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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과 탄식의 이중주
예레미야 20:7-18
who?
최근에 우리들이 묵상하고 있는 성경본문은 예레미야서입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왕조 마지막 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1절에서 3절에 의하면,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여호아하스 왕, 여호야김 왕, 여호야긴 왕,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 왕까지 무려 다섯 왕이 유다를 통치할 때까지 예언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이전에는 유다를 향해서 예언하였지만,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에는 유다를 뛰어넘어 이방민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누구에게 보내던, 또 무슨 명령을 내리던, 예레미야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신을 비방하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레미야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했습니다(렘 1:6-8).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유다의 심판과 회복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여기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은 심판에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건설하고 심는 것’은 회복에 해당됩니다. 유다의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유다를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레미야의 소명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말씀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만을 분명히 전해야만 합니다. 단지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오직 한 가지 사명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온전히 전하는 것뿐입니다.
what’s problem?
그런데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 유다를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는 유다 백성에게 결코 환영받는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예레미야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존재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심판의 메시지를 받은 백성은 예언자를 핍박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된 이유는 여호와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1절 이하에 보면, 예레미야는 제사장이요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이라는 사람에 의해 큰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전한 유다심판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렘 19:3). 심지어 예레미야는 성전 뜰에서도 유다 성읍에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이 목을 곧게 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렘 19:15).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들은 성전의 총감독 바스훌은 예례미야를 핍박하였습니다. 바스훌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그를 채워 두었습니다. 다행히 다음 날, 예레미야가 풀려나긴 했지만, 예레미야는 성전 문에 딸린 감옥에 갇힘으로 모욕과 수치를 느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8).”
사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의지적 선택에 의해서 선지자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성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로 불러주셨을 뿐입니다. 심지어 7절에서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주께서 나를 권유하셨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문의 문맥상으로는 “유혹하여 속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낳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여서 자신을 예언하는 선지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또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다.”는 표현도 원문의 문맥상으로는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여 억지로 관계를 맺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p. 252).
왜 예레미야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자신이 말할 때마다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치욕과 모욕거리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결심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면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뒤따르고, 하나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게 되는 이중적인 고통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 닥치는 큰 어려움을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바나바훈련원 사역자영성훈련을 받으시는 한 시니어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 선교사님은 한전이라는 안정된 공기업을 다니며, 교회의 장로로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몸에 이상이 와서 검진을 했는데, 간이 굳어져 가는 간경화증이라는 병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이 분에게 몇 달 혹은 잘해야 몇 년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이 서원하였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주셔서 저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신다면 제가 꼭 선교사로서 헌신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니고 있던 직장을 퇴사하고,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공부를 하여 박사과정에 도전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져, 열심히 공부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관리하던 중에 시간이 지나 재차 병원진료를 가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검진 후에 장로님께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간경화 증세가 호전되어, 이제 안정권에 접어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간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 장로님의 간경화증상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이후 이 장로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가장 먼저 수십 년 간 살았던 정든 집을 팔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했던 시니어 선교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자녀들과도 잠시 이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인생 후반전에 자신의 생활을 정리하고 낯선 외국 땅으로 향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는 큰 고통과 어려움이 닥칠 수 있습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장로님처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처럼,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전과 사명을 따라 사는 일을 포기해야 할까요?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아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 순종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what?
이제 예레미야는 다시 용기를 냅니다. 그는 호시탐탐 자신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친한 벗도 자신이 실족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합니다.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로 결심합니다.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11절).”
예레미야는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께 자신의 사정을 아룁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싸움에 능하신 전사이시기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찬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1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예레미야는 현재 당하는 모욕과 수치 앞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레미야의 신뢰와 확신은 그의 앞에 놓인 인생의 난관을 뚫고 나가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14절 이하의 예레미야의 고백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14-18절).”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확신은 어디로 가고, 지금 예레미야의 입술에서 이런 탄식의 노래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확신을 노래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탄식의 노래가 흘러나온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서 적잖게 당황하게 됩니다. 과연 이것이 신앙이란 말인가?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란 말인가? 신앙의 확신과 탄식이 공존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자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저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확신과 탄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이 혹시 여러분에 낯설게 느껴지진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듣지 않으시고, 너그럽고 깊은 가슴으로 들으신다. 깊은 숨을 들이쉬듯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심연의 절망을 그대로 받으신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아기가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 그 아이의 어머니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아이는 죽어서 천에 싸여 있는데, 어머니는 애기가 젖 달라고 울었다며 가서 젖을 먹여야 한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목회자는 그 어머니에게 아이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천국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알아요, 저도 그것은 알아요!”하면서 다시 울부짖었다.
천국의 위로를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어머니의 행동에 대해 뭐라 말할 것인가? 이 어머니가 믿음으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슬픔의 먹구름이 잠시 하나님과 자신의 믿음을 가렸을 뿐, 그 어머니는 슬픔과 치유의 과정을 함께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슬픔이 사로잡은 동안 사람은 슬픔을 조절하지 못한다. 슬픔이 그 사람을 몰고 가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슬픔과 충격은 나선형의 반복 곡선을 그리며,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회복하게 된다. 슬픔과 충격이 꼭대기와 바닥을 오르내리면서, 한꺼번에 몰려왔다 물러가는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다. 인간 감정의 생리를 조금이라고 이해한다면 믿음으로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다그칠 수 없을 것이다. 이성적 판단을 기준으로 인간의 감성을 다그치기만 하는 것은 강박적이다. 인간의 경험에서 마음과 감정을 빼 버린 것이 곧 강박적 신학이다.
-출처: 하재성, 「강박적인 그리스도인」(이레서원),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19년 6월호, p. 255에서 재인용.
인간은 어느 하나만의 감정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늘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만 아니라, 때로는 꺾이고, 가차 없이 부서지는 부서짐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고,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믿음이 밑바닥을 경험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믿음은 자주 꺾어짐을 경험해야 하고, 부서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인간의 경험에서 마음과 감정을 빼 버린 것이 곧 강박적 신학입니다(위의 책).” 사람을 살리는 신학은 인간을 단편적으로 보지 않고 통전(通典) 적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러이러 하니까 너도 이러이러 해야 돼!”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에 정서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출발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종일토록 사람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당하게 되지만, 예레미야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하게 되더라도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 견딜 수 없는 또 다른 고통을 느끼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가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더라도, 곧 그는 자신 내면의 연약함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인생의 고생과 슬픔으로 몸서리치는 연약한 인생임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고, 나의 믿음이 대단한 것인 양 자신을 속이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행여 나의 주변에서 예레미야처럼 신앙의 문제로 인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형제, 자매를 발견했다면 함부로 그를 재단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로 그를 포용하고 감싸 안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고 가르쳐 주셨고, 바울 선생도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회피해야 할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맞닥뜨리고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고난입니다. 오히려 나의 믿음의 최고점을 바라보기보다, 최저점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산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산 정상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산 정상에서 어떻게 내려올 것인가도 미리 계획해 두고 산 정상을 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경주를 다 마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고, 또 살아가야 할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고난 받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자신의 몸을 내어 주사, 고통의 나무 십자가에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고통은 고통으로 마감되지 않고 부활의 생명으로 꽃을 피워 오늘 우리들에게 생명의 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아멘.
(찬송가 149장)
what’s then?
하나님의 은혜로 육신의 질병을 치유 받은 장로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집을 팔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도 잠시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선교지로 나가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70세가 가까워지는 고령의 나이에 새로운 나라로 선교사로 떠나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대한민국 정부의 대외무상원조 전담기관인 코이카(KOICA)에서 봉사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코이카는 개발도상국가의 빈곤퇴치와 경제, 사회발전을 지원하는 정부기관입니다. 이 장로님은 자신이 전공한 분야가 남들과 달리 독특한 분야였기 때문에 서류접수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지원서를 냈습니다. 장로님의 딸이 엄마도 유아교육을 전공했으니까 같이 지원서를 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코이카에 봉사자 지원서를 냈는데, 장로님은 떨어지고 장로님의 아내는 합격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모님 덕분에 부부가 함께 스리랑카로 정부지원을 받아 봉사자로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리랑카로 출발하는 당일, 장로님이 출국허가서를 받기 위해 공항에 줄을 서 있었는데, 공항직원이 장로님의 여권과 비행기 티켓을 보여 달라고 하더니, 다른 비행기 티켓으로 바꾸어 주더랍니다. 이 장로님은 영문도 모른 채 비행기를 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이 예약한 좌석이 나오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여승무원에게 티켓을 보여주며 자리를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잠시 후, 여승무원이 자신을 따라오라면서 장로님을 비행기 앞자리의 넓은 비즈니스 석으로 안내하더랍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좌석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잠시 후 뒤에서 여승무원들의 대화소리가 자신에게 들리더랍니다. “원래 저 자리는 다른 분이 예약을 했던 자리인데, 그 분이 오지 않아서 저 분이 대신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내용이더랍니다. 그 순간 장로님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정리하고, 자녀들과도 떨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위해 이 자리를 예비해 주셨구나.” 장로님은 작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큰 위로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에 도착한 장로님은 사모님과 함께 집을 구하고, 스리랑카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였습니다. 또 그곳에서 바나바훈련원 사역에 대한 비전을 갖고 계신 우리교단 전○○ 선교사님을 만나 함께 2년 간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장로님이 스리랑카 사역을 잘 마치시고 한국에 돌아온 후로, 한국에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을 선교하는 선교기관에서 여생을 헌신하고 계십니다. 또 올해는 특별히 바나바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저와도 좋은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에게는 분명 큰 고통과 어려움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불붙는 것과 같은 열정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확신과 탄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더욱 깊은 영적성숙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더 깊고 새로운 인간이해와 사랑의 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은 우리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주님을 묵상하고 바라봄으로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넘치는 위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