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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50
7월8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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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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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y2YPiA4-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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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동업자 예수님>
100억을 가진 대부호가 100만원 밖에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내게 동업을 제안했다고 합시다. 누구라도 깜짝 놀라겠지요.
사업자금 든든하겠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프로젝트 역시 탄탄하겠다, 그런데다 더욱 금상첨화인 것은 공동대표를 제안하면서 사업을 통해 창출되는 수익금의 절반씩을 나눠 갖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만왕이 왕이신 분께서, 어마어마한 분께서, 삼라만상을 다 소유하시고 다스리시는 분께서 자랑할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을 향해 인류 구원이란 큰 프로젝트를 들고 오셔서 동업하자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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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K2ZhJ01t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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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면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비교’로 이행 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었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과 비교하는 이유는 우월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려고 남과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사람은 어차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살아서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같은 쪽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달리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자신이 부처처럼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고 누가 더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입니다. 다만 방향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부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수천억의 자산가입니다.
이탈리아의 ‘잔루카 바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수천억의 재산과 초호화 보트, 개인 제트 비행기, 수영장 딸린 저택은 기본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거의 할아버지인데도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최고의 미녀들을 바꾸어가며 삽니다. 그의 저택에는 잡지에나 나올법한 미녀들이 몇 명씩 함께 삽니다.
그는 SNS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세계 많은 이들과 공유합니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홍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자랑은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하루하루를 부러워하며 그의 부족한 행복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의 ‘주윤발’ 씨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재산 ‘8천억 원’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내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저렴한 식사를 하고 싸구려 시계와 옷을 입습니다. 건전하고 겸손한 생활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두 사람의 인생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바키를 선택하시는 분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고, 주윤발 씨를 택하는 분은 그것보다는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단순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달리는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치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보다 목적지를 향해 눈이라도 돌리는 사람이 더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합니다. 비참해져도, 교만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부러워함 없이 함께 뛰는 사람들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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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단신께서 모든 질병과 병을 치유해 주셨듯이,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부른 것으로 본다.
그런데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장차 무엇을 해 나갈 수 있는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절)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고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 있었다.
결국은 유대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 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어떤 사람이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채운다 하여도, 이제는 세상이 그것을 선포할 것이다.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파멸하고 만다. 그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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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들의 눈에 놀랍고 특별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분의 선포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기적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눈앞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예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왔다는, 하느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열두 명의 제자는 예수님에게 권한을 받아 치유의 기적을 이어 갑니다. 마치 구약 성경에서 열두 부족이 하느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듯이, 열두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두 번 전하는 셈입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도록 권한을 주시는 것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선포는 그분의 업적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모든 신앙인에게 옮아갑니다. 모두가 예수님과 같은 권한을 가질 수는 없지만, 신앙인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 나라가 우리 안에 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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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여기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이라는 말은,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는 힘과 권한’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권한에는 ‘마귀들을 쫓아내지 않을 권한’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이 권한을 주신 것은 사실상 마귀들을 쫓아내는 ‘임무’와(과제와) ‘힘’을 주신 것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임무와 힘은 교회의 임무와 힘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마귀들에 맞서 싸워야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야 하고,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마귀들의 세력을 ‘악의 세력’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은 교회의 임무입니다. 만일에 교회가 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면, 그것은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악의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주는 일인데,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준다는 말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하나이고, 신앙생활은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고쳐 주게 하셨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음을 암시합니다. 뒤의 8절을 보면,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죽은 이들을 일으키는 권능과 권한’까지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일으킨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적은 사도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일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옛날에는 많았던 기적들이 오늘날에는 왜 없는가?” 답은 “옛날보다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다.”가 아니라, “믿음이 부족해서 기적을 보아도 기적인 줄을 모른다.”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이 아니라, ‘기적을 알아보는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옛날과 다름없이 하느님의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쪽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아보고 깨닫는 믿음이 부족해서 기적이 일어나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니 이 일은 기적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기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기적은 과학과 대립 관계가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냐, 아니냐? 가 중요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7)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지 말라는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예수님 말씀에서 ‘다른 민족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우상 숭배자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않는 이단자들로 해석됩니다. (산상 설교에 나오는 ‘돼지들’도 이단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과 이단자들에게는 가지 말라고 지시하신 것은, 아주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나중에’ 가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자들과 이단자들을 처음부터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루신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들 쪽에서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까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라는 말씀은,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갈망하고 있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서둘러 가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말은 유대인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고 올바르게 섬기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메시아와 메시아의 복음을 갈망하고 있지만, 누가 가서 전해 주기 전까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어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것의 책임은 복음을 거부한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것의 책임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서 그 나라를 맞이하여라.”라는 선포입니다. 복음으로 선포되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말은, “하늘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완성되는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늦어질 수도 있지만, 오늘 밤일 수도 있고, 내일 아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회개를 미루기만 하다가는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후회만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복음 선포를 잠시 미루었던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언제 회개하나? 그들에게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심판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을 먼저 들은 사람이든지 나중에 들은 사람이든지 간에 똑같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기회는 복음을 들은 바로 그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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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황님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 반포 5주년을 맞으면서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핵심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자연과 조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에너지 소비에 있어서 6위의 국가였습니다. 중국, 미국, 인도, 러시아, 일본 다음이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국토와 인구의 비율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석유 36%, 천연가스 16%, 전력 12%, 석탄 29%, 바이오 7%에 의해서 얻어지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는 천연가스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은 통계에서 제외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의 에너지 사용량에 비하면 훨씬 적을 것 같습니다.
석유화학의 제품 중에 플라스틱이 있습니다. 플라스틱은 성능, 내구성이 좋습니다. 가변성도 좋습니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플라스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스틱은 분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플라스틱에 의한 환경오염, 해양오염은 생태계에 큰 위험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건강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플라스틱이 산업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인간의 생활에 풍요로움을 주었지만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할 지구에는 피해를 주는 쓰레기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도 이제는 마트에서 비닐봉투를 주지 않습니다. 모두들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거나, 종이봉투를 사야 합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본인의 컵을 가지고 가면 할인해주는 커피 전문점도 있습니다. 분해가 되는 종이 빨대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쉽게 분해되는 친환경 플라스틱을 개발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모두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좋은 환경을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그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코로나19는 우연히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는 앞으로도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를 통해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바이러스를 보았습니다. 개발과 성장으로 인해 기후가 변하고,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연의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욕망과 발전의 제단을 부수라고 합니다. 그 위에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잠시 멈추니 자연의 질서가 회복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늘이 깨끗해지고, 물이 정화되고, 떠나갔던 동물들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인간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비용으로 자연과 인간을 살리는 방법을 찾으면 분명 길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12가지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의 시작. <창세기1:1~30>, 인류의 시작. <창세기1:26.2:7>, 죄의 시작. <창세기3:1~7>, 죽음의 시작. <창세기2:17. 3:19>, 구원 약속의 시작. <창세기3:15>, 가정의 시작. <창세기4:1~15>, 제사의 시작. <창세기 4:3~5>, 살인의 시작. <창세기4:8~9>, 도시문명의 시작. <창세기4:16~24>, 국가 형성의 시작. <창세기10:1~9>, 언어 분산의 시작. <창세기 11:1~9>, 선민 역사의 시작. <창세기12:1~50:26>과 같은 것입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부르셨고, 12명의 제자들은 사도가 되어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에서 나온 12명의 제자와 같은 사도직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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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까닭>
마태오 10,1-7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까닭>
나 그대를
부르는 까닭은
그대에게
나를 주기 위함이니
그대 내 곁에서
나를 곱게 품게나
나 그대를
부르는 까닭은
그대를
나 삼기 위함이니
그대 기꺼이
내가 되어 주게나
나 그대를
부르는 까닭은
내가 된 그대를
보내기 위함이니
그대 있는 곳 어디든
나 역시 있게 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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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우리는 누구나 한번 쯤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욱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게 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어 매일 제대에 올라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분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니 이미 충분히 주인공의 역할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 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진정한 주인공, 즉 여러 가지 한계와 어려움을 극복해 주님께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TV에 나와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조건은 첫 번째, 충분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두 번째,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하고 세 번째, 적어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은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어느 하나 빠짐없이 모두 반드시 필요한데, 예를 들어 분명한 목적도 있고 기회도 주어지지만 충분한 시련이 없다면 독자들이 감정을 이입시키기가 힘이 듭니다.
시련도 있고 기회도 주어지지만 목적의식이 없다면 독자들은 책을 읽는 목적을 상실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충분한 시련도 겪었고 목적의식도 있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소설을 읽는 입장에서 맥이 빠지게 되는 법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불러 모으는 제자들입니다.
이들의 면모를 보면 당대의 잘나가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조금씩 모자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잘나가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부와 같은 그저그런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민족들의 세금을 걷어 지배국에 헌납하는 세리, 이러한 세리와는 반대로 무력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혈 당원 등, 세상의 구원이라는 과업을 이루기에는 뭔가 하자가 있어 보입니다.
더더군다나 훗날 예수님의 수난을 보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니 이들은 확실히 충분한 시련을 장차 겪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증언하듯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고 이를 통해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부족함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분명한 목적을 가질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의심하기도 하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잠에 빠지기도 하며 수난의 두려움으로 부활 교리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회입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유다를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저마다 이 기회를 무사히 성공시켜 구원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들은 역시나 같은 주인공의 반열에 서고 싶은 제게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공교롭게도 저 역시, 충분히 주인공이 될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로써 느끼는 크고 작은 시련들이 저에게는 이미 주어져 있고 한없이 부족한 인간인 저는 앞으로도 이를 계속해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제 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의식,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신앙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저에게 주어지는 기회인데 사실 이러한 기회는 매일매일 제 앞에 놓여 있는 듯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사제로써 해야 할 책임들 앞에서 저는 제 목적을 이룰 기회를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잡아 나간다면 저는 충분히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왜 지식인 혹은 성실한 사람들이 아닌 철부지와 같은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부족한 면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게 될 때 그 삶은 한 층 더 훌륭한 모범이 되고, 그 기회를 무사히 성공시킬 때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족한 우리들은 더욱더 많은 힘과 용기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 강론을 듣는 많은 분들 역시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이 주인공이 될 만한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계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시련들이 다양한 얼굴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 다가가길 원하는, 하늘나라에 가길 원하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 안에서, 사회생활 안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회를 마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실 마냥 기뻐하기엔 이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 기회를 과연 어떻게 성공시키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한 결말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주인공은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또 다른 주인공은 반대의 모습으로 파국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그렇듯, 저는 당연히 아름다운 이야기의 멋진 주인공이고 싶습니다. 시련이 있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아가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주인공. 이러한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나아가 십자가를 지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주인공이 되고자하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호세야 예언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 합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 들여라. 묵혀둔 너희 땅을 갈아 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 까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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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부르심>
제가 사제성소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설 요한 신부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던 저는 어느 해 배낭을 메고 혼자 부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하루는 시내를 지나게 되었는데, 식물을 좋아하는 제게 어떤 분이 나무 한 그루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사진 속 나무를 보여주면서 아주 귀한 나무며 우리나라에는 흔하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었습니다. 그 나무에 호기심이 생긴 저는 나무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그분한테서 받은 주소만 갖고 무작정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농장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며 나무 한 그루만 구하고 싶다고 했는데, 주인은 저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실망하고 돌아서는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고향 선배님 댁에 갔다가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표정으로 그 나무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여쭤보았더니, 신부님한테서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후 혼자 성당에 갔고, 그때 제 생애 처음으로 만난 신부님이 바로 설 요한 신부님이셨습니다. 신부님은 처음 보는 제게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현재 그 나무를 갖고 있지 않지만 아일랜드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제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모로 배려해 주시는 신부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향 선배님의 권유로 교리를 받게 되었고 예비자로 성당을 다니면서 신부님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머나먼 타국에서 신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 신자들에 대한 섬김의 자세, 미사 전에 성당 마당을 거닐며 기도하시는 모습 등은 당시 제 삶의 진로에 동요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신부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이후 세례를 받고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가끔 당시를 떠올리며 주님의 이끄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제의 길을 걷는 지금 고귀하게 다가온 제 성소의 시작이 훗날 주님 보시기에 좋게 마무리될 수 있기를 간구하는 마음이 큽니다. 여러 길 중에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사제 생활 12년째를 보내는 지금, 부르심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부르심 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고, 사제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제답게 사는 것이고, 은총을 받는 것 못지않게 받은 은총을 잘 간직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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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기죽지 맙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누군가에게 매를 맞고 다닌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자녀를 때리는 사람에 대한 분노보다, 맞고 다니는 자녀에게 더 화가 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기고, 똑똑하게 태어났습니다. 실제, 자녀들 역시 똑똑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녀가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 의기소침하고 어깨가 축 쳐진 모습으로 생활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냐?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생활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오늘 12사도를 부르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보니, 우리가 자녀들에게 격려하고 용기를 주듯이, 하느님 역시 우리에게 그러하시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쫒아 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는” 사도로 불림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불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사도로 불림 받은 것보다 더 큰 특권을 부여 받은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느니, 더 이상 의기소침하거나 기죽은채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으로 근심, 걱정,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당당히 물리치며 힘차게 살아야 합니다.
실제, 주위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고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병자를 고쳐주고 더러운 영인 악마를 쫒아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 너무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그렇게 숨죽인 채로 고개 숙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죽을 죄인이 아니라,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너 죄인이야, 나에게 잘 보여, 그래야 구원받아!’ 라고 말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요, 사도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것에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기쁘게 살아가거라. 너 스스로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힘들게 하지 않는단다. 너 스스로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너를 아프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단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힘차고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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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12사도 선발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사도로 명하고, 이들에게 권능을 주어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갈릴래아를 무대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시던 예수께서는 곧바로 사람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이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이 인류, 즉 사람이라는 점이 그리스도 강생(降生)의 핵심이다.
인간의 구원협조는 하느님의 소명(召命)아래 천지창조 때부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수행되어 왔다. 하느님 소명의 절정(絶頂)은 두말할 것 없이 성모 마리아의 소명이다.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교회(敎會)의 소명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배를 손질하던 어부출신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마태 4,18-22)으로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예수님의 복음과 수많은 병자치유의 기적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람들이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몰려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태 4,25)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그 많은 무리의 제자들 중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셨다. 제자(弟子)들은 많았지만 사도(使徒)로 뽑힌 사람은 열둘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많은 제자들 중에 오늘 복음에 거명(擧名)된 사람들만 사도로 선발되었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지만 마태오복음사가의 의도 또한 수긍해 볼만하다.
사도선발의 기준은 어떤 특별한 조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복음에 들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 집성문(8-9장)에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놀라움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적어도 이 믿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전파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사도(使徒)로 선발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배반자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왜 사도로 선발하셨을까?
이렇게 따지자면 베드로도 멀리 못 간다. 베드로도 유다에 못지않게 스승을 배반하였다.(26,69-75)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27,3-5),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러내는 이상의 가치를 지닌 순교(殉敎)로 스승을 따라갔다.
결국 선발은 예수께서 하시지만 사도로서의 실존(實存)은 스스로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며, 사도로서의 진가(眞價)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 밝혀 줄 것임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바탕으로 제각기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사도로서의 진정한 태도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병자와 노약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등 세상의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베풀며, 길 잃은 양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도는 그에게서 이름만 있을 뿐 아무 의미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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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다는데 덩치도 크고, 머리도 크고…. 아무튼 모든 점에 있어서 비슷한 또래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와~~ 우량아인데요? 아주 튼튼하네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아이의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걱정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비만이니 어떻게 해요? 더군다나 여자아이인데…….” 요즘에는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무조건 빼빼 말라야 하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량아 선발대회가 있었습니다. 이 선발대회에서 1등을 한 아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몸무게가 많이 나가야 하고, 둘째는 머리가 커야 했습니다.
이 기준이 요즘에도 적용될까요? 아닙니다. 마르고 머리가 작아야 미남미녀로 구분되는 점을 떠올리면 불과 40년 만에 기준이 확 바뀌었음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기준은 계속 바뀝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준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을 하느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르고 있는 기준은 어떤 것일까요? 하느님의 기준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십니다. 당신의 사명은 절대로 작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이 이상합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길 배반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놀라운 권한을 주셔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왜 이들을 선택하셨고, 놀라운 힘까지 주셨을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별 볼 일 없지만, 주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하느님의 기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부족함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이 확실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어 주님과 함께 할 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기준을 제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기준을 따르는 삶. 바로 주님을 찾을 때가 지금입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될 때,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됩니다.
또 절망과 좌절의 부정적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희망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부족한 내 안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장 주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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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강하던 남편의 뜻밖의 죽음으로 큰 슬픔 속에 빠진 어떤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슬픔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철학적,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사회적으로 슬픔을 풀어냅니다. 이 책은 상당히 두꺼웠습니다. 아마 예전 같으면 ‘슬픔을 뭐 이렇게 거창하게 표현하나?’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도 어머니의 죽음을 체험하고 나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슬픔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슬픔의 접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정답은 아닙니다.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슬픔 안에서 우리의 작고 나약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함 그 자체인데도 하느님의 손길을 함부로 판단했고, 마치 내가 하느님인 양 전지전능한 흉내를 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자그마한(물론 남의 판단입니다. 자신의 판단은 엄청나게 클 수 있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매달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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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하늘 나라 꿈의 현실화-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제가 참 자주 강조하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가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참으로 넘어지면 곧장 새롭게 일어나 시작할 때 비로소 참 사람이 되어 갑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비로소 빛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1데살5,5)
회개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빛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가, 참 나의 참 사람의 실현입니다. 평생과정이요 이보다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기를 잃고 무지의 어둠중에 괴물처럼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어제는 지난달에 이어 여섯분의 코이노니아 자매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산 모습들의 얼굴이었습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합니다. 얼굴은 그대로 마음의 표현이자 살아 온 역사의 축적입니다. 참으로 얼굴을 거울에 자주 들여다 보듯 영혼의 거울인 주님의 거울에 자주 내 영혼을 들여다 보는 행위가 바로 회개입니다.
“모든 분들이 은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믿음으로 살아 온 자매들이기에 며느리와 사위를 둔 자매들이지만 모습들은 한결같이 젊고 밝아 미사후 사진촬영후 단체 카톡방에 사진과 더불어 올린 댓글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호세아 에언자가 촉구하는 바도 회개입니다. 무지의 죄악에서 벗어나는 회개입니다.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그대로 하느님을 잊어 우상들로 인해 무지에 눈먼 이들의 황폐한 내면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참으로 존재감 희박한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은 모습(시편1,4)입니다. 이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 대해 즉각적 회개를 촉구하는 호세아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회개한 영혼들 위에 쏟아지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주님을 찾을 때요 회개의 때입니다. 또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아래서 위로
땅에서 하늘로
끊임없이 송이송이 폈다 지며 하늘님 향해 오르는
지칠줄 모르는 접시꽃 빨간 파스카의 사랑”-을 살아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르심과 파견이 주제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마태복음의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신 후,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을 주시고 치유활동과 구마활동의 현장실습(8-9장)후 바야흐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견(10장)하십니다.
열두 사도를 부르시어 파견하는 모습이 흡사 새로운 출발의 회개의 삶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회개로 매일 새롭게 삶의 현장에 파견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서두 말씀이 삶의 영적 전쟁터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모습같습니다. 마치 영적으로 완전 무장하여 출전하는 장면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마치 회개로 새로워진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을 상징하는 장면같습니다. 이어 열두 사도를 뽑으시어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됩니다. 역시 우리가 파견되는 삶의 현장에도 길 잃은 양들은 널려 있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회개로 새로워진 이들은 그야말로 주님의 현존이자 하늘 나라입니다. 회개로 새로워져 주님과 함께 할 때 바로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멀리 밖에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회개로 새로워진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하늘 나라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회개로 새롭게 되어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이 아름답습니다. 무지의 죄악과 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하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하늘 나라를 선사하시어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토록 하십니다.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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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약속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자매의 부르심에 대한 묵상글을 적어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부르셨는데
파아란 잔디 위에서도
잔잔한 호숫가에서도
때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저무는 낙조의 여울 속에서도
그분은 밤낮없이 부르고 손짓하셨는데도….
스쳐가는 바람소리에서도
노도와 같은 파도 속에서도
당신의 손길 속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셨는데도…
나는 외면하고 뒤돌아서며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분은 조금도 섭섭해 하거나 노여워하지도 않으셨으며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고
내가 방황의 끝자락에서 지치고
좌절과 절망 속에 일어설 수 없어 누워 있을 때에
그분은 살며시 내 손을 잡아 주시며
“나다, 일어나거라. 나와 함께 가자.” 하고 나를 일으켜 주신 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그 한 말씀으로
내 온 생애의 모든 어둠과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사랑이라는 한 말씀으로 죽음의 긴 터널에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신 내 사랑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하기 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복음은 바로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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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때"를 숙고하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들춥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죗값을 치러야 한다."(호세 10,2)
주님께서 풍요와 번영을 허락하시고 축복을 베푸실수록 이스라엘은 우상을 위한 제단 수를 늘이고 기념 기둥들을 더 세웁니다. 참 이상하지요. 꼭 이스라엘뿐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주님께서 잘 살게 해 주시면 해 주실수록 더 잘 살 궁리를 하면서 다른 주인을 찾기 일쑤이니 말입니다.
예언자는 이제 곧 이스라엘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제단들 위에까지 뒤덮일 황폐와 멸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백성은 우상 따위에는 관심조차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고 피폐해져 이 모든 몰락을 하릴없이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호세 10,12)
하지만 주님의 날은 단순히 주님을 배반한 이들에게 쏟아지는 분풀이나 징벌의 때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날의 도래는 주님 곁을 떠났던 백성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제 자리를 찾게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세상의 주인을 좇느라 무뎌진 영적 감각, 하느님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올 수 없이 굳어버린 마음, 두꺼워질대로 두꺼워져 굳은 살로 뒤덮여 버린 양심... 이 묵은 땅은 뒤집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까이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러니 모든 것이 무너지고 전복된 지금이 주님과의 사랑을 회복할 때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제자리를 되찾을 때입니다.
복음은 열두 제자의 선정과 예수님의 당부를 들려 줍니다.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명을 뽑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수님 "가까이" 다가간 것이지요.
주님 "가까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의 제자리입니다. 거기에 서서 거기에 머물러 거기서 주님과 지내야만 제자로서 사도로서 다음 스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병과 마귀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줄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십니다. 제자들의 영달을 위한 게 아니라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
하느님 주권, 곧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날, 하느님의 때, 하늘 나라가 실현되는 때는 징벌과 멸망의 아비규환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의 장이 됩니다. 이방인 압제에 신음하며 희망을 잃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치유와 회복을 알리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하느님의 때를 징벌과 멸망의 종말로만 받아들인다면 두려움과 거부감이 크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 "때"를, 우리 영혼을 저 밑바닥부터 뒤집어 산소를 불어넣고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때, 고착된 자아에서 거미줄을 걷고 먼지를 털어내어 새롭게 단장하는 때, 길 잃고 헤매던 영혼이 진리를 듣고 제 길에 들어서 생기를 되찾는 때로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먼저 우리에게 위로의 존재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런 존재로 양성해 파견하시지요.
어차피 그때와 그 시간은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언제인지를 가늠하며 따지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지요. 우리는 그저 두려움보다는 희망으로, 미련보다는 기대로 하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며 주님 가까이, 제자리에 머무르면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 가까이에 머무르며 주님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의 때는 먼 미래의 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당장 맞이해도 여한 없이 충만한 사랑 속에 하늘 나라를 쟁취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지금 여기, 우리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미처 못다한 사랑의 책무에 두려워 떨지 말고 가진 것을 다 못 누렸다고 아쉬워도 말고 담담하고 충만히 오늘의 하늘 나라를 누리며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그분은 위로와 자비의 주님이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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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믿는다.
마르코와 루카는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이른 아침 무덤으로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분께 마지막 향료로 향기 좋은 기름을 직접 만들었다. 예수께 대한 여인들의 사랑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의 시신을 붙잡았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믿는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여성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을 만났다. 예수는 살아 계신다. 이렇듯 여인들의 사랑은 헛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사랑하시는 분께로 향하고 있다.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중에서
♣여인들은 ‘희망에 이르는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향기로운 좋은 기름을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은 바보짓이라 보입니다. 그러나 ‘바보적인 사랑이 기적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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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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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다섯 개의 설교모음집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하는 제10장의 “파견설교”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 9,37)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당신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사도로서의 권위와 힘을 부여해주십니다.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들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요,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제 제자들은 단지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하늘나라를 증거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이 된 것입니다.
이는 여기 모인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나선 가난한 이들이지만,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명을 부여받은 특별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5-6)
복음전도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제한한 이러한 사실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이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에 따르면,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하시니, 우리는 먼저 내 곁에 있는 우리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 누구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인지를 분별하고 그분의 뜻과 하늘나라의 의로움을 앞세워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가까이 왔다.’라는 말의 원어의 뜻은 ‘주먹 안에 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내 손에 들린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하늘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고 선포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선물로 주어진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나라는 우리의 협조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이루어나가는 나라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고, 또 실현해야 할 일입니다. 그 사랑, 그 자비를 드러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하여,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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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내신 곳으로 가게 하소서!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게 하소서!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게 하소서!
해야 할 바를 그만두지 않고, 가야 할 길을 멈추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소서!
내 나라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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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M5qBaHRSb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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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길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다시
만드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되찾기 위해 오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길이 사랑이고
길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이 길이 우리를
되찾는 사랑의
참된 길입니다.
우리모두가
가야할 길입니다.
길이 끊긴
자리에서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관계를
되찾게 됩니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하늘 나라를
보게 되고
회개하며
깨닫게 되는
사람의 길입니다.
사랑으로
사람을
만들어가시는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모든 길들은
주님을 향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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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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