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엔 미련이 없다. 등록금이 아까워서 휴학이라도 하고 싶지만 부모님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내 성격은 한층 변해서, 더 이상 나 자신조차 괴로운 가식의 모습으로 캠퍼스를 걷기 싫어졌다.
아니, 변했다기 보단 이전에 나를 꽁꽁 감쌌던 얇은 껍질이 벗겨진 게 옳다. 정말 바람직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대부분은 명문대 학생증이 목숨보다 소중하다. 그러면서 하는 짓은 누구보다 비열하고 가식적이다. 가령 등산을 한다면 웃으면서 동료의 머리를 밟고 먼저 정상을 차지하고 그 후에 정상에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살랑살랑 웃음을 흘리며 겸손을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겸손이, 상대방에겐 승리자의 위세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에. 비열하게라도 일등을 차지해야하지만 혼자가 되기 싫어서 그러는 걸 다 알지만 모두 그것을 굳이 비난하지 않는다. 모두 그런 승리자의 여유를 부러워하고 있다.
술을 일체 팔지 않는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세 대의 기타 엠프 바로 옆에서 마시는 술은 달콤하다. 사실 헤로인은 술집 주인이자 (보드카 두 잔으로 맛이 가는 주제에)구제불능 애주가라서 집에도 양주가 꽤 있다. 툭하면 그걸 클럽에 가져와서 마시는 바람에 아레스는 진땀을 뺀다. 감정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많다.
보관을 잘못 해서 약간 맛이 간 위스키를 엠프 옆에 쭈그린 채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엠프에 위스키를 쏟을 뻔했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 아레스에게 된통 깨졌을 거라고 안도하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핸드폰 플립을 열자마자 난 또 다시 수신자의 정체에 숨을 멈추고 만다.
-전화 받고 있는 거야?
“어, 으응.”
저 쪽에서 볼 리가 없는데도 나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아 목을 가다듬었다. 어디냐는 모비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쉰 소리로 롤링홀(rolling holl), 대답해버린다.
-혹시 아레스 거기 있어?
“아니, 없는데.”
-거짓말.
하아? 거짓말이라니, 정말 클럽 안엔 나 밖에 없는데, 헤로인이 아까까지 있었지만 어느 틈에 나가버려서 정말 아무도 없는데, 대체 어떤 확신으로 거짓말이라는 말이 나오는 걸까, 모비는.
모비의 단 한마디만으로도 내 머릿속은 컨트롤을 잃고 만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입술 옆에 난 뾰루지가 콕콕 쑤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쩔쩔 매고 있는데 클럽 문이 열리더니 훤칠한 모비가 짠! 하고 나타났다.
“정말 아레스 없네.”
모비는 정말 모비(moby. 미국출신의 일렉트릭 뮤지션)처럼 생겼다. 균형 있고 탄탄하게 자란 몸매와 의외로 조그맣고 하얀 얼굴. 소년일 적부터 변함이 없을 게 분명한 커다란 두 눈은 가끔 너무 티 없어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 정도다. 술도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다. 때문일까, 사회에 갓 반항하기 시작한 소년처럼 순수함과 동시에, 즐겨 입는 켈빈 클라인 청바지에서 풍기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다.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단지 그가 가끔 바보 같이 굴 때가 있을 뿐.
“대관 신청하는 밴드가 들어와서.”
“언제?”
“응, 다음 주 목요일. 일단 간단한 건 내가 받아 적긴 했지만 사장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말해야 하는데. 어디 간 거야.”
“밴드 이름이 뭔데?”
위스키 병을 가방에 넣으며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건데 다음순간 모비는 목각인형처럼 굳어버렸다.
“……그걸 안 물어봤어…….”
“연락처는.”
“…….”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물론 클럽 일이야 아레스가 알아서 할 일이라지만 가끔 모비의 나사 풀린 행동에 마치 그의 어머니가 된 심정으로 한숨이 나온다. 대관 신청하는 밴드 이름도, 연락처도 적지 않고 고작 날짜만 받아 적다니. 안 그래도 일에 있어선 지극히 소심한 아레스의 머리에 새치가 나기 시작했는데, 모비 때문에 한 올 더 늘어나게 생겼다. 그러고 보니 아레스가 모비를 만난 뒤부터 새치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괜찮아. 아직 다음 주는 멀었으니까 해결 되겠지.”
모비의 장점은 심각한 낙천주의자일 뿐. 금방 목각인형에서 벗어나곤 공허한 클럽 천장이 울리도록 porcelain을 부른다.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죽음을 맞이하지. 일어나면 마음에 변화가 와. 나는 당신을……어, 여보세요? 헤로인? 아아, 좋아. 응, 나 마침 여기 롤링홀이니까. 같이 갈게. 응, 끊어.”
전화 때문에 노래가 잠시 끊기는가 싶더니 모비는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며 씩 웃었다. 정말 잘생겼다.
“가자. 헤로인하고 아레스, 블루아이즈에 있어. 나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난 거짓말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러면 이것이 작별인사군. 이것이 작별이야…….”
모비는, 모비(moby)의 목소리까지 꼭 닮았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모비도, 나도 블루아이즈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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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의 play 앨범 자켓을 디카로 찍었지만 막상 찍고 나니 컴퓨터로 올리기 귀찮아서
결국 사진 준비 못합니다. 하지만 저, 되게 좋아하거든요. 모비(moby).
모비의 증조부가 소설 "모비딕"을 쓴 사람이라죠.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별명이 모비였다는군요
porcelain이란 곡을 듣고 좋아하게 됐는데요. 얼굴을 보면, 고작해서 스무살 같은데
실제론 삼십대 후반을 걷고 있다니까요.
엄태현님 - 인간적이기 때문에 혐오스러울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어느 부분에서 그런 걸 느끼셨는지 전 모르겠지만 왠지 용기나는 말씀이셨어요. 코멘 감사드려요.
승월님 - 에.... 마르스보단 아레스가 더 어울릴 것 같았어요. 마르스, 하면 전 자꾸 베르사이유의 장미같은 분위기가 떠올라서(긁적;) 그렇다고 마스, 라고 부를 수도 없구요. 켄... 스캔들 났더군요. 으음....;; 코멘 감사드려요.
첫댓글 케릭터들이 개성있는게 참 좋아요.
모비가 무엇인가요?
미련이 없다고요?