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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찰과 직관에 의한 시 문학성
'sprit sence'의 힘
통찰력(l, insight)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현상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자기를 둘러싼 내적, 외적 전체 구조를 새로운 시점, 새로운 관점에서 고쳐보거나 궤뚫어 바라보는 힘이다. 이 용어를 독일어로는 Einsicht " 프랑스어로는 Intution' 으로 표기한다
어찌 보면 통찰은 직관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전자가 볼 수 있는 것을 다양한 각도에서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을 필요로 한다면 직관은 볼 수 없는 것을 더 깊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통찰력이 주로 다양한 인문학적 교양의 습득에서 얻어지는 후천적인 속성을 지닌다면, 직관력은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과 관계된다. 또한 전자가 좌뇌의 발달과 밀접하다면, 후자는 우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의 시대는 감성지능의 시대요. 교감과 소통이 우선하는 시대다" .나아가 감성을 발휘하여 글을 잘 쓰려면 잠자고 있는 우뇌의 능력을 발달시켜야 한다. 감성, 곧 우뇌에 비중을 두고 있는 감성지능의 힘은 통찰과 직관에 있고, 통찰과 직관의 극대화는 각자 지닌 sprit sence'에 좌우된다. 이 'sprit sence' 는 선천적인 요인도 있지만 유아시절의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사람의 키도 본격적으로 크는 시기가 있듯이 좌뇌와 우뇌도 발달하는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우뇌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태아 때부터 초등학교 때까지 많이 발달하고, 좌뇌는 주로 중학교 때부 터 많이 발달한다고 한다." 바로 감성지능의'감성 '은 우뇌와, 감성지능의' 지능 '은 좌뇌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시대가, 문학 예술 창작이 요구하는 것은 지능이 아니라, 보다 감성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뇌의 Sprit sence 의 힘은 노력 여하에 따라 지속적인 발달을 가져온다고 한다. 평소 음악이나 그림 등 예술방면에 관심을 갖게 되면 계속 길러진다는 것. 따라서 성인이 되어서도 'sprit Bence 를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안다든가, 음악이나 시 등의 예술작품을 통해 깊은 감동을 느낀다든가, 상대방이나 사물의 생각을 피악해 본다든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생활하게 되면 우뇌가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의 비밀을 캐내는 작업
상투성의 껍질을 벗겨가다 보면 맛깔스런 과육, 속살이 보인다. 이것이 통찰의 세계다. 사물의 겉핥기, 외피적, 피상적으로 보면 통찰의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 법, 남다른 사유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마중물을 아는가. 양질의 생명수를 얻으려면, 사물의 또다른 본질, 의미를 찾아내려면 한 바가지, 두 바가지 마중물을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탁한 물이 나오게 마련, 관조와 몰입- 상호텍스트의 관계짓기, 스키마, 연상, 상상, 비유적 상상 등에 매진하다 보면 나중에는 맑고 차가운 생수가 나오기 시작한다. 통찰은 생수와 같은 대상의 비밀을 캐내는 작업이다. 현실적, 실용적 일상적, 논리적 관찰을 거부하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로소 그 대상은 자신의 비밀을 열고 우리에 게 다가온다. 가령 난초가 꽃을 피우는 것은 즐거운 것인가? 아니다. 서정주의 말대로 '바깥으로 밸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 몸속에 있 기 때문에/ 꽃은, 핀다"는 것이고,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 란초>)이라고 또다른 의미의 시적 진술을 이루어낸다. 그래서 시인은 시상을 계속 파고 들어가거나, 대상을 거꾸로 보거나, 뒤집어보는 힘, 존재를 확장해가는 능력이 늘 있어야 한다.
어머니 묘소에 큰절하고 비석 뒷면을 살펴보니 생몰연월일 앞에 한자로 生과 卒이 새겨져 있다
生은 그렇다 치고 왜 死가 아닌 卒일까 궁금해 하다 인생이 배움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이승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여 인생이라는 기나긴 배움의 길에 오른다
그러나 우여곡절과 신산고초의 과정 속에서
희,로, 애, 락, 애, 오, 욕까지를 제대로 익히고
무사히 졸업을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는 못 견디고 너무 일찍 자퇴하거나
어떤 이는 병이 들어 중도에 휴학을 하며
어떤 이는 불성실하여 퇴학당하기도 한다.
그러니 내 어머니는 그냥 사망하신 게 아니다
여든 해 동안 인생의 전 과목을 두루 이수하시고 이승이라는 파란만장한 학교를 졸업하신 것이다
무덤 옆의 저 비석은 자랑스러운 졸업장이다.
김선태 <卒> 전문 (월간(신동아>2011. 2)
김선태의 <김선태의 <卒>은 통찰의 묘미를 보여주는 시이다. 어느 날 화자는 성묘를 갔다가 우연히 비석의 뒷모습을 드려다 본다. 누구든지 이런 경험을 했으리라. 그런데 시인은 이곳에서의 순간적인 경험을 시로 만들어낸다. 그 착상은 死가 아닌 '卒'로 새겨진 의미에 있다. 자의(字意)에 대한 시적 화두, 곧 의미부여의 시적 상상력이 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서 남다른 자기만의 시상이 전개된다.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 되새김질에서 참으로 그렇구나' 라는 시적 진리를 얻어낸 것이다 어떤 사물이던지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견자(#)요,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자이며, 사물의 본래 모습으로 또다른 본질을 찾아내는 천개를 누설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의미부여의 직관적 상상력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발
또한 발
함민복<부부> 전문
위 시에서 본문인 상 나르는 일' 과 제목인 부부'는 비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관찰의 단계를 뛰어 넘는 관계맺기, 내면을 투시하는, 사물(상황)들의 특성을 살려 정신의 힘을 부여하는 착상 내지 가치화하려는 의미부여의 힘이 시를 통찰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통찰과 감동적인 시를 얻기 위해서는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애정,관심, 인격적 몰입, 의미부여의 상상력이 늘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시인은 그 대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가령 시가 의인법과 같은 비유의 세계임을 인정한다면, 나아가 시가 상상의 세계임을 인정한다면 정신을 사물로 연결하고, 사물을 다른 사물로 연결하여 인식을 확장해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가령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한 것처럼, 몸짓이 꽃 으로 바뀌는 새로운 의미를 전환하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 사람, 현상 등을 피상적으로 보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대상과 나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뮤즈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쭈구미라는 연체동물이 있다
낙지의 사촌쯤 되는 이놈은
자승자박의 바닷물고기이다.
이놈을 잡는 일은 너무 쉽다
줄에 소라껍질을 매달아놓으면
은신처로 알고 들어가 걸려드는데
문제는 문단속을 잘한다는 것
혹시 남에게 들켜 잡아먹힐까봐
펄을 뭉쳐 입구를 꽉 틀어막다보니
퇴로도 없이 잡히고 만다 바보같이
나 여기 들어 있소' 자수하거나
'눈 가리고 야옹' 인 셈이다 하여
입구가 막힌 소라껍질 속에는
틀림없이 쭈꾸미가 들어있다
어부는 옛날 처녀 보쌈해오 듯
그냥 걷어오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문단속 잘해
폐가망신당한 사람들이 있다.
김선태 <쭈꾸미> 전문
시인에게 있어 자연과 사물이란 우주의 섭리,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요.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넓혀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김선태의 시 <쭈꾸미>에서는 쭈꾸미의 생리를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해낸다. 그는 남도의 목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시간만 나면 섬으로 바닷가로, 갯벌로 시 사냥을 나간다. 그의 시에는 연체동물이나 꽃게, 숭어 우럭, 홍어, 말미잘, 개불 등 물고기만을 엮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한층 더 파고들어 물고기를 통해서 보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라든가, 남도 바 닷가 사람들과 풍경과 그윽한 향수를 수거하여 시편들 속에 담아낸다. 섬마을의 이팝나무를 조상들의 유산인 쌀밥' 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해안선을 어머니의 치맛자락으로 묘사하거나, 갯벌을 '넉넉하고 깊은 그늘' 을 드리운 '진창의 노래판' 으로 인식해 '잘 삭은 적막'과 '절창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 진주조개에서 찬란한 중심에 스며 있는 고통'의 삶을 통찰해 내기도 한다.
못을 뽑습니다
휘여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본 체 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김종철 <고백성사> 전문(시집 '못에 관한 명상,)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관념을 전달한다. 그래서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못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대못, 슬라브못, 압정, 녹이 슨 못. 구부러진 못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못대가리도 큰 것에서부터 대가리 없는 못가지 여러 종류다. 김종철은 자신의 인생사, 자신의 과오나 행위, 그리고 묵상에서의 고회성사나 기원 등을 모두 못의 비유, 못의 상상력을 통해서 삶의 질료를 드러낸다. 어떤 인간이든 현실(삶)과 이상(꿈)이라는 두 공간 속에 존재한다. 바로 김종철은 시집 <못에 관한 명상>에서 못의 생리, 못의 특질을 통해서 두 공간, 현실을 반추하고 이상을 노래한다. 곧 존재에 대한 성찰이며, 존재 성에 대한 탐구라든지 세상사를 통찰해내는 것이다. 못이라는 사물이 생산해 내는 이미지는 영혼의 비밀과 존재의 사물을 동시에 드러내기도 하고, 그 존재의 본질을 넘어서 예수의 옆구리에 박힌 못에 이르기까지 원형적 삶을 두루 아우르는 테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위 시도 주일에 찾아 간 성당에서 묵상하면서 고백성사가 곧 못을 빼는 행위로 치환되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존재의 복귀를 노래한다 다음의 시 <못>도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녹슬고 구부러진 못으로 나타내고 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 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정호승 < 못> 전문(시집 <포옹>)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윤효 <못> 전문 시집 <물결< 다층, 2001
조임과 풀림이 한 길이라니!
같은 길이라도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결합의 길과 해체의 길로 나눠지는구나.
풀림과 조임이 한 길이라니!
만남과 이별이 한 길이라니!
함민복 <나사못> 전문 <산림문학> 2011 봄,여름
이러한 못의 이미지, 못의 의미를 통하여 화자 존재의 파편적 의식은 물론 사물의 속성을 꿰뚫어 사물 통찰의 또다른 시적 성과를 얻고 있다 정호승의 <못> 이나 윤효의 <못>은 못을 박고, 빼고, 구부러지고, 녹슬고 하는 못이라는 사물의 속성을 통해서 비유적 상상력으로그려지고 있다. 함민복의 <나사못>도 마찬가지다. 하찮은 나사못이라는 사물에서 시인은"조임과 풀림", "만남과 이별"이 한 길에 있다는 삶의 섭리를 발견케 하는 것이다. 순전히 사물 통찰의 전형을 보여주는 미시적인 사물 현상을 통하여 "풀림과 조임이 한 길이라니!" 이라는 거시적인 참뜻의 의미를 도출해 낸다.
하찮은 사물에 대한 몰아와 예리한 관찰력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글을 쓰려면, 삼라만상에 흩어져 있는 온갖 시의 소재로 삼을 만한 것들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달리 말하면 대상에 대한 몰아과정의 예리한 관찰력이다. 관심을 갖고 주변을 관찰하면 쓸거리는 무궁무진해진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아름다운 몰입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 창작 분야가 그렇지만 시는 무엇보다 착상이 중요하다. 예기치 않은 일. 엉뚱한 생각, 하찮은 경험, 별 볼 일 없는 일, 사소한 것에도 몰입하는사유이 작업이 중요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대로변
깍두기머리로 깎아놓은 쥐똥나무 뒤
누군가 실례해 놓은 물똥 한 판
똥파리들이 해치우는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처음엔 무료급식이라 쭈펫거리더니
날이 갈수록 동네잔치로 판을 키웠다
늦은 귀가길, 누군가
첫 먹던 힘까지 조여 넣었을 팔약근
거어이 뚫고 나온 그 간절함에 화답하듯
성찬을 즐긴 식객들의 등피가 사뭇 번들거린다
쓰레기 치우던 환경미화원이 빙긋 웃는다
몸바꿔 입은 푸르름이다
이영식<축제> 전문
어떤 사물이던지 상식적, 고정적, 관습적, 피상적으로 접근하면 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자이며, 사물의 또다른 본래모습, 즉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자이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험민복<성선설> 전문)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이정록<서시> 전문)
통찰이나 직관에 의해 드러나는 시편들의 소재를 보면 대개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이 많다. 바로 별 볼 일 없는 무가치한 대상에서 참다운 것을 발견해내는 과업이야말로 시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인 것, 다음의 개똥 을 소재로 한 시를 보면 위대한 실감을 맛볼 수 있다.
개똥 철학
-유강희(1968~)
개똥도
찬밥처럼 식는다
내리는 눈을 핥아 먹고
찬 속이 얼어붙는다
몸을 움직여 앉은 자리를
바꿔 보고 싶지만
집이 먼저 몸을 묶어버린다
제 있는 곳이 집이지 싶어
자꾸만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개똥,
마당 귀퉁이에 바위 절벽처럼
가보좌를 틀고 앉아 있다
개똥은 오늘도 철학을 한다.
유강희<개똥철학> 전문 ((중앙일보)2012.3.29. 시가 있는 아침)
개똥 이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에서 무슨 철학을 얻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견자의 눈을 통해 통찰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먼저 시에서 말하는 '눈 오는 개똥' 의 모습을 바라보자 겨울날 길바닥에 찬밥처럼 식어가는 '개똥' 이 있다. 식어갈 때 개똥은 점점 내려앉아가며 자리를 잡는다. 차갑다고, 눈이 온다고 전혀 옮겨갈 생각이 없다. 오히려 숙명적으로 제 집인 양 주어진 눈을 핥아먹으면서 내면까지 얼어블는다 그리고는 부처님처럼 가부좌까지 틀고 앉아 참선을 하는지, 크리슈나무르티처럼 무슨 깊은 사유의 명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권력과 욕망이 있겠는가. 아니 무소유의 길을 숙명처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보여주기를 통하여 오히려 시인은 반문한다. 하찮은 개풍도 자기 본분을 지키며 철학(?)을 하고 있는데, 그대라는 존재, 21세기 우리 군상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화두를 던지고 있다.
바깥으로 밸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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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안도현<꽃> 부분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 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고, 사물의 또다른 모습을 현연시킨다. 그래서 사물(상황)들의 특성을 살려 정신의 힘을 부여하고, 가치화하려는 의미부여, 관계 맺기의 통찰이나 직관이 시의 힘이 되며, 시를 감동적으로 만든다. 가령 불이 났을 때 달려가는 자동차를 우리는 불자동차라고 하지만 실상은 물자동차인 것이다. 플라톤은 시인을 칭하여 광기의 미친 자' 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인'으로 보았지만, 어쨌든 작가는 범상한 사람은 아니다. 우주의 본질, 사물 존재를 깨닫는 사람, 곧 하늘과 인간 세계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시인은 무당의 무(巫)와 같이 세상의 온갖 비밀을 파헤쳐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통찰의 깊이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들추어내며,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상상력을 통하여 드러내거나, 상식이나 보편적 인식을 뒤집어 놓는다.
출처: 문광영 <비움과 채움의 논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