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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 22:1-11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내용분해 : A. 엘리바스가 세번째 변론을 시작함(1-3절)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다시 말을 받음(1절)
2. 하나님의 자충족성 강조로 인과응보론의 비현실성을 주장하는
욥의 강력한 자기 변호를 간접 비판함 (2-3절)
·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2절)
·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절)
B. 욥의 고난은 욥의 죄악 때문임을 명시함(4-5절)
1.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4절)
2.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5절)
C. 욥의 범죄로 추정되는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함(6-9절)
1. 욥이 가난한 자의 재물을 빼앗았으며
목마르고 배고푼 나그네를 외면하였다고 비난함 (6-7절)
·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6절)
·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7절)
2. 욥이 부당한 방법으로 많은 토지를 얻고
그로 인해 권세가 커졌다고 비난함 (8절)
·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8a절)
·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8b절)
3. 욥이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였다고 비난함 (9절)
·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9a절)
·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9b절)
D. 욥의 고난을 그의 악행의 결과로 다시 못박음(10-11절)
1.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10절)
2.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11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새 아침을 허락해 주시고,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호홉을 주시며, 비록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지도, 우리의 부족한 삶을 예배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살아있음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줄 믿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께 우리 전심으로 찬양합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욥기 22:1-11절 말씀으로 욥의 악행으로 추정되는 구체적 사례 제시와 욥의 고난에 대한 인과응보론적 단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4-27은 욥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과 관련한 욥과 친구들 간의 총 3차에 걸친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욥과 친구들 간의 제1차 논쟁은 제 4-14장까지 이어지며, 제 2차 논쟁은 제 15-21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제3차 논쟁은 제 22-27장까지 이어지는데, 제 2차 논쟁이나 제 3차 논쟁에서 친구들의 변론은 전체적으로 그 내용에 있어서 첫번째 논쟁에서의 변론과 비교해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즉 친구들은 첫번째 논쟁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세적이고 도식적인 인과응보론에 입각해서 예기치 못한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을 정죄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서 갈수록 강경해지고 노골적이 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본서의 저자는 내용상 크게 다를것이 없는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을 연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처럼 오류와 한계를 안고 반복되는 인간의 논쟁을 통해, 인간 논리의 한계성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며, 동시에 절대 주권자요 의로운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이후에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며 의지 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제 22-27장까지 이어지는 욥과 친구들간의 제삼차 논쟁은 제일 · 이차 논쟁과는 그 구성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즉 앞선 제일 · 이차 논쟁에서는 욥의 세 친구들이 각각 한번씩 변론을 하고 그에 대하여 욥이 각각 반박 변론을 하였으나 제삼차 변론에서는 욥의 친구들 가운데 마지막 변론 주자였던 소발의 변론이 나타나고 있지 않으며 그에 따라서 욥의 반론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발의 변론은 제이차 변론으로 마감된 것입니다. 이러한 제삼차 변론의 구성은 문학적으로 볼 때 균형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발의 잃어버린 변론’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중, 학자에 따라서는 27:13-23의 내용이 욥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소발의 제삼차 변론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소발의 제삼차 변론이 없었던 것으로 봅니다.
이제 제 22-27장의 내용 가운데 엘리바스의 제삼차 변론과 그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 제 22-24장의 내용을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제 22장의 세 문단에서는 엘리바스의 제삼차 변론을 다루는데, 엘리바스의 제삼차 변론의 내용은 앞선 제일 · 이차 변론의 내용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즉 현세적이고 기계적인 인과응보론에 입각하여 고난 당하는 욥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조에 있어서는 제일 · 이차 변론에 비하여 훨씬 강경하고 극단적이기까지 합니다.
상술하여 보면 먼저 1-11 절의 문단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욥이 인과응보론의 비현실성을 주장하며 자기의 의로움을 강력히 주장한 데 대하여 비판하고, 욥의 고난이 그의 죄악 때문임을 명시하며, 욥의 범죄의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엘리바스가 제시한 욥의 범죄는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자가 저지르기 쉬운 것들로, 가난한 자로부터의 재물 착취, 굶주린 자와 나그네에 대한 외면, 부정한 방법에 의한 토지 획득, 고아와 과부 등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 등 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욥이 범하였다고 제시한 이러한 구체적인 사례는 욥이 실제로 범한 것이 아니라, 욥이 범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진 죄목을 추정하여 제시한 것일 뿐으로, 그는 현세적 인과응보론에 근거한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친구에게 없는 죄목까지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2-20절의 문단에서는 욥을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정죄하며, 그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여기서 엘리바스가 욥이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본 근거는 그가 초월자로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마치, 인간 세계에 미치지 않는 것처럼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나 통치를 인정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까지도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만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음을 거듭하여 피력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바스는 욥이 마치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것처럼 왜곡 인용하여 욥이 이전에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망한 악인들의 길로 가고 있다고 정죄하며, 그가 하나님의 재앙을 당하여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던 엘리바스가 이제 변론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주장의 객관성마저도 상실하고, 이성 없는 자처럼, 욥을 정죄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21-30절의 문단에서는 욥에게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평안을 얻으라고 권면하며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둘 것, 전능자에게로 돌아갈 것, 세상 욕심을 버릴 것 등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회복되어 기도 응답, 경영하는 일의 형통, 높아짐, 죄에서의 구원 등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에서 욥을 위로하기 위한 친구로 왔다가, 이제는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하여, 친구에게 없는 죄목까지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엘리바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자기의 그룻됨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의 논쟁은 처음에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가도, 나중에는 논쟁하는 바, 사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되는 예가 허다합니다. 한편 엘리바스의 주장을 욥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거듭 밝힌 대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평안하라는 그의 말은 만세대를 통하여 죄된 본성을 안고 태어나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 이것만이 죄로 인하여 온갖 질고를 지고 허덕이는 인생이 그 모든 질곡에서 벗어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자신과 단절되어 질곡의 삶을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과 화목하고 그로 인하여 구원과 영원한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사 화목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엡 2:16). 따라서 이제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이에 응답하는 일만이 요구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모든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 23.24장의 네 문단에서는 엘리바스의 제삼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을 다루는데, 엘리바스의 제삼차 변론에 대한 욥의 반박 변론은 반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독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욥의 반박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24 : 18-20 .25 정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욥은 여기서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의 주장에 대하여 일일이 반박하기보다는 마치 하나님을 향한 호소에 가까운 독백의 말로 자신의 반론을 대신하는 비논쟁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욥이 계속해서 현세적이고 기계적인 인과응보론으로써 자신을 매도하는 친구들의 주장이 더 이상 일일이 반박 할 가치도 없는 것임을 파악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이제 욥의 변론의 내용을 좀더 상술하여 보면, 먼저 23 : 1-9의 문단에서는 엘리바스가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였으나, 정작 욥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가운데 있음을 토로합니다. 이어 23:10-17의 문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행위를 아시기 때문에, 자기가 시련을 겪고 난 후에는, 자신의 무죄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피력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난 가운데 몰아넣기로 작정하셨다는 인식으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결국 본문에는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신념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을 주신 것으로 인하여, 번민하는 욥의 심적 상태가 그 어느 곳에서보다 잘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24:1-12의 문단에서는 선악에 대한 심판 시기를 알지 못함으로 인한 의문을 제기하며, 하나님의 방관으로 말미암은 부조리한 현실로 인하여 탄식합니다. 특별히 욥은 여기서 악인들의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굶주린 자에 대한 무자비함 등을 매우 사실적인 언어로 묘사함으로써, 악인이 오히려 의인을 핍박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며, 하나님이 이러한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시는 것에 대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24: 13-25의 문단에서는 비록 현실에서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를 강하게 희구하는 것으로 변론을 마무리합니다.
이상에서 보듯 엘리바스의 제삼차 변론에 대한 욥의 답변에는 현실적으로 악인이 번성하고 도리어 의인이 악인에게 핍박받는 부조리함과 관련된 그의 번민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의로우심에 대하여 신뢰하기는 하였지만 극심한 고난과 부조리한 현실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상당히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본래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역시도, 그의 경험적 지식과 판단에 근거한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욥의 마음이 어느 기간 동안 흔들리기도 했으며, 그가 가진 영적 지혜도 불완전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욥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옴부림쳤으며, 자신의 의를 붙들고 이를 끝까지 지켜나갔던 것입니다. 결국 욥은 오랜 고난을 통한 연단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라고 고백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영적 지혜에서 탁월한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영적 지혜는 자기의 주관적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서만 원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진리의 일면을 진리의 전체인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서 엘리바스는 욥을 향하여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죄에 있다고 단정한 데 대하여, 자기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한 특정한 죄를 지은 사실이 없으며, 자기는 의롭다고 거듭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욥의 주장은 엘리바스를 비롯하여 인과응보의 원리만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섭리의 원칙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던 친구들에게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하고 가증한 주장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여기서 우선은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라고 반문 함으로써 욥을 뻔뻔스럽다고 조롱하고 욥의 죄악이 커서 극악하기까지 하다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즉 욥이 당하는 고난은 그의 극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4절에서 ‘책망하다’ 에 해당하는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판단하다’ 입니다. 그러므로 욥에게 임한 심문, 즉 고난은 까닭없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행실을 선악간에 판단하신 결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엘리바스의 이러한 주장이 성경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리실 것임을 곳곳에서 거듭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는 신명기28장의 축복과 저주의 율법에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엘리바스나 친구들이 주장한 인과응보의 원리도, 하나님이 말씀하는 진리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인과응보만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에서는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의 다양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변 인과응보의 원리는 진리이기는 하되, 그것은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한 일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종말론적으로 보면, 인과응보의 원리는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종말의 때에는 자신의 공의를 완전히 실현하여 선과 악에 따라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인과응보의 원리는 부분적인 진리입니다. 엘리바스와 다른 친구들의 문제점은 이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음으로 생겨났습니다. 즉 그들은 부분적인 진리에 불과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여거 무조건 욥에게 적용함으로써 의로웠던 욥을 극악 무도한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이러한 잘못을 흔히 범한다는 데 있습니다. 즉 우리들도 진리의 한 부분만을 알면서 마치 진리의 전부를 아는 것처럼 여겨,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진리의 한 일면을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확대함으로써 실제로는 진리를 왜곡하는 잘못을 흔히 범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러한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어느 특정한 부분만을 보거나, 자기 중심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종합적 ·통시적으로 보고 이해하려 할 때에만이 바른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購史)라는 통시적 관점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게 되면, 분명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어느 특정 부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지만, 우선은 성경을 종합적 · 통시적으로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국어 교육 과정에서 책의 다독과 정독에 대해서 배우면서 숲을 보고 나무를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 할 때에도 먼저는 숲으로서의 성경 전체의 맥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무로서의 성경 각 부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에 이릅니다. 나무가 숲을 이루는 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지만, 숲 자체는 아니듯이 인과응보의 원리도 진리의 한 일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리 전체는 아닙니다. 많은 이단자들이 같은 진리의 책인 성경을 가지고도 비진리에 이르는 것은 그들이 숲을 보지 아니하고 나무만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여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전체 숲을 먼저 보고, 그 안에서 진리의 각 부분으로서의 나무를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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