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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보이신 모범
벧전 3: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벧전 3:18-22 /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분이었지만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께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려고 단 한 번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죽었지만 영은 살아 계셔서 19)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들을 찾아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혼들은 오랜 옛날 노아 시대에 살던 자들을 가리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순종해 오기를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무서운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받는 침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죽음과 멸망할 운명에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침례는 단순히 우리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에서 깨끗해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렇게 살기를 약속드리는 것입니다. 22)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셔서 모든 천사들과 하늘의 군대들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과 죽음이 주는 영적인 의미를 일깨워 성도들이 고난에 담대하게 대처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18) 불의한 인간을 위해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림을 받으셨습니다. 육은 인간인 그리스도를, 영은 부활하신 생명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도 선을 행하고, 또 고난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의 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엡 3:21).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죽음뿐 아니라 부활에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고 부활은 구원을 보증합니다. 따라서 죽음도 부활도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이에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무엇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19-21)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죽음으로 무덤에 들어가셨고, 영으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그는 죄를 이기신 것과 그 악한 영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이 당시의 나그네 같은 성도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은 노아와 그 가족처럼 고난과 핍박을 받는 성도들이 결국에는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이를 통해 고난 받는 이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니(22) 시편 110편 1절은 구약 성경 중 신약 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절입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도 승리와 영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미래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보장되어 있습니다. 창조된 천사들과 능력들과 권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주이십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위한 최종적 제사이며, 부활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성도는 심각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전해야 합니다.
세계 제일의 부호 록펠러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록펠러 씨, 당신은 지금까지 세계 제일의 부호를 누리고 계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록펠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지요.” 록펠러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을 들려주었습니다. “첫째, 어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십일조를 철저히 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 어머니는 성전 건축의 축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셋째, 모든 예배의 맨 앞자리에 앉도록 가르치셨고 교회 일에 절대 순종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설 교 >
소망의 가르침을 지켜 행합시다
벧전 3장 15-15절 / 강성찬목사(전주동부교회)
투르니에는 스위스의 내과 의사이자 정신의학자이며 유명한 저술가인데 그가 쓴 책 중에 "듣는 귀"라고 하는 제목의 신앙 간증집에 이런 내용이 있다합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금실 좋은 남편과 아내로 소문났는데 한번은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쳐다보며 숨을 거두기 전, 남편에게 말했다합니다.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그 말에 그가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합니다.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합니다. 아내를 보낸 후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다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요 소망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그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다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세에 그리스도인들이 당해야 할 고난을 미리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에 물들지 말고 슬기로운 생활을 하며 선행을 열심히 하라고 권면하는 가운데 무서운 박해에 대처하면서도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안에서 확고한 태도를 가질 것과 열심으로 선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지려고 하기보다 남에게 나눠주기 좋아하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보다는 양보하기를 즐겨하고, 스스로 절제하는 것을 보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핍박하는 사람들이 “저 사람들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하며 “무엇 하러 그렇게까지 하느냐, 그렇게 사는 이유가 뭐냐?”며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소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느냐고 물어보는 이유는 힘들 때나 고난 받을 때,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편하게 살지 왜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믿는 사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이 마음을 훑고 지나가면서 “글쎄 말이에요. 내가 뭐 하러 이러나…….” 하는 말이 튀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흔들리지 말고 소망에 대해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진리를 수호하는 차원에서 법정에서 변호하는 것처럼 논리적이면서도 정확하게 불신자들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엘피도스)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들을 명확히 구분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불신자들을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엡2:12)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불신자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내할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내세의 소망에 대해 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 자기 조상들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을 따르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 1:18)라고 합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았던 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합니다.
이런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전혀 다른 삶을 산다면 당연히 주위 불신자들의 호기심은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악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라고 합니다.(벧전 3:14-15)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사는 것과 관계없이 착한 사람도 고난 받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 혹은 핍박은 착하게 또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른 일을 하면서 의를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오히려 복 받는 일이라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상당히 익숙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0)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말씀 그대로 베드로가 듣고 배운 대로 다시 강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주님을 주인 즉 푯대로 삼고 살아갈 때 성도들은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물위를 걸었을 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물결, 즉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지 않고 살면 세상 유혹에 빠져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세상만 바라보고 살면 우리 마음속에 늘 잠재되어 있는 악한 본성이 믿음을 타락시키고 세상의 환난과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합니다.
의를 행하다 고난을 받으신 주님, 고난을 당하시되 고난에 매몰 당하지 아니하시고 승리하신 주님, 승리하여 영광의 보좌에 계신 주님을 바라볼 때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으며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선행을 포기하지 않는 힘과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의 환난과 핍박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선을 열심히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라고 말씀했습니다.
능력의 주님이 행하라고 명하신 일을 하는데 두려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며, 주님이 명하신 것을 지키는데 우리를 위협할 자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기 때문에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어 주님만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복 주시고 굳은 믿음을 가지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 속에 거룩함이 나타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면 세상의 모든 시험과 환난을 견디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15-16)고 합니다.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소망에 관한 이유에 대한 대답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온유’(프라우테토흐)는 ‘친절함'‘부드러움’’겸손 등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4-25)라고 말합니다.
온유는 베드로가 새삼스럽게 갑자기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 때부터 온유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그런 성품으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민수기에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고 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했을 때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비난했습니다. 건전하게 비판을 한 것이 아니라 마구 비난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와만 이 야기하시느냐고 말하면서 모세가 뭐 특별할 것 있느냐는 식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런 공격을 당하자 모세가 나설 것도 없이 하나님이 직접 미리암을 피부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런 터무니없는 공격이 있을 때도 온유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미리암을 위해서 간절하게 중보기도해서 그 병을 낫게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 즉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컸던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 온유한 자에게 돌아갈 상급에 대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예수님이 강조하신 그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모세가 비록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는 온유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광야에서 깎이고 깎여서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았을 때 불같은 성질은 다 타버리고 온유한 마음이 그 중심에서 반짝였습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바로에게 보내셨을 때 바로는 핍박하고 압박을 했지만 모세가 결국 바로를 이겼습니다. 무엇으로 이겼는가요? 온유함으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 때 그 기간이 무려 사십 년이었습니다. 일이년이었으면 어쩌면 박력 있는 지도자가 더 효율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삼사년이었으면 머리 좋고 똑똑한 지도자가 백성들을 관리해서 일을 쉽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연단의 기간이 사십 년이었는데 그 기간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성품이 바로 온유함이었습니다. 그 성품이 있었기 때문에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폴 에크먼 박사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구별하고 싶다면 표정을 살펴보라고 자신의 저서 『텔링 라이즈』에서 주장했다합니다. 특히 미소를 주시하라고 조언했다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표정에는 3~5가지 근육이 필요한데, 미소는 단 한 가지 근육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솔직하게 말할 때 ‘진정한 미소’를 짓고, 거짓말을 할 때는 ‘거짓 미소’를 짓는다고 그는 주장했다합니다. 특히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를 구분하는 결정적 단서는 눈썹인데, 저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대방을 속이려는 거짓 미소를 지을 때는 눈 근육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표정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를 봐도 거짓말을 알아낼 수 있다합니다. 얼굴에 5초 이상, 길게는 10초 이상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 거짓 표정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무아지경이거나 폭발적인 분노를 느낄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표정 은 몇 초만 나타나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합니다. 세상이 점점 험해져서 상대방의 표정에서까지 마음을 읽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서도 상대방이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 부지런히 탐색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서는 참된 미소 진짜 미소로 대하며 온유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소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하고의 ‘두려움’(포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2)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은 자기주장이나 감정이 배제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하되 논쟁적으로 하지 말고,조심스러운 태도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을 향해서는 온유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미국에 `아딜로우'라는, 지도에도 표시하기 힘든 아주 작은 마을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정직하다 합니다. 그곳에 사는 보이드 하메닝씨는 사료상과 농기구상을 경영하는데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정오에 문을 닫고는 목장에 나가 일을 한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목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창고 문을 열어 놓는다 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떤 물건을 가져갔는지, 그리고 얼마를 받아야 할지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문에 걸려 있는 장부를 보고 검토한다 합니다. 하메닝씨는 이런 식의 장사를 여러 해 해왔지만 결코 물건을 도난당한 일이 없었다 합니다. 그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아딜로우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소망에 대해 묻는 자들에게 대답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의 양심은 원래 ‘함께’라는 말과 ‘인식하다’ 혹은 ‘보다’라는 말을 함께 붙여놓은 말로 함께 보는 것, 공통되게 아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바탕으로 선행을 행한다면 비웃고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마저 언젠가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고 언젠가 그것을 인해서 자기들이 부끄럼을 당하게 되는 그런 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이 있는데,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 결국 이기게 되는가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집니다. 지금은 비록 상대방의 거짓말에 의해서 내가 그 일들을 다 뒤집어쓰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 일이 밝혀집니다. 그렇게 믿고, 참고, 기다리다보면 알아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보다는 선이 강하며, 선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으로써 이 세상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이 세상 불의한 자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선행에 대한 의지가 꺾여서는 안 되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는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력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맹렬하게 타오르는 신앙의 불길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같이 진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선행을 삶의 기본 원리로 우리에게 반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선을 행하는 자는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될 것인즉 두려워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힘으로 악한 사탄의 무리를 무릎 꿇릴 수 없습니다. 교육이나 철학으로도 그들에게 죄악의 부끄러움을 깨우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선행은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선행이 비록 극히 미미해 보일지라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악한 자로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선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소망을 품고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해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소망 가운데 착하게 사는 사람은 함부로 해를 받지 않는 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와 같아서 비록 믿지 않는 사람들이 “소망이 무엇이냐? 도대체 그렇게 힘들게 살 것이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고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할지라도 그렇게 지나가면 될 것이지만 이 세상이 지나간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그때가 오면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기쁨으로 그 순간을 맞겠지만,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됨(16절)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원리를 베드로 사도가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온유해야 하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온유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는데 내 안에 그 선한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들이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하는 그런 마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한 영혼을 전도하는 사명 감당하되 소망의 가르침을 행하며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베드로전서 3:18-22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괜찮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다 잘될꺼야”라는 말보다 “나도 너와 같은 상황에 있어 우리 같이 힘내보자”라는 말일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7절에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납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우리의 삶에서 아무리 많은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보다 더 큰 고난은 없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고 무너질 것 같은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이 절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보다 크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설명하며 성도들의 고난이 그들에게만 있었던 고난이 아니었음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반복적이지 않고, 단번이었습니다. “단번에”라는 말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독특함과 충분하고, 완료된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도 로마서 6:10절에서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라고 말하며 단번에 고난 당하셨음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고난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은 불의한 자들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남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고난을 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나와 있듯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소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고난 받으며 살던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을 잃지 않고, 잘 견뎌낼 것을 격려하기 위한 서신입니다. 베드로는 박해 받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도 고난 받으셨음을 설명하며 위로와 격려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하나님 앞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구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이유들을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증거하며, 이 외에도 많은 곳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함을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도 고난 당하셨음을 설명하며 현재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베드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라고 말하며 베드로는 자신이 믿고 섬기는 예수님에게는 고난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혹은 구세주에게는 고난이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일 이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였고, 그 경험을 뒷받침 하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 때문이고, 단번에 이루어 졌으며, 고난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목적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고난의 목적 역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본문은 그 이후의 예수님의 행적을 설명합니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19절에 나오는‘옥’은 어디이며,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했는데 이들은 누구입니까? 해당 내용에 대해 성숙자반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노아 방주 때 구원 받은 사람은 노아 가족 여덟 명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외면하다가 모두 멸망당해 죽었습니다. 바로 그 영들이 갇혀 있는 ‘옥’, 다시 말해 지옥에 예수님의 영이 복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에서도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선포하신 예수님을 설명한 후 베드로는 시선을 돌려 다른 주제를 다룹니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지어지는 기간이 얼마입니까? 무려 12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은 기다려 주셨습니다. 심판이 결정 된 이후에도 하나님의 기다림과 인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과는 다르게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는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사람들이지만 당대의 의로운 남은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흩어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며 받고 있는 박해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지만 노아의 방주 말씀을 통해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 구원을 얻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 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도 위로의 말씀이 됩니다. 우리 삶에도 고난이 다가올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랜 기다림의 끝은 주님과 함께하는 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다수결을 말할지라도 구원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사람과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로서 올바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노아 시대의 그들의 가족처럼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지치더라도 오랜 기다림 끝에는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심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베드로의 관심은 과거 노아의 때에서 현재 교회의 상황으로 바뀝니다.
[(21-22)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베드로는 노아의 홍수와 교회의 세례를 연결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이며, 그것이 세례라고 말하는데, 물 자체에 사람을 구원하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물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을 통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구원 받은 것처럼 세례를 통해 성도들은 새 삶을 살아가며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씻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다는 표현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40일 동안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간 것처럼 세례를 받은 성도들도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여정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례를 받는 것은 옛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죄 된 생황을 그치도록 하는 것이 목적에 전부가 아닙니다. 자유함을 받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성도는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 악을 만나도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는 고난을 통해 그들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앞선 16절에서 말했던 ‘선한 양심’을 다시금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살아가지만 선한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구원은 이동입니다.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서 이동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이동 했던 것처럼 이동합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은 믿는 자로 하여금 이 세상을 지나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하게 하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님들은 지금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자리에 정착하여 안주하고 멈춰 계십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실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중한 하루를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주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을 멈추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구원을 귀히 여기고 있는지 돌아보며 매일의 삶에서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신앙이 그 자리에 멈추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도록 오늘 하루도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그리스도께서 누구 때문에 고난 받으셨고, 고난 받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노아 시대에 구원 받은 인원은 몇 명인지 살펴보고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묵상해 봅시다.
3. 지금 나에게 있는 고난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고, 무엇을 의지하며 이겨낼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4. 나의 신앙은 정체되어 있습니까?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까? 멈춰 있다면 지금 당장 주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시다.
그리스도의 고난
벧전 3:18~22 / 유명근 목사
저는 주 중에 제가 특별히 중보기도 하고 있는 집사님으로부터 ‘목사님! 전도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자를 받고서 순간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도하라고 하시나! 알파시피 지금 코로나 19로 인하여 교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은 상황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마도 그러한 반응이 순간적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가 존경하고 있는 집사님이기에 모른 체 할 수 없어서 이 문자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두 절의 성구가 떠올랐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디모데후서 4: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또 다른 성구는 고린도전서 9: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성도 여러분! 이 두 성구를 정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파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랑하지는 말라 부득불 우리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전파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입니다.
저의 지난 30여 년의 목회를 돌아보면 전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이벤트성 대규모 행사를 선호 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저만의 스타일 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가 그런 방법을 추구했던 시대에 제가 목회 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치유나 예언 등의 신기한 이적이나 혹은 인기 연예인, 운동 선수, 푸짐한 선물 등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수단이 복음 전도의 단골 메뉴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행사나 수단이 때로는 사람들의 발길을 교회로 옮기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부흥된 교회가 실제로 많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를 위한 행사만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교회의 뜰만 밟는 무리가 될 수 있게 할지는 몰라도 제자는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목적은 진리를 깨우쳐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수단을 개발하고 동원하느라 수고하기 보다는 먼저 우리의 삶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진리에 순종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 중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음식 배달 앱 '배달의 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의장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빌 게이츠 부부가 주도한 세계적인 기부 캠페인 모임인 더기빙플레지 클럽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름을 올렸습니다. 더기빙플레지는 2010년 빌 게이츠 부부와 워런 버핏이 설립한 세계적인 기부 클럽입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등 전 세계 25개 나라 218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클럽에 가입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자산이 10억 달러가 넘어야 하고, 그 중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김봉진 의장은 기부 선언문에서 "죽기 전까지 재산 절반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자녀들도 이 결정에 동의했다"며 "이 기부선언이 자식들에게 주는 최고의 유산이 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김봉진 의장은 2010년 자본금 3천만 원으로 배달의 민족을 설립했습니다. 국내 배달앱 1등으로 키운 뒤, 2년 전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에 4조 7천억 원에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그동안 주식 가치는 더 올라, 김봉진 씨의 재산은 현재 1조 원이 넘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기부한다면 지금 가치만으로도 5천억 원이 넘습니다. 그는 2017년에도 100억 원을 기부한 적이 있습니다. [김봉진/우아한형제들 의장 (2017년)]
"저는 공고 나오고 전문대 나와서 학점은행 하고 어렵게 시작을 했던 사람이에요. 세상에 대한 감사함을 잃게 되면 내가 어떤 것을 얻더라도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고요." 김 씨는 이 일을 계기로 기부문화를 확산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MBC뉴스 박종욱)
그의 친구의 친구라고 하는 신용철씨는 카카오 스토리에서 “내 친구의 친구인 김봉진 의장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참, 김 의장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입니다. 요즘 교회가 하도 욕을 많이 먹는지라...신앙의 힘이 기부에 커다란 동기가 됐을거라 믿으며...”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진리에 순종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와 탐욕과 다툼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자기를 비워 가진 것을 베풀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사랑으로 섬기고,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과 함께 기뻐하는 진리를 따르는 구별된 삶을 통해 그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복음의 귀한 비밀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거룩한 천국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본문 15절에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본문은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의 축복 및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전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 13,14절에 성도가 선을 행하면 누가 해할 것이며 그리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라고 말씀하고 17절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솔직하게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데 오히려 핍박받고 고난당한다면 사실 주저 않거나 부조리한 세상을 비관하며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고 심지어 두려워하고 근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도는 그리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는 곧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에게는 더 큰 영광과 상급이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5:10~12절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특히 사순절을 통하여 고난과 축복에 대한 관점을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분명하게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곧 최고의 축복이란 아무런 고난이 없거나 심지어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악을 행하고도 형통한 것이 아니라 의와 선을 행하다가 고난당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러한 실 예로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나 부활하사 영광의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 제시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고난에 동참해 그러한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
베드로는 선을 행하면 해함을 받지 않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이며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피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본문 18절에서 주님의 고난,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주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위해 의로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성도가 의로운 고난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야 말로 성도들에게 한없는 위로와 소망의 원천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 교인들로부터 괴로움을 받던 한 목회자가 상회 감독에게 찾아가서 어려움을 호소하며 사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감독은 물었습니다. ‘교인들이 당신에게 침을 뱉던가요?’ 아니요. ‘그렇다면 그들이 당신의 옷을 벗기고 조롱하고 때리던가요?’ 아니요. ‘그러면 그들이 당신에게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라고 질문을 이어나가자 결국 그 목회자는 얼굴을 떨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의 괴로움은 결코 그에 비교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받은 사명대로 목회를 계속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어려움과 고난이 아무리 커도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도저히 비교 될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은 고난 받을 때 무엇보다 먼저 의를 위하여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고난, 둘은 18절에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입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의(義)의 전가이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무죄하고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죄인 된 자들이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불의를 짊어지는 대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운명이 바뀐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셋은 18절에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목적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며, 복음의 기록은 바로 현재 우리를 위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18절 마지막부터 19절까지를 보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난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또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이며 여기서의 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어째서 노아의 날 이전의 영들에게만 전파되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한 많은 의문들이 이 말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본 절의 세부적인 내용은 차지하고서라도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이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단순한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전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에서 보듯 이 사건은 실로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들 사이에 막혀 있던 장애물이 제거되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땅 아래 있는 곳에까지 그 결과가 전파되는 엄청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동시 시간적인 차원에서도 미래뿐만 아니라 까마득한 과거에 까지 미쳤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는 사단의 세력까지 떨어지게 된 실로 우주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했을 때 미국은 이를 국제 평화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간주하여 엄청난 공격을 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사건을 리얼하게 라이브로 전한 CNN과 기자는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미국이라는 한 나라가 쿠웨이트라는 조그만 나라를 위해 전쟁을 벌였던 사건이 그토록 큰 사건이었다고 하면 사단으로부터 온 우주를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얼마나 위대한 보도입니까? 그리고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선택된 성도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없는 감사와 함께 기쁨으로 이를 널리 알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사단에 매여 있는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고 아울러 주님의 재림으로 온전히 여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무궁한 영광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구원의 방주
본문 20절과 21절을 보면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와 홍수 사건을 언급하며 물은 우리를 구원할 세례의 상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을 세례와 연결시키고 있는 곳은 이곳만이 아닙니다. 그린도 전서를 보면 바울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 했던 사건을 언급하며 이를 세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전 10: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사건 모두에게 세례의 상징으로 언급하고 있는 물로 인해 상반된 두 개의 결과가 공통적으로 초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노아의 홍수만 해도 당시 모든 세상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었던 반면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가족들은 오히려 그로 인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출애굽의 경우에도 애굽의 병사들은 모두 홍해에 빠져죽었던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통과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는 장차 있을 불 심판에도 그 불에 의해 옛 세계는 모두 불타 멸망하는 반면 성도들은 그 가운데를 통과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들어갈 것을 예표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벧후3:7)
물론 그 때의 방주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상징하는 세례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인류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할 방주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곧 노아의 물 심판 때에도 인류를 구원할 수단은 오직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주 한 척 뿐이었듯, 마지막 불심 판 때에도 우리를 구원할 방주는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20절에서 세례를 통한 구원을 언급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는다고 분명히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례 그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기에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14: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언젠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불 심판을 통과하여 새롭게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무궁히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을 살아 갈 때에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되 고난 받을 때에도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쁨과 소망으로 용기를 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부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널리 전함으로써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밤하늘의 별처럼 천구에서 길이 빛나는 아름다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베드로전서는 1:1절에서 수신인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거론된 지명은 모두 지금의 튀르키예에 해당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기는 네로가 그리스도인을 유별하게 박해하던 60년대이거나 도미티안 황제가 박해하던 90년대라고 합니다. 집필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박해받던 시기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는 특히 ‘고난’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2:19절에서는 부당한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으라고 했고, 4:13절에서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까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4:16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문제로 인해서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습니다.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말도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나 오늘 우리 시대나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시대도 로마 제국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더 나아가서 혐오합니다.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아니 너처럼 괜찮은 친구가 아직도 교회에 나간다는 말이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웬만하면 교회 다니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 시대정신 자체로 인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시대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달리 돈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자아를 숭배하도록 유혹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다 보니 교회 생활에 충실하게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의 혼란까지 겪습니다. 세상에서의 정체성과 교회 안에의 정체성이 분열되는 겁니다. 일종의 인격 분열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피하려다 보니 결국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를 포기하거나 신앙생활을 은퇴 시기로 유보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적응해서 사는 게 편하고 행복하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라고 해도 그렇게 살지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라는 게 뭐지, 그게 뭐기에 이 현실과 마찰을 빚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 신앙의 깊이가 밥 먹여주나,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지만 별로 확실한 인생을 보장해주지 않는 거 같은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그 신앙의 깊이를 날것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은 너무 낯설어서 우리의 영혼이 서늘해질 정도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 한 구절만 일단 읽겠습니다. 마지막 절인 벧전 3:22절입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이 문장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렸습니까? 우리나라 말이기는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처럼 들렸을 겁니다. 오늘 제가 이 문장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도 있도록 해석해드리기만 하면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다 감당한 것이겠지요.
그는 하늘에 오르사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실제로 우주 공간인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에는 예수님이 계실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낮에 보는 하늘은 밝고 아름답지만, 밤에 보는 하늘은 몽환적으로 보이는 별이 있기는 하나 어둡고 두렵습니다. 우주에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비밀입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국 표상과는 다릅니다. 신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하늘을 생명의 원천으로 여겼기에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주기도>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이 문장에 나오는 하늘은 그리스어 οὐρανός(우라노스)의 번역입니다. ‘회개하라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가까이 왔다.’(마 4:17)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나오는 그 단어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천국이, 즉 하늘나라가 ‘하나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로 나옵니다. 똑같은 뜻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도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지금도 존재하고 과거에서 존재했고, 앞으로 오실 분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본래 우주 전체에 충만하신 분이시니까 하늘나라는 어느 시점에 왔다기보다는 이미 와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인식하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걸 진작에 인식하셨기에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즉 ‘하나님의 현실성이 지금 여기에 드러났다.’라고 선포하신 겁니다.
하늘나라라는 그리스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하늘과 동의어인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가장 우선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창조 행위입니다. 창조 행위가 곧 하늘의 통치, 곧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보존하시며 장차 완성하실 겁니다. 그 선하신 창조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존재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능력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서 사람이 두 발로 걷는다는 게 얼마나 선한 능력인지 무슨 긴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두 손으로 물건을 잡는다는 것도 선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두 손과 발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합니다.
집안에서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일은 저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청소기로 집 안 구석구석 먼지를 끌어들이는 작업은 황홀할 정도로 멋진 일입니다. 일반 동물들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걸 못 합니다. 로봇청소기를 사용하라고 추천받은 일이 있는데, 제가 더 늙어서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로봇청소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로봇청소기가 저보다 더 부지런하게 청소할지 모르지만, 청소를 인간처럼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도 마찬가지고요. 제 설명이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생명 세계의 깊이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입니다. 그 무궁무진한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 곧 창조의 선하신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것이 곧 구원 경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청소와 설거지를 너무 낭만적으로 설명하는 거 아니냐, 식당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하고 저에게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1988년도에 돌아가신 저의 아버님은 평생 함석으로 물받이를 만들어서 시공해주는 육체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멋있게 부르면 함석세공업자였고, 낮춰서 부르면 땜장이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분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집수리에 관계된 일은 비교적 잘하는 편입니다. 제 아버님의 인생에서 보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는 저도 잘 압니다. 하루 노동을 끝내고 마시는 막걸리 한잔이 그에게 위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난한 삶에도 여전히 창조의 선하신 능력이 은폐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그렇게 믿습니다. 본회퍼는 사형당하기 몇 달 전에 감옥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능력’이라는 기도문을 썼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 2월13일 밤 8시 저는 ‘신학공부’ 6강 ‘십자가와 부활에 관해서’를 생방송으로 강독했습니다. 강독 중간에 위르겐 몰트만의 책 『예수 그리스도의 길』(부제: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 4장 제목은 ‘그리스도의 묵시사상적 고난’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고난의 ‘끝판왕’입니다. 그걸 묵시적 고난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그 고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한 실패였으나 하나님 역사에서는 승리였습니다. 4장 마지막 단락인 ‘깊은 곳에서의 부르짖음’에서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고문당하고 절망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짖음은 …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서막이다.’ 그래서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외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로마 제국의 질서로만 세상과 삶을 판단하는 겁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손에 넣은 자가 승리자라는 패러다임으로만 세상을 봅니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그런 로마 제국의 권력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옳은가요? 로마 황제와 제국의 권세와 이데올로기인가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인가요! 대답하기 곤란할 겁니다.
오늘 본문 19절은 예수 구원의 능력이 얼마나 심층적인지를 아주 특이한 진술을 통해서 묘사했습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옥’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영어와 독일어 사도신경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구절이 들어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신 이유는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겁니다. 이 대목이 들어간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이 아주 심층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구원 능력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고 말하는 본문이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좀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예수의 승천은 우주 공간으로 공중 부양하신 게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 변화를 가리켜서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과 승천은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도 서로 다른 단어를 쓰는 이유는 종말론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일시적으로 경험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는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증조할머니나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경험을 여러분이 똑같이 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예수 승천이 가리키는 것은 종말론적 생명이라 할 예수 부활이 우리의 일상에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보고 싶으면 우주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일상의 깊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깊이라는 말이 어색하면 신비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도 멀게 느껴지면 사랑이라고 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로부터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영혼으로 받아들인다면 고난도 고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일상의 깊이에서는 인생살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 힘을 잃습니다. 지옥 같은 곳도 그 하나님의 생명을 만날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저 사람 인생은 종 쳤어.’라는 말을 들을만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그 선하심은 남아있습니다. 사형수들에게도, 콜걸들에게도,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사람들에게도, 예수 당시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에게도,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도, 사기꾼과 노름꾼들에게도, 꼴찌들에게도, 전쟁터에 버려진 이들에게도, 큰 수술을 앞둔 사람에게도 다 열려 있습니다. 지옥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그런 이들에게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그 창조의 선한 능력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는 본인들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방안에 들어앉아서는 햇빛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니
본문은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우편이 있고 좌편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나님의 우편은 하나님과 똑같은 권위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라고 말한 겁니다. 이런 표현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립니다.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지 어떻게 예수에게 복종하느냐고, 그런 표현은 순전히 종교적인 차원에 속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제력과 정치 권력과 대중적 인기에 매달립니다. 보통 매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거기에 완전히 소진합니다. 거기에 복종하는 겁니다. 그런 삶의 목표를 성취한다고 해서 행복하다는 보장이 없는데도 무작정 휩쓸려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습게 여기거나 멀게 느낍니다. 이런 시대 정신 가운데 두 발을 딛고 사는 여러분은 만물이 예수께 복종한다는 성경의 증언을 이해할 수 있고, 그렇다고 실제로 믿으시나요?
판넨베르크는 졸역 『사도신경해설』158쪽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가 재림할 때 계시될 그것이 비밀스럽게 오늘의 현실성이 되는 것이야말로 부활한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진술의 핵심적 의미이다.” 재림하실 예수는 심판자입니다. 추수 때에 알곡은 모아서 곡간에 넣어두고 가라지는 모아서 불에 태웁니다.(마 13:30)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합니다. 하나는 그 종말 때까지는 세상 권력이 기세를 올린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말 심판이 오늘 여기 우리의 일상에서 비밀스럽게 현실성(reality)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로마 제국의 폭력성 앞에서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군가요? 매일 1억 원씩 써도 평생 다 쓰지 못할 겁니다. 그는 돈에 파묻혀서 살다가 곧 늙어 죽습니다. 가장 큰 부자였다는 사실만 역사책에 기록되겠지요. 그는 죽을 때 그 많은 돈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돈은 우리의 영혼을 절대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기 가난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 이미 종말에 완성될 생명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땅에 묻힌 보물을 찾는 사람의 심정으로,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등잔을 손에 든 여자처럼 일상을 깨어 있는 영성으로 삽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종말론적 생명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삶보다 더 참되고 더 의미 있는 삶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께서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는 신앙고백을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아멘.
음부에 내려가사
벧전 3:18-22 / 김성수목사 사도신경강해
사도신경강해 열세 번째 ‘음부에 내려가사’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아주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잘 들으셔야 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4세기 이후부터 확정이 된 사도신경의 원문에는,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장사지낸바 되시고’라는 말 다음에, ‘음부에 내려가사, 디센디드 인 인 페르나, 히 디센디드 인투 헤이리즈(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말이 덧붙어져 있어요.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신자들의 오해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누군가에 의해, 그 내용이 삭제가 되었습니다만, 영어, 헬라어, 라틴어 등, 모든 사도신경에 다, ‘음부에 내려가사, 히 디센디드 인투 헤이디스(He descended into Hades)’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어요.
어떤 곳에는, ‘헤이디스(Hades)’라는 단어 대신에, ‘헬(hell)’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히 디센디드 인투 헬(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번역을 해 놓은 곳도 있습니다만, 그건 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은 ‘헤이디스’예요. ‘헤이디스’와 ‘헬’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물론 구어에서 헤이디스는 지옥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헤이디스, 음부(陰府)’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아우르는, 망자들이 가는 곳을 총칭하는 단어예요.
그러나 그 ‘음부’라는 단어는, 그렇게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이기보다는, 죽음의 상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로, 주로 쓰이는 단어예요. 거기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안토니 후크마의 ‘더 바이블 앤 더 퓨터(The Bible and the Future)’라는 책이 있거든요. 그 책을 한번 사서 읽어 보세요.
반면에 지옥은, 심판대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들이 가는 곳을 말해요. 그게 ‘헬(hell)’입니다. 어찌되었든 문자적으로 그 부분을 해석을 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헬이나 헤이디스, 음부, 둘 중 한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거죠. ‘음부에 내려가사’ 그죠? 정말 그럴까요?
요즘 한국 장로교 통합 측에서, 뜨거운 감자로 회자되고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에요. 한국 개혁교회에, 존경받는 지도자 중에 한 분인, 기독교 백주년 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님이, 지금 총회에, 이단으로 고소가 되어 있는 상태예요. 이미 공론화 되어서, 일간지에까지 기사화 된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교회와 인물의 실명을 밝히는 거니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이단으로 고소가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슈가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할 그 부분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에요. 이재철 목사님은, 그 분의 책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자마자,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통합 측에서, 그 부분을 문제 삼아, 이단으로 고소를 하자, 이재철 목사님은, ‘사도신경 원문을 봐라! 거기에도 예수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해명을 했어요. 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채택한,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내 놓았습니다. 과연 우리가 오늘 공부할, ‘히 디센디드 인투 헤이디스(He descended into Hades)’가, 예수님의 지옥행 전도를 말하는 것일까? 지금부터 차근차근 한번 풀어 보잔 말이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사실,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3장의 내용과, 사도신경의 ‘히 디센디드 인투 헤이디스(He descended into Hades)’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3장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이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그걸 연결시켜서, 지금 설명들을 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내용 속에,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라고 오해할 만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그 구절을, ‘음부에 내려 가셨다.’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설명하는 근거 구절로 쓰는 거예요. 그거는 큰 오류입니다. 그건 베드로전서 3장의 앞뒤 문맥만 봐도, 그 부분이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그 내용만 딱 떼어서, 엉뚱한 곳에 지금 적용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기독교의 성경 연구가, 얼마나 일천한지, 그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거죠.
거기에 대한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서, 제가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부분을 설명하는 오늘 설교에, 베드로전서 3장의 본문을, 의도적으로 채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는, ‘음부에 내려가사’ 라는 사도신경의 고백과,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를 연결하여, 그 부분을 해석하려는 게 아니라, 왜 그 둘이 무관한 것인지를 밝히고, 그 양쪽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명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출 거예요.
먼저 우리와 똑같은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는, 개혁파 전통에 속하지 않는,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의 잘못된 해석들을, 짚어서 설명을 해 드리고, 개혁교회에서 지지하고 있는, 올바른 해석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면서, 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해석이 엉터리인지, 제가 밝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로만 가톨릭의 문제점을 한번 지적해 보죠. 천주교에서는,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부분을, 연옥(煉獄)의 교리와 연결시켜 설명을 해요 천주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공로적 구원관을 갖고 있는 종교예요. 그래서 제가 기독교와 다른 종교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로만 가톨릭의 구원의 이해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구속에만 근거하지 않아요.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의 원죄만을 해결하는 거고, 그 뒤로 인간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여 성화를 이루어 내었느냐에 따라, 낙원행과 연옥행 그리고 지옥행이 결정이 돼요. 따라서 로만 가톨릭의 구원의 서정은, 성화(聖化)! 칭의(稱義)! 영화입니다. 반면에, 개혁교회의 구원의 서정은, 칭의 성화 영화예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그 후에, 우리의 삶이, 성숙의 단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셍티피케이션(sanctification)입니다. 거기에서 글로리피케이션(glorification)으로 가는 거지, 먼저 우리가 생티피케이션(sanctification)을 이루어 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스티피케이션(justifiication) 하시고, 글로리피케이션(glorification)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개신교의 구원의 서정은, 은혜(恩惠)가 가장 먼저이고, 전부예요 그렇게 천주교와 기독교의 구원교리는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다른 종교입니다.
아무튼 천주교인들은, 그들이 곧바로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그들의 공로가 모자라게 되면, 연옥이라는 곳에 가서, 영혼의 정화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믿어요. 교리에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산자들이, 연옥에 들어가 있는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면죄부를 사서라도, 사랑하는 이들의 연옥생활을 줄이려고 얘를 쓰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이재철 목사님께서,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은, 아마도 천주교의 이런 주장을, 일부 수용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는, 이러한 연옥의 교리뿐만이 아니라, ‘림버스(liimbus), 림보((limbo)’의 교리라는 게 있어요. ‘림보’는, 말 그대로, 지옥의 가장자리를 말하는 거예요. ‘림버스’가 가장자리니까!
지옥의 가장자리에는, 지옥과 방불한, 그러나 일정량의 행복이 존재하고 있는, 그런 두 장소가 있다는 거예요. 그 중 하나가, ‘유아 림보, 림보스 인 팬텀! 유아 림보’라는 것인데요, 유아 림보는 영세를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아들! 즉 원죄는 여전히 있으나, 왜? 영세를 받아야 원죄가 없어지는데, 영세를 안 받았으니까! 원죄는 그대로 있으나, 죄책은? 개인적 죄책은 없는, 왜? 죄를 안 졌으니까요! 나자마자 죽었으니까요! 죄책은 전혀 없는 유아들이 있는 곳! 그곳을 ‘유아 림보’라고 이야기를 해요.
또 하나는, 구약시대의 신자들이 죽어서, 그 영혼이, 구속의 계시와 적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사는 곳! 로만 가톨릭은, 그 곳을 ‘선조 림보’라 그래요. ‘림버스 패트럼!’ 그러니까 유아 림보는 영원한 곳인데, 그곳에는 종국적 기복의 삶의 소망이 없지만, 자연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좋은 상태로 있는 곳이, 유아 림보고, 선조 림보는, 구약의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기다리는 한시적인 곳!
그러니까 복음을 자꾸 시간 속에서만 이해를 하니까, 이런 오류가 나오는 거예요. 구약 때,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 예수의 십자가가 아직 역사 속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고 때까지 기다리는 곳을, 가톨릭에서는, ‘선조 림보’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것은 한시적인 곳이죠. 지금은 없어요. 그죠? 십자가가 섰으니까! 그러니까 가톨릭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바로, 그 선조 림보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거예요. 그게 가톨릭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구약의 신자들이, 그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정말 일관성도 없고, 논리적 근거나, 성경적 근거도 없는 이야기예요. 천주교의 주장을 입증할 성경의 근거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제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전집을 읽으면서, 그 림보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이런 걸출한 신학자도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하고 참 마음이 찹찹했습니다.
루이스 벌코프의 ‘시스티메틱 띠올로지(systematic theology)’라는 책을 보면, 그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과, 천주교의 연옥! 림보교리를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데, 정말 명쾌합니다. 연옥이나 림보 같은 곳은 없어요. 성경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추측으로 그런 걸 자꾸 만들어 내면 안 됩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더 나은 본향! 즉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을 나그네처럼, 이방인처럼 살았지, 연옥이나 림보에 대한 공포로, 이 땅을 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살지 않았다니깐요. 그들에게 연옥이나, 림보의 공포가 있었다면, 절대 히브리서의 그 구약의 신앙의 선진들은, 그렇게 소망스럽게 이 땅에서 고난을 감수할 수 없었을 거예요. 히브리서 11장으로 갑니다. 16절 보세요.
(히브리서 11:16)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저희는? 믿음의 선진들이죠?)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보시다시피, 구약의 신자들도, 본향을 사모했고요.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림보나 연옥이 아닌, 한 성!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하나님나라를 준비했다는 거예요.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개혁교회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점이에요.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하는 이들 중에, ‘음부에 내려 가사’라는 부분을, ‘제2의 기회설’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처구니가 없죠. 그들은 이 ‘음부에 내려 가사’라는 어구를, 베드로전서 3장의 말씀과 연결하여,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그곳에 있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심으로 해서,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고 주장을 해요.
씨 빅이라는 사람의 책, ‘에피설즈 오브 세인트 피러 엔 세인트 주드’라는 책에 보면, 아주 거기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해놨는데,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그건 제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라는 걸 아시죠? 두 번째 기회라는 게 없어요.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뭐 하러 이 땅에서 목숨을 걸고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합니까? 지옥에 가면, 예수님이 다 복음을 전하실 걸!
세 번째로 루터교의 주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루터교에서는요,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신 것은, 지옥에 있는 사단에게 승리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명백한 유죄선언을 하시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이라고 해석을 해요. 랜스키의 책을 보면, 잘 나와 있어요. 그런데 루터파의 그러한 해석은, 정경이 아닌 외경! ‘에녹서’를 근거로 하여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개혁교회에서는 외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성경은 성경 66권 이외에, 다른 것은 없어요. 다른 건 그냥 참고 도서예요.
그런데 그러한 에녹서를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거죠. 만일 루터교의 주장대로라면, 그들이 에녹서와 함께 근거 구절로 쓰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의 ‘전파하심이라 그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라는 그 ‘전파하심’이라는 단어가 공중에 뜨게 돼요. 그 ‘전파하심이라’는, ‘케로스’라는 단어는, 심판의 선언이나 승리의 선포에, 쓰는 단어가 아니에요 그 단어는, 복음전파에 쓰는 단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네 번째로 성공회의 해석은 더 허술해요. 성공회는 음부를, 지옥이 아닌,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해석을 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예수님의 낙원 행’으로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영으로 낙원에 가셔서, 그 곳에 있는 천국 백성들에게, 복음을 상세하게 설명을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역시 근거구절로 삼고 있는 베드로전서 3장에,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부분이, 이해가 안가죠? 낙원이 옥입니까? 도날드 거슬리의 ‘뉴 테스트먼트 띠올로지(New Testament Theology)’를 보면, 여러분이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제가 여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안 해드리는 이유는, 이런 건 몰라도 되기 때문에, 설명 안 해드리는 거예요.
이게 다, ‘음부에 내려 가사’라는 어구를,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후와, 억지로 연결시켜서 설명하려 하는 데에서 나온, 오류인거예요. 그 둘은 아무 상관이 없다니깐요.
그렇다면 도대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 대한, 개혁교회의 올바른 해석은, 어떠한 것인가? 저는 초대 교부인, 루피누스와,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과, 벌코프! 게알더스 보스 등이 해석한 것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봐요. ‘음부’라는 단어가 원래 장소의 개념보다는, 상태에 개념으로 쓰였단 말입니다. 그 음부라는 단어가, 장소의 개념보다 상태의 개념으로 쓰인 단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예수님께서, 당신 곁에 함께 달렸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이야기를 분명히 하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강도만 낙원에다 데려다 주고, 다시 지옥으로 내려가신 거예요?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이후에, 하나님이 계신 그 곳! 낙원으로 올라가신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에,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그 자체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는, 지옥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고, 하나님이 수난의 삶을 사셨고, 심지어 피조물들에게 잡혀 죽는 수모를 당하시기도 하셨어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분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 성자 예수님이, 성부이신 하나님과, 잠시지만, 단절(斷絶)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를, ‘지옥(地獄)’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옥은 다른 게 아니에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가 지옥이에요. 그 단절의 상태뿐 아니라, 예수님의 성육신의 삶!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지옥의 경험이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세 시간 동안 흑암이 온 천지를 덮었었죠. 흑암은, 언제나 구약에서도 그렇게 표현이 되었지만, 지옥과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골고다에 섰을 때, 천지가 흑암으로 덮였다는 것은,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지옥의 절정을 경험하고 계신다는, 상징적인 현상이었던 거예요. 괜히 하나님이 태양을 막아버린 게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 가셨다.’라는 어구가 함의하고 있는 메시지는, 지상에 내려오셔서, 자기부인과 자기비하의 삶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최고의 자기비하의 삶! 그 절정인 십자가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렇게 우리의 지옥을 다 겪고 가신,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겪을 지옥이 우리의 인생에서 이제는, 완전히 제거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신조에다 그 내용을 넣어 놓은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4문답을 보면, 좀 더 쉽게 정리가 되실 거예요. 44문이 이렇습니다.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왜 신조에 덧붙여 있는 것입니까? 답) 개인적인 위기와 유혹의 때에,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십자가에서 또한 그 이전에도,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고통과 공포를 감당하심으로서,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에서 구원하셨음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명쾌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음부에 내려 가사’라는 내용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죽은 뒤에 도달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영원히 살아야 할 음부를, 예수님께서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감격 속에서, 찬양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음부에 내려 가셨다.’ 다음에, 부활이,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가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에, 지옥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도 아니고, 그 곳에서 사단에게 승리를 선포하신 것도 아니에요. 만일 십자가 이후에도, 예수님이 하실 그런 잔 일이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테텔레스 타이! 다 이루었다!’라고 이야기하시면 안 돼요. ‘아직 조금 일이 남았는데, 내가 지옥에 가서, 다 완성할게!’ 그리고 죽었어야죠. 다 이루고 가셨다니깐요. 테텔레스 타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다 이루고 가셨어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은, 우리가 가야할 지옥의 모든 고통을,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특별히 십자가에서, 전부 다 경험을 하고 가심으로, 우리를 그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고백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보세요.
(히브리서 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자가 아니요 (지옥까지 다! 그 내용이 여기 함의(含意)되어 있는 거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하의 그 내용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번 읽어 보죠. 18절 보세요.
(베드로전서 3:18-20)
18절 보시면, 예수님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라는 내용이 나오죠? 그 부분은 ‘관련의 역격’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거든요 관련의 역격! 육 안에서 죽고, 영 안에서 살았다는 그 대조는,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의 대조가 아니에요. 구속사적인 대조인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육으로 죽으시고, 영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은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발생했으나, 그분의 부활은, 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대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은, 영으로서 만의 부활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육 단일체로서의 부활이에요. 그렇잖아요? 육신을 갖고 오셨지 않습니까?
따라서 ‘영으로는 살림을 받았다.’라는 그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영적인 영역! 즉 하나님의 영이, 최고로, 그리고 가장 뚜렷이 작용하는, 하나님의 존재영역에서에의 부활을 지칭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은, 영의 영역이 실재한다는 것의, 증거인 것입니다. 영의 영역! 그 영의 영역에 존재하는 이는, 영원과 시간을 넘나들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낙원과 이 시간을 오가면서 존재하신 것을, 여러분! 볼 수 있죠?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그러한 영의 영역 안에서, 영으로 존재하셨어요. 영의 영역에서는, 이 시간이라는 차원으로의 통행이, 가능한 곳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왔다 갔다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이후에는, 그 나머지 시간에는, 어디 계셨을까요? 동굴에 숨어 계셨을까요? 어디 계셨어요? 그때는? 낙원과 이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 말입니다. 영의 영역에서는!
차치하고, 영의 영역에서 영으로 존재하시던 예수님은, 구약시대에도 시간 속으로 내려오셔서,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선지자들에게 임하셔서,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계시하는 일들을 하셨어요. 선지자는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일을 하는 자를, 선지자라고 하잖아요?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서, 하늘의 비밀을, 이 땅에다가 내리꽂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그게 선지잡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은, 시대와 역사를 뛰어넘어서, 선지자 등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던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이 모두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냐?’는 등의, 그런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몰라서 그런 것이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께 주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전 역사를 아우르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건져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당신의 일을 하셨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영원 속에서 섰기 때문에, 그 영원은, 전체 역사를 아우르는 거지,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골고다에 그냥 단 한 번 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네스토리오스가, 430년경에, 그 때는 신라시대예요. 430년경에,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후에, 시리아, 인도, 당나라까지 가서, 전도를 했다는 건, 교회사를 공부해 보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그죠? 그 때에, 당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지고, 경교라는 것이 전해지고요. 경교비라는 게 섰거든요. 그 경교비가 바로, 네스토리우스가 전했던 기독교에 관한 비석이에요.
이미 중국은 AD 400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함부로 거기 가서, ‘야! 우리가 먼저 기독교를 받았으니까, 나 너희들한테 전도하러 왔어!’ 이런 소리 하지 마세요. 그 때에, 당나라로부터 신라에까지, 기독교가 전해졌다는 흔적이 있어요. 금강산에서 발견된, 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경교비와, 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진, 경주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 등이 그거예요. 숭실대 박물관에 가면, 그 돌 십자가가 아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 놓치지 않으세요.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은 건져 내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전도를 받지 못해서, 모두 다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은 하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만 아시는 거예요. 괜히 시비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트집을 잡는 것이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절대 놓치지 않으세요.
그리스도의 영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네스토리우스 같은 사람 속에서도 역사를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분이에요.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계속 있었다면, 그 사람이 쫓겨나지 않았다면, 당나라나 신라에, 절대 경교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노아도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이에요. 노아는,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 잡혀서, 심판을 선포했던 선지자였어요. 그죠? 맞습니까? 따라서 예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불순종을 하던, 그러나 지금은 옥에 갇혀 있는, 지옥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는 건, 노아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노아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에게 임한 거니까, 노아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복음을 전하셨다는 말이에요. 영의 영역에 존재하는 예수의 영이!
그런데 노아의 여덟 식구 이외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지금 지옥에 떨어져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인 거예요. 한글 개역성경에는, 19절에, 옥에 있는 영들 앞에, ‘나우(now), 지금’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죠. ‘지금 옥에 있는 영들이에요.’
사실 이 베드로전서 3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삶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에요. 앞 뒤 문맥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예수의 고난이, 영의 영역에서의 부활로 결론이 난 것처럼, 이 땅에서의 고난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부활의 영역이라는 그 소망의 결론을 바라보면서, 육의 영역 안에서의 고난을, 잘 참아내라는 권고의 일부로 주어진 거예요. 영의 영역 안에서의,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은, 분명히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참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끌고 들어온 에피소드인데, 이걸 갖고 무슨 ‘음부에 내려가사’ 이런 것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을 보면, 거기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어요. 한 번 볼까요?
(베드로전서 4:6)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마치 베드로전서 3장 18절 이후와 요게 연결을 하여, 서로를 강화시켜 주는 것 같죠? 예수님이 진짜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 전했잖아? 요렇게 우긴다 말입니다. 요 구절을 갖고!
이 구절도 언 듯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 아니에요. 여기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단어가 가진 개념을, 잘 정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 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자기들의 살아생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데살로니가서 같은데 보면 잘 나오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기 전에, 수명이 다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는 이들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들에게 걱정거리가 생겼어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래서 심지어 죽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까지 생겼다 말입니다. 바울서신에 나오죠? 그래서 그걸 갖고 또 죽은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줘야 된다고 우기는 이들이 많은데, 그거는 성경을 정말 진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공부해보지 못한 사람들인 거예요. 그건요!
그 때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굉장히 많이 혼란스러워 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성도의 죽음을 가리켜, ‘잠을 자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준 거예요. 성도의 죽음은, 절대 죽음으로 결론나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설명해 준 겁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리켜, ‘죽은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신자들’이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예수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던, 불신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심판의 근거로, 신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지옥에 있는 영들! 죽은 이들에게 복음을 예수님이 전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한 번만 읽어봐도, 그 문맥은 정확히 알 텐데…. 성경을 진지하게 읽지 않는 거예요. 소설책들은 그렇게 열심히 읽으면서! 여러분 성경을 읽을 때, 목욕재개는 못할망정, 맨 정신에는 읽으세요. 딴 데 신경 쓰다가, 비디오 보다가 읽고, 애 혼내다가 읽고, 부부싸움 하다가 읽고, 여러분 적어도 성경 앞에서, 우린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그러한 구절들을 전체 문맥 속에서 이해를 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문자적으로만 보고 해석을 하다보면,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느니,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졌다느니,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거예요.
자, 예수님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무슨 이야긴지 이제 이해가 가시죠? 남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어요. 그래야 됩니다. 여러분!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한테, 여러분이 설명을 해줄 수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는 이제 그 무시무시한 지옥과는 영원히 이별이에요. 우리 주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시는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지옥을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고백 속에, ‘음부에 내려 가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지옥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 되었는데,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끔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게 되는 걸까요? 지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된 곳을 이야기 한다. 그랬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다는 건, 천상천하에 자기 자신이 최고라는, 자아숭배에 빠진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그 지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끔 지옥을 사시는 거예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에요.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나를 수레바퀴의 기하학적 축 중심에, 나를 갖다 놓고 사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 지옥이에요. 지금 속으로, ‘야! 지옥도 살 만하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 계시죠? ‘이게 지옥이라며? 아니, 지옥도 살만하구나!’ 아녜요. 하나님은 지금 성도들의 거룩과,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해, 일반은총으로, 지옥의 질서를 잡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나마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만한 거예요.
하나님은 양심! 사회법! 도덕! 율법! 상위 권세! 이런 것들을 일반 은총으로 허락하셔서, 이 죄인들이, 자기만을 위해 사는 죄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못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누굴 죽이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죽이는 거예요. 그게 일반 은총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시고,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그 날!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확 빼버리시면, 어떻게 될까요? 거기가 지옥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그런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이 지옥을, 작은 지옥으로 경험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예요.
성도는, 예수님이 대신 지신 십자가로,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지만, 이 땅에서 작은 십자가를 경험하므로,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게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시므로,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 음부가 되어 버린, 그 음부! 지옥을 이 땅에서 경험하므로 해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얼마만한 손해를 감수했는가를, 요만큼 맛보는 거예요. 코스코의 시식 때처럼!
제가 월요일에만 항상, 저의 아내와 코스코를 가거든요. 저는 그게 그렇게 좋아요. 시장보고 요리하는 거 바꿔야 돼! 전 집에서 살림하고 싶어요. 진짜 코스코에 가면, 항상 그 시식대들이 놓여 있잖아요? 한 바퀴 돌면 배불러요. 그래서 저희 아내와 저는, 꼭 점심 때 가서 두 바퀴 정도 돌고, 장을 봐요.
그리고 거기가면은, 우리 전장로님 회사 옷이 있어요. 코스코에! 요즘 그걸 팔더라고요. 거기 가서 우리 둘이 흐트러놓은 거 개주고, 옛날에는 그런 거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 교인께 거기 있으니까, 개게 되더라구요. 코스코 가서! 직원들이 우리보고 놀래요. 저 사람들! 코스코 직원인가? 이렇게! 거기에 있는 시식대, 그 시식대처럼 지옥을 이 땅에서 조금 맛보는 거예요. 그리고 이게 영원히 우리에게서 살아졌다는 것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옥을 경험하며 감격할 수 있는 건, 성도밖에 없어요. 이 땅에서!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에 지옥이 찾아 왔을 때에, 여러분! 기뻐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셔야 돼요. 그 지옥들이, 그 음부가, 여러분에게 지금 작별 인사하러 온 거예요. 너희와는 이제 영원히 작별이기 때문에, 잠깐 맛만 보여주고 갈께! 그러고 찾아와서,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여러분에게 그 지옥을 맛보게 해주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 ‘할렐루야!’ 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 찬양이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영원히 들어가, 음부에 들어가, 이를 갈아야 할 그곳에, 나와 이렇게 상관없어 지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냥 말로만 설명해 주면, 그게 뭔지 전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지옥을 허락하시기도 하는 거예요. 요만큼! ‘거기에 억만 배 곱한 고통을 너희들이 겪고 살 뻔 했는데, 내 아들 예수가, 그 지옥을 먹었다. 그 지옥을 내가 내 아들 예수에게 퍼부어서, 너희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만들었으니까, 행복해라!’라고 지옥을 허락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직장이,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생업의 현장이, 지옥 같으시거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세요. 그게 성숙한 성도예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