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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3)】" 저 사람이 메시아인가? "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3
저 사람이 메시아인가?
자기네 예배당에 아주 참 거룩하게 두던, 그 진정하게 생각하는 두루마리도 끄집어내서 보여주고 뭐 그럽디다마는, 그 다음에 유대교도 책도 이렇게 큰 책을 보냈고. 지금도 무슨 병원에서 있을 땐 세미나 하니 오라고 하고. 갈 리도 없지마는 그래도 잊지 않고 명부를 기록해 두었으니까 잊지 않고 보내는 그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아! 그 참 놀랍다! 그리고 미국 가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을 들어도 유대사람들은 거 아주 매서운 사람들이라는, 결혼을 해도, 결혼도 꼭 그 유대사람으로서의 그 목적을 잃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기네의 사회전통을 어떻게든지 유지해 간대요.
그래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라 그러긴 그럽디다마는, 일전에도 이 사람들 놓라, 안놓라고 그래. 그렇게 메시아사상이 중심이 돼. 아, 이제 그 얘기. 그래 가서 솔직히 물었지요. 그래, 나는 기독교, 당신들은 여기 유대교라고 그러는데, 기독교에서는 메시아가 예수에게서 곧 시행되어 왔다고 보지. 당신들은 아직도 안 왔다고 그러지 않소? 그 점에는 어떻게 생각을 하우? 그러니까 아주 달라진 거야. 근데 유대교에도 그렇게 아주 보수라면 보수적인 사람인데도, 거기도 이제 리버럴한 사람,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들 있고, 또 아주 보수적인 사람 있고 그래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좀 리버럴하니까 그랬겠지.
곧 벌써 하는 말이 뭔고 하니, 메시아 옛날에는 예언자라고 그러면 그건 뭐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래 생각합니다만, 옛날엔 예언자라고 그러면 개인이 왔지만 말이야. 이다음에는 개인이 되겠는지, 혹은 단체가 되겠는지, 그건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요. 그런 말 곧 해요. 그렇게 해서 꼭 온다고도 안하고, 안온다고도 안하고, 그 점은 그렇게 피한다며 말을 하고 말긴 맙디다. 그래도 대체로 말하면 유대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생각을 안 하니까 아직도 기다린다고 그러겠는데. 그럼 이들도 열심히 기다리는 거는 있어. 그래 구약에서 이렇게 역사를 보면요, 시대 시대가 늘 저 사람이 메시아인가 저 사람이 메시아인가, 그렇게 봐오지 않았어요?
그래 어떤 때는 무슨 사무엘이라든지, 가령 유명한 선지자 엘리아라든지,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닌가, 그렇게 봐요. 사사시대에는 뭐 드보라가 저 사람이 아닌가? 힘만은 세게 썼어도 삼손 같은 사람도 저게 메시아나 아닌가? 그렇게 기대를 하리만큼 기다렸어. 그다음에 사울이 난다면 물론 사울 저 사람이 세상을 구원할 줄 알았다가, 거기서도 그만 낙망을 하고, 그럼 그다음에는 다윗인가? 다윗은 지금까지도 다윗인가, 그랬다가 그것도 안 돼. 그럼 솔로몬인가? 솔로몬까지 내려가면 그만 그놈의 나라 다 망하고 깨지고 말잖아요? 그다음 이제 남북으로 갈려 놓고, 또 그 다음 붙들려가고 뭐 이래. 그럴 때에 한편으론 그렇게 많이 기대가 깨지기도 하면서도, 그래도 그게 그냥 계속을 해 왔어. 고레스왕을 보고도 저 사람이 메시아가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가. 그래 오늘까지 이제 옵니다마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를 저 사람이 메시아다, 이러고 있는데도, 저렇게 기적을, 놀라운 일을 할 땐 보통 사람이 아닌 게 아닌가? 어떤 사람은 또 그렇지 않다, 자기가 드디어 하나님 메시아가 어디 그럴 수 있나? 그러고 이제 어떤 사람은 기라하고, 아니라 하는데, 의견이 갈렸는데, 그러면 그것이 사람을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속에서도 마음이 갈려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이제 이렇게 되는 이런 마음씨가 그때 사람들로써의 고민이 있었던, 요새의 우리의 말로하면 민주주의가 옳은가? 공산주의가 옳은가? 그 문제가 그렇게 표현되는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는 주로 그걸 정치로만 생각을 하지만, 그 때에는 그 우리에겐 지금 정치가 전부 아니에요? 에브리씽(everything)이요. 뭐 정치면 다 인줄로 알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만, 그때는 또 종교면 종교가 다 인줄 아는 시대 아니에요? 그랬던 때니까 그때 저 사람이 메시아인가? 아닌가? 하는 거나 요새 사람들이 공산주의면 살아갈 수 있을까? 민주주의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는 모양으로 현대에 우리의 마음에 갈라진 것 그들의 갈라진 것 갈라진 것은 마찬가질 거예요. 그런데 이제 아까 이 앞에 종교가 어드럴 것인가, 그런 것 참작을 하는데서, 생각을 하는데 참작을 하시오. 그런 말 합니다만 하여간 갈라진 마음인데, 우리 일은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렇지만 지나간 일은 비교적 말하기가 쉬워요. 그런 게 이제 우리 공부하는 소이가 거기 있습니다. 그럼 지나간 것을 거기서 그 때 사람들은 비교적 나의 직접 관계가 안 된 나라는 자아가 직접 관계가 안 되니까 꽤 이렇게 공정하게 비판할 수가 있어요. 그렇하면 그걸 미루어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야 돼요. 그럼 이때 우리가 기독교도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런 말 그래 그 당파적인 그 생각을 가지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또 낙제하는 거니까. 그런 생각은 그만두고 이젠 내가 크리스천이라 해서 그러는 거 아니라, 그때 모양으로 요렇게 놓고 생각을 해본다면, 이들이 왜 실패했나? 마음이 조린다는 건 이제 예수의 하신 일 보면 어딘지 부인할 수 없는데, 그래 여기도 내가 선한 일 했는데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선한 일 때문에 죽이려 하는 게 아니요. 어떻게 당신이 사람이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니까 그래 그러지. 그러구 하지 않아요? 예수의 하신 일 보고는 부인할 수 없는 사람 많이 죽은 사람 살렸지. 병자 고쳤지. 그건 말이 무슨 다른 말 잘못이란 건 이웃사랑 하라는 말 모두 다 말 비난할 거 뭐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점은 인정안할 수가 없거든, 그런데 다만 한 가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데만은 참 이게 용서할 수가 없어. 그 점이 제일 걸리는 점이예요.
그 복이라는 것 뭡니까?
그렇게 돼서 이들이 실패하게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 같은 근사한 거는 실례를 들겠습니다. 여기도 다 그 책을 읽은 이가 계신 줄 압니다만 일본에 이젠 벌써 수 십 년 됐어요. 그이도 이제는 과거인물입니다만, 내촌감삼(內村鑑三) 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교역자 목사님치고는 내촌감삼이라든지, 내촌감삼이 직접 아니라도 구로사키 책이라든지 그러는데 무교회 사람들의 책을 읽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들은, 내 귀로 직접 들은 또 나는 뭐 지금은 반드시 무교회주의라든지, 그런 말도 하지도 못합니다만, 달라졌죠. 하지만 그전엔 그저 무교회라는 자타가 그렇게 하기도 했댔으니까 자연히 그런 말도 들었고, 목사님들도 그래요. 많이 읽는데 내촌이 성경해석이고 말은 다 좋은데 교회 아니라 하는 것만은 딱 틀려먹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역자치고 내촌의 책 안 본 사람은 뭐 안 본 사람 없다면 좀 과한 말이지만, 많이 보고 좋다고 다 인정을 하지 않아요. 그러는데 그 무교회주의만은 틀렸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마치 고추가 좋기는 좋은데, 맵지나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마찬가지로 내촌은 내촌 된 점이 그 점이 내촌인데, 그것인데 말이야. 그게 모순 아니에요? 헌데 그러니까 자연히 그런 사람들이 정말 내촌의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그렇지 않아요. 근데 남의 일이면 알 수 있어요? 하겠는데 우리 자체 자신이 그럴 땐 몰라 그러지. 이천년 전에 예수는, 그 사람은, 사람으로는 괜찮은데 좋은데 말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는데, 안식일을 자꾸 지키지 않고 범하고 그러는데, 그건 안 된다, 이제 이래 걸린 건데, 그 정말 그렇게 믿던 사람들의 그 잘못된 점이 어디 있나 이런 점을 하나 얘기할 수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을 믿는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그러지만은 그 메시아를 뭘로? 그때로서는 부득이 무리도 아니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몰라요. 그때 시대고 하지만 하여간 그 사람들의 주는 생각이 자기네의 요구를 다 만족을 시켜줄 수 있는 사람으로 알고 그래 메시아를 기다려. 메시아를 좋다고 오기만 하면 적국을 다 물리치고 흉년 안 들게 하고 각 사람이 다 제 포도원을 가지고 먹고 살 수 있고, 사회에 모든 모순이 없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 그런 의미의 요새 말로 이상적인 성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 그런 사람으로 알고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아요? 근데 거기가 그럴 것 같으면서 틀려먹은 데가, 거기가 거기라고 이제 틀려먹었다는 걸 누가 비로소 말하냐 하니, 예수에게 와서야, 예수님에게 와서야 그게 분명해져 말씀하는 건데 말이야. 그전까지는 그러한 의미의 메시아를 기대해도 그것이 별로 잘못인줄을 생각 못해, 다 그래 왔으니까, 구약을 읽어보면 죽 그렇잖아요? 그러니 이사야 같은 사람은 훨씬 내다보는 사람이니깐, 벌써 더구나 제2이사야 그중에서도 53장 같은 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고 그럽니다만, 그런 사람들은 생각이 앞섰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사야에서만은 많이 읽고, 많이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게 실지로 이사야에게는 생각 정도로 있었던 것이, 예수님한테 훨씬 더 밝아져 가지고, 아주 나셨던 것이 예수님의 그 생앤데, 그러니깐 그런 의미로 하면 메시아관이 메시야가 예수님에게 와서 많이 아주 근본적으로 달라져. 혁명이 됐다.
종래에 있던 그런 그 메시아에서 탈피를 해가지고 달라져,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 그것은 아까 말대로 사회정도가 인간의 정도가 그런 거니까 종교 일반이 다 그렇던 때니까 무리도 아닐 거예요. 하지만 그 정도를 못 면했어. 그러니까 그거는 무리도 아니라고 하지만, 깊이 있게 가만히 반성을 해들어 가면, 사실은 하나님을 믿은 것 아니고 자기네 욕심, 그래 바울이 우상은 욕심이요, 우상이라고 그러잖아요? 우상이 어디서 나오냐 하면 자기네 요구를 다 만족할 수가,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게 하고, 입고 싶은 대로 입게 하고, 적군을 다 물리치고 모든 문제를 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거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어느 그 무엇을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예수님의 이것을 가지고 지상천국을 건설한다, 그런 식의 발표들은 이름은 달라도 마찬가지지. “하늘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가지고 땅에서도 임한다.” 그건 옳습니다. 그런 줄 알지만 그런 것은 소위 말하는 지상천국이라 하는 사상과는 달리 생각을 해야....
오늘은 뭐 그 문제만을 토론하지 않을랍니다만, 말하자면 이제 그때와 비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듯이, 그 사실이 지금도 계속이 돼 그러니까 그건 이름을 붙여서 한다면 옛날의 종교를 일관으로 했습니다만, 그건 복의 종교, 복을 줍시사, 복을 줍시사, 그래. 자꾸 하나님더러 복 달라는 겁니다. 우리 옛날에도 그건 마찬가지 아니에요. 동양, 서양 할 것 없이 부처님한테 가서 빌고 할 때, 그저 복 달라고 하는 거. 그러면 그럴 거예요. 그럼 예수님은 복 얘기 얼마나 하지 않았소?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 8가지, 9가지로 복이 있다는 말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거예요. 그래 나는 날더러 설명을 하라면 그렇습니다.
그 예수님의 복이라는 건 신통이, 신통이 다 복이 아니야. 그게 그 혁명한 데예요. 그때 사람들이 종교라는, 하나님이라면 왜 믿나? 하나님이라면 복 받을라고. 지금도 그 정도를 못 면한 사람이 있어. 왜 교회에 오나? 왜 믿습니까? 예수 믿고 복 받으시오. 그럼 그 복이라는 거 그럼 뭡니까? 그러면 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공장 잘돼 갑니다. 우리 교회 헌금도 많이 들어오고 자꾸 발전합니다. 그런 식이 다 그게 있는 거예요. 어디 예수님의 생각에 그런 식의 사상이 있습니까? 첫 번부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예수의 사상이 그렇게 그 점이 아주 달라. 그러니깐 쉬운 말로 한다면 종교를 순전히 정신적인 면으로 끌어. 영적인 면으로 끌어 올린 데가 예수님의 예수님의 된 점 아니야? 메시야라는 것이 이때까지 너는 기다리길 이 따위의 어느 임금으로 온다고 해가지고, 이거 다 만족 시켜줄 줄 그렇게 알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의 약속은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싹이 처음으로 나올 때 이렇게 떡잎이 나오지만, 떡잎을 보고 어 이게 이거겠거니 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야. 조금 있으면 떡잎은 시들어 떨어져 지고, 그 속에서 새순이 나오잖아요? 그런 모양으로 처음에 나올 때에 그건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떡잎 같은 종교에 있어서 그렇게 배우면 사실이지만 조금 사람이 그걸로 깨어나면 그런 거 아니 되겠다, 요거야말로 종교의 알짬이다, 그런 걸 옛날에 있던 이 마술, 요술종교, 매직, 고대종교 올라가면 일반적으로 다 그렇잖아요. 우리나라 것도 그래, 중국의 것도 그래, 바벨론이라 그래 매직이 주인데. 그 종교에 비긴다면 모세의 종교가 얼마나 그게 고상한 종교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유대사람들이 모세밖에 없다는 것 무리가 아니에요. 그때 천지에 왼통 종교라면 그 마술이요, 뭐요, 이게 천지인데 그러한 종교 천지에 있을 때에,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가 어떻게 높은 하나님인데, 그게 말하자면 이 나오는 데 그게 떡잎, 이렇게 자엽이 떨어지고 그 속에서 새, 정말 진짜 잎이 나오는, 그렇게 오기를 수 천 년 끌어오잖아요? 하지만, 그 잎도 진짜 잎이 아냐. 그 뒤로도 많아. 그다음엔 그 속에서 또 다른 거 또 올라오지.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시대에 오면 율법 거기다 비기면 그러니까 옛사람이 한 말 너도 들었지마는, 나는 너희에게 이런 이런 것으로 말한다, 그러면 당신 그럼 모세의 율법을 폐하오? 아니 그렇지 않지. 일점 일획도 안 없어지지.
나는 상은 많이 못타 봤습니다.
하지만 내가 완성한다, 완성한다 하는 데서 겉으로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게 진짜 정말 산다, 떡잎이 떨어졌지만 그게 없어진 것 아니야. 뭐 누구, 맥아더가 “노병은 살아지지만 죽지 않는다” 거 재미있는 말 아니요? 그렇지만 시대가 다 그러지. 참, 사라지지 문에서 사라지지. 없어지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매직 종교도 사라졌지만, 곧 그 껍데기라 그렇지. 고 알짬 되는 건 그 다음 종교로 왔고. 그럼 율법 종교라 하는 것도 외형은 어느 시대 변할 수밖에 없어. 눈을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라 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모세가 너희가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부득이 해서 이혼서를 써주고 이혼을 해도 괜찮다고 그랬지만, 근본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고 하는 데가 바깥으로는 부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긍정하는, 또 속으로는 긍정은 하지만 겉에 있는 거로는 적어도 고칠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한다”고 하는 게 자기가 말씀하신 건데, 그래서 메시아관도 아주 달라져. 그 점이 이 사람들이 낙제를 하는, 옛날에 딱 달라붙어 있어. 이건 놔서 이것 놓고는 못살 것 같아. 복 없이는 못살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게 그 시대의 사람으로서는 무리가 아니라 그렇게 동정해 볼 수도 있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인 다음에는 또 그 시대에 있기도 있지만, 어느 시대에 있어도 사람은 자기 시대를 초월해 영원한 것을 알 수 있지. 그 점이 이제 조금 말하기 어려운 거예요. 대체로 보면 “역사는 발전해 간다.” 발전해 가니까 옛날에는 점점 단순한 시대고, 차차 이렇게 시대적으로 발전해 오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옛날 그 단계에 있어서도 사람이 직접, 이렇게 직접 하나님에게 가는 길이 있을 수 있지. 직접 이럭해서 순 정신적인데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지. 역사적인 이 과정을 통해서만 간다, 그렇게는 안 돼요. 그 말씀을, 뜻을 알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여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각 시대 시대가 인간의 역사로 보면 시대적으로 이렇게 발전이 돼가는 거 있으니까 종교는 종교대로 발전적인 그러한 우리가 체험을 해야 돼요. 그런 의미로 보면 옛날의 미신이라는 거 다 의미가 있어요. 살려줘요. 내가 그대로 믿지 않지만, 그렇게 하지. 그런다 해서 옛날 사람은 그럼 순전히 그 준비시대에만 있었고 지리를 도무지 몰랐다, 그렇게 안 돼. 단순한 그 시대에 있어서도, 그 시대에 있는 그 상태에 있어서도, 직행해서 곧 순수하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가능성이 있지. 그 시대는 그 시대답게, 어린애는 어린애답게, 곧 그대로 벌써 그 다음에 순전히 다섯 살, 여섯 살 된 그때 있어서도, 벌써 거기서도 사람의 사람 된 그 점을 실지 체험할 수 있는 그 가능성이 있지, 없지 않아요. 소년은 소년시대, 장년은 장년시대, 또 이 일생 전체를 보면 전체가 자라온 거고 그러니깐 양면이 그렇게 둘이 있다 하는 면을 인정 안할 수가 없습니다.
시대적으로 이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할 수 없지 해서 용서해서 낙제를 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줄 수가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너무 잔혹하게 가혹하게 생각을 해서, 그들은 도무지 아주 전연 아닌 것처럼 그래서도 안 되고, 그들에 동정을 하면서도 그들의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점이 뭐였던가? 어떻게 하면 됐던가? 그걸 찾아내서만 오늘날 우리의 자리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비판해서 우리로서의 갈 길을 찾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그 자리가 돼서 생각을 하면 뭔고 하니 그거예요.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메시아를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목적, 욕구에 만족을 위해서, 그 한 욕구 만족시켜주는 이로, 그래 그러니까 언제든지 보다 더 낫게 더 시켜 준다는 사람이 오시면 버릴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아냐. 종교로도 자꾸 개종하는 사람들이 그래. 이게 믿으면 날까 했다가 만족이 안 되니까 또 그다음엔 저리로 가고 저리로 가고 그러지 않아요? 우리나라에서 난 못 봤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아마 그런 일 더러 있을 거예요, 일본사람들은 좀 그러길 잘하지요. 오지조사마라고 동네 어귀에 가면 돌로 이렇게 뭐 만들어 놓은 것 많이 세워놨어. 거기 가서 빌거든. 빌 때는 열심으로 빌어요. 뭐해다오. 뭐해다오. 열심히 빌다가 빌다가 안 되면 새끼로 매서, 모가지 매서 저리 끌어다 내쳐요. 일일이 그까짓 것도 못해주는 놈 어디서 설 일이 없다고. 그런 건데 그런 게 소위 옛날의 종교에 전형적인 거예요.
근데 예수님에게 오면 그런 거 아냐. 하나님이 아버지니까 믿는 상으로. 그런 의미로 하면 지금도 오늘 어찌 그리 초보적인 어린애 같은 신앙이 있나? 천당을 간다니깐 믿는다든지. 무슨 금면류관을 준다니깐 믿는다든지. 가면 상품 많이 있다니깐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게 그때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래도 무리가 아니었어요. 소학교시대 우리가 공부만 잘하면 우등상을 주는데, 그게 좋아서 좋아서 공부했던 게 무리도 아니지만, 그것은 한 때 우리 마음이 그 정도밖에 못되니까 그걸 개발을 시키느라고 그랬지.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쯤은 이제 이제쯤하면 알 거예요. 이제쯤만 아니라, 그때 있어서도 그 받는 애가 참 옳게 생긴 애면 상을 목적으로 하질 않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난 상은 많이도 못 타봤습니다. 더러는 타보고도 싶다 그랬습니다만 나 어린 적에 생각에도 그래 실지 정말 그럽디다. 상을 나와서 받으라는데, 그 동무가 다른 애 못나오는데 미안해서 안됐던데, 그것만 보면 특별히 잘난 마음 아니래도 벌써 애 마음에 솔직한 마음엔 그게 있어야하는데, 그런데 이 사회가 이 어른이라 하는 것들조차도 상을 타면 으쓱해져. 그걸 자꾸 높일려고 하는 데가, 어린애 마음도 그게 아주 제 본심이 아닌 틀려먹은 마음입니다. 그건 요다음 단계입니다만 이들의 종교사상이 그렇게 낮아. 낮을뿐만 아니라 자기네 딴 목적이 있어 가지고, 거기 깨지는 데야 말로 종교야 하겠는데, 그걸 면치 못하고 그걸 만족을 시켜준다니까, 그래 고맙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그걸로 인해서 예수님이 보면 어느 면 그렇게 될 것도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그 점에 있어서만은 놓지를 않아요. 이제 그래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종교의 아주 기본이 되는 점이, 우선 내집어 던지는 것 그게 영어로 리넌시에이션(renunciation) 이라는 말 있습니다만, 불교에도 따지고 들어가면 리넌시에이션, 기독교도 리넌시 내버린다, 일체를 내버리는 것, 일체를 내버리는 것, 내버리다가, 내버리다가, 자기 자신까지도 내버리는 것인데, 그게 종교의 아주 기초된 첫걸음인데 말이야.
하나님이라 해도 좋고 진리라 해도
이들은 그 생각에 내버릴 생각을 안 해. 자기 껀 꽉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하고 이건 밑질 생각은 안하니까 그렇게 하곤, 저 사람이 잘 우리의 기대를 만족을 시켜주겠나 하면, 그러니까 어느 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참 마음이 그래서 괴로워.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말을 할 수가 있고, 또 같은 말입니다만 그 다음은 뭔고 하니 이제 종교가 그런 종교니까 말이야. 이들이 찾긴 찾지만 찾는 것이 늘 밖에 있어. 이제 오늘은 우리 생각을 한다면 주 중심은 거기 두고 싶습니다. 찾는 태도가 밖에 있어. 하나님이라고 해도 좋고, 진리라 해도 좋은데, 하나님이 저기 있어. 진리가 저기 있어. 그래 왜 내가 이렇게 밖에다 두고 찾는 그 태도 그랬기 때문에 이게 종당 예수님의 말씀을 못 받아들이게 되는 원인 아닌가?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 말씀에 그런 말도 있지 않아요? 메시아는 언제 옵니까? 그렇게 물으니깐 여기 온다 저기 온다 할 수도 없고 언제 온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씀 아주 분명히 그런 말씀해 주셨는데, 그럼 대개 그걸 보면 예수님의 그 생각하신 거 어떤지 짐작 알 수 있어요. 또 다른 데도 말하면 이것도 두 번 세 번 있는 말입니다만, “때가 오려니와 지금도 그때라.” 그런 말 그런 거 보면 예수님의 시간이라는 관념이 어드런 건지, 메시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보통사람이라는 건 어드런고 하니 아무래도 메시아가 어디에 오나? 여기로 오는 건가? 저기로 오는 건가? 또 어느 때에 올까? 금년에 오나? 내년에 오나? 시간과 장소에다가 이렇게 못을 박아놓고, 거기 어디 오는 거 그러니까 쉬운 말로 해서 바깥에, 외적인 조건으로 생각을 하고 메시아를 기다려. 기다린 건 좋았는데 그런 걸 면치를 못했어. 그런데 메시아가 그렇게 올 수가 있나? 그렇게 올 수가 없어. 왜 그런고 하니 만일 어느 곳에 온다, 어느 곳에 온다, 또 어느 시간에 온다, 그런다면 어느 곳에 오면 어느 곳엔 못 올 거다, 어느 곳에만이 아니라 그곳을 내놓고 다른 데는 못 올 거 아니에요? 또 어느 시간에 왔다고 그런다면 그 다음 시간엔 안 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뭔고 하니 그럼 예수 태어나기 전 있던 사람들은 지옥 가겠습니까? 천당 가겠습니까? 그런 문제 제법 그럴듯한 문젠데, 질문인 것 같지만은 조금 깊이 생각하면, 그건 문제 안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라는 건 시간 공간이라 하는 여기다 딱 못을 박아놓으니까 예수 나시기 전에 있던 사람들이야 “천하인간에 이 이름만 부르지 다른 이름은 구원을 못 얻는다”고 그랬으니까, 그전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리 성인이라고 해도 그건 별 수 없습니다. 지옥 갑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런 게 다 잘못 생각하는 데서 메시아라 하는 거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를 구간해 정해놓으면, 메시아에 메시아가 메시아가 될 수가 없어요. 저번에 우리에게 우주 뭐 때문에 왔던 뭐지? 그 사람들이 뭐랬지? 그 재미있는 말 아니에요? 나는 이제 아폴로 10호 사람들이 올라가서 하나님 안 만나길 바란다, 왜 만난다면 하나님이 아닐 꺼다, 옳지요. 옳은 말이에요. 어디서 만날 수 있는 이라면 하나님이 될 리가 없어요. 그럼 나보다는 조금 클런지 몰라도 그것도 형편없는 사람이지. 그러게 아까 우주인 얘기했습니다만 별 수 없어. 더러운 얘깁니다만 입으로 먹으면 똥이 나오는 우주인이 될 리가 없지. 그러니까 사람이 마지막까지 그걸 못 면해. 마지막까지 그걸 못 면하는 데가 그 아주 우리에 뭐라 할까 애석한 곳이에요. 아 어지간히 다 잘났는가 말이야. 어, 여기다 훈장을 잔뜩 달고 뭐 어쩌구 그러지만 말이야. 변소 간에 가 앉으면 그 꼴을 해도 그 꼴이야. 그러니까 될수록은 다른 사람 보는데 똥은 안 누는 것처럼 하고 다니지만,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저는 저를 속일 수 없지 않아요? 자기가 변소 간에 가서는 아니 겸손해 질 재주가 없을 거예요. 그런 것은 인간으로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 조건을 남겨주는 것은 요렇게 해서라도 네가 좀 어디 못생긴 물건인 줄 좀 알아봐.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가 앉아서 그렇게 하는지 않그러는지 모릅니다만, 적어도 인간인 데면 그렇게 생각을 하면 그 의미가 있지 않아요? 사람으로서 그래 우주까지 갔다 하면서 똥을 마지막에 싸가지고 도로 우주로 돌아온대요. 비닐주머니에 넣었다가 말야. 도로 돌아온대요. 그러니 뭐 잘났냐? 그 과학문명이라고 그러지만 어디 똥처분 하나 거기서 안에서 못해서 왜 이러냐? 그러겠지만, 다행히 그런 까닭에 인간이 인간인줄을 알고. 그것까지 할 수 있냐하면 이 사람들이 방향무인일런지 몰라요.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겸손을 유지하지 않을까? 인간으로서의 겸손이 조금 있어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넘어가는 게 지독하게 나가지 않을 것 아닐까?
이들에 그 메시아 찾는 태도 진리 찾는데 바깥에 있어요. 찾긴 찾지만 그게 잘못이야. 예수님이 이들과 다른 건, 안으로 끌어, 안이라. 그래 아주 밝히 말씀하셔 “하늘나라가 너 안에 있다.” 아주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점은 다 일관되게 주의해 보지도 않고 역설을 안 합니다만, 사실 예수의 말씀대로 중요한 말씀은 그걸 거예요. “하늘나라가 너 안에 있다” 혹은 어디서 예배 합니까? 그러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도 말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때가 온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영과 참으로 예배한다.” 그런 말씀이라든지. (녹음3, 3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