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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해설
찬송이 터져 나오다(1): 하나님의 예정(엡1:3-6)
바울이 그토록 찬미의 탄성을 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 특히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체적으로 시행하실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유효적으로 성취하는 분이심을 생각할 때 감탄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내용을 에베소서1:3-14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을 읽으며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에 진술된 내용이 바울의 교회론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변적 언어로 진술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믿는 자들(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본문(엡 1:3-6)은 주로 성부 하나님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찬양하세”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맘모니즘(mammonism)의 노예가 된 대다수의 현대인들은 돈, 명예, 권세, 건강, 출세, 성공, 향락 등 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로는 이런 것들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육신으로는 부인하고 싶어한다. 어떤 불의한 자들은 세상을 좀 시끄럽게 하고 수치를 당하더라도, 그래서 감옥에 간다 할지라도 한몫 크게 챙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물질로는 메울 길이 없는 큰 허공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 허공이 채워질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정상을 회복할 수 있고, 그가 소유한 물질도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본성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다.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에 매몰된 사람들은 허무감과 빈곤감 같은 것이 영적 기갈로부터 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피폐가 물질적 빈곤에 기인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물질로 영적 빈곤을 해소해 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패배감, 좌절감을 이기지 못한 채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만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복”을 추구하지 않으니 불행의 선로(線路)를 벗어날 수 없다. 특히 설교자는 적극적 위치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전달하는 사역자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사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그는 청중에게 천만금의 물질을 안겨주지 못하는 것으로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더 풍성하게 증언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아모스 선지자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한국교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촉촉해진 대지 위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만한 상태인가? 아니면 여전히 심각한 기갈인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시대의 지도자인 양 열연(熱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참조. 딤전 1:7). 성경은 여기저기서 교훈의 기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성숙단계로 나아가라고 가르치지 않는가?(히 6:1-2). 어린아이 상태를 벗고 진정한 어른이 되라고 호소하지 않는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당부하건만, 우리는 과연 명쾌히 간증할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초보 수준도 안 되는 것을, 그것도 부정확한 언어로 반복 또 반복하고 있으니 무슨 준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단지 성경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의 언어와 문맥, 교훈과 메시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 진리에 자신을 믿음으로 결합시켜야 한다(히 4:2).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된 일이라고 짚어 준다. 에베소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 공식구가 장소적 의미를 갖든 또는 수단적 의미를 갖든, “안에서”라는 전치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신령한 복을 베풀어 주신 조건을 가리킨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조건이 아니고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럼 정작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무엇인가? 바울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많은 물질을 받아 부자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아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었는가이다. 사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예리한 구분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모든 물질세계도 영(靈)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양자(兩者)는 신비적으로 결합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인간에게 어떤 복을 가져왔는가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가장 결정적으로 베풀어 주신 신령한 복은 “선택과 예정”이다(4-5절). 이 두 개념은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실재에 대한 두 표현이다. 양자 간에 차이가 있다면 “선택”은 수량적 국면을, “예정”은 시간적 국면을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수많은 인류 중에 선별하였다는 것이고, 예정은 미리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우선 선택사상은 바울신학에서 매우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딤후2:10; 딛1:1도 참조할 것).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하여 이에서 제외된, 유기(遺棄)된 자들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것이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따지는 것은 주제 넘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소환하여 근원적 문제들에 대해 이유를 대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 사이에, 모세와 바로 사이에 선택적 의지를 행사하실 권한이 없는 분이신가?(롬9:7-18).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이나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 것인가?(롬9:21; 참조. 사29:16; 45:9).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 사랑과 공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그리고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믿어야 할 뿐이다. 그리고 유기의 치명적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으로, 예정사상은 바울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 중의 하나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영원 시간계가 무엇이며, 피조 시간계가 무엇이며, 또한 이 두 시간계의 결합의 비밀이 무엇인지 이해할 때 비로소 약간의 답을 얻을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바울의 가슴을 쾅 하고 울린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의 예정 이 양자(養子) 신분 획득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절; 비교. 롬8:14-15).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양자(養子)됨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하고, 포괄적으로는 구원받음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숙명론 또는 운명론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정 시점이 “창세 전”이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고정된 시간 트렉(track) 안에 갇히신 분이 아니다. 그는 피조시간계 너머, 초자연적 영원한 시간 속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모든 예정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의와 사랑으로 충만한 만유의 주재이시기에 그의 기쁘신 뜻은 모든 신령한 복의 궁극적 근인(根因)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숙명론이나 운명론 같은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역동적이며,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그의 예정을 따라 인간사를 이끌어 가신다. 세상사가 아무리 가변적이고 예측불허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영원한 예정을 따라 역동적으로 인간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예정하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는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믿는 자의 지혜이며 행복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 부어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흑암의 우주 공간을 유리하는 별무리 같은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불신자들로서는 선택/예정을 하나님을 향해 날리고 싶은 비판의 화살로 삼고 싶을지 몰라도,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신을 위한 든든한 반석과 같은 것이다. 구원의 출발점이 내게 있지 않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해설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바울은 왜 선택/예정을 거론했을까? 두 가지로 대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대인들이 선택을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할 때 바울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들임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1세기 유대교가 묵시문학의 영향으로 왜곡된 종말사상 위에서 메시야 왕국의 정치적 성취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종말, 즉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일 때, 바울은 시작, 즉 알파 포인트(alpha point)를 언급함으로써 유대교 사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릇된 종말사상을 교정해 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령한 복의 근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의 궁극적 성취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의 독자인 나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해 보자. 신앙인으로서 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해 터져 나오는 찬송이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3. 찬송이 터져 나오다(2):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만물 통일(엡1:7-10)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평생토록 교회 다녔기 때문이 아니다. 5대째 예수 믿는 집안이기 때문이 아니다. 안수 받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거액의 기부금 출연으로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수십 곳에 개척교회를 세운 공로 때문이 아니다. 수만 명 모이는 대형 교회를 일군 목회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기간에 큰 사업을 일으킨 입지전적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탁월한 설교가여서가 아니다. 21세기 종교개혁자라는 칭송을 받는 자여서가 아니다. 영향력 있는 책들을 쓴 저명 작가여서가 아니다. 불쌍한 노숙자들에게 무수한 날들 밥을 퍼 주고 독거노인들에게 연탄을 날라 준 특급 봉사자여서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여서가 아니다. 남다른 구제 활동으로 진열장에 가득한 감사패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다. 40일 금식기도를 세 차례씩이나 한 기도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고 죄 사유(赦宥)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폐부 깊숙이 침착된 죄의 참상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고 새 영(靈)을 부어주신 것이다. 이 결정적 과정이 없이는 갈기갈기 금이 가서 흉측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받을 수 없다.
많은 사람이 따지고 싶을 것이다. “아니 내가 왜 죄인이란 말인가?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단 말인가?” 바울 사도는 지적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감사하지 않는 것,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 마음이 미련하게 되어 어두움의 지배를 받는 것,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며 오만을 떠는 것, 결과적으로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죄라고 선언한다(롬1:21-23). 타락한 영혼에 군살이 배기고 죄가 자리를 잡게 되면 건전한 종교성과 도덕성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희미한 양심의 울림마저 정지된 채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 부패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창조주 하나님을 팽개쳐 버리고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다(롬1:25). 또 성적 타락 같은 것은 개념마저 지워버리고 동성애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마땅한 사랑의 한 양태이고 성경도 지지해 주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런 모든 행위가 죄라는 지적에 대해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상투적 주장일 뿐, 자신은 결코 그렇게 비난받을 만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바울은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살며 자기들은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어깨를 치켜들고 활보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그럼 왜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남들의 눈을 피해 도둑질하느냐? 왜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한 것으로 여기면서 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하느냐?”고 반문한다(롬 2:21-22).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할 것 없이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부패한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끊임없이 남을 속이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지적한다(롬3:13-15).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인간의 죄악 됨을 지적하는데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성경의 거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항복하자. 죄인인 것을 깨끗이 인정하자. 살 길은 여기서부터다. 자기 합리화만 하려하고, 자기 정당화만 하려 한다면 칠흑 같은 어둠의 벽은 자기를 더 꽁꽁 가두어 놓을 것이다. 죄는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해결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만족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셨다.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 죄를 속량할 수 없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죄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죄란 아차 실수해서 잠시 주저앉았다가 일어서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주먹질을 해대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죄값을 치를 길이 없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려면 누군가가 속전을 내고 자기를 사서 풀어줘야 하듯,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서 죄의 결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도 없느니라”(히9:22, 사역. 참조. 출24:8). 역사 속의 한 지점에 객관적으로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울은 우리가 십자가의 피의 구속(救贖)을 믿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통해 지금 이 땅에서부터 구원을 실현하며 살 것을 호소한다(롬8:1-17).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이 어떻게 인류 구원을 위한 죽음이 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 한 분의 죽음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우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계획하셨고(참조. 창3:15), 그의 속죄의 피를 믿는 자에게 속죄의 은혜를 베푸시고 의롭다함과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대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가 인류 모두에게 죄를 몰고 온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주어 생명과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롬 5:12-21). 이것은 대표성과 연대성의 원리로 답하는 것인데, 아담이 타락한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또한 모든 인류가 아담과 연대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을 대표하고 또한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와 연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罪)나 의(義)가 DNA처럼 유전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죄나 의는 생물학적 유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여 해당 그룹 전체를 통째로 보쌈해 버린다. 아담의 죄는 그의 모든 후예들을 사로잡아 사망으로 이끌어 가고,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의는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사로잡아 영생으로 이끌어간다. 사람들은 보통 가난, 질병, 기아, 갈등, 전쟁, 불화, 신분 등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죄’다. 죄는 인간을 부패하게 만들고, 부패한 인간은 끝없이 참혹한 현실을 만들어낸다. 죄는 인간을 흑암으로 끌고 가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참담하게 만드는 것은 죄와 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믿는 우리에게는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속량해 주신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올려드릴 뿐이다. 이제 8-10절로 가 보자. 이 본문은 독자에게 문맥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왜 바울은 7절에서 그 중요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속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놓고 갑자기 다른 이야기 곧 “하나님의 뜻의 비밀”에 대한 생소한 이야기로 전환하는 것인가? 두 이야기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부조화는 우리를 보다 더 큰 질문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양자(兩者)는 부조화가 아니라 완전한 조화다. 창세 때 아담이 타락의 길을 걸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라. 그의 타락은 결국 창조세계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지 않았던가. 지금 만물은 비정상 상태 곧 썩어짐의 노예 상태에서 허무한 데 굴복하며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지 않은가(롬 8:20-22). 바울이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간결하게 언급한 후에 ‘하나님의 뜻의 비밀’ 이야기로 넘어간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우주적 의미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때문이다. 즉, 그는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온 우주의 회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 맹목적적 묵시문학적 환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우주 만물의 비극적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과 함께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물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비밀스런 의도를 갖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은 신약에서 ‘계시’ ‘공지’ 개념과 맞물려 나타나는 특별한 단어다. 하나님의 만물 회복의 비밀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그 사실 곧 우주적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이란 다름 아닌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avnakefalaiw,sasqai)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해 만물을 통일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피조세계를 하나로 재통합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은 이미 성취되었고, 우리가 알게 되었고, 첫 숟가락을 뜨는 것처럼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 되었다(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의 상태를 능가하는 최상의 질서, 조화, 아름다움, 생명의 충만 상태로 회복시키기 원하시며 십자가를 통해 이 대사역을 이미 시작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그에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신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해결 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죄 사유의 은총은 나 한 개인에게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건이다. 십자가 구속과 죄 사유의 은총은 피조세계 전체의 궁극적 회복을 조망한다. 믿는 자가 ‘나의 구원’ ‘구원의 확신’ ‘내 집’ ‘내 가족’ ‘내 교회’를 마음에 품고 그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관이 너무 협소하고, 때로는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이 어떠하고, 다른 민족의 삶이 어떠하고, 한국 교계가 어떠하고, 이단의 위험성이 어떠하고, 권력 구조가 어떠하고, 국가의 도덕성이 어떠하고, 사회 시스템이 어떠하고, 생태계가 어떠하고, 다음 세대에게 닥쳐올 미래가 어떠하고 등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관심하지 않은가? 우리의 구원관은 달라져야 한다. 눈을 떠서 주변을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고, 피조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피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머리가 열려서 새로운 차원에서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구원관을 지양하고 우주적 구원관을 확립해야 할 때다 4. 찬송이 터져 나오다(4): 성령으로 인치심(엡 1:11-14) 바울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찬미의 환호성을 올렸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때문이었다. 이제 바울은 신령한 복의 세 번째 항목을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의 의도를 따라 예정을 입어 그의 유업이 되었다(11-12절). 여기서 핵심은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 “기업이 되었다”라고 하나 원문상 “유업이 되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것은 클레로오의 수동형 클레로데멘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클레로오는 “몫을 받다, 선택하다, 소유로 삼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수동태가 되면 “~의 몫으로 받아들여지다, ~의 몫이 되다, ~에 의해 선택되다, ~의 소유가 되다”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부르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애지중지하신다. 누가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워 금 100돈의 포상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겠는가? 인간에게 소유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저 집이 누구의 소유인가? 저 땅이 누구의 소유인가? 저 물건이 누구의 소유인가? 글을 쓰는 사람은 볼펜 한자루도 소중히 여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악기를 분신처럼 여긴다. 농사 짓는 사람은 자기 연장을 살뜰히 간수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다면 얼마나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겠는가? 스스로 학대하고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아무데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셨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고, 우리의 행보(行步)와 우리가 하는 말을 아시며, 우리가 하늘 끝에 올라가 있든 어두운 천 길 지하 구덩이로 내려가 자리를 펴든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주한다 할지라도 거기서도 손을 내미시는 분이시다(시 139:2-10). 시편 기자(다윗)는 말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시 139:17).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 “넌 내 거야. 내 사랑하는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산 내 소유야. 내가 책임진다”라고. 그런데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몫이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공적 권리선언 혹은 배타적 권리확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성경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여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바로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이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출 19:6) 곧 하나님 나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성경은 여기저기서 믿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확인시켜 준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9; 참조. 신 7:6; 9:29; 32:9도 볼 것) 지금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체로서 궁극적 완성의 날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다. 요한계시록 1:6; 5:10; 21:1-2, 22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성전의 궁극적 성취로서의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은 근원적으로 자기 뜻의 의도대로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함을 입어 성취된 일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바울은 에베소서 1:5에서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진술한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 대해 그 근원부터 밝혀주는 것은 성경뿐이다. 뿌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실체에 접근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사로잡는 유명 디자이너의 옷이나 1천만 원 이상의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의 장신구로, 자신이 소유한 최고급 승용차나 대저택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위나 경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수 없다. 근원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 그의 영원하신 계획에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계획하시고 당신의 뜻의 의도를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예정하시어 당신의 유업을 삼으신 일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실이다. 신적 작정과 시행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꽃장식 금마차에 바퀴가 없는 것이나 같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작업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자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이시다(참조. 요 1:1-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유업으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미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 필자 사역).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의 소망은 우리에게 용기와 인내를 주며,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하게 하고, 종말론적 확신을 갖고 미래를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소망을 가진 우리를 당신의 유업으로 삼아주신 것은 우리로 그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들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내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 지향점을 알지 못하면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궁사가 화살촉을 과녁에 조준하듯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맞추지 않으면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게 돼 있다.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며 목청껏 구호를 외친다 해도, 자기기만의 잘못된 레일에 올라타게 되면 처음에는 제대로 가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바울의 여러 고백들과 책망이 메아리쳐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고전 9:26)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피곤한 인생살이를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고 빛나는 삶을 설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5. 바울의 기도(엡 1:15-19)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울의 13개 서신서 안에서 그의 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본문들 가운데 하나다. 바울은 여기서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도하는 내용을 직접 보여준다. 물론 기도의 정의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슨 말로 기도할 것인가이다. 기도는 허공에 띄우는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그 언어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기도를 배우는 것, 즉 성경 인물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했는지 배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내가 가르칠 테니 들어봐라’는 식의 기도, 풍부한 성경지식을 과시하는 듯한 기도, 신앙경력과 헌신을 자랑하는 듯한 기도, 온갖 미사여구로 자신의 문학적 감성을 뽐내는 기도, 뛰어난 구변으로 대중연설을 하는 듯한 기도, 푸념인지 넋두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기도, 남을 탓하며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 같은 기도,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인신공격성 기도, 하늘 곳간을 열어 소나기처럼 쏟아부어 달라고 하나님께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 기도, 신세 한탄 조의 기도, 회개인지 변명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도, 겸손히 간절하게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을 소환해 놓고 윽박지르는 듯한 기도···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기도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예수께서 왜 제자들에게 “[너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사역을 기도로 시작하였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공문서까지 구비하고 조직을 동원하여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그리스도가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라고 하실 때, 그는 벼락을 맞는 듯한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온몸에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바울은 하늘에서 내리찍듯 자신에게 꽂히는 강한 빛으로 인해 시력을 상실하였고, 얼마 후 아나니아의 안수로 회복되었지만, 동행자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다메섹에 들어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당시 그는 어린 시절의 예루살렘 유학생활에 대한 자부심이며, 풍부한 율법 지식이며, 랍비 신분 획득이며, 유대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누렸던 사회적 신분이며,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헌신이며, 들불처럼 번지는 신흥 이단종교(바울로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고한 처단 의지와 실행과 이로 인한 온갖 칭찬이며 ···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자기 발뒤꿈치 바로 뒤에서 와그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때 그의 참담한 심정은 지옥보다 더 깊은 흑암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주목할 것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어 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만나주신 주께 매달려 기도하였다(행 9:11). 자기 자신이 그분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고, 빛을 본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살 길은 자신에게 충돌해 주신 그분을 찾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생명이 되시는 그분께 기도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시작하였다. 그는 주의 섬세하신 계획을 따라 아나니아의 방문을 받고 그에 의해 안수를 받고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아나니아의 예언을 따라 선교사역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세 차례 선교여행을 하며 개척 목회, 순회목회를 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기도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는 처음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가운데 아라비아 나바테아 왕국에 3년 동안 머물고 있을 때에도(갈 1:17; 행 9:23) 기도에 전념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가서 잠시 머무는 동안 아레다 4세의 위협으로 공포심에 짓눌려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했을 것이다(행 9:23-25; 고후 11:33). 그리고 광주리를 타고 밤에 다메섹을 탈출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도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였는데(행 22:17), 이때 그는 신비상태에서 주께로부터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었다(행 22:17). 그는 아직 1차 선교여행도 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길리기아 다소로 가서 약 8년 정도 체재하는 가운데 신비상태에서 셋째 하늘 곧 낙원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고후 12:1-2), 이는 분명 기도 중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드디어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청빙이 있어 바나바와 함께 일 년간 동역한 후에 교회의 파송을 받고 1차 선교여행을 떠났다. 그는 가는 곳마다 교회 장로를 세울 때 금식기도를 하였고(행 14:21-23), 2차 선교여행을 할 때도 틈이 날 때마다 기도처를 찾았으며(행 16:16), 축귀(逐鬼) 사건이 빌미가 되어 실라와 함께 옥에 갇힌 중에도 한밤중에 다른 죄수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기도와 찬송을 하였고(행 16:25), 3차 선교여행 중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한 후 헤어질 때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고(행 20:36), 다메섹 서남쪽의 해안도시인 두로의 제자들과 작별하기 전에도 바닷가에서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행 21:5).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가이사랴에서 구금생활을 하다가 배를 타고 로마를 향해 가던 중 배가 난파되어 가까스로 멜리데섬에 올랐을 때도 그는 그 섬의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도하고 안수하며 치유해 주었다(행 28:8).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였고(엡 1:15-19; 3:14-19; 빌 1:9-11; 살전 1:2; 살후 1:11), 자신이 세우지 않은 교회들과도 계속 교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롬 1:9; 골 1:3, 9-12; 몬 1:4).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에 항상 힘쓰고(롬 12:12; 골 4:2; 엡 6:18),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아무것도 염려 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고(빌 4:6), 쉬지 말고 기도하고(살전 5:17),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도고와 기도를 하라고(딤전 2:1) 당부한다. 또 그는 방언기도의 유익과 한계성을 언급하면서 영으로 기도하고 또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교훈한다(고전 13-14, 15). 그는 또한 기도자가 자신이 처한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창조의 원리와 사회적 상식과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장착해 주신 본성에 비추어 매무새를 경건히 하고 기도할 것을 교훈한다(고전 11:1-16).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대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서슴없이 부탁한다(롬 15:30; 고후 1:11; 살전 5:25; 살후 3:11). 이러한 기도의 사람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의 핵심 내용은 “저 성도들이 ~을 알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식이 없으면 믿음이 견고히 설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지식은 마른 막대기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성경이 때로는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을 교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게 폭력을 가하고, 믿음에게 조롱을 보내는가? 지식에 대한 행패가 열등의식의 표출이고 믿음에 대한 경멸이 오만에 의해 생성된 불안의 표출이라면 이는 적그리스도적-반성경적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는 사람들을 학문 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반성경적 행위이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라고 독려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대한 무지가 문제이지 그분에 대한 앎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곡해된 영성만 추구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위이다. 성경진리를 추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헌신된 자세로 최선의 학문적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동시에 수많은 말을 쏟아냈던 욥이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에 이르러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크게 두 가지를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믿는 자가 하나님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는 지혜로 충만한 분이시다. 또한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믿음도, 십자가도, 구원도, 신령한 복도, 교회도, 사랑도 알 수 없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 시행과 성취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다. 진리와 계시의 성령은 강압적으로 나를 찢고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다. 내 안에 칼을 들고 침입하여 내 영혼을 제압하고 쫓아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인격적으로 조용히 찾아와 말을 거시며 마음 문을 열고 영접해 드릴 때 내 영혼에 가까이 접근하여 부드럽게 결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내가 내 안의 영토를 내어 드리는 만큼 나를 차지하시고 나를 최대한 존중하며 최선의 방식으로 나를 다스려 주시는 분이시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선하신 뜻과 권능과 사랑을 알 수 있기에 더욱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 둘째,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마음 눈이 열려 보배로운 영적 지식들을 알게 해 주소서. 마음 눈이 닫힌 사람들은 영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들은 물질세계를 넘어선 초월세계를 볼 수 없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만 실재라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실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육신의 눈이 볼 수 있는 것들만 실재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왜소한 생각인가? 우주에 떠도는 먼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음 눈이 열린 사람들은 물리적 실재 너머에 영적 실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영적 감지력으로 초월적 세계에 있는 것들을 인식한다. 마음 눈이 열리지 않고는 영의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가치들을 볼 수 없다. 마음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선한 일들과 그가 베푸시고자 하시는 복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마음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그가 베푸시는 은혜를 깨달아 알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마음 눈이 열려 세 가지 영적 사실들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에서부터 불러 주셨다. 그의 부르심 안에는 놀라운 소망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와 이 세상 너머 모두에서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주의 재림과 함께 최종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지금은 이 모든 신령한 복들을 “첫 숟갈”의 형태로 맛보고 있다. 소망을 가진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사명에 충실하며 담대히 미래를 향해 전진해 나아간다. (2) 하나님 나라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유업”(개역개정에는 “기업”)은 하나님 나라를 뜻한다. 믿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받은 자들이며 또한 궁극적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나라다.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부터 그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하늘 시민권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 쇠하지 않고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나라를 받은 자들이다. 이 나라의 영광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같이 완전하기에 풍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당신의 힘의 위력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지극히 크신 능력을 나타내 주셨다.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세상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어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늘에 나는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바다의 어족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 모두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 모든 것의 영원한 소유자시다. 그분은 사람들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가난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려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시는 분이시다(삼상 2:7-8). 우리가 그분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의 권세를 힘입어 영육간 최상급 부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이상과 같은 지식을 갖출 때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것을 확신하면서 그들로 그렇게 보배로운 영적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기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참조. 약 4:8).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분이 응답해 주시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참조. 렘 33:3) 6. 교회란 무엇인가?(엡 1:20-23) 이 본문은 에베소서의 교회론을 대변하는 핵심 본문들 중의 하나다.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이 본문 하나로 신약의 교회론 전체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은 짧은 몇 마디 말로써 교회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실 바울은 이미 앞에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 암시해 주었다. 이를테면 그는 간접적 방식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의해 형성된 선택공동체로, 만물통일의 구심점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공동체로 제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 초월 세계와 현상 세계, 신비 세계와 현실 세계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방식은 소위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 즉 교회를 “이 시대”와 “올 시대”의 중복지점에 정위시키는 독특한 종말론적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핵심은 역사의 종말에 최종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이미 이 세상과 교회에 침투하여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살아야 할 목회자도 묻고 싶고, 신학자도 묻고 싶고, 일평생 교회를 떠나 살 수 없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묻고 싶은 질문이다. 아니 세상을 깊이 관조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불신자라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뭐 하는 사람들이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공산당들의 준동으로 심히 불안했던 시기에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용기와 희생과 혁혁한 활동에 대해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런 기대 속에 교회를 바라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75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는가? 최근 10여 년을 뒤돌아볼 때 국정을 책임진 자들이 보여준 실망스러운 행동들, 성폭력 사건들, 특수 경제 범죄 사건들, 나라의 도덕성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회상식을 무시하는 듯한 낯뜨거운 발언들, 마구 쏟아내는 막말들, 하나님을 모욕하는 언사들, 세인들의 보편적 기대를 저버린 행위들 ··· 어쩌다가 한국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는가. 아니 목사가 목사라는 것이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이 상황은 무엇인가.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려면 부활·승천하시고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방을 좇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어디로 가셔서 무엇을 하시는지? 그리고 동시에 이분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께 어떤 임무를 맡기셨는지 물어야 한다.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본문의 문맥을 관찰하면서 바울이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자들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해 주시라고 간구한다(19절). 뒤이어 나오는 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힘의 위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한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20절). 하나님은 당신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고전 15:17).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큰 소망이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부활을 푯대로 삼고 달려가는 삶을 사는 자들인 것을 밝히면서(빌 3:11-14), 종국에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빌 3:21). 누가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는가? 첨단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섬모(纖毛) 하나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힘의 위력은 그리스도를 살려내신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하늘 위로 끌어 올리시고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셨다. 이곳은 물리적 공간의 어느 지점이라기보다는 초월적-영적 영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인간의 이성적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승귀의 위치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그분의 위치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그곳은 악한 천사적 존재들보다 뛰어난 최고 권자의 위치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승귀의 그리스도는 1세기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물들보다 훨씬 뛰어난 권세자이시다.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름”은 사탄(=마귀, 디아볼로스)의 왕국의 핵심 세력들 곧 악한 천사적 존재들을 가리킨다(롬 8:38; 고전 15:24; 엡 3:10; 6:12; 골 1:16; 2:10, 15). 이것들은 본래 천사적 존재들인데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영물들이다(유다서 6). 이 악한 영들은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탄)의 명령을 따라 활동한다(엡 2:2). 바울은 그의 서신서 여러 곳에서 “귀신”(다이모니온)을 언급하는데, 이 영물은 우상을 매개로 인간의 종교성을 교란시키기도 하고(고전 10:20-21),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침투하여 건전한 이성의 활동을 훼방하기도 한다(딤전 4:1).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도 귀신들은 사람들로 병마에 시달리게도 하고, 괴이한 행동을 하게도 하고, 복음전파 활동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면 도리어 그와 동급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시켰다. 이 결정적 사건 이후 아담의 후예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사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사탄은 노아시대 사람들을 불경건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하였고, 바로를 분기(奮起)시켜 모세를 대적하게 하였고, 아합을 격분시켜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 들게 하였고, 사울에게 시기심을 발동시켜 다윗을 제거하려 들게 하였고, 다윗의 마음을 오만과 욕정으로 채워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게 하였고, 발람 선지자를 더러운 탐심에 눈이 멀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게 하려 하였고, 3년 동안 예수와 동행하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던 그의 제자들을 십자가 처형이 임박한 때 다 배반하고 줄행랑을 치게 만들었고, 가룟 유다로 예수를 은 30에 팔아넘기게 하였고, 유대 군중들로 예수 대신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며 괴성을 지르게 하였고, 세상의 수많은 독재자들로 살인마가 되게 하였고,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군으로 여러 나라 연약한 여성들을 유괴하듯 강탈하여 그들을 성노예로 전락시켰고, 권력욕에 눈이 먼 자들로 무고한 시민을 향해 총탄을 발사하게 하여 민족의 비애를 가중시켰고, 이단들을 간악하게 만들어 무지한 자들로 집단 우매에 빠지도록 하였고, 자칭 지도자라 하는 자들로 오만과 독선에 취해 이 시대의 개혁자인 양, 하나님의 선지자인 양 자기기만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역사 속에서 사탄이 자행해 온 짓, 하고 있는 짓, 앞으로 예견되는 짓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탄과 그의 핵심 세력들, 그리고 그의 졸개들의 행패를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의 속량으로 이미 이것들의 송곳니와 수염을 다 뽑아 버리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사탄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선언이며(골 2:15) 영원한 하나님 나라 확립의 공적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는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들고 산다면 그 어떤 시련과 역경도 돌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곳은 만물보다 뛰어난 우주적 통치권자의 위치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승귀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다(시 8:6). 이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 곧 우주적 통치권자가 되신 것을 의미한다. 하늘과 하늘들 위의 하늘과 공중과 땅과 땅 아랫 곳과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우리는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 위에 뛰어난 최고의 통치권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며 까악까악 부르짖을 때 먹이를 마련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해를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매일 동편 바다 끝에서 솟아오르게 하시며 전 인류로 그 열기의 혜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햇빛을 비춰주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이 한 혈통으로부터 나와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여 살게 하시고 연대(年代)를 정하여 존속케 하시는 분이시다. 누구에게 나를 다스리도록 내어줄 것인가? 누구에게 나를 이끌어 가도록 허락할 것인가? 나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인가? 날개를 달고 날아갈 재물인가? 우리가 믿고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분은 우주적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뿐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도전하려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자신이 쟁취하려 한다. 니므롯은 시날 땅에 바벨탑을 쌓으며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큰 소리쳤다(창세기 11:4).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도전하는 그들에게 언어를 흔잡케 하심으로 그들을 징치하셨다. 우리는 주의 높으신 권세를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에베소서 교회론의 진수(眞髓) 중의 진수는 승귀의 그리스도가 교회에 주어지셨다고 하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은 22절 하반절을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라고 번역한다. 이는 원문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번역은 국문법적으로 모호하고, 의미구성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최소한 영역본들을 보라. 거의 모든 영역본들이 원문과 일치한 번역을 내놓고 있다. 원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이 그[그리스도] 곧 만물의 머리를 교회에 주셨다”라는 것이다. 바울의 의도는 그토록 높으신 우주적 통치권자(그리스도)를 교회가 받았으니 교회가 어떤 실재인가를 인식해 보라는 것이다. 우주적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땅에 존재 하는 교회와의 신비적 결합은 교회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리스도에게 교회가 무엇이지 생각하게 한다. 이 결합은 교회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우주 중에 가장 중요한 실재임을 암시한다. 교회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매일 시달리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높으신 권세와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특별한 기관이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에이전트와 같은 기관이다. 하나님이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교회를 어떤 존재로 여기시겠는가? 첫째,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기의 몸으로 여기신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23절 상반 절). 이것은 일종의 그림 언어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얼마나 귀중히 여기시는지에 대한 표현이다. 그분은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교회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본능과 의식을 전량 가동하여 자기 몸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충만케 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신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23절 하반절). 교회를 자기 몸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는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케 된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며, 에베소서 교회론의 핵심이다. 바울은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과감하게 교회를 만물 안에 계시면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충만하게 된 실재라고 선언하고 있다. “충만”이라는 것은 물이 가득 부어진 컵처럼 승귀의 그리스도의 모든 것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 곧 더할 나위 없이 충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영적 차원에서 볼 때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케 된 실재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충만인 것을 깨닫고 그 사실을 삶 속에서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이 교회를 충만케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성령을 부으시고(참조. 막 9:10; 마 16:28; 눅 9:27), 필요한 모든 은사들을 보내 주시며, 영육간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 교회는 자신이 충만인 것을 실제 삶을 통해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적 삶을 위해 힘쓰는 교회는 결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결코 자신을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게 하지 않는다. 참된 교회는 악한 영들을 분별하고 그것들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의지하여 그것들과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한다.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삶 속에서 실증해 보임으로 세상에 참된 부요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7. 믿는 자들의 영적 현주소(엡 2:1-10) 사람들은 흔히 “과거는 묻지 말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자”라고 말한다. 이는 과거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통스럽고, 들추면 들출수록 상처가 커질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영적 측면에서 믿는 자의 현재상태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상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믿는 자가 자신의 과거상태와 현재상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미래의 삶을 어떻게 개척해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자신의 현주소에 대한 위치 인식과 함께 회고적 측면과 전망적 측면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본문을 바로 이해하려면 몇 가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본문이 속한 큰 문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승귀의 그리스도를 교회에 주셨다고 한 진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 연장선상에서 현재 우리의 본문 첫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여러분을 살리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큰 틀에서 하나님의 “힘의 위력”(엡 1:19)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믿는 모든 자들도 살리셨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여기에 모든 믿는 자들의 궁극적 소망이 있다.
둘째, 바울은 1세기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에베소서를 쓰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밖의 교회 내에는 크게 현지인(헬라인) 개종자들과 흩어져 사는 유대인(소위 디아스포라 유대인) 개종자들이 있었다. 이들 대다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 양상을 나타낼 때가 많았다. 1세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철천지 원수지간처럼 상대방에 대해 서로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온갖 잡신들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멸시하였고, 이방인들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오만으로 가득한 유대인들을 증오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기독교로 개종한자들의 교회 생활에도 은연중 이어지고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양대 그룹 간의 반목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바로 앞의 포인트와 관련하여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와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희”는 거의 예외 없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어떤 때는 믿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독자들은 “너희”에 해당된 내용이든 “우리”에 해당된 내용이든 구별없이 자신에게 적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들이 어떤 경우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자신을 “이방인 그리스도인” 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동일시하고, 과연 내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 구원 받은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읽을 필요가 있다. 첫째,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모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서 살리셨다(1-2 절). 믿기 전에 그들은 죽은 자들과 다름이 없었다. 인간은 몸이 움직인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가 진정으로 산 자다. 육체의 죽음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영적 죽음이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인해 영적 죽음의 상태에 있었다(참조. 창 2:17).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처럼 그들을 또한 영적 죽음에서 살리셨다. “허물”과 “죄” 사이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단지 “허물”이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모든 행위 즉 위법, 불법, 반칙, 과실을 가리킨다면, “죄”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그의 진리를 거슬리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이방인들을 소생시키시기 전에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 한마디로 그들은 “이 세상 풍조”를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살았다. 그들이 허물과 죄의 낙을 누리는데 세상 풍조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이세상 풍조는 “남들도 다 그러는데 나만 유별날 필요가 무엇인가”라는 편리한 생각을 갖게 해 주었다. 믿는 자는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좇아가서는 안된다. 믿는 자는 돈의 바람 따라 이리저리 휩쓸고 다녀서도 안된다. 권력의 바람 따라 부화뇌동해서도 안된다. 명예의 바람 따라 위선과 기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려 해서도 안된다. 믿는 자는 세상에 부는 바람이 북풍인지 남풍인지, 강풍인지 미풍인지 감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방인들이 세상 바람 따라 허물과 죄 가운데 행했던 삶의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가 안긴 참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연장전이라고 착각하고 이 기간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하여 마귀는 여전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잠입하여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들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영원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무저갱으로 던져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귀가 여전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 삶을 이끌어 가는지, 아니면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 안에 침투하여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인지 감지할 필요가 있다. 믿는 자들은 지금 나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가 성령에 의해 조성된 생명 가득한 공기인지, 마귀가 예수 이름을 팔아 기만전술로 깔아놓은 독성 가득한 공기인지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이 온갖 허물로 인해 죽어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3-5절). 3절에서 “우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때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할례로 그 징표를 받은 자기들은 죄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그릇된 의식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는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속하여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들을 행함으로 육체의 정욕 가운데 넘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유대인들 역시 그때에는 이방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직구를 던진다. 바울의 뜻은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 가운데는 자기 스스로 정해 놓은 몇 가지 신앙의 척도를 가지고 “나 정도면 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자기로써 자기를 재면 언제나 만점일 수밖에 없다.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상의 권위 있는 척도는 없다. 바울이 보기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과거에는 마귀의 조종을 받으며 육체와 마음의 소욕을 따라 행한 자들이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자기 감정에 충실한 것이 가장 진솔한 행동이라고 부추기면서, 육체와 마음의 소욕을 지성소 안의 법궤라도 되는 것처럼 두둔하고 보호하려 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장 근본적 질문은 “나”란 존재를 내 육체와 마음의 소욕에 믿고 맡겨도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라고 지적한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을 산출한다고 지적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부패한 마음과 육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충실한 것 이전에 무엇이 나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에 빠져 살면서도 스스로 의로운 자라는 뻔뻔함으로 단련돼 있던 과거의 유대인들에 대해 바울은 그들도 이방인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는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그들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지적은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이라고 하는 동일한 토대 위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유대인들이라고 하여 다른 방식으로 의(義)에 이를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 역시 이방인들과 다를 바 없는 진노의 대상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의 크신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그들을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선언한다(4-5절). 구원의 원천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 분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아버지로부터 끊김을 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끝까지 참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 와 함께 영적 죽음으로부터 살리셨다. 바울은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는 말로 이 사실이 유대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은혜에 의한 구원”은 바울 복음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다.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믿는 자들의 현위치에 대해 진술하는 내용이다. 6절의 “함께 일으키사”는 5절의 “함께 살리셨고”를 변형시킨 것이다. 바울의 요지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그의 승귀와 연합하여 이미 하늘에 함께 앉히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영적 차원에서 보면, 믿는 자들은 이미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主) 되심과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곧 시들어 버릴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몸에 걸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사라지고 수치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 지성소로 끌어 올려져 그리스도의 승귀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영적 현주소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난과 부활과 승귀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존귀와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실에 대한 앎의 문제이며, 확신에 관한 문제이며, 그에 바탕을 둔 삶의 문제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인식하고, 확신하고, 영적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나뭇잎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을 수는 없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그리스도의 승귀의 위치에까지 끌어 올리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자비 안에 나타난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오는 여러 세대에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7절). “오는 여러 세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 세상에 올 수많은 세대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인지해야 할 존재들이다. 이제 바울은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 가운데 한 중요한 테마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강조하면서 1-10절 단락 전체를 마무리한다(8-10절). 그는 앞에서(5절 하반절) 이방인들이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진술의 독특한 점은 바울이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단지 “은혜”만을 말하지 않고 동시에 “믿음”도 언급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이 당신의 의(義)를 받기 위해 믿음의 수단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을 위해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참조. 히 4:2). 바울은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 그 어떤 오해도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구원의 출처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언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 구원이 인간의 협력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서 “이것은”은 원문상 앞에 나오는 “은혜,” “믿음,” “구원” 중 한 단어를 가리키지 않고 이 세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앞 문장 전체를 받는 지시대명사로 보인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으신 것은 인간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적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설계하셨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신 일의 본질적 의미와 목적에 대해 언급함으로 단락을 마무리한다. 죽은자들의 영적 소생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비교. 갈 6:15).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와 동일한 솜씨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셨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부어주신 새생명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일들을 이루며 살아갈 때 가능하다. “너희”(이방인)와 “우리”(유대인)는 동일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토대 위에서 구원받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누구를 대하든 교만하거나 비굴해서는 안된다. 단지 우리는 과거의 배경과 상관없이 서로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며,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 승귀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들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신 새로운 피조물임을 깨닫고, 그가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과제이다. 수평적-수직적 화목 공동체(엡 2:11-18) 본문은 1세기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실체와 본질에 대해 심도 있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 말할 때 물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신비적 차원으로까지 끌고 나간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에 관한 이야기는 신비롭고 황홀하기까지 하다(참조. 엡 5:32). 앞에서 바울은 1세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교회가 유대인 그룹과 이방인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사실 그들은 인종과 상관없이 허물과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승귀의 위치에까지 끌어 올려져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너희”)을 주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연합하게 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밝히고 있다. 본문 안의 “그때에”(11, 12절)와 “이제는”(13절)은 독자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과거와 현재의 틀 속으로 안내해 준다.
첫째, 과거에 이방인들은 영적 차원에서 볼 때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육신적으로 이방인이었다(11절 상).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즉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유대인들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들을 특별한 민족으로 세워주었더니 그들은 인간을 “우리”와 “너희”로 나누고 이방인들을 멸시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행위였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보편성은 구약시대 때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편가르기 행위의 부당성이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분별력을 거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믿는 자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날카롭게 선을 그어야 할 대상인지, 인내로 참고 설득하며 기다려야 할 대상인지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이 양의 가죽을 쓰고 나타나 교회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자라 불리는 자 곧 유대인에 의해 무할례자라 불리는 자들이었다(11절 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례 받은 민족이라는데 대해 대단한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 할례는 곧 하나님이 주신 의(義)의 징표 곧 구원받은 자의 표식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손으로 육체에 낸 흔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영적 의미가 중요하고, 그러한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성경통독을 100번 한 것, 기도 중에 신비상태에서 하늘 궁정을 다녀온 것, 모든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마스터한 것, 교회를 위해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봉사한 것, 1000명이나 전도한 것, 10평을 10만평으로 일군 것, 세상일 다 포기하고 신학공부 한 것 ··· 이런 것들로 교만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셋째,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다(12절).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와 같은 단어다. 구약시대에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언약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메시야가 올 것을 대망하였다. 그가 오면 다윗의 왕조가 재현되고 그의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왕국 개념은 다분히 정치적, 군사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메시아(그리스도)가 오면 그의 왕국이 건설될 것인데, 이방인들은 이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너희는 아무리 무릎으로 기며 울고불고 매달려도 영원히 희망 없어”라는 태도였다. 이런 유대인들의 오만에 이방인들의 분노는 쌓여만 갔다. 지금 한국교회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무엇을 쌓아가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 교인 수가 10만 명이고, 땅 부지가 2000평이고, 국회의원·대학교수·의사·판사·변호사가 100명이라고 자랑할 때가 아니다. 넷째, 그들은 이스라엘의 백성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12절).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 개념이나 하나님 나라의 개방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영적 특권(롬 3:1-2; 9:4-5)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방인들을 소외시키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교회는 재산, 학력, 신분, 사회적 관계 등 육적 요소들로 인해 소외감을 가진 사람들은 없는지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그들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낯선 사람들이었다(12절). 유대인들은 자기의 조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복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라는데 대해 큰 자랑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열두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들(창 17:1-14; 26:24; 28:13-15), 모세 시대에 출애굽 백성에게 주신 언약들(출 24:1-11),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영원한 메시아 왕국(삼하 7:16; 렘 31:31-34; 단 7:14)에 대한 언약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이 이방인들에게는 낯선 것들이었다. 여섯째, 그들은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12절). 이방인들은 세상에 태어나 살고는 있지만 영적으로 볼 때 현재와 미래에 대해 그 어떤 소망도 없고 참 신(神) 하나님도 모르는 가련한 자들이었다. 사람에게 소망은 안전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은 것으로서(히 6:19) 목적지를 향해 전진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제공해 주는 필수 기재인데,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소망이 없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알고 그분과 정상적 관계성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방인들은 그 출발점조차 갖지 못한 비참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과거의 참혹한 상태로부터 벗어났다. 과거에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38선처럼 이격된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이 가진 특권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십자가의 피로 그들 모두를 자기 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로 연합된 것에 대해 바울은 특이한 비유로써 교회론적 진술을 시도한다. 그의 진술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암시해 준다. 그는 먼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그의 요지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체로 양자 간의 화목을 이루어 내셨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출현의 결정적 요인에 대한 진술로서, 그것은 돈이나 학문 또는 인간의 열정이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그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화평이시다. 각각의 배경이 어떠하든 그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 내셨다. 그는 둘로 하나를 만들어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어 버리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철폐하셨다. 여기서 “둘”은 이방인 그룹과 유대인 그룹을, “하나” 는 새로운 연합체적 인격으로서의 교회를,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은 양자 간에 켜켜이 쌓인 증오심을, “자기 육체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었던, 수많은 세부조항이 달린 율법을 가리킨다. 아무튼 교회의 중요한 본질 중의 하나는 하나됨 곧 통합성이다. 어떤 경우이든 교회의 통일성을 깨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무효화하는 반교회론적 도전행위이다. 그리스도의 율법 철폐 사역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키고, “한 새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가진 “제3의 인격” 곧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새 창조 안에 나타난 최고의 걸작(傑作)으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용광로 안에서 빚어진 새로운 결정체다. 교회를 “한 새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인격을 가진 유기적 통일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이런 종말론적 인격적 유기체를 만들어내신 것은 자신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화평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 곧 유기적 통일체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셨고, 또한 이들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한 신앙 공동체가 되게 하셨다. 교회가 수평적-사회적 관계만 중요시하고 수직적- 신앙적 관계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교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16절 하반절에서 18절까지는 14-16절에 대한 주해적 설명이다.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누적된 증오심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들 모두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이것은 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교회론적 연합체로서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단절된 자들이 아니다. 교회론적 “몸”으로서의 그들 안에 한 성령이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교회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시고, 교회를 위해 계속해서 생명을 공급하시며, 교회가 아버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우리의 본문은 에베소서가 교회론의 보물창고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교회를 묘사 하는 “하나,” “한 새 사람,” “한 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라는 별칭들은 교회가 무엇이며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암시해 준다. 교회는 연합 공동체이며, 종말론적 제3의 인격 공동체이며, 유기적 통합 공동체이며,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신앙 공동체다. 이는 교회가 통일성과 인격성, 유기체성, 신적 거룩성을 본질로 하는 실재임을 보여준다. 교회가 이러한 실재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다. 그리스도의 피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그리고 “한 몸”이 된 이 “둘”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건축술적 연합체(엡 2:19-22) 바울은 자기가 목숨을 바쳐 사역하고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 보다 전진된 진술을 시도하고 있다. 그가 앞 단락(엡 2:11-18)에서 교회를 “하나,” “한 새 사람,” “한 몸,”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라고 묘사했을 때, 그는 이미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심오한 통찰을 진술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용어들이 갖는 교회론적 의미를 또 다른 각도에서 종합함으로써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한다. 첫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론적 결합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놀라운 신분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방인들은 이제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19절). 바울은 영적으로 유대인들과 하나가 된 이방인들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 11-13절에서 사용한 대조 도식을 재사용함으로써 교회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믿는 이방인들이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두 개념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70인경에서는 이 두 개념을 동의어로 취급한다. 그러나 “외인”이 타국인 또는 낯선 사람을 가리킨다면(비교. 12절; 참조. 마 25:35, 38, 43-44; 27:7; 행 17:18, 21; 히 11:13; 13:9),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행 7:6, 29; 벧전 2:11).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억울하고 서러운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밖에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차에 치여 얼굴이 골절되는 치명상을 입어도 쏜살같이 달려온 경찰차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키고 자국민을 보호하기에 급급하고 결국 사고의 원인이 아이에게 있다고 통보하며 가해자 접촉 금지 명령을 내린다. 라운드어바웃을 돌다가 급히 뛰어든 차가 내 차를 찌그러뜨려도 접촉사고의 원인이 당신의 과속에 있으니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벌금을 때린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복된 약속들로부터 제외된 이스라엘 나라 밖의 타국인들과 같이 취급하였다. 이방인들은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유대인-‘갑’들의 등 뒤를 서성거리며 서러움의 눈물을 삼켜야 하는 ‘을’들이었다. 또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해 본 사람이라면 현지인들의 텃세와 경계로 인해 괴로운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오해를 받아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괜한 시비로 괴롭힘을 당하기도 해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도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걸어서 부모 심부름이나 무슨 일이 있어 타동네를 지나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동네 아이들이 괜히 욕을 하거나 돌을 던지기까지 하면서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이렇게 “외인”과 “나그네” 취급을 하였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훗날 지옥 불을 땔 때 장작개비로 쓸 것들이라고까지 하며 멸시하였다. 이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다. 그들은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 바울에게 믿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극적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과 그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된 자들이다. 지금 이방인들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믿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영적 특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지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의 멤버로서 그의 식탁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자들이다. 이는 믿는 모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동일한 토대 위에서 새롭게 출현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는 그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집안 배경, 사회적 신분, 부(富)의 정도, 학벌, 세상적 지위, 성별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결정하거나 하나님 가족의 자격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속량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이며 그의 가족의 사랑스러운 식구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 보호하심을 받는 존귀한 자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공급과 보살핌을 받는 그분의 자녀들이다. 둘째,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는 함께 지어져 가는 건축물과 같다(20-22절; 비교. 고전 3:9-17; 벧전 2:4-5).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들을 보면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섬세함,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발한다.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감상에 젖어 속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누가 설계했을까, 어떤 자재를 사용했을까, 몇 년이나 걸렸을까, 어떤 공법으로 지었을까, 내부 구성은 어떻게 했을까, 각 방의 용도는 무엇일까, 내부 장식은 어떻게 했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채광은 어떻게 했을까, 채색은 어떻게 했을까 등등. 그런데 나는 본문이 보여주는 영적 건축물로서의 교회의 모습은 사람의 아이디어로 지은 그 어떤 빌딩보다도 웅장하고 견고하고 아름답고 생명 가득한 빌딩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문이 진술하고 있는 영적 건축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일견해 보자. (1) 교회 공동체의 토대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20절 상). 교회는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토대, 선지자들이 전한 계시의 터 위에 서 있는 신령한 건축물이다. “사도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을 중심으로 한 최전선의 복음 전파자들을, “선지자들”은 신약 성경시대 초기에 하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전한 계시 전달자들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고전 3:11), 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교회의 토대라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뿌리가 그리스도이시고, 그들이 전한 복음과 계시가 그리스도가 전파한 천국복음과 그의 죽음, 부활, 승귀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토대”라고 하는 말과 “그리스도의 토대”라고 하는 말은 등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할 때, 예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과 선지자들이 전한 계시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않으면 교회라고 볼 수 없다. 교회가 어떤 사람의 신비체험이나 이목을 끄는 특이한 행동, 수려한 언변, 마성적 능력, 그럴싸한 교리, 유사 복음이나 유사 계시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성일 뿐 교회라고 볼 수 없다. 만일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결국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와그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나 정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곳에 결코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 (2) 교회 공동체의 모퉁이돌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이기신 귀하고 견고한 기초석이시다(20절 하).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시대에 이미 이 사실을 예언하였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사 28:16).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석으로 삼아 위치와 방향을 잡고 세워져 간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쓸모없는 돌로 여기고 버려 버렸다. 그러나 예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다윗은 구약시대에 일찍이 바로 이 사실을 예언하였다(시 118:22). 베드로는 이사야서와 시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는 하나님이 택하신 산 돌 곧 보배로운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진술한다(벧전 2:4-7). 어떤 사람이 만일 교회의 모퉁잇돌처럼 행세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다. 그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위를 탈취하려고 정면으로 도전하는 자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교회는 사실 교회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종교집단 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수많은 이단들과 유사 교회들이 이런 행태를 나타낸다. (3) 영적 건축물로서의 교회 공동체의 외관은 여러 건물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복합건물 형태로 되어 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21절). 유럽의 오래된 도시 건축물들을 보면 건물들이 연달아 이어져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좁은 면적에 수많은 민족이 함께 살아가려 하니 건축 형태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건축물로 비유하는 바울의 교회 공동체에 관한 설명은 서로 연결된 형태의 집합 건물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는 그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상징되는 다양한 종류의 구성원들과 모퉁잇돌 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결합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인다. 교회는 나라와 인종, 지역, 계층, 신분, 성별, 연령, 시대를 뛰어넘어 믿는 모든 사람이 함께 연합하여 세워져 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후 6:16). 교회 공동체를 “성전”이라고 할 때 이는 교회가 구약 성전의 전통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교회 공동체는 신령한 건축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국가를 초월한 세계 모든 교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거룩한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간다. 바울은 이것을 “자란다”(아욱사노)라고 묘사한다(한글개역개정은 “되어 가고”라고 되어 있으나 이 번역은 바울의 은유적 표현이 의도하는 바를 적절히 나타내 주지 못하고 있다). “건물” 이미지에 대한 “성장” 이미지의 갑작스런 혼합은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이미지의 합성은 “건축물” 비유가 앞의 “한 새 사람” 또는 “한 몸”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 합성을 통해 자신의 건축물 비유가 어떤 무생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체의 역동적 성장에 관한 이야기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세 성막과 솔로몬 성전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성막과 성전의 맥을 잇는 교회는 지금도 계속 지어져 가고 있다. (4)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지금도 건축 진행 중에 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 “너희”는 여기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들 역시 성전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교회 공동체로 현시된 영적 성전 건축의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다. 이 개념은 21절에서 사용한 “성전”에 대한 주해적 진술로 출애굽 시대의 성막과 왕정시대의 솔로몬 성전을 연상케 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그가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장소이며 또한 그들을 통치하는 지휘소였다. 교회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성막/성전이 성취되어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신령한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지는 것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믿는 이방인과 믿는 유대인이 한 몸을 이루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엡 2:16)과 그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엡 2:18)이 서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한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성전으로 자라간다는 것과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은 서로 맞물려 있다. 성령께서는 이질적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결합시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완성해 가신다. 지금도 각기 성격과 배경이 다르고 수많은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라는 용광로에 녹여 거대한 건축물(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건설해 가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는 성령이 자신을 최상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자신을 완전히 그분께 내어 드려야 한다. 인간이 교회의 주관자가 되어 교회 구석구석을 좌지우지한다면 성령께서는 활동을 멈추고 조용히 물러나 계실 것이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건축되는 것이 중단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 구성원들은 성령께 지배권을 내어드리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의 성전 건축이 최종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현재 수동태)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오래 전에 완공되어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낀 낡고 퇴락한 건물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생명력을 가진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 건물이 견고하고 웅장하게 건축되어 갈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신령한 건축물로서의 교회가 술집이나 찻집으로 용도 변경된 유물이 되어 후손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철저히 성결을 유지하며 명실공히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처소, 하나님께 예배하는 처소가 되도록 잘 간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김정훈 교수 / 김정훈 교수는 영국 더람(Durham) 에서 제임스 던(James Dunn)의 지도로 석사를, 영국 글라스고(Glasgow)에서 존 바클레이(John Barclay)의 지도로 박사를 취득하였고, 백석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다 올해 2월 정년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The Significance of Clothing Imagery in the Pauline Corpus’ (T&T Clark), ‘바울 서신 연구’ ‘사도들의 설교와 신학’ ‘약속, 성취, 그리고 하나님 나라’ ‘작은 구름 한 조각’ 등이 있다. 현재는 B and C Mission Center 대표로 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81 - 바른신학 바른신앙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