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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린(姜繗)
[문과]광해군(光海君)5년(1613)계축(癸丑)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12위(22/42)
이 시험의 문무과 단회방목(單回榜目)은 현존하고 있다.
강린(姜繗) 자수(子修) 1568 ~ ? 진주(晉州) 병과(丙科) 12위
강영(姜泳) 양원(養元) 1574 ~ ? 진주(晉州) 2등(二等) 1위
[인물요약]
자(字) 자수(子修)(주1)...극수(克修:고대일록, 정경운 저,참조...23.04.11)
호(號) 남음(濫蔭)【補】(주2)
생년 무진(戊辰) 1568년 (선조 1)
합격연령 46세
본인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함양(咸陽)【補】(주3)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1568년(선조 1)∼미상.
조선전기 교리, 부수찬, 함경도어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극수(克修), 호는 남음(濫蔭). 경상도 함양 출신. 강신우(姜愼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규(姜奎)이며, 아버지는 강위로(姜渭老)이다.
1603년(선조 36)에 함양의 유생‧생원등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의 편에 서서 양홍주(梁弘澍)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8년 어모장군행충무위사과(禦侮將軍行忠武衛司果)가 되었으며, 그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찰방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5년에 정언‧사서‧지평‧헌납 등을 역임하였고, 1617년에 장령, 1618년에 교리‧부수찬‧함경도어사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추방되었다.
[이력사항]
선발인원 42명
전력 찰방(察訪)
[별칭]우관(郵官)‧역승(驛丞)‧마관(馬官)
관직 교리(校理)
문과시험답안 책문(策問):관제(官制)
타과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
성명 : 강위로(姜渭老)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전행성주목사(前行星州牧使)【補】(주5)
[조부(祖父)]
성명 : 강규(姜奎)
[증조부(曾祖父)]
성명 : 강신우(姜愼友)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한효중(韓孝仲)[文]
본관 : 청주(淸州)【補】
[처부(妻父)2]
성명 : 정구(鄭逑) [주 1]‘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2005-11-30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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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25, 임진)
6월 적과 맞서기 위해 의병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를 갖추다
9일. 모든 지경의 선비들이 모여서 의논했는데,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노사예와 노사상을 도유사로 삼고 서기,군기,군량,군사,군마 모으기, 군량운반등에 유사를 두었다.
나(정경운)와 강극수는 기록하는 일을 주관하며, 박공간과 정현경은 활과 화살을 맡아 살피고, 정사고와 노경승은 군자금을 모으고 먹을 것을 공급하기로 했다.
그 밖의 고향 벗들도 각자 일을 맡아 처리하게 돼 여력이 없었다. 강군망(姜君望) 형은 무기를 책임지고 맡아서 힘써 주선하기로 했다. 또 모인 선비들은 각자 활이나 창 가운데 하나를 쓰도록 했다...37 - 38쪽
8월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좌도 감사로 가는 것을 만류하다
11일. 상소문 만드는 일때문에 인근 유생들이 우리 군 향교에 모두 모였다.
진사 정유명을 소두로, 성팽년과 노사상을 장의로, 노주와 강린(姜繗)을 유사로 삼았다. 박여량이 상소문을 짓고, 나와 박여량이 함께 상소문을 썼다...67 - 68쪽
11월 경기순찰사 심대와 진주목사 김시민이 전사하다
26일. 노사예, 조광립, 박여량, 박선, 노사상, 노사소, 강린(姜繗)과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이 김대장 집에 찾아가서 뵙고 거창에서 묵었다...89쪽
27일. 박경실(박선), 박공간, 강극수와 함께 해인사에서 내암 정대장(정인홍)을 조문했다. 선생께선 60 여세에 아들 상을 당해 오랫동안 오열하고 계셨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복이 온다는 말은 막연하고 그 징조가 없구나!
28일. 박공간, 강극수와 함께 가야산을 넘어가서 성주 증산촌에서 묵었다...89쪽
1393년(선조26, 계사)
1월 관리들은 정신을 못차리고 백성들은 떠돌며 굶어죽다
7일. 순찰사가 우리 군에 전령하기를 '의병유사 등의 공로를 검토하고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기록해서 순찰사에게 보고하라. 그리하면 행재소에 천거하려 하니 유사 등의 성명을 책으로 만들어서 관에 보고하라'했다.
문병하러 온 강경정(姜景靜)을 만났다.
11월 도망친 종을 잡으로 남원에 가다
29일. 노 원장, 노지부, 박공간, 정사고, 노경소, 강극수, 노여임과 향교에서 함께 잤다.
1394년(선조27,갑오)
6월 고을 수령이 파직돼 위로하다
7일. 노충보와 강극수가 향교에 와서 함께 대화했다. 겸관으로 온 덕응 어르신이 향교에서 걱정스러운 소란을 이야기 했다.
1595년(선조28, 을미)
4월 심유경이 왜적과 화의를 논의하러 오다
9일. 강극수와 이자반이 찾아와서 담화했다. 노빈부 또한 왔다.
5월 명나라 장수들이 고을수령과 백성들을 구타하다
8일. 정사고와 작별했다. 오후에 노경승과 강극수가 부르기에 가서 만났다....254쪽
1596년(선조29, 병신)
1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재침략을 준비하다.
15일. 정사고와 함께 안음에 갔다. 노지부는 먼저 현재로 갔다. 한효중과 경장 및 강극수도 모였다. 곽양정 형, 찰방 김지화 어르신과 함께 자면서 정답게 이야기했다.
1597년(선조30, 정유)
2월 의병 군량을 모으는데 항의를 받다
24일. 진안수령 오익승이 열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군에 도착했다. 가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뒤 동헌으로 갔다.
오후에 노지부, 강극수, 우중평, 정사고, 최규보, 노이복이 와서 만났다.
3월 군에 온 심유경이 세객노릇만 하다
18일. 소문을 들으니 '강극수가 정시(庭試)를 보러갔다'한다...
8월 산골까지 쳐들어온 왜적의 칼날에 큰딸이 죽다.
3일. 강군망 형, 강극수와 더불어 산에서 내려와 곽천에 도착했다. 물이 깊어서 겨우 건넌 뒤 유옥을 만나서 조용히 대화했다.
10월 왜적이 여러 고을을 약탈해 가족과 함께 피란하다.
13일 아침 무렵에 날이 갰다. 전유옥과 더불어 노지부를 만난 뒤 노 참봉, 강 목사, 노경소, 경승, 강위서, 강극수를 방문했다.
27일. 날 샐 무렵 길을 나서서 육십령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강군망 형, 희망, 강극수와 잠깐 대화했다.
1598년(선조31,무술)
2월 왜적들이 곳곳에서 노략질하고 백성들을 죽이다
6일. 조카와 함께 함양에 갔다.
저녁에 옥산창에 가서 전유옥의 모부인을 뵈었다.
길에서 강극수(강린姜繗), 한효상 및 한효삼을 만나 대화했다.
1599년(선조32, 기해)
5월 곡물을 심었지만 파종이 늦어 결실을 걱정하다
21일. 강극수가 보낸 편지가 와서 읽어보니, 마치 오랜만에 모습을 대하는 듯해 감회가 그지없었다. 서로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여러 날 계속되는 궂은비가 말썽이구나!
24일. 대야곡에 가서 강군망 형을 만나 오랜 시간 대화했다. 강극수는 백토에 가서 만나지 못했다. 이른바 그대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저 허탕치고 돌아오는 격이로다.
28일. 강극수가 보낸 편지가 왔다.
1600년(선조33. 경자)
12월. 죽은 막내딸의 장사를 지내다
8일. 강극수가 한양에서 부모님을 뵈러 와서 관아에서 만났다. 여러 해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기쁨이 어떠했을까!
1601년(선조34, 신축)
1월 쉰 가까운 나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과거에 응시하다
18일. 이경광과 헤어진 뒤 강목사(강군망)와 강극수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2월 과거에 떨어지고 계집종을 잃어버리다
22일. 강극수가 찾아왔다. 극수가 동당 6인에 합격했고, 익승은 차석, 송원기는 수석을 차지했다.
3월 좌의정 이헌국이 어진이를 훼방놓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
27일. 소문을 들으니 '강극수가 사마시에 급제했다'한다.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었다. 극수는 나와 절친할 뿐 아니라 현인군자인데 과거에 통과했으니 더욱 기뻤다. 권집, 정대방, 박효선 등도 급제했다고 한다.
6월 정권잡은 자가 사사로이 한푸는 일을 일삼다
13일. 노 원장을 만났다. 이어서 강 목사, 노예산, 강극수, 노경승, 면재, 여임 등과 대화했다.
27일. 돌아가신 왕비(의인왕후 박씨)의 첫 기일이므로 온나라 선비와 백성이 모두 검은 옷을 입었다.
7월 제주에서 역적모의를 하던 길운절이 스스로 고변하다
7일. 병이 깊어진 머슴이 죽었다. 종들을 시켜서 매장했다. 신분이 비록 종은 아니지만 매우 섭섭하고 서운했다.
25일. 강극수의 경사스러운 잔칫날이다.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해 한이되니 어찌할꼬?
8월 서원 옮길 터를 척서정으로 정하다
1일. 강극수가 편지를 보내 작별했다. '사는 지역에 전염병 기미가 있어서 급히 올라간다'했다.
11월 강화가 이뤄지지않으면 왜적이 다시 침입한다는 소문이 돌다
9일. 개평에 가서 노원장을 방문했다. 노경승과 강극수도 왔다. 극수, 여시회, 임중, 이복과 함께 잤다.
27일. 동짓날이다. 문묘에 가서 배알했다. 강목사와 강극수를 방문한 뒤 원장을 찾아보고 돌아왔다.
28일. 향교에 가서 공무에 참여했다. 경승과 면재가 맡은 직분에서 물러나고 자순과 극신이 새로 뽑혔다.
1602년(선조35, 임인)
1월 임금께서 최영경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다
4일. 고을 수령을 만났다. 강목사, 강극수와 오랫동안 대화했다.
윤2월 내암 선생께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시다
14일. 시 천총과 함께 개평에 가서 노원장을 만난 뒤 강목사, 강극수와 대화했다. 서원에서 잤다.
3월 가뭄이 매우 심해 백성들이 탄식하다
8일. 강위서와 더불어 새벽에 길을 나서서 강극수를 방문했다.
노임중 집에서 아침을 먹고 오후에 귀가했다.
5월 내암선생께서 사직하시고 고향으로 돌아오시다
15일. 할아버지 기제사를 지냈다. 제사지낸 뒤 덕옹에게 가서 만나고 강극수를 방문했다.
6월 내암 선생께서 사퇴하시자 소인배들이 기뻐하시다
17일. 강극수가 찾아와서 대화했다.
7월 선조와 인목왕후의 가례날이 정해지다
10일. 진주와 삼가의 여러 사람이 회문을 내어 '흉악한 이가가 선생을 모함한 죄를 따지고자 했다'
나와 강극수가 소두가 됐다.
11월 서원 이전으로 인한 갈등이 시작되다
8일. 개평에 가서 강목사 형제. 강극수, 경승,경소 등 여러 사람과 모여서 서원 옮기는 의논을 마무리 지었다.
9일. 나촌에 가서 서원터의 지세를 살펴보았다. 가시를 베어내고 더러운 흙을 끌어낸 뒤 터닦기하는 것을 신께 아뢰었다. 강극수가 헌관이 됐다.
11일. 나촌에 가서 여러 벗들과 모였다.
'유세차 임인년 11월 무오 무진일에 아무개는 발산의 신령님께 고합니다.
우리 고장에 서원을 세운 것은 아득한 옛날이었으나 경영이 마땅치않았고 여론에 맞지않음이 많았기에 다시 손질해 고치기 위해 터를 잡고자 합니다.
나촌 발안 서쪽 기슭을 살펴보니 냇물 한줄기가 아름답게 흘러가고 뭇 산봉우리는 서로 뽐내며 뛰어났습니다. 고대는 호랑이가 떡버티고 앉은 듯하고 갈게 뻗은 수풀은 교룡이 춤추는 듯합니다. 바람과 구름이 빙둘러 휘감아도는데 뛰어난 경치는 저마다 쭉 늘어서 있습니다.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 지으려는 사람들 생각에 확실히 부합합니다.
여러 해동안 하늘이 도와서 오늘이 잇도록 정해 주셨으니 이에 좋은 날을 잡아 공사를 시작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존령께서는 놀라지 마시고 은혜로 도와주시옵소서. 학푸이 다시 떨치게 하시고, 받들어 숭상하는 제사를 바꾸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문운을 길이 도와주셔서 도동이 수를 누리게 해주십시오.'
강극수가 지었다.
12월
13일. 노경승과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양형언, 강경정도 와서 대화했다.
1603년(선조36, 계묘)
1월 합천에 가서 내암선생께 새해인사를 드리다
20일. 개평에 가서 노참봉과 대화했다. 저물어서 강극수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양형언이 와서 대화했다.
2월 주변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
18일. 양형언, 양충원과 대화했다. 나촌에 갔더니 강목사와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3월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잇따르니 나랏일이 걱정이다
18일. 강군망 형을 찾아가서 만나 보았다. 강극수가 과거에 낙방해 위로하고 대화했다.
4월 서원의 두 사당 지붕덮기를 끝내다.
13일. 서원에 머물렀다. 강목사, 강극수, 노경후와 강위서가 와서 대화했다. 날 저물어 귀가했다.
5월 양홍주가 내암선생을 헐뜯는 상소를 올리다
9일. 강극서(?)와 대화했다. 박공간집에 도착해서 종매를 문병하고 수족에 침을 놓았다. 서원에 대나무를 심었다.
14일. 백토에 가는 길에 노경승, 임종, 강극수 등 여러 사람을 찾아보았다. 저물어서 빈부와 대화했다.
7월 양홍주 벌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15일. 서원에 가서 문묘에 배알했다. 노원장, 강위서, 노면재, 경후, 강극수 등 여러 사람이 와서 만났다.
22일. 소두를 바꿔 강극수를 소두로 삼았다. 성주가 소식을 듣고는 상소에 쓸 종이, 표통과 보자기 등 물품을 갖춰왔다.
24일. 오후에 전패에다 상소문을 바치고 저녁무렵에 여러 벗들과 헤어졌다.
두통이 나고 기운이 지쳤다.
생원 강인(극수) 등이 올린 상소에는 정인홍을 옹호하고 양홍주의 죄악을 열거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임금에게 양홍주의 죄를 물어 머리를 베어서 인심을 바로 잡고 사기를 맑게 하기를 청했다. <선조실록 1603년8월9일>...513쪽
8월 가을 장마가 잇따라서 양식 떨어질 것을 걱정하다
11일.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식후에 종매를 만나보니 병에 차도가 있어서 기뻤다.
18일. 노면재와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강목사 형과 극수를 방문했다.
또 허중관을 조문하고 여계를 방문했다.
10월 흉악한 자의 죄악을 알리고자 온 도에 통문하다
26일. 개평살던 종매의 상을 조문한 뒤 내처 박공간에게 가서 잠깐 대화했다. 저물어서 강극수와 함께 서원에서 잤다.
27일. 날 샐 무렵에 비가 오다가 식후에 갰다. 강극수와 헤어지고 다시 개평으로 가서 노원장을 문병한 뒤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11월 10년동안 맡은 유사 자리에서 물러나다
13일. 강극수, 노경소, 경후, 정덕옹 등 여러 사람이 문병왔다.
18일. 저물어서 향교에 갔다. 경소,경후, 강극수와 함께 자면서 친밀히 대화했다.
1604년(선조37, 갑진)
1월 북쪽 오랑캐가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다
16일. 박공간을 찾아가서 만나 보았다. 또 서원에 모여 노경승이 맡았던 직임을 강극수에게 대신하게 했다. 경승이 성주에게 곤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들으니 '정홍서가 찰방 오희길에게 노참봉을 계획적으로 모략했다. 그러자 오희길은 성주에게 참소했고, 성주가 이 때문에 노했다'한다. 얼마나 괴이한가!
3월 왜적과 무역을 재개한 소식을 듣고 분개하다
14일. 판관 박공간과 강위서가 찾아왔다. 들으니 '강극수가 고을수령에게 곤욕을 당했다'했다.
15일. 공간 집에 머물렀다. 어른과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 슬픈 생각이 많이 들었다. 강극수도 왔다.
4월 영의정 이덕형이 임해군의 비행을 직언했다가 파직당하다.
14일. 송원기와 손처눌 등이 도내에 통문을 내 '회재의 억울함을 풀기위해 이달 25일 대구에서 제회를 연다'했다.
함양에서는 강극수와 노여임이 유사가 됐다.
24일. 노경후가 와서 대화했다.
대구 소회에 강극수만 참석했다고 하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5월 유일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다
2일. 강극수가 와서 말하길 '소회가 이달 15자로 연기돼 선산에서 모인다'했다. 나와 극수가 유사를 맡았다.
3일. 운고에 가서 극수와 위서를 만났다. 상소하러 갈 유생을 의논해서 결정했다.
10일 향교에 갔다. 임극신, 강군망과 더불어 상소하러 갈 유생을 의논해서 정했다. 오후에 서원에 갔다. 조계수, 강극수와 함께 갔다.
14일. 서원에 가서 강극수와 함께 잤다.
16일. 소문을 들으니 '거창 상산에서 땅이 갈라지고 불덩어리가 날아올랐는데 모양이 큰입과 같았고, 가조쪽으로 가다가 떨어졌다'한다. 괴변이다, 괴변!
24일. 강극수 편지를 받아보니 비용마련해서 보내는 어려움을 많이 걱정했다. 또 향인들이 기가 빠져서 머리를 쭉 빼고 늘어뜨리고 있음을 깊이 한탄했다.
27일. 향교에 모여 상소올리는데 함께 갈 유생을 뽑고, 보낼 물건을 의논했다. 강극수와 강위서도 함께했다.
7월 명나라 장수가 와서 무명을 바치라고 요구하다
7일. 익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침에 개평에 가서 만나 보았다. 그러고 나서 노경승,경소, 강극수와 서원에서 함께 잤다.
9월 새로 집지을 터를 살펴보다
18일. 강극수와 함께 박공간 집에서 잤다.
27일. 서원에 갔더니 박공간이 왔다. 강극수 부자와 노충보도 함께 대화했다.
28일. 서원에 머물렀다. 공간을 불러서 냇가에서 회를 쳐서 먹었다. 공간, 극수와 더불어 서원에서 잤다.
9월 전라병영 이전 관련 뇌물사건이 터지다
2일. 동면에 가서 한양으로 부임하는 박공간을 전별했다. 밤에 강극수와 더불어 서원에서 잤다. 순찰사 이시언이 지경에 도착했다.
14일. 서원에 가보니 장인(匠人)들이 죄다 흩어졌다. 강극수만 만나보고 날 저물무렵에 귀가했다.
26일. 강극수와 대화했다. 아픈 어깨가 차츰 나아지니 어찌 이리 기쁜지!
10월 임금의 병이 낫지않는다니 걱정이다
8일. 한양으로 가는 강극수를 전별하기 위해 잤다.
11월 순찰사가 탐학이 심한 창녕수령을 꾸짖어 내쫓다.
15일. 도사 박공간과 강극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18일. 공간과 극수의 답장을 받아보았다.
1605년(선조38, 을사)
1월 아내의 장례를 준비하며 여러 사람의 조문을 받다
4일. 강목사가 조문왔다. 강극수가 다른 사람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문을 들으니 강위서가 병을 얻었다고 한다.
3월 새 서원으로 세 선현의 신주를 옮겨모시다
22일. 강극수가 귀가했다. 그런데 극수집에 불이 나서 책이 거의 다 탔다고 한다. 탄식이 나오는구나!
29일. 강극수가 와서 조문했다., 소문을 들으니 '좌도에서 흰꿩이 태어났다'한다. 상서로운 일인가? 재앙인가?
4월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다
7일. 나는 ...일찍이 제멋대로 함부로 하는 잘못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현인이 되기를 희망했으니 옛 서적에서 스스로 깨친바가 조금 있었다. 박공간, 박경실, 노지부, 정현경, 강극수 등과 서로 친하게 지냈다.
경자년(1600)에 초야의 높은 선비 노씨 어르신께서 원장이 돼 서원옮기는 논의를 함께 내고 좋은 땅을 찾아 일을 시작했다...내가 하던 일을 강극수에게 맡겼다.
갑진년(1604)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예법을 여쭤 장례를 치러서 아내 잃은 그르침을 면할 수 있었다.
사생을 함께하는 벗 강위서와는 우산언덕에 함께 묻히기로 정해 두었으니 정이 한가지요, 뜻이 한가지요, 스승과 벗이 한가지요, 궤안이 한가지요, 방훼가 한가지로다....
상을 당한 뒤 을사년(1605)에는 사람 일에 뜻을 잃었으나, 그저 '세 선현을 모신 사당'이 풀숲에 파묻힐까 걱정됐다. 그렇지만 일을 맡은 강극수가 성균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니 언제 신주를 봉안해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엿보고 있다가 잘못될 경우 함정에 빠뜨리려 하기도 했다. 그래서 강위서, 강극수와 더불어 비방하고 헐뜯는 말이 함께 들어왔는데 그 끝이 없구나! 이는 외로운 학은 무리가 적고 올빼미와 까마귀는 무리가 많은 것과 같다. 이로부터 인사를 사절하고 문을 닫아 걸고서 허물을 살피려한다.
허물이 있다면 고칠 것이오, 없다면 웃고 살피지 않음과 같구나!
5월 북쪽 오랑캐가 함경도 종성부를 점령하다
28일. 정덕옹의 사위가 일본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강극수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았다.
7월 좌도에 큰물이 져서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많이 죽다
9일. 강극수를 방문했다.
8월 순찰사(이시언)가 파직되니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다
3일. 강극수가 찾아와서 대화했다.
9월 일본에 잡혀간 친구가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다
25일. 강극수가 와서는 '노경승이 의병일으킨 일에 대해 다른 의견을 말한다'하니 한탄스럽다.
10월 장원급제한 사람이 상중에 고기를 먹어 사판에서 삭제되다
3일. 오후에 강위서를 방문한 뒤 날 저물어 서원에서 강극수와 자면서 친밀히 이야기를 나눴다.
4일. 극수와 헤어지고 강목사를 방문한 뒤 돌아왔다.
8일.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는데 곧 한양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9일. 오후에 개평에 가서 노익산의 소상을 보았다. 강극수가 별거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갔다.
11월 정병을 뽑는 공문이 도달하니 인심이 두려워하다
7일. 오익승과 강극수가 별거에 응시했다고 한다. 정운수와 조정립 형제도 참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606년(선조39, 병오)
2월 새집을 짓기 시작하다
5일. 강극수 편지도 왔다.
18일. 강극수와 대화헸다.
3월 새로지은 집에 입주하다
15일. 강위서와 함께 대고대에 가서 구경했다. 조카와 강극신도 왔다.
4월 중전이 대군을 낳으니 세자가 물러나겠다고 상소하다
5월 탐학하는 관리가 파직되다
19일. 박공간과 강극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6월 고을수령이 고과에서 하를 받아서 위로해주다
11일. 박공간과 강극수가 보낸 편지가 왔다.
7월 선현들 위차 문제로 갈등이 심화되다
16일. 소문을 들으니 '성균관이 텅 비어 사람 그림자도 없이 적적하다'한다. 강극수가 몸을 붙여 사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서 걱정이다.
8월 새 고을 수령이 부임해 선정을 베풀다
22일. 강극수가 '먹물만 마시고 돌아왔다'고 하니 탄식이 나는구나!
9월 내암 선생을 만나러 덕산서원에 갔으나 헛걸음하다
1일 강극수가 찾아와서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임극신도 왔다.
11일. 선생께서 곧 덕산서원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강위서, 강극수와 더불어 덕산서원으로 출발했다. 산응향교에서 함께 잤다.
17일. 소문을 들으니 '선생께서 향천에 당도해서 사흘동안 머무셨다. 그러나 거리끼는 일이 있어서 서원에는 오시지 않는다'했다. 그래서 강극수, 조카와 더불어 돌아왔다.
20일 고대 집에 가서 강극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들으니 '노빈부가 아들을 잃었다'한다. 불쌍하구나!
26일 고대 집에 갔다. 덕산서원에서 강극수에게 통문을 보내왔다.
10월 임금이 임해군 일로 대신들을 나무라다
6일. 종형을 찾아가서 조문했다. 하예산께서 보내신 답서를 보니 강위서, 정휘원, 강극수, 오덕홍 등이 유사가 됐다고 한다.
7일. 불량한 향인들이 이름을 숨기고 괴이한 이야기를 지어낸 강극수를 헐뜯었다.
17일. 강극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24일. 타작하다가 눈이 와서 중단했다. 강극수가 찾아왔다.
11월 산음에 가서 한강선생을 만나다
4일. 창녕 사는 박경무와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12일. 강위서와 더불어 산음 도사헌에 가서 한강선생을 뵈었다. 얼굴뵙지 못한지 이제 12년이 됐는데, 형용이 윤택해 조금도 쇠한 모습이 없으시니 어찌 후학에게 다행이 아니겠는가?
다음 날 서원터를 둘러본 뒤 저물어서 공손히 인사드리고 돌아왔다. 박방부 형집에서 숙박했는데 강경정, 강극수, 임중과 함께 잤다.
24일. 고대에 갔다. 좌도로 가는 강위서 편에 선생께 안부여쭙는 편지를 올렸다.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12월 나를 헐띁는 근거없는 말이 전라도에까지 전해지다
26일. 새 집으로 돌아왔다. 들으니 '향인들이 나와 강위서, 강극수의 죄를 꾸짓기위해 근거없는 말을 억지로 꿰어맞췄다. 이 말이 퍼지지 않은 곳이 없으니 전라도에까지 이르렀다. 개평 사람들이 말을 만들었고 유사 하, 정 두사람이 서명했다. 노충보가 남원향교에도 전했다'했다.
1607년(선조40, 정미)
1월 이름을 숨긴 통문이 돌아다니다
4일 강목사와 강극수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16일. 이정보가 찾아왔다. 하자열, 하명서, 강극수도 와서 대화했다.
2월 딸의 혼례를 치르다
4일.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황덕장이 와서 묵었다.
26일. 딸의 혼례를 치렀다. 강극수와 박덕중이 와서 보았다.
29일. 내 생일이라, 유영순을 위해서 술과 음식을 간략하게 차렸다. 저녁에 임인중, 노면재, 임극신, 강극수 등 여러사람이 와서 모였다.
3월 도사행차에 바라지하는 행렬이 줄을 잇다
14일. 강극수를 찾아가서 만나고 날이 저물어 돌아왔다.
5월 임금께서 건강이 좋지않으시다고 해서 걱정이다
19일. 임인백을 조문하고 강목사를 방문했다. 강극수를 만나보고 강위서와 동행해서 돌아왔다.
6월 가뭄으로 백성들이 걱정하다
23일. 고대에 갔다. 향교에 도착해서 강극수와 함께 잤다.
24일. 조수일, 조계수, 강극수와 더불어 술마시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했다.
7월 일본에 간 사신이 잡혀간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다
10일. 강극수와 강경정이 찾아와서 대화했다. 성쌓는 일에 종을 보냈다.
10월 어진 고을수령이 억울하게 파직돼 상소하다
9일. 의논해서 상소를 만들었다. 소장은 극승이 지었다. 강극수, 정극승과 함께 잤다.
10일. 군에 머물렀다. 극수, 극승과 함께 잤다. 강경정 또한 함께 했다.
18일. 강극수가 와서 대화했다. 상소올리는 날짜를 동짓달 열흘로 미루어 정했다는 통문이 왔다.
1608년(선조41, 무신 광해군 즉위)
1월 내암 선생께서 영의정 유영경을 공박하시다
2일. 당형을 찾아가서 만나보고 강목사도 만났다. 그리고 강극수와 함께 잤다.
3일. 아침 식전에 귀가했다. 강극수가 한양으로 갔다.
2월 내암선생께서 귀양길에 오르시고 임금께서 승하하시다
20일. 강극수가 상소를 올려 선생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5월 임금께서 내암선생에게 상경하라고 명하시다
10일. '이임중이 청풍현감에 제수됐으나, 유여견은 합천군수에서 파직됐다. 강극수는 참봉 망에 들었으나 몽점하지 못했다'라는 소문을 들었다.
11일. 강극수와 함께 있었다. 하자순이 와서 함께 잤고, 조수일도 왔다.
7월 임금께서 내암선생의 병을 걱정해 뒷바라지를 명하시다
9일. 강극수가 찾아왔다.
29일. 강극수가 평릉찰방 망에 들었으나 몽점하지 못했다. 금오랑 망에 들었으나 역시 몽점하지 못했다.
8월 역모가 드러난 임해군이 서인으로 강등되다
1일 강목사 부자와 대화했다. 그리하여 강극수는 유숙했다.
20일. 강극수가 진주에서 약속을 지키고자 왔다. 밤에는 선생을 모시고 잤다.
10월 임금을 속인 무리의 죄를 상소하기로 하다
1일. 강위서, 여수와 더불어 서원에 갔다. 강극수를 만나서 안음에 글을 냈다.
22일. 강극수가 찾아와서 함께 잤다.
11월 벗들과 교외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다
9일. 들으니 '강극수가 과거 볼 시기에 맞춰 한양으로 올라가려고 돌아왔다'한다.
13일. 한양에 가는 강극수를 전송했다.
12월 서원에 사액이 내려오다
1609년(광해1. 기유)
5월 명나라에서 조제사신이 한양에 오다
12일 강극수가 보낸 글을 받아보고 일찍이 약속한 운사를 알게됐다.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7월 내암선생을 만나고 해인사에서 숙박하다
11일. 강극수가 왔다고 해서 만나보았다. 관사에서 강목사 형도 만났다.
고대일록, 정경운 지음, 문인체,문희구 옮김, 2016년, 서해문집
정경운(鄭慶雲 1556년 - ?) : 본관 : 진양, 자 덕옹, 호 고대(孤臺)
1556.경남 함양 출생,
1581.내암 정인홍 문하에 들어감
1592.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킴.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유사와 의병장 김면의 소모종사관으로 활약
1597.남계서원 복구
1617.남계서원 원장에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