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인. 경남 충무 출생.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동인지
<죽순(竹筍)>에 '온실'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설명적인 요소와 논리적인 요소가 배제된 시적
세계의 창조에 있다. 언어의 특성을 다른 어떤 시인보다 날카롭게 응시하며 존재론적 세계를 이미지로 노래하고 있다.
김춘수를 흔히 '인식의 시인', '이미지의 시인'이라 한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사물로 비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고, 그의 언어는 인식을 위한 도구이다. 그의 언어는 의미 전달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이미지
환기의 수단이 된다. 이런 뜻에서 그를 이미지 시인이라 부르며, 따라서 그의 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난해시(難解詩)에 속한다.
2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에서 출생하였다.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12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통영중?마산고 교사, 마산대?경북대?영남대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현재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1981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제7회 아시아자유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김춘수는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 윤이상, 심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에
참여했고, 1946년 조향, 김수돈 등과 함께 동인지 <<노만파>>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고,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유치환, 김현승, 송욱, 고석규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연구>>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의 시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나뉘어진다. 첫째 시기는 1950년대
중반까지로, 이 시기에는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어를 통한 사물의 존재
인식이 강조된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이르는 둘째 시기에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곧 묘사를 지향하는 서술적
이미지가 강조되는 한편, 언어유희가 두드러진 <타령조>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셋째 시기는 60년대 중반이후부터
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로, 이 시기에는 특히 <처용단장> 제2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끝으로 넷째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등이 있다. 한편,
자신의 시적 언어와 시적 인식에 대한 관심을 담은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1959),
<<시의 이해>>(1971), <<의미와 무의미>>(1976), <<시의
표정>>(1979)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대표 작품> 꽃 1952년에
발표되고 이듬해 시집 <<꽃의 소묘>>에 수록된 김춘수의 시작품. 김춘수의 초기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어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가 강조하는 것은 `꽃'이라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시 속의
화자가 말하는 대상은 ‘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꽃’은 감각적 실체가 아니라 관념,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꽃이란 무엇인가' 혹은 `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꽃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고 한다. 달리 말해서, ‘꽃’은 인간의 명명 행위 이전에는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바로 사물과 언어의 관계가 유추된다. 1연은 명명 이전의 단계, 2연은 명명과 동시에 `꽃'이
존재한다는 사실, 3연은 `꽃'에 비유되는 `나'의 존재, 4연은 우리들의 존재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모든 사물들이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 이 시의 시사적 중요성이 있다.
기(旗)
김춘수(金春洙)의 제3시집. 1951년 7월 25일 문예사(文藝社)에서 간행되었다. 변형 4?6판, 양장, 80면.
<갈대>, <호수(湖水)>, <기(旗)>, <집1>, <집2>,
<딸기>, <오전(午前)의 산령(山嶺)>, <순정(純情)> 등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은 없고, 책 끝에 “나는 나의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정돈해 가야만 했다. 이런 소묘(素描)의 형식으로라도 나는 나를
미래에로 건설해 가야만 했다."는 지은이의 후기가 있다. 이 시집은 시적 소재에 능동적으로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상이나 소재 자체에 대한 내향적 지향을 보여주던 이전 시집들과는 그 경향을 달리한다. 가령
<<늪>>(1950)에서는 단지 몸을 ‘흔들거나’, ‘속삭여주는’ 데 그쳤던 갈대가 여기서는 “느낀다는 것,
그것은 또하나의 다른 눈/ 눈물겨운 일이다"(<갈대>)라고 하여 그 자체로서 감각을 가지며 자기 반성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주정적(主情的)이고 낭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 시집들과 그 경향을
같이 한다. 한편 ≪기≫는 출간 당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조연현은 “이 시집의 최후의 일절까지 모조리 읽고 책을
덮은 나에게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위대한 작품은 침묵을 강요한다는 발레리의 말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알 수
있는 것 같았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한국 현대시 형태론 1959년 해동문화사에 간행된 김춘수의
시론집(詩論集). 한국 현대시의 형태를 집중적으로 다룬 이론서이다. 김춘수는 이 책에서 시의 형태를 자연발생적·감성적인 것과
기교적·이론적인 것, 두 갈래로 나누면서 정형시가 형성되기까지의 시의 형태는 전자이며, 정형시가 형성되면서부터의 시의 형태는
후자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산문이 보다 자연음에 가깝다면, 운문은 자연음을 그 언어의 질에 따라 보다 논리적으로 조직한
메카니즘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산문의 리듬이 자연의 질서라면 운문의 리듬은 인간의 질서에 해당된다. 그러나 운문, 혹은
정형시가 타성이 되어 생기를 잃게 되면 새로운 산문과 자유로운 형태가 반동으로 나타나며, 이때 드러나는 것이 기교적 논리적
형태이다. 이런 가설 위에서 김춘수는 한국 현대시의 형태를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10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창가
가사와 신체시 시대, 제2장은 자유시 초기로 <<창조>>, <<폐허>>,
<<백조>> 시대, 제3장은 민요적 운율과 김소월의 시 형태, 제4장은 사족, 제5장은 `시문학파'의
시형태, 제6장은 김기림, 이상의 시형태, 제7장은 정지용의 <<백록담>> 및
<<문장>>지 추천 시인들의 시형태, 제8장은 8.15에서 6.25까지의 시형태, 제9장은 6.25 이후,
제10장은 사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강조되는 것은 특히 제5장에서 논의되는 `시에 대한 인간적 태도와 비인간적
태도'라는 개념, 제6장에서 논의되는 `구미의 모더니즘과 한국의 모더니즘'이라는 주제이다. 전자는 낭만주의적 세계관과 고전주의적
세계관을 전제로 한국 현대시의 형태를 분석한 점, 그리고 후자는 이른바 기술주의와 모더니즘의 관계를 해명한 점이 당시의 한국
현대시론의 수준한 단계 글어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처용단장 1991년 미학사에서 발간된 김춘수의
시집.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1960년대 후반에 완성된 것이며, 제2부는 1970년대에, 제3부와 제4부는
1990년을 전후해 완성된 것이다. 제1부와 제2부는 처용의 유년기를 시화하고 있으며, 제3부와 제4부는 처용이 바다 밑 생활을
마치고 이른바 현실을 체험하는 과정을 시화하고 있다. 기법의 측면에서 제1부는 이른바 물리시의 공간이며, 제2부는 극단적인 의미
배제에 의한 리듬과 주문의 공간이다. 이런 사정은 예컨대 <처용단장> 제2부의 앞부분,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 여자가 앗아가고 남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여잘 돌려주고 남자를 돌려다오."와 같은 시행들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제3부와
제4부는 물리적 현실의 배후에, 혹은 심층에 있다고 여겨지는 반현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곧 `마이너스 현실'이 노래된다. 이런
기법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그가 제3부와 제4부에서 보여주는 극단적인 통사 해체는 현실을 지배하는 일정한
규칙, 문법, 통사에 대한 전면적 와해를 노리는 책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제3부의 ‘39’에 나오는
“ㅕㄱㅅㅏㄴ-ㄴ/ 눈썹이없는아이가눈썹이없는아이를울린다./ 역사를/ 심판해야 한다ㅣㄴㄱㅏㄴㅣ/ 심판해야 한다고 니콜라이
베르쟈에프는/ 이데올로기의 솜사탕이다"와 같은 시행들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김춘수의 작품 세계>
·시풍
- 초기의 경향은 시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과 진실성을 추구하였고, 이후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서
이른바 의미(意味)의 시를 쓰게 되었다. 후기로 넘어오면서 이미지적인 작품으로 변천, 설명적 요소와 논리적 요소가 배제된 시적
상황을 새로운 활로로써 개척하였다. 문예 사조면에서는 사물의 존재성 여부를 고구(考究)하여 인간의 의식 세계를 다룬 순수시 계열의
시를 썼으며, 정신사적 배경에서는 존재론적 인식에 근거를 둔 관념시를 썼다. ·시정(詩情) - 인식론적 관념에 의한 언어의 명명을 통해 사물의 존재를 탐구하였다. ·시형과 운율 - 산문적 성격의 시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가, 한국의 전통적인 넋두리와 리듬을 재생시켜 보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실험을 시도하였다. ·정서의 특질 - 현실 직시적이며 비판적 인식론에 접근한 시를 썼다. ·문학사적 의의 - 존재와 언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지속함으로써 시적 대상과 인식의 문제에 관한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였다. 시집으로는 '구름과 장미', '늪', '기(旗)',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타령조 기타', '처용', '남천', '비에 젖은 달' 등이 있다.
[작가 연보] 1922.11.12 경남 통영읍 서정(현재 경남 충무시 동호동)에서 아버지 김영팔(金永八)과 어머니 허명하(許命夏)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26(5세) 오스트리아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계 유치원에 다니다. 1929(8세) 안정의 간이보통학교 입학. 이후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 1935(14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중학교)에 입학. 2학년 때 서울로 이사하여 종로구 명륜동에서 산다. 1939(18세) 경기공립중학교 5학년 때 졸업을 3개월 앞두고 자퇴. 그 해 11월 동경에 건너가 간다의 한 고서점에서 릴케의 일역판 시집을 발견한다. 1940(19세) 4월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 시인 하기하라 사쿠타로, 소설가 이토 세이 등의 강의를 듣는다. 특히 하기하라 교수는 문학의 길을 걷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942(21세) 일본의 항구도시 카와사키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던 중,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판하여 불경죄로 헌병대에 끌려간다. 요코하마 헌병대, 세다가야 경찰서 등에서 7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고, 학교에서는 퇴학처분된다. 1943(22세) 유치장에서 위장이 상해, 출감한 뒤로 선친이 금강산 장안사에서 한 달 가량 요양하다. 1944(23세) 명숙경(明淑瓊)과 결혼. 1945(24세)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전혁림, 정윤주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근로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연극, 음악,
문학, 미술, 무용 등의 예술운동을 한다. 이 때부터 시작 활동을 본격화하고, 극단을 만들어 경남 지방 순회공연을 하기도 한다. 1946(25세)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 조향, 김수돈과 동인지 「魯漫派」 창간하여 3집까지 낸다. 「백민」에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소설가 염주용이 주간하는 「예술신문」, 진주의 설창수가 주재하는 「영문」 등에 시를 발표한다. 1948(27세) 8월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행문사) 출간. 서문은 유치환이 썼다. 1949(28세) 마산중학교로 전근, 1951년까지 근무. 1950(29세) 3월에 두 번째 시집 『늪』(문예사) 출간. 1951(30세) 마산 근교 안성의 작은 마을로 피난했다가 마산으로 돌아온다. 세 번째 시집 『旗』(문예사)를 출간하고 자유아시아문학상을 수상한다.
1952(31세) 진주에서 열린 개천예술제에 모인 문인 서창수, 구상, 이정호, 김윤성 등과 시동인 「시와 시론」 결성. 시 <꽃>과 함께 첫 산문 <시 스타일론>도 발표한다.
1953(32세) 네 번째 시집 『隣人』(문예사) 출간. 로댕의 데생을 복사해서 표지 장정, 제본까지 손수한 등사판 시집이었다.
1954(33세) 시선집 『제1시집』(문예사) 출간. 9월에 『세계근대시감상』(산해당) 출간.
1956(35세) 5월에 유치환, 김현승, 송욱, 고석규 등과 동인지 「시연구」 간행. 고석규의 발의로 간행했으나 그의 타계로 창간호를 내는 데 그친다.
[작품 세계] 무화과나무의 언어
신 범 순 (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
1.
김춘수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고전적인 시인이 되어버렸다. 그의 <꽃>이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등이 학교 교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젊은 가슴에 인상 깊이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어떤 시인에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종종 자기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는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일들이 있는데, 시인들에게도 이러한 일들은
많이 일어난다. 아마도 김춘수 역시 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가
흘러가면서 파들어가는 언어의 깊은 골짜기에서 그것은 그리 두드러지지 못한다. 그의 <꽃>은 그가 '꽃'에 부여하는 여러
가지 의미들, 예를 들어 삶의 가장 빛나는 부분, '의미'를 개화(開花)하는 존재, 혹은 그러한 것들을 암시하며 넓게 그러한
의미의 지평선으로 사물들을 데려오는 하나의 기호이다. 그러나 그의 <꽃>은 오히려 서로의 그리움 속에서 소중한 의미로
자리잡고 싶어하는 상투적인 연애의 텍스트로 사람들에게 고정되어간다. 대개의 수준 높은 시인들은 연애 그 자체의 미묘한
감정들을 시의 목표로 삼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좀더 인생의 보편적인 원리, 깊이 있는 깨달음, 소위 '철학적'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렇게 골치 아픈 것들에 대해 냉담하다. 그들은 좀더 감각적으로 파고들며, 삶 속에서
회오리치는 충동의 직접적인 물결에 몸을 맡길 뿐이다. 그러한 것들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다. 김춘수라는 이 어려운 시인이
약간의 '연애'적인 분위기를 살짝 뿌린 이 <꽃>이 유독 대중적으로 퍼질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김춘수
시의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서 이 시는 '연애'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 역시 그에게는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적인
'언어철학' 텍스트이다. '연애'적인 분위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하나의 '동기부여'에 불과하다.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타령조> 이전의 시들까지를 고찰하려는 마당에 이러한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 나로서는 그의
시들이 어떠한 넓이와 깊이 속에서 움직이는지 따져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탐구하는 주제를 많은 사람들의 삶과 사유와의
관계 속에서, 개인과 집단 사이의 미묘한 엇갈림 속에서 되새겨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고독'이란 단어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그 분위기는 도처에 있다. 넘쳐흐르는 정적(靜寂)에 파묻힌 '나'(<또
하나 가을 저녁의 시>), 순결한 공기 속에 놓여 있는 소년(<소년>), '모른다'라는 말로 산수(山水)의 공간을
무관심의 안개로 가득 채운 채 기다림에 몸을 달구는 '나'(<모른다고 한다>) 등 고독한 주인공은 그의 시에서 하나의
뼈대 구실을 한다. 그의 <고독>은 그에게 시적인 사유와 몽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면의 깊이를 마련한다.
그것은 이 일상의 세계를 야릇하게 뒤집는다. 갑자기 타인들과 어울려드는 일상적인 삶의 리듬이 깨어지며, 추억의 시공간이 현재의
시공간을 뒤흔들어버리기도 한다. <황혼>에서 이제는 잊어버린 아득한 날의 과거 속에서 한 여자가 의식의 물결을 헤집으며
솟아오른다. 이러한 현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루하루 수많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가오는 일상적인 삶의
의미에 대해서 그것은 질문을 하는 것인가? 아마도 그럴지 모른다. 그것은 이 지루한 현대세계 전체를 무화시키고 자신의 우주를
새롭게 만들려는 개인의 고독한 노력일 것이다. 이 고립된 개인은 일종의 능동적인 개인이다. 즉 적극적으로 고립을 원하며, 거기서
자신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개인인 것이다. 그의 시에서 하나의 정적(靜寂)이나 무관심한 공간, 순결한 책
위의 하늘 등은 모두 고립 속에서 일상을 무화(無化)시키며 최대한 자신의 감각과 몽상을 순결한 상태로 열어놓는다. 바로 이러한
곳에서 그의 시들이 탄생하며 자라간다. 그의 시들이 지니고 있는 첫 번째 특징 중의 하나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이 의문은 일상의 대상들을 어둠 속에 침몰시키면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것을 붙잡으며 삶의 근원적인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이 의문을 우주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고 생기 있게 만들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강력한 염원과 관련시킨다. 이 광대한 우주적인 물음이 가장 근원적인 고독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다음의
시가 말해준다.
<밤의 시> 전문
이 절대적인 침묵의 밤은 무엇인가? 모든 것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침묵의 절대적인 가난 속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광대무변한 천지간에서 홀로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실존주의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춘수의 시적
자아들은 일단 우주적인 물음(실존적인 개인이 묻는)은 갖고 있지만, 허무에 직면하여 적극적으로 대결해나가는 강력한 의지를 갖지는
못한다. 이러한 측면의 그의 초기시들을 가난하게 만든다. 그는 가난한 시대, 가난한 세계 속에서 '나의 가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시가 항상 현실의 '빈곤함'에 대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운명을 지닌다는 사실을 또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는 그러한 빈곤의 구렁을 메우고, 그 위에 풍요로운 몽상의 밭을 일구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꿈꾸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한 면에서 그의 초기시에서 시적 자아는 너무 현실의 빈곤에 발이 묶여 있다. 그것은 자신 속에 숨겨진
몽상이나 본능의 불길 혹은 정열적인 탐구로 자신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그의 언어들은 과거의 세계가 지니고 있던 의미들의 창고와
단절되어 있으며, 현재에 있어서도 이 우주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전능적인 자아'의 마술적 손길들에 붙잡히지도 않는다. 그의
시들은 단지 '고독' 그 자체, 그것의 가난함에서 솟아나며, 그 가난 속에서 간신히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무엇인가가
사라져버리는 풍경들이, 그리고 점차 말이 없는 침묵의 고요함에 지배되는 풍경들이 시적인 이미지들로 자리잡는다. <네가 가던
그날은>, <부재>, <嶺에서>, <푸서리>, <가을 저녁의 시> 어떤
것을 들어보아도 그러하다. 이 불모의 시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슬픔이며 동시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초기시들이
탄생하는 지점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은 아닐까?
<가을 저녁의 시> 전문
가을 저녁 산과 들의 어스름 풍경을 어떤 고독한 사람의 죽어가는 광경과 겹친 이 시는 통상적인 기교를 뒤집었다. 즉 사람의 어떤 운명을 자연의 풍광으로 비유하는 대신 자연의 어떤 경관을 사람의 어떤 운명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자신을 살게 만들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갈 수 있는 사람의 죽음은 얼마나 슬프고 아름답고 정결한가? 그가
<嶺에서>에서 '아름다운 꿈들은 사라지는가'라고 물었을 때 바로 이 슬프고 아름답고 정결한 것은 하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불모의 세계는 그러한 것들이 사라진 채 어둠과 먼지 그리고 단단하고 두꺼운 침묵에 둘러싸인다. <산을 등진
거리>나 <길바닥>의 불묘성을 보라. 김춘수에게 이 불모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깊이 탐색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시에서 치명적인 한계이다. 그러한 불모의 일상적인 세계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킨다는 순결함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그의
시들에서 두드러진다. 바로 이 부분이 후기의 <처용단장>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지적하기로 하자.
소년의 고독과 그 순결함이 시적인 풍요로움을 상당부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그의 시들에서 시적인 이미지들을 빚어내는
힘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고독하고 순결한 소년적 자아가 이 세계에서 순수하게 다가오는 사물들과 그에 맞는
아담의 최초 언어를 둘러보려 했다. 아마도 초기 시들에서 후기에까지 이어지는 이 순수한 언어-대상, 대상-언어는 '꽃'과
'눈물'일 것이다. 3. 그의 <서풍부>를 보면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의 시들에서 이 '꽃'은 <나르시스의 노래>의 수선(水仙花), <장미의
행방>의 장미, <부재>의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그리고 <유월에>의 작약, 장미, 사계화, 금잔화
등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꽃들의 이름이 <꽃밭에 든 거북> 이후에 수많은 꽃들이 농축된 '꽃 일반'
아니면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순결하게 자신의 의미를 아름답게 개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하나의 존재론적 기호가 된다. 그것은
<꽃1>, <꽃2>를 거쳐 그 유명한 <꽃>에서 김춘수적인 전형성을 얻는다. 그의 절창인
<꽃>은 그가 초기에 가다듬은 예리한 감각과 어느 정도의 언어철학적 고민을 반죽하고 걸러내어 빚어진 것이다.
정결하면서도 깔끔하고, 요란스럽게 치장하거나 설명하려는 수다스러움으로부터 거리를 취한 간결함이 이 시를 아름답게 한다. 이
'꽃'은 고독한 자아의 침묵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그것은 초기시에서는 이 불모에 세계 속에서 삶의 어떤 의미들을 깨우며, 그
감각의 불꽃들을 인생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텍스트가
<불나비>이다.
<불나비> 전문
여기서 꽃은
불이며, 하늘의 별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꽃'은 지상에서 삶이 설레임 속에서 물결칠 때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삶의
'꽃'이다. 삶의 깊은 계곡들 속에서 불의 기운이 넘칠 때 그것들이 불타오른다. 그것들은 하늘의 별들을 달래듯 깨운다.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김춘수 시들의 열정적인 부분을 엿보게 된다. 그가 <부재>나 <가을 저녁의 시>,
<푸서리> 등의 불모성들을 늘어놓을 때 그 반대편에는 이러한 열정이 하나의 짝으로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꽃'의 이러한 생명력을 간추리면서 응축시키고 점차 불모성과 풍요로움과 변증법적 담론으로 건조하게 나아가게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현대세계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삶의 허무함에 너무 깊이 매몰되어버렸기 때문일까? 그의
<숲에서>와 <동해>, <밝안 祭>, <신화의 계절> 등을 보면 이제는 마치 그의 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낯설음을 느끼게 된다. 무의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 계열의 시들을 그는 왜 포기한 것일까? <신화의
계절>에서 원시적인 자연의 숨결로 몸부림치는 산, <숲에서>는 그 속에서 생명력으로 충만한 채 비개인적으로
영위되는 삶을 찬양한다. <밝안 祭>는 단군조선의 신화를 상징하는 '태백(太白)'을 중심적인 의미소로 하여, 하얀 옷의
겨레가 대자연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의 시들에서 고립된 개인의 허약한 모습과 이 시의 웅장한 모습은 극히
대조적이다.
<밝안 祭> 전문
이 '황금시대'를 김춘수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제목의 설명으로 그는 이처럼 말한다.
진(震) 땅에는 예로부터 '불근'이란 신도(神道)가 있어, 태양을 하느님이라 하여, 섬겼으니, 옛날의 임금은 대개 이 신도의 어른이니라
우리 민족의 이 신화적인 시대, 이 황금시대가 김춘수에게는 인간과 자연과 세계의 성스러움을 한꺼번에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횃불들은 어떠한 개인의 고독도 남겨놓지 않는다. 하늘 위에서 타오르는
태양의 불은 모든 개인의 삶 속에서 횃불로 타오른다. 이러한 황금시대의 신화와 아직 마르지 않는 그 거대한 물줄기에
여전히 입을 대고 사는 설화적인 시대들은 그에게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이제는 어떠한 신화나 설화도 남겨놓지 않은 순수한
'꽃'에서 그것의 막연한 반향만을 그려보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이야말로 김춘수 시에 대해 우리의 진정한 정신사, 문학사적 맥락을
갖다대는 일이다. 그의 시에서 순결함과 그로 인한 빈곤함을 동시에 비춰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물음 속에서 가능하다.
우리는 앞에서 그의 초기시들에 나오는 소멸과 침묵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그 죽음과 밤이 두껍게 짓누르는 현대의 일상적인 삶 속에
그의 시적 자아들은 빈곤하게 놓여 있다. 그의 <동해>를 보면 황금시대의 소멸 이후 긴 시간 동안의 역사가 한낱
데카당스에 불과하다는 가치판단을 볼 수 있다. 그의 초기시들에는 그래서 '만년(萬年)'이라는 세월이 황금시대의 소멸의 역사로서
제시된다. <숲에서>에서 그는 '아득히 가버린 만년!'이라고 외친다. <푸서리>에서 이 불모의 시대로부터
앞으로 몇만 년을 흘러야 그 황금시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눈물>은 황금시대가 지나가고
그것이 쇠퇴해갔던 시대, 그 눈물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 '눈물'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이러한
것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시들은 그 역사철학적인 문제들 때문에 지탱해야 할 무게들을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감당하거나 시적으로
용해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김춘수 개인의 한계만은 아니며 우리 시대 전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어떤 시인들은 과도하게
옛날의 신화적 분위기들을 가지고 현대적인 삶의 어떤 부분들을 유려하게 치장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이 거대한 질문의 벽
앞에서 아무런 토대도 없는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언어들을 탑처럼 세우려 하지만 헛될 뿐이다. 김춘수는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의
왜소함과 빈곤함을 보여주려 할 뿐이다. 김춘수의 순결한 시적 자아는 자신의 순수하고 작은 우주를 목표로 삼는다. 그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과 같은 일련의 시들을 통해서 단지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가치 없고 허무한 것인가를
확인하고자 했었다. 특히 지금 여기 이 당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그의 순결함은 이러한 역사가 소멸하는 순수공간을 시 속에서
창출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초기시에서 멀어질수록 그의 '꽃'은 역사적인 것들을 막연하게
반향할 뿐인 순수공간-언어 텍스트의 그 절대적인 내면공간-속에서 피어오른다. 그 새로운 순수한 우주를 건설하기 위한 원초적인
재료들을 위해 그의 언어들이 실험되기 시작한다. '죄 지은 기억 없는 무구(無垢)한 손들이/스스로의 손바닥에 하나의/장엄한
우주(宇宙)를 세웠습니다'(<무구(無垢)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에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최후의 탄생>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약간은 철학적인 분위기에서 모두 정리하고 설명하는 구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이 시에서 감동적인 울림을 갖는 생명력 넘치는 언어들로 탄생되기는 어렵다. 4
김춘수적인 시세계, 김춘수적인 미학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는 그의 <처용단장>, <타령조 기타>에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혹은 <서촌 마을의 서 부인>, <이중섭> 연작이나 <노새를
타고> 그리고 최근의 <서서 잠자는 숲>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해본다. 그 흐름을 통해서 희미하게
감지되는 어떤 것이 있다. 그의 시에서 이러한 독특한 흐름으로 가는 입구에 <딸기>나 <6월에>,
<'눈'에 대하여> 같은 시들이 놓여 있다. 마치 시간의 역사적인 흐름이 소멸된 것 같은 회화적 공간이 그러한 시들의
배경을 지배한다. <딸기>에서 아마도 우리는 그러한 최초의 순수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의
고독한 분위기는 전체 사물을 지배한다.
<딸기> 부분
딸기밭에서 보던 일상적으로 익숙한 대상으로서의 딸기와 그로부터 낯설게 된 다방의 고독한 공간 속에서 놓인 딸기의 대조가 이 시의
회화적 평면과 그 미학을 마련한다. 그 진열장 안의 딸기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뻘겋게 달아오른다. 그것은 자신의 주위
공간을 빨아들이면서 그 가쁜 숨을 쉰다. 이 팽팽한 '낯설게 하기'는 '딸기'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감각을 무너뜨린다. 여기서
과연 김춘수는 그가 '의미의 탈바꿈'이라고 불렀던 것을, 또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그는 세잔이라고 착오를 일으켰던
것 같다)에서 이룩했다고 칭찬했던 '유용성 너머의 근원적 의미'를 마련할 수 있었는가? 김춘수가 이러한 전환점에 서서
이러한 목표 달성보다는 그러한 것에 대한 추구 자체를 시의 대상으로 삼아 성공했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꽃밭에 든
거북>이나 <바위>, <꽃1>, <꽃2> ?눈짓? 등은 때로는 그러한 추구의 미묘한 상태나
좌절, 혹은 약간의 희열 등에 대해 노래한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꽃> 역시 그러한 단계의 여러 시도들로부터
결정(結晶)된 것이다. 사실 김춘수의 이러한 과정에서 볼 때 이 시는 오히려 너무 설명적이며 서술적이다. 그것은 오히려
<돌>이나 <능금>에서 비해 자신의 세계를 깊이 있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꽃>이라는 기호가
김춘수 자신에게 펼쳐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역사와 그 드라마가 그 한 편의 시만을 읽어보는 독자들에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춘수는 이제 새롭게 다가오는 대상물인 <돌>이나 <능금>들에서 새로운 감각의 의미의 결합들을 만들어내어야
했다. 그것들이 그 기호들을 풍요롭게 만든다. <꽃의 소묘>와 <꽃을 위한 서시>,
<나목(裸木)과 시>, <나목(裸木)과 시 서장(序章)> 등은 그가 순수공간 속에서 이러한 실험들을 어느
정도 하나의 일관된 경향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김춘수 시의 결정판들이다. 이 시들을 그의 전체 시편 중에서 대표작으로 꼽는 데
주저할 수는 없으리라. 이중에서 앞의 <꽃>과 같이 잘 정리된 작품이 바로 <나목(裸木)과 시
서장(序章)>이다.
<나목(裸木)과 시 서장(序章)> 전문
김춘수는 '꽃'에서 '무화과(無花果)나무'로 옮겨간다. 이 시가 한문이 많은 것은 의도적이다. '꽃'이 없는 나무는 그의 '꽃'
연작들과 하나의 패러디 관계를 이루면서 의미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는 무엇인가 의미를 개화하고 그 향기를 은밀하게 진동시키는 꽃
대신 그것이 없는 나무를 내세운다. 그것은 정말 텅 빈 것 같은 허무의 하늘, 그 하염없는 무한으로서의 겨울 하늘을 마주한다.
무엇인가 반짝이는 듯했던 꽃과 별 대신에 순수한 없음이 다가선 것이다. 그는 역사의 완전한 소멸, 그 순수한 공간을 여기서
노래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김춘수적 역설인 것인가? 그는 이 반(反)역사 속에서 만나는 언어, 그 텅 빈 절대허무의 공간에서
솟아나는 언어를 붙잡고자 한다. '언어는 말을 잃고/잠자는 순간'이라고 그가 말할 때 그 언어, 새로운 우주를 명명(命名)해야
하는 최초의 언어가 탄생한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시적 언어인 것이다. 이 시가 마련한 시학의 근원적인 지점을 그 이후의 김춘수 시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나는 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 그가 이후에도 이리저리 많은 실험을 했지만 모두 이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김춘수는 우리 현대시에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한 결정적인 꼭지점을 여기서 만들어놓았다. 그가 역사를 무(無)로 돌려놓고
순수한 오브제들을 만들어내려고 했던 것을 그저 반역사적이라거나 몰역사적이라고 단순히 매도할 수는 없다. 그것 역시 역사에 대한
역설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거기서 언어에 대한 현대적 집착과 그로 인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그가 집요하게
탐색했다는 측면을 주목한다. 그가 언어에 딸려 있는 일상성의 측면에 침을 뱉고 그로부터 빠져나가려 했다는 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극단적인 대극 역시 그러한 어리석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춘수의 이러한 실험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역사가 우리를 둘러싼 대상들에 대한 어떠한 창세기적 몸짓에서 흘러나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시적 암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현대언어 속에 잠겨 있는 모든 것을 삭제하려 한다. 그러나 삭제하고자 하는 그 태도 역시
현대성의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실험 이후 그는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러한 굵은
줄기를 염두에 둔다면 김춘수는 그 이후 거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단지 그러한 실험들의 어떤 경향들을 추가하거나
풍요롭게 만들려는 시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작가세계」1997, 여름)
[작가의 변] 의미에서 무의미까지 김 춘 수
자기가 해 온 일을 스스로 회고해 보는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 의의 있는 일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남 앞에
공개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허영같이 보일 염려도 있고 하여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라도 자기를 남 앞에
내놓고 싶어하는 그런 허영을 참지 못할 만큼 나는 아직 어리지는 않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작시 과정이 남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서다. 이거마저 허영이라고 한다면, 나는 시에 대하여 일체의 말을 삼가야 하고, 시를 쓰는
일까지도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그 쓸쓸함을 참을 수 있을 만큼 나는 지금 어른이 돼 있지도
못하고, 용감하지도 못하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작시 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詩作)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보려는 것이다.
1947년에 낸 나의 첫 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이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 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손님이 갖다 주는 선물'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 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 대한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
<모른다고 한다>
<경이에게>
<서풍부>
이것들은 모두 내 촉각을 더듬어 짚어 가며 암중에서 씌어진 시들이다. 내 체질의 빛깔은 원색이 아니고 중간색인 듯하다. 방법을
정립하지 못하고 거의 촉각 하나를 밑천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의미)보다 먼저 톤(tone)이 있다. 나의 무의식에는
베를렌과 미당(未堂)이 있었는 듯하다. 이 무렵 내 가까이에 늘 청마(靑馬)가 계셨지만 청마의 말은 나에게는 너무 무겁고
거북하기만 하였다.
나의 사춘기는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니라 너무 일찍 와서 너무 오래 머물다 간 것 같다.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이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자기 내 세계'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 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다녔다. 선험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과 제일인(弟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뒹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19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꽃을 위한 서시>
이데아로서의 신부의 이미지는 릴케와 평계(平溪) 이정호(李正鎬)의 시에서 얻은 것이다. 이 비재(신부)는 끝내 시가 될 수 없는
심연으로까지 나를 몰고 갔다. 그 심연을 앞에 하고는 어떤 말도 의미의 옷이 벗겨질 수밖에 없었다. 핑계의 침묵을 단지 나는
그의 게으름으로만 돌리지 못한다. 나는 이 시기에, 어떤 관념은 시의 형상을 통해서만 표시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또
어떤 관념은 말의 피안에 있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관념공포증에 걸려들게 되었다. 말의 피안에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싶었다. 그 앞에서는 말이 하나의 물체로 얼어붙는다. 이 쓸모없게 된 말을 부숴 보면 의미는 분말이 되어 흩어지고, 말은 아무것도
없어진 거기서 제 무능을 운다. 그것은 있는 것(존재)의 덧없음의 소리요, 그것이 또한 내가 발견한 말의 새로운 모습이다. 말은
의미를 넘어서려고 할 때 스스로 부서진다. 그러나 부서져 보지 못한 말은 어떤 한계 안에 갇힌 말이다. 모험의 그 설렘을
모른다. 나는 그 설렘에 몸을 맡겨 보고 싶은 충동이 팽팽해졌지만, 간헐적으로 반동이 일어나 말을 아주 제 구실의 가장 좁은 한계
안으로 되돌려보내곤 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과 같은 시가 일종 그런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을 익히듯
나는 말을 익힐 생각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나는 의식적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데생시기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타령조'라고 하는 시가 두 달에 한 편 정도로 씌어지게 되었다. 일종의 언롱이다. 의미를 일부러 붙여 보기도
하고 그러고 싶을 때에 의미를 빼 버리기도 하는 그런 수련이다. 이 시간의 부산물로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겨울밤의 꿈' 등이 있다. <겨울밤의 꿈>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관념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생(寫生)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 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여기서 나는 시의 일종 순수한 상태를 만들어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나의 의도상의 기대를 글로써 공개하기도 하고, 작품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 처음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다.
<인동잎>
이 시의 후반부는 관념의 설명이 되고 있다. 관념과 설명을 피하려고 한 것이 어중간한 데서 주저앉고 말았다. 매우 불안한
상태다. 나의 창작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여태까지의 오랜 타성이 잠재 세력으로 나의 의도에 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갈등의 해소책을 생각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의식과 무의식의 시작(詩作)에서의 상관관계를 천착하게 되었다.
타성(무의식)은 의도(의식)을 배반하기 쉬우니까 시작 고정에서나 시가 일단 완성을 본 뒤에도 타성은 의도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사생에 열중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설명이 끼게 된다. 긴장이 풀어져 있을 때는 그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한참 뒤에야 그것이 발견되는 수가 있다. 'id'는 'ego'의 감시를 교묘히 피하고 싶은 것이다. 'ego'는 늘 눈 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동안 사생에서 나는 하나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세잔느가 사생을 거쳐 추상에 이르게 된
그 과정을 나도 그대로 체험하게 되고, 사생은 사생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리얼리즘을 확대하면서 초극해
가는 데 시가 있다는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 사생이라고 하지만, 있는(實在)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 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은 버리고, 다른 어느
부분은 과장한다. 대상과 배경의 위치를 실재와는 전연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제의 풍경과는 전연 다른 풍경을 만들게
된다.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게 되고, 자유연상이 끼게 된다. 논리와 자유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개입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는 부서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시가 이리하여 탄생한다. 타성(무의식)은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나 그 내용을 바꿔 갈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을 아주 관념적으로 비유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즉물적으로 서술적으로 써 보겠다는 의도적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또 하나 새로운 타성이 되어 낡은 타성을 압도할
수가 있게 된다는 그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새로운 타성은 새로운 무의식으로 등장할 수도 있다. 이것을 나는 전(前)의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1960년대 후반쯤에서 나는 이 전의식을 풀어놓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물론 내 의도, 즉 내 의식의 명령하에서
생긴 일이다. 이런 행위는 물론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 내
의도(의식)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말할 필요도 없는 일일는지 모르나)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菲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가 된다. '처용단장' 제1부는 나의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씌어진 연작이다. 여기서 나는 인상파풍의 사생과 세잔느풍의 추상과 액션 페인팅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싶었으나 내 뜻대로 되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처용단장> 제1부
자각을 못 가지고 시를 쓰다 보니 남은 것은 톤뿐이었다. 이럴 때 나에게 불어닥친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관념에 대한
기갈이라는 강풍이었다. 그 기세에 한동안 휩쓸리다 보니, 나는 어느 새 허무를 앓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허무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 허무의 빛깔을 나는 어떻게든 똑똑히 보아야 한다. 보고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는 그것이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어디론가 날려 버려야 했다. 말에 의미가
없고 보니 거기 구멍이 하나 뚤리게 된다. 그 구멍으로 나는 요즘 허무의 빛깔이 어떤 것인가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보일 듯
보일 듯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처용단장' 제2부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미지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 이미지 콤플렉스
같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나에게는 없다. 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미지를 수사나 기교의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의
폐단이다. 나에게 이미지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행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 이미지가
되어 가려는 과정에서 하나는 또 하나의 과정에서 처단되지만 그것 또한 제3의 그것에 의하여 처단된다. 미완성 이미지들이 서로
이미지가 되고 싶어 피비린내 나는 칼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살아 남아 끝내 자기를 완성시키는 일이 없다. 이것이 나의 수사요 나의
기교라면 기교겠지만 그 뿌리는 나의 자아에 있고 나의 의식에 있다. 서도(書道)나 선(禪)과 같이 동기는 고사하고, 그러한 그
행위 자체는 액션 페인팅에서도 볼 수 있다.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되려는 순간, 소리(리듬)로 그것을 처단하는
수도 있다. 소리가 또 이미지로 응고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연작에 있어서는 한 편의 시가 다른 한 편의
시에 대하여 그런 관계에 있다. 이것이 내가 본 허무의 빛깔이요 내가 만드는 무의미의 시다. 잭슨 폴록의 그림에서처럼 가로세로
얽힌 궤적들이 보여주는 생생한 단면-현재, 즉 영원이 나의 시에도 있어 주기를 나는 바란다. 허무는 나에게 있어 영원이라는 것의
빛깔이다. <처용단장> 제2부
말에 의미가 없어질 때
사람들은 절망하고 말에서 몸을 돌린다. 그러나 절망의 몸짓을 참으로 보고 사람들은 그러는가? 팽이가 돌아가는 현기증 나는 긴장
상태가 바로 의미가 없어진 말을 다루는 그 순간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말의 장난이라고 하지만, 잭슨 플록은 그러는 그 긴장을
이기지 못해 자기의 몸을 자살로 몰고 갔다. '말의 긴장된 장난' 말고 우리에게 또 남아 있는 행위가 있을까?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눈에 그것은 월하(月下)의 감상으로밖에는 비치지 않는다. 고인이 된 김수영에게서 나는 무진 압박을 느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관념·의미·현실·역사·감상 등의, 내가 지금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말들이 어느
땐가 나에게 복수할 날이 있겠지만, 그때까지 나는 나의 자아를 관철해 가고 싶다. 그것이 성실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언제나
불안하다. 나는 내 생리 조건의 약점을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나의 이 생리 조건이 나의 의도와 내가 본 진실을 감당 못
하고 그 긴장을 풀어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나의 생리 조건에 나는 동정한다. 다음과 같은 나의 근작에서 그것은 잘
나타나고 있다.
<두 개의 꽃잎>
이 시는 나의 생리
조건과 나의 의도, 또는 의식과 타협 끝에 생긴, 나로서는 매우 불성실한 제품이다. 나로서는 말의 장난이라고 하는 긴장상태를
견디어 내는 데 있어 생리적인 압박을 느낀다. 변비가 도졌다가 설사를 하다가 한다. 말에다 절대자유를 주고 보니,
이번에는 말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말이 그러한 자유에 길들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해지고, 불안하니까 나를 자기의 불안 속에 함께
있자고 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 주인이 봉변을 당하게 된다. 말은 수천 년 동안 자유를 모르고 살아 왔다. 허무가 나에게 오자 나는 논리의 역설을 경험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