고난의 길을 가시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심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현대 교인들은 자신의 욕망에 버무려진 종교성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몇 가지의 종교 행위만을 신앙의 근거로 삼은 채, 오로지 자신을 위한 종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샘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와 더러움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찾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렸음에도, 유대인들은 그 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샘을 따로 갖고 있는 것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스스로, 죄와 더러움을 씻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율례고 법도였습니다.
정결 규례대로 손을 씻고 음식을 먹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우물이 있는데, 남의 집의 우물에 가서 물을 떠먹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렘 2:13절에서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작 생수의 근원으로 오신 분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두 가지 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에 불과합니다. 웅덩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스스로 판 웅덩이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신앙생활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자기만의 샘을 가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샘은 죄와 더러움을 씻어 주는 샘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샘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거짓된 것은 반드시 드러나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4-6절에서는, 거짓된 것이 드러나는 그 날이 되면, 선지자는 자신이 선지자인 것을 감추게 된다고 합니다. 자신의 거짓이 드러났으니, 선지자로 행세했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우상을 섬기는 방식을 본받아서, 자신을 자해하며 하나님을 불렀던 상처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신앙의 돈독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팔에 난 상처는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친구 집에서 받은 상처로 숨긴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러한 상처가 전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진리의 말씀이 전파됨으로, 참된 것이 무엇인가가 드러났습니다. 참된 것이 드러남으로, 자연히 거짓된 것의 정체도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참된 것을 외면하고, 거짓된 것을 추구합니다. 거짓된 것이 여전히 참된 것의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거짓된 것이 무엇인지가, 확연히 드러날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세상이 핑계할 수 없고, 거짓된 것을 따랐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숨기에 바쁜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이를 때까지 성도는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배우고 깨달으며, 그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나는 성경에서 진리를 보고 배우며, 오직 그 길만을 가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변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외로운 길이라고 해도, 참된 길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 길은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8-9절을 보면, 2/3는 멸망하고, 1/3은 남는다고 합니다. 지옥 갈자가 2/3, 천국 갈자가 1/3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문자대로 세상 사람들 2/3가, 지옥 간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천국 갈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수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가 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다수가 가는 길이라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더군다나 남은 1/3은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을 받습니다. 연단을 받는다면, 그 모습은 초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여호와를 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죄와 더러움을 씻어주는 샘으로 오신 예수님께 나오며,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간구하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은, 우리의 성공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더러움으로 애통해 하고 고백하며, 은혜에 감사하는 그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