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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이른 아침 바티칸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관광객 대열 한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온 인종 박람회장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큰 목소리로 자신들의 모국어로 떠들고 있었습니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 중국어, 독어, 아랍어...
그러던 어느 순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도 계열의 한 청년이 제게 다가오더니 아주 익숙한 한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
한국에서 오셨어요?”
그렇다고 하니까 조금은 조잡해 보이는 박물관 엽서들을 능숙하게 촥~ 펼치며 그러는 것입니다.
“이거 원래 2유로인데 1유로에 해 드릴게요.”
너무도 능통한 그의 한국어에 신기해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 하냐고 물었더니...
“저는 방글라데시 사람인데 한국에서 6년 동안 공장에서 일했어요.
경기도 안산에서요.”
너무나 반가웠던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로마로 오게 됐냐? 가족들은 어디서 사냐? 사는 게 힘들지 않냐? 등등.
홀로 군중 속에 외로이 있던 서 있던 저는 잠시나마 그 청년과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당시 제 주변에 서 있었던 수많은 외국인들은 그저 머나먼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그 청년은 정겨운 이웃이요 다정한 친구로 다가왔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참으로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같은 언어로 내면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희망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입니다.
언어가 안 통하는 사람들은 그저 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때 내게 한 특별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광대무변한 이 지구상 200여개 이상 되는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북녘 땅의 우리 동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리적으로도 수많은 나라 가운데 가장 인접해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현재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칠레며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과도 마음만 먹으면 즉시 연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북녘 동포들과는 그 어떤 소통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이 다시 또 있겠습니까?
정치경제적으로 참 많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먼 나라입니다.
같은 성씨 같은 조상을 모시고 있는 북쪽의 우리 동포들이
아직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독재자들의 세습 장기 집권 치하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지구상 가장 폐쇄된 장막 안에 갇혀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남북 분단의 고착화가 지속되면서
남과 북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과 북의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역시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주민들 얼굴과 체형 역시 점점 달라지고 있습니다.
생활양식, 사고방식, 가치관, 역사관 등등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너무나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뤄내야만 하는 남북통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불가능한 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불변의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을 빼고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마음 모아 기도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절대로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졌습니다.
철벽같던 소비에트 연방의 높은 담도 세월 앞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련한 우리 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더 달라지기 전에, 더 격차가 벌어지기 전에, 완전 서로 다른 이질적인 집단으로 고착되기 전에
하나 되는 은총을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남북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오늘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칼을 들고 주님께 다가가지 마십시오>
유투브에 있는 ‘왕따를 구한 일진’이란 사연을 옮겨봅니다.
-
난 스무살의 남자야.
사실 난 내 은인이자 친구를 찾고 있어.
난 중학교 때 왕따였어.
일진 애들한테 괴롭힘 당한 건 아니야.
소위 말하는 일진은 아닌데, 나대는 애들한테 하루가 멀다 하고 맞고 다녔지.
내 꿈이 작곡가였는데 걔네들이 내가 아끼는 음악 공책도 찢고 담배 사오라고 시키고 돈도 뺏고 … (공학이었어)
진짜 극도의 괴롭힘을 당했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학교는 두려운 곳이 되어갔어.
자살도 생각해봤고 시도도 해봤어.
음악도 접었고 가난한 집안의 부모님이 돈 모아서 사주신 엠피쓰리도 뺏겼어.
진짜 마지막엔 칼 들고 나 괴롭히던 애들 찌르고 자살할까 생각하고 집에서 부엌용 식칼도 챙겨갔어.
그날이었어. 내가 찾고 있는 내 은인인 친구가 우리 반에 찾아왔어.
그 애는 솔직히 말하면 일진이야.
나 같은 왕따랑은 거리가 멀었지.
근데 그 애가 우리 반에 오더니 음악책을 빌리더라고.
“음악책 있는 사람!” 하면서 소리치는데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
그리고 나한테 음악책을 빌려갔지.
난 당연히 안 돌려줄 줄 알았는데 쉬는 시간에 책을 돌려주러 온 거야.
그러더니 나보고 음악 하냐고 물어보더라고.
내가 당시에 음악공책이 없어서 음악책에다 악보 그리고 좀 끄적끄적 해놨거든.
그래서 내가 했었는데 지금은 안 한다고 하니깐 개가 자기도 음악 한다고, 악보 그려져 있기에 물어 봤다고 하더라.
근데 신기한 건 그 뒤로 걔가 우리 반에 자주 오는 거야.
그것도 나 만나러.
그래서인지 나 괴롭히던 애들이 내 주위에 얼씬도 안 하더라고.
물론 가방에서 칼은 꺼낸 적도 없지.
그러던 어느 날 애가 학교에 안 왔나봐.
우리 반에 맨날 오더니 그날은 안 오더라고.
난 티는 안 냈지만 걔를 기다렸지.
솔직히 그렇게 잘 노는 애가 나한테 관심 가져 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얘랑 있으면 괴롭힘 안 당하니까.
그런데 그날 사건이 터졌어.
걔가 안온 틈을 타서 다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이 새끼가 감을 잃었네 뭐네 하면서 침 뱉고 가위로 내 머리카락 자르고 발로 차고 점심시간 내내 괴롭힘을 당했고
난 이성을 잃었지.
계속 가방 속 칼이 생각나더라고.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가방에 칼을 꺼내 들려는 순간에 우리 반 문이 열렸어.
걔가 온 거야.
병원 갔다 지금 온 거였다고.
하여튼 개가 엄청 어이없는 표정 짓더니 나 때리던 애들을 무차별적으로 때리는 거야.
똑같이 침 뱉고 가위로 머리 자르고 교복 찢고.
다섯 명이서 나 괴롭혔는데 다섯 명이 걔한테 맞다가 한명은 실신했고 네 명은 내가 항상 하고 있던 꼴처럼 됐어.
그리고 나한테 오더니 내 교복 찢어진 거 벗기고 자기 교복 주더라.
자기는 어차피 잘 안 입는다고.
근데 얘도 징계를 받았지.
애 한명이 실신하고 네 명이 엄청 다쳤거든.
정학 먹었는데 정학 끝나고 학교 온 날 아침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교장이 표창장 주더라.
정학은 그 다섯 명의 부모가 항의를 심하게 해서 그런 거였고, 결국 다섯 명 다 강제전학 처분을 받았어.
하여튼 그날 걔는 모든 걸 털어놨지.
사실 자기는 음악 하는 거 아니라고.
처음에 눈 마주쳤을 때는 그냥 눈 마주쳐서 빌려달라고 했던 건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교복이 찢어지고 슬리퍼 자국도 있고, 그래서 왕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도가 지나친 거 같아서 며칠 붙어 있어 봤다고.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내가 음악 하는 거 같기에 자기도 음악 한다고 거짓말 한 거고...
난 고등학교를 예고로 진학해서 열심히 음악하고 장학금도 받고 지금 여기까지 왔네.
원하는 대학에도 들어갔고 방학 때는 학교에서 외국도 보내준대.
아 진짜 보고 싶다, 친구야.
연락해, 010-5877-
뒷자리는 옛날 너네 집 비번이야.
진짜 고맙고, 넌 내 은인이다.
고맙다, 친구야.
-
미움이라는 칼을 지니고 살아가던 한 아이가
일진이라는 한 친구를 만나니 자신의 칼을 꺼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호해주는 친구가 있는데도 미움으로 칼을 꺼내들었다면
그 일진 친구는 더 이상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를 이용해 복수를 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대신 복수해 주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그분의 힘을 빌려 복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내 안의 미움의 칼을 빼 들고 있다면 아직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결코 내 미움의 칼을 빼들고 휘두르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보호를 계속 받고 싶다면 미움은 가방 깊숙이 숨겨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라고 물어볼 때,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에 관한 말씀은 바로 위의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해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데,
‘한 마음’으로 청한다는 말은 이 ‘두 사람’이 서로 미움의 칼을 겨누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기도해봐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서로 간에 미움의 칼을 빼 들고 스스로를 지키려하고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주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없애려 하면서까지, 스스로 제사를 드려가면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왕권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떠나신 것과 같고,
골리앗까지 이기게 해 주셨는데도 스스로의 힘을 측량하기 위해 병적조사를 하여 주님께서 7만 명을 죽여 버리신 것과 같으며,
자신의 지혜로 돈을 모으기 위해 수많은 정략결혼을 하여 이방 아내의 신을 섬긴 솔로몬 때문에 남북이 분열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미움은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스스로 거부하는 행위이고
그런 상태에서 하는 기도는 모두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미움으로 서로 갈라진 사람들이 통일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혼자 헤엄쳐 30명을 구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구소련의 촉망받는 수영선수 샤바르시 카라페트얀입니다.
1976년까지 세계기록 11개. 월드 챔피언쉽 우승 17회. 유럽 챔피언쉽 우승 13회. USSR 챔피언쉽 우승 7회를 기록하였습니다.
1976년 9월16일 어떤 한번하기 기계결합으로 중심을 잃은 버스가 10m물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때 그 주변에서 달리기를 하던 샤바르시가 그 현장을 보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혼자서30명을 구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용기는 혹독한 대가를 가져왔습니다.
구조 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폐렴과 패혈증으로 46일간 의식불명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 후로 샤바르시는 깨어났지만 두 번 다시 수영경기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사고 며칠 후 전차 사고는 크게 보도됐지만 보도된 기사에선 샤바르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언론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영웅이 된 것은 지켜보기만 했던 구조대원들이었습니다.
2년 후 퇴직을 앞둔 한 검사가 양심선언으로 진실이 밝혀졌습니다.
진실이 밝혀지자 소련국민들은 샤바르시를 국민영웅으로 추대했고 격려와 감사의 편지들이 전국각지에서 쏟아졌습니다.
비록 원하던 올림픽 메달은 얻지 못했지만 소련정부가 국민영웅에게만 주는 특별한 메달을 받습니다.
누군가 샤바르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건 무엇이었나요?”
“물속에 뛰어드는 것 외에는 인명구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실수할까 봐 두려웠어요.
물속은 어두웠고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한번은 사람 대신 의자를 끌고나왔는데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아직도 악몽에 시달려요...
수영을 그만둔 건 아쉽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살린 게 너무 기쁩니다.”
한 사람도 한 사람을 살리는 것만큼 더 기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다면
그는 맨 마지막에나 구원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두려움 때문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잘못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곧 미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만을 바랐다면
주님은 그들을 계속 에덴동산에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자신 안에 미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명이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두 명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다가 미운 사람이 생각이 나거든 기도를 멈추십시오.
어차피 하느님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니 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미움의 칼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래야 주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필요하면 칼은 필요 없습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면서 술래잡기(‘숨바꼭질’이라고도 하지요?)를 했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한 명이 술래가 되어서 눈을 가리고 얼마의 숫자를 세고 나서 숨어 있는 사람을 찾는 놀이지요.
저와 다른 친구들은 술래에게 들통 나지 않기 위해서 구석진 곳, 찾기 힘든 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술래가 찾지 못하도록 한참을 숨어 있다가 술래보다 먼저 정해진 지역에 들어가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두가 술래에게 들통 나지 않고 정해진 지역으로 들어가서 이겼다고 신나 있는데 정작 술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술래를 찾으러 다니다가 결국 못 찾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다음 날, 알고 보니 배고파서 집에 갔다고 하더군요.
혼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자기만의 규칙을 내세워서 한다면 어떨까요?
놀이의 재미도 사라질 것이고, 아무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놀이라는 것은 함께 해야 재미있는 것이고,
서로가 규칙을 잘 지켜나갔을 때 함께 재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는 휴대전화를 통해서도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내 전화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즉, 내 말을 듣고 함께 이야기할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전화가 꺼져 있는데 그냥 혼자서만 말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전화를 걸지도 않고서 상대방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이렇게 혼자만의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함께 라는 세상을 살고 있으며, 이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함께 보다는 혼자를 강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인 오늘,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땅에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이 모이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형제들의 일치와 화합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면서도 불구하고 남과 북으로 오랫동안 서로 분리되어 있지요.
그 과정 안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이 안에서의 미움과 다툼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더욱 더 마음을 모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데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절~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하건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용서, 화해, 일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따라서 ‘용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1)
용서는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쌓는 덕행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또 나를 괴롭히는 증오심과 원한에서 벗어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도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1-32)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증오심과 원한만 키워간다면,
그런 ‘삶’ 자체가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과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도 용서해야 합니다.
“저쪽이 회개하면 그때 가서 용서하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회개는 그의 문제이고, 용서하고 평화를 얻는 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평화를 다른 사람의 회개에 종속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2)
용서는 나 자신의 회개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나의 죄를 인정하고, 내가 먼저 회개함으로써
참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만 생각하고, 내가 그 형제를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너만 잘못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교만한 태도입니다.)
내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을 생각해야 하고,
나도 형제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란 서로 용서를 주고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는 용서만 하고, 누구는 용서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용서하는 일과 내가 회개하는 것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3)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셨던 일입니다(요한 17,11.21).
하나가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려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4)
그런데 사실 용서와 화해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개인 사이에서도 어려운 일이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이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마음을 모아’ 라는 말입니다.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로 모인 믿음과 마음입니다.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마음으로 모으려면
우선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의심, 증오심, 원한 등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에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고 미워하면서 입으로만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그런 기도는 안 들어주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마저도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고, 서로 미워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모아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겠습니까?
어쩌면 그동안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동안 우리가 바친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만 회개하고, 우리만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저쪽은 아무런 호응도 하지 않고, 일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데...”
라고 생각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도 사람의 힘으로 안 될 때가 많은데,
정권을 변화시키는 일은 더욱더 사람의 힘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은 하느님께 맡겨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라는 말씀은,
용서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면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기도는 올바른 믿음 속에서 바치는 기도이고,
올바른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인내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남북의 화해와 일치의 길을 찾아>
오늘은 남북한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단의 엄청난 폐해 속에 심각한 사회적 갈등은 물론 인간다운 삶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분단은 군사적 대립과 긴장으로 이어져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고 있으며,
경제 발전과 복지 사회 건설에도 어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남북한 모두 분단으로 인한 불필요한 국력 낭비와 이산가족의 아픔,
군사 안보 비용, 장기간의 군복무, 기회비용의 상실,
통신과 교통 제한과 자원의 분할 사용에 따른 손실 등
유형무형의 엄청난 통일비용을 부담하고 있습니다.
분단은 ‘우리’와 ‘적’으로 가르는 냉전적 이분법과 사상의 획일화,
적대의식과 대립적 사고의 증폭, 군사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의 형성,
남북 간 이질화, 경제 격차를 가져왔습니다.
분단이 초래한 공간적, 제도적, 심리적 단절은
공간적 폐쇄성과 정치 경제적 불안정성, 문화심리적 적대성을 생산해 냈고,
양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결, 정치적 적대 및 군사적 긴장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분단 사회 내부의 비민주화와 경화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 이분법의 틀에서 나오는 분단 언어는
황폐한 의사소통과 사회 경직화를 초래했습니다.
남한의 경우 입장이 다른 상대를 ‘빨갱이’, ‘종북좌파’, ‘극우보수’ 등으로 공격하는 왜곡된 의사소통 구조를 드러내고 있고,
북한의 경우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획일화된 사상으로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억압해왔습니다.
그 결과 남북한 모두 개방된 의사소통과 토론을 통해 통일 역량을 키워가는 ‘통일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분단의 폐해가 궁극적으로는 남북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저해할 뿐 아니라
분단 상황의 지속은 경제, 사회, 문화, 인권 등 인간 삶의 거의 모든 면에서 발전과 성장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서 서로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고,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에페 4,31-32)
또한 분단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 훼손된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고, 엄청난 통일 편익을 누릴 수 있으며,
자유와 복지, 인간 존엄과 가치라는 혜택을 가져다주는 통일의 초석의 길이기에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합니다.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인간을 정치 도구화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는 결국 인격적인 소통을 가로막아 비인간화를 초래하고 사회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민족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함은 물론,
우리 자신부터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인간을 존중하는 삶을 실천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나아가 분단극복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경제적, 정치적 이득의 추구가 아니라 큰 틀에서 분단을 극복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남북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적대적인 분위기를 불식시키는 정치적, 사회적, 교회적 노력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통일을 정치이념의 틀 안에만 가두게 될 때,
통일을 향한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제2의 냉전’, ‘비인간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배제된 냉전적 이분법적 사고와 분단언어를 극복하여 화합을 이루고,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의 폭도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미움은 자신과 남을 모두 망가뜨리는 무서운 힘입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를 잊으려고 회피하거나 무관심해 보려고 하지만,
미움의 끝은 내가 없어지거나 남이 없어지거나 둘 중 하나여야 될지도 모릅니다.
더 힘든 것은, 우리가 상처를 받은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우리의 기억이 잊었던 아픈 상처를 슬그머니 꺼내어 반감을 일으키고,
더 큰 분노로 상처를 주거나 또 다시 상처를 입고 맙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미움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다인의 율법에서 강조해 온 ‘동태 복수법’, 곧 내가 당한 대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고자 하십니다.
참된 화해와 용서는
보복으로 내 맘이 편해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또 다시 앙심을 품고 보복해 오지 않도록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먼저 하느냐에 대한 자존심 싸움이 힘들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면서도 세상과 다른 ‘대조 사회’(게르하르트 로핑크)인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은
용서의 횟수를 넘어서는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오늘날 남북 갈등의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모두가 남북 갈등의 원인을 북쪽에만 돌리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그 악의 고리를 끊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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