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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재집 제4권 / 잡저(雜著) 선수(瑄壽)가 고찰하건대, 선형의 유고는 경전을 보좌할 수 있으므로 대단치 않은 작품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 중에 종류별로 모을 수 없거나 한두 편에 불과하여 권(卷)으로 묶을 수 없는 편명들이 있으므로 《한창려집(韓昌黎集)》과 《방정학집(方正學集)》의 예에 따라 잡저(雜著)로 엮어서 문(文)의 첫머리에 싣는다.
대구 민충사 중건기〔大邱愍忠祠重建記〕
철종 5년(1854) 겨울 11월 계사일(28일)에 영남 암행 어사 박규수가 돌아와 다음과 같이 주달하였다.
경상도의 고(故) 관찰사 황선(黃璿)은 영묘(英廟) 무신년의 변고 때, 왕실을 위해 힘을 다해 반란군을 진압하였는데, 옥사(獄事)를 다 해결하기 전에 재임 중에 갑자기 죽고 말았으니, 그 일에는 미심쩍은 점이 있습니다. 영남의 백성과 선비들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고 죽음을 슬퍼하여 대구(大邱) 부성(府城) 남쪽 구산(龜山) 아래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원(祠院)의 사사로운 제향(祭享)을 금지한다는 교령이 내려질 때, 다른 사원들과 함께 훼철되었고, 공적을 기록한 짧은 비석만이 남아 잡초덩굴 사이에 묻혀있습니다.
생각건대, 태평시절이 오래되어 백성들이 병란을 알지 못하던 터에 갑자기 미쳐 날뛰는 도적떼가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번갈아 일어나 백성을 선동하여 그르치니, 군졸과 백성들은 누구를 따라야할 지 혼란스러워했고, 대단한 기세로 들이닥치자 주군(州郡)은 곧 무너질 형세였습니다.
황선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모든 군사를 지휘하면서 사태의 추이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여 번번이 실책이 없어, 안팎으로 연결된 적들이 끝내 조령(鳥嶺)을 한 발짝도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한 달 사이에 흉악한 무리들이 목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사직을 보존한 그 공적과 백성을 덮어준 그 은택은, 경상도가 온전히 보존된 것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이 막 펴지던 차에 그의 몸이 불행히 죽었으니, 지나간 사적을 회상해 보는 일로도 오히려 슬픔을 자아내는데, 한 채의 사당마저 뒤따라 헐렸습니다. 지금까지 백수십여 년 동안 그 일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어 큰 공적과 위대한 업적이 매몰되어 드러나지 않으니, 진실로 태평성세의 흠결(欠缺)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온 힘을 바쳐 환난을 막아낸 사람을 모두 사전(祀典)에 올리는 것이 선왕의 예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특별히 명하시어 사우(祠宇)를 세우고 편액(扁額)을 내리신다면, 그의 공적에 보답하고 충근(忠勤)을 장려하는 일이 될 것이고, 나아가 온 고을을 흥기시키고 권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에 임금께서 그 논의를 유사(有司)에게 내렸으나 아직 시행되기 전에, 이조 참판 신석우(申錫愚) 성여(聖與)가 영남지방에 관찰사로 가게 되었다. 임지로 떠나려고 할 즈음에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공(黃公)을 위하여 사우를 건립하자고 청한 것은 적실한 논의였으며, 대신들의 말에도 별다른 이견이 없었는데, 아직 품의하여 명을 받지 못한 것은 유사들이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 고을 사람들 중에는 앞서서 사우를 건립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으니, 나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어 거절하지 않고자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이 일은 그 고을 사람들이 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이오. 흉포한 적도들이 창궐하여 그 무리가 7만이라 일컬었으니, 저들이 헛된 말로 꾀어 인심을 현혹한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소. 그런데도 온 영남의 백성들이 거기에 이끌려 들어가 올빼미나 승냥이, 도깨비의 소굴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과연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이 고을 사람들이 공을 사모할 줄 아는 마음이 쇠퇴하지 않았다면 조정에서도 필시 그들의 마음을 곡진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사당의 면모가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을 어찌 사사로운 사우(祠宇)라 하여 거절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성여는 “알겠소.”고 하였다.
1년 남짓 지나 성여가 편지를 보내왔다.
황공의 사우(祠宇)가 준공되었소. 이 고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절도사 원필규(元弼揆) 공을 좌측에 배향하고, 군관 이무실(李茂實)을 낭무(廊廡)에 종사(從祀)하기를 바란다고 하오. 예전에 황공이 일본에 사신갈 때에 보좌관을 엄선하여 원공(元公)을 발탁하여 데리고 갔소. 또 무신년 변란에는 원공이 숙위(宿衛)로 있다가 특별히 문경(聞慶) 현감을 제수 받아 조령(鳥嶺)의 요해처를 굳게 지켰고, 곧 좌도(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배수되어 그날로 황공의 군문으로 달려갔소. 비록 적도들을 진압하는 데 하루도 걸리지 않았으므로 좌도의 병사들을 쓰지는 않았으나, 협심하여 토벌함으로써 방책을 보좌한 공이 많소.
적도들이 청주를 점거했을 때에 황공이 군관 가운데 누가 적을 정탐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이무실이라는 자가 비분강개하면서 자기가 가겠다고 청하였소. 영남의 적도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안음(安陰) 현령이 읍을 버리고 도주하여 백성들은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는데, 황공이 이무실에게 임시 현령의 직함을 주어 가서 진무하게 하였소. 이무실이 방문(榜文)을 내걸어 역순(逆順)의 이치로 타일러 소요를 진정시키고, 안음 고을을 점거하였던 노이호(盧爾瑚)ㆍ신선악(申善岳) 등의 적도들을 잡아 죽이자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평온해졌소.
대체로 원공은 말위(靺韋 무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평소 대의(大義)에 밝고 정론(正論)을 지켜 조충익(趙忠翼)ㆍ이충숙(李忠肅) 등 여러 공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으니, 이 때문에 번번이 다른 정파에 의해 곤란을 당하곤 했소. 그러다가 황공의 지우(知遇)를 입고서 머나먼 바다 이역만리를 오갔고, 부절을 받아 문경의 요해처를 지켰소. 또 황공이 군무를 다스리던 때에는 주도면밀하게 계책을 세워 적도들의 난을 평정하였으니, 그러한 공적은 우연히 이룬 것이 아니었소. 황공을 제사 지내는 곳에 함께 배향해야 한다는 말에는 진실로 정밀한 의론이 담겨 있소.
그리고 이무실은 군교(軍校)의 신분으로 충의를 떨쳤으니 그 뜻이 가상하고 그 공적은 기념할 만하며, 황공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눈과 인재를 발탁한 공효 또한 민멸되어서는 안 되니, 사우 곁에 종사하는 일 또한 그만 둘 수 없는 일이오. 이곳 사람들이 이 사우를 중건하는 일이 그대로부터 발단된 것이므로 반드시 그대의 글을 얻어 그 실상을 기록하고 싶다고 하니, 그대가 글을 지어 주기 바라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필부가 무고하게 법망에 걸려 죽어도 오히려 떼로 일어나 억울함을 송사하여 끊임없이 시끄럽게 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지금 저 봉강대리(封疆大吏 관찰사)가 난역(亂逆)의 무리를 주벌하고, 거짓을 날조하여 웅거하던 적을 깨부수어, 뿌리를 제거하고 소굴을 뒤엎어 버렸으니, 그 공렬(功烈)이 어떠한가. 큰 공적을 세우자 백성들의 뜻도 이에 안정되었고, 순역(順逆)이 밝혀지고 충사(忠邪)가 분명해져 백성들이 금수나 이적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니 그 은덕이 어떠한가. 반란은 겨우 평정되었으나 큰 근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상벌을 분명히 하고 군율을 정비하고자 했는데, 하루 저녁에 급작스레 운명하고 말았다. 사람들의 말에 중독되어 죽었다 하니, 그 일의 비통하고 억울함이 또 어떠한가.
밝으신 성상께서 환히 살피시어 기강이 모두 펼쳐졌으나, 이윽고 한두 번 재조사하고 문서만 갖추고 그쳤는데, 이러한 조정의 조처는 비록 그 옥사를 끝까지 추구하지 않아 불안에 떨던 무리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 남방의 사람들은 큰 은덕을 입고서도 당시에 모두 아무 말 않고 있었으니, 이것은 유독 괴이하다.
아아! 몸이 부서지도록 충성을 다해 마침내 목숨을 바쳐 순국했건만 존숭하고 보답하는 은전은 적막히 들리지 않고 있다. 이는 담당 관료들이 절차와 규정에 구애된 것이 아니라면 시급하지 않은 일로 여긴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충렬공이 죽은 뒤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한 것이 지금 백여 년이 되었다. 비록 암행 어사의 말과 사민(士民)들의 청원이 있지만, 만일 또다시 전날처럼 절차와 규정에 구애되고 시급하지 않는 일로 여긴다면, 사당의 면모가 찬란하게 빛나고 배향이 질서 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대체로 일이 흥하거나 쇠퇴하고 드러나거나 묻히는 것은 각기 정해진 때가 있고, 또한 반드시 그 적임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군자의 은택은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고, 고을 사람들의 추모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짐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훗날 조정에서 백성들의 바람을 위안하여 영광스러운 사액(賜額)을 내리는 일은 아마 그 날이 있을 것이다. 우선 이 글을 써서 기다리노라.
숭정후(崇禎後) 네 번째 정사년(丁巳年, 1857) 맹추(孟秋)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반남(潘南) 박규수(朴珪壽)가 기록하다.
[주-C001] 선수(瑄壽) : 박선수(朴瑄壽, 1821~1899)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온경(溫卿)이다. 환재의 아우로, 1864년(고종1) 증광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 《설문해자익징(說文解字翼徵)》이 있는데,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고대 종정(鍾鼎)의 유문(遺文)을 연구하고 문자의 원리와 본뜻을 고증하였다. 《환재집》의 간행에 교정을 맡았는데, 간혹 간략한 논평을 달아놓았다.[주-C002] 한창려집(韓昌黎集) :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의 문집을 가리킨다. 앞부분에 운문인 부(賦)와 시(詩)가 먼저 실려 있고, 문장은 〈원도(原道)〉, 〈원성(原性)〉을 필두로 각종 설(說), 해(解), 전(傳), 잠(箴), 찬(贊), 변(辯), 후서(後敘), 송(頌), 기(記) 등을 모아 첫머리에 배치하였다.[주-C003] 방정학집(方正學集) : 명나라 방효유(方孝孺, 1357~1402)의 문집인 《손지재집(遜志齋集)》을 가리킨다. 문집의 첫머리에 잠(箴), 명(銘), 계(誡), 의(儀), 논(論)을 비롯하여 각종 산문을 모아 잡저(雜著)라는 제목으로 실어 놓았다.[주-D001] 대구 민충사 중건기 : 대구 민충사(愍忠祠)의 건립과 훼철, 중건과정을 1857년(철종8)에 정리한 글이다. 환재는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그곳의 관찰사를 역임했던 황선(黃璿)이 이인좌의 난에 큰 공적을 세우고도 조정의 공식적인 포상을 받지 못함을 알고, 민충사를 복구하고 사액(賜額)할 것을 조정에 주달하였다. 이후 관찰사로 부임한 신석우(申錫愚)가 백성들의 청원에 따라 민충사를 건립하게 되자, 환재는 이 중건기를 지어 황선 및 절도사 원필규(元弼揆)와 군관 이무실(李茂實)의 공적을 예찬하였다.
민충사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대략 경상 감영 근처 연구산(連龜山)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17년(1741) 3월 5일 조에는 경상 감사 정익하(鄭益河, 1688~?)가 상소를 올려 경상도에 있는 이술원(李述原), 휴정(休靜), 이순신(李舜臣), 김천일(金千鎰), 송상현(宋象賢), 곽재우(郭再祐)를 모신 각지의 사당과 대구 부성 남쪽에 있는 민충사의 보수관리를 위해 각각 10결을 지급하여 면세의 혜택을 달라는 기록이 있는데, 민충사가 건립된 과정과 황선의 행적이 자세하다. 민충사와 황선에 관한 또 하나의 사료로는 평영남비(平嶺南碑)를 들 수 있다. 1780년(정조4) 경상 감영 남문 앞에 세워졌으며, 대사헌 이의철(李宜哲)이 짓고, 이조 판서 황경원(黃景源)이 글씨를 썼다. 황선의 공적을 주로 하여 말미에 민충사의 건립과 훼철, 비석 건립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고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금석총람》에 비문이 실려 있다. 아울러 1857년에 심암(心菴)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이 지은 상량문이 《심암유고》 권30에 실려 있는데, 중건할 때의 상량문으로 보인다.[주-D002] 황선(黃璿) : 1682~1728.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성재(聖在), 호는 노정(鷺汀),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숙종 36년(1710)에 진사가 되고, 같은 해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낸 뒤 숙종 45년(1719)에 통신 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가자(加資)되었다. 경종 2년(172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무장(茂長)에 유배되었는데, 영조 1년(1725)에 석방되어 예조 참판ㆍ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경상도 관찰사로서 정희량(鄭希亮)의 군사와 대치하여 이를 진압하다 죽었는데 그의 죽음이 뜻밖이어서 독살된 것으로 추측된다.[주-D003] 무신년의 변고 : 이인좌의 난을 가리킨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경종이 죽고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朴弼顯)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豐君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며,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의해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ㆍ거창ㆍ합천ㆍ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 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토벌 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주-D004] 구산(龜山) : 일명 연구산(連龜山)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26권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에 대한 기사에 “대구부성(大邱府城)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읍을 창설할 때 돌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남으로 머리를 두고 북으로 꼬리를 두게 묻어서 지맥(地脈)을 통하게 한 까닭에 연구라고 일컬었다.’고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대구 출신의 문인 서거정(徐居正)이 대구10경의 하나로 꼽기도 하였다.[주-D005] 사원(祠院)의 …… 때 : 《영조실록》 영조 17년 4월 8일에 이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영조는 “무릇 법령이 해이해지는 것은 오로지 흔들리고 어지럽히는 데 연유한다. 갑오년에 정식(定式)한 뒤에 조정에 아뢰지 않고 사사로이 건립한 사원(祠院)과 사사로이 추향하는 경우 대신이나 유현을 논하지 말고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이미 죽은 도신은 논하지 말되 나머지는 모두 파직할 것이며, 수령은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그리고 수창(首唱)한 유생은 모두 5년을 기한하여 정거(停擧)하게 하라. 이후로 사사로이 건립하거나 추가로 제향하는 경우 도신과 수령은 모두 고신(告身)을 빼앗는 율(律)을 시행하고, 유생은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라.”라고 교령을 내렸다.[주-D006] 도적떼가 …… 그르치니 : 이인좌의 난 때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변고를 일으켰고, 정희량이 경상도에서 거병하였음을 의미한다.[주-D007] 한 달 …… 말았습니다 :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관군이 동년 4월 19일 개선함으로써 막을 내렸다.[주-D008] 사전(祀典) : 제사(祭祀)를 지내는 예전(禮典)을 말한다.[주-D009] 신석우(申錫愚) 성여(聖與) : 신석우(1805~1865)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예(成睿)ㆍ성여(聖與ㆍ聖汝ㆍ聖如), 호는 해장(海藏)ㆍ금천(琴泉)ㆍ맹원(孟園)이다. 183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용강 현령ㆍ이천 부사ㆍ경상 감사ㆍ예조 판서 등을 지냈다. 철종 때 환재와 함께 조정에서 활약하며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1860년 동지사행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입연기(入燕記)》를 저술하였다. 저서로 《해장집》이 있다.[주-D010] 원필규(元弼揆) : 1687~1771.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필(君弼)이다. 1712년(숙종38) 무과에 급제하여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후 1730년(영조6) 황해 병사를 거쳐 평안 병사, 1746년 포도대장을 역임했다. 1750년 충청 병사 재직 시 장령(掌令) 이수관(李壽觀)의 상소로 파직되었다가 풀려난 뒤, 1752년(영조28) 경기 수사와 좌포도대장을 역임했다.[주-D011] 이무실(李茂實) :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나, 이무실이 썼다고 하는 정사본(丁巳本) 《천자문(千字文)》의 권말에 “雍正十三年乙卯三月日 月城后人李茂實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무실은 경주 이씨로 추정된다. 《손희하, 李茂實書 丁巳本千字文 연구, 한국언어문학 51, 2003, 118쪽》 아울러 대구광역시 만촌동 영남제일관문 앞에 있는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도 1735년(영조11)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 도호부사 민응수(閔應洙)가 토성인 대구읍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는 과정에 “도청감동 가선 이무실(都廳監董嘉善李茂實)”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선대부 정3품 도청 감동의 임시직함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주-D012] 숙위(宿衛) : 숙직하면서 임금을 호위하는 직위에 통상 숙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때는 숙위군의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주-D013] 역순(逆順)의 이치 : 역순에는 반역과 순종, 정절의 가벼움과 무거움, 경우의 좋고 나쁨, 사리의 당연함과 부당함이라는 뜻이 들어있는데, 이런 이치를 들어 좋은 쪽으로 효유하는 것을 말한다.[주-D014] 대의(大義)에 …… 받았으니 : 원필규(元弼揆)가 노론의 정론을 따랐다는 말이다.
조충익(趙忠翼)은 조태채(趙泰采, 1660~1722)를 가리킨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시호는 충익이다. 노론 대신으로서 영의정 김창집, 판부사 이이명, 좌의정 이건명, 호조 판서 민진원 등과 함께 1721년 연잉군(延礽君 영조)의 세제(世弟) 책봉을 건의, 실현시켰다. 그러나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 좌참찬 최석항 등의 공격을 당해 진도에 유배되었고 다음해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1725년(영조1) 우의정 정호(鄭澔)의 진언으로 신원되었다. 저서로 《이우당집》이 있다.
이충숙(李忠肅)은 이만성(李晩成, 1659~1722)을 가리킨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사추(士秋), 호는 귀락당(歸樂堂)ㆍ행호거사(杏湖居士), 충숙은 그의 시호이다. 노론으로서 1721년(경종1) 병조 판서에 올라 노론 대신들과 함께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청해 실현시켰다. 그러나 소론이 일으킨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불려 와서 국문을 받다가 64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귀락당집》이 있다.[주-D015] 훗날 …… 일 : 민충사 사액에 대한 실질적 조치가 이루어졌는지는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변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고종실록》 ‘고종 27년 경인(1890) 11월 7일(계유)’조에 보면 “이교하가 의정부의 말로 아뢰기를, ‘무신년(戊申年)에 순절(殉節)한 사람과 공로 있는 사람으로서 제사를 지내주거나 추증할 만한 사람들과, 대를 이은 후손으로서 조용(調用)할 만한 사람들을 묘당에서 문적(文籍)을 상고한 뒤에 계품하여 시행하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삼가 정조(正祖) 때 표창한 기록에 따라 …(중략)… 고 감사 황선(黃璿), 증(贈) 참판 유승현(柳升鉉), …(중략)… 증 절충장군(折衝將軍) 조중관(趙重觀)에게는 모두 지방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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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3월 4일 기사 3번째기사 1741년 청 건륭(乾隆) 6년 경상 감사 정익하가 본도의 일곱 곳의 사우에 면세지 10결을 지급할 것을 청하다
경상 감사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기를,
"본도에는 이순신(李舜臣)·김천일(金千鎰)·송상현(宋象賢)·곽재우(郭再祐)·중 유정(惟政)·이술원(李述原)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더러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더러 개인이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고 감사 황선(黃璿)이 본도를 안찰(按察)하다가 무신년 난리를 당하여 반역(叛逆)을 토벌하여 평정한 공이 있었는데, 유독 훈적(勳籍)에 누락되었으므로, 도내(道內)의 사민(士民)들이 그를 위하여 사우를 세우고 그 사우의 이름을 민충사(愍忠祠)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곳의 사우에 대해서는 각기 세금을 면제한 전지(田地) 10결(結)을 지급하여 그것으로 수호(守護)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하교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대신에게 묻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전지는 허락할 수 없지만 관청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서원(書院)의 〈건립을〉 금지하고 있으니, 사우의 건립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우와 서원은 다르다."
하였다. 마침내 전지의 지급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우를 처음 세울 때의 도신은 추고하고 수령은 파직하도록 하였다.
○慶尙監司鄭益河上疏言:
本道有李舜臣、金千鎰、宋象賢、郭再祐、僧惟政、李述原祠, 而或有官祭者, 或有私祭者。 故監司黃璿按本道, 當戊申亂, 有討平叛逆之功, 而獨漏勳籍, 道內士民爲之建祠, 名其祠曰愍忠。 此七祠, 宜各給免稅田十結, 俾令守護。
批曰: "當問于大臣而下敎。" 其後詢于大臣, 左議政宋寅明曰: "田不可許, 而官給祭需, 恐無不可。" 右議政趙顯命曰: "書院有禁, 不可許其建祠也。" 上曰: "祠與院有異矣。" 遂不許給田, 而創祠時道臣推考, 守令罷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